911과 아시아의 분쟁 (한겨레21 기사)

[ 아시아 네트워크 ] 2003년09월17일 제476호

[아시아의 분쟁] 9·11이 아시아 분쟁지도 바꿨다

[아시아네트워크 | 아시아의 분쟁]

미국 주도 대테러전쟁 속 국지전 오히려 격화… 지역마다 ‘로드맵’ 선풍적 인기

숨이 턱 막힌다. 최북단 카자흐스탄에서 최남단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동쪽 끝 한반도에서부터 서쪽 끝 팔레스타인까지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다. 그야말로 분쟁으로 날이 새고 분쟁으로 날이 지는 아시아의 현주소.

지도를 펼쳐놓고 아시아를 보노라면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최북단 카자흐스탄에서 최남단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동쪽 끝 한반도에서부터 서쪽 끝 팔레스타인까지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다. 그야말로 분쟁으로 날이 새고 분쟁으로 날이 지는 아시아를 본다.

이념분쟁은 한풀 꺾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날로 먹지 않았더라면….”

아시아 분쟁의 뿌리를 보자는 뜻인데, 영국을 비롯한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 경영을 위해 ‘인종분리정책’을 쓰지만 않았던들, 그리고 떠나는 마당에 책상머리에서 황급히 국경선을 긋지만 않았던들, 적어도 인종분쟁·종교분쟁·영토분쟁 같은 재래식 분쟁이 아시아를 뒤덮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에서다. 국가간 전쟁이 고단위 파괴력과 살상력을 지녔음에도 비교적 타협점을 찾기 수월한 경우라면, 한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런 전통적인 분쟁들은 해결책도 마땅찮고 재발 가능성이 높은 영속성을 지녀 다루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2003년 9월 현재, 아시아 분쟁지도 속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드러난다. 하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내건 이념분쟁이 수그러들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규모의 대테러전쟁이 국지적 분쟁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나머지 하나는 분쟁 당사자들이 휴전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아시아 전역을 휘몰아쳤던 이념분쟁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들머리타격을 입은데다, 아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본보기였던 중국의 변질로 갈무리타격을 입어 완전히 한풀 꺾이고 말았다. 아시아 무장혁명 투쟁을 대표했던 필리핀의 신인민군(NPA)이 주춤한 사이, 그나마 1996년부터 네팔공산당 마오이스트(CPN-M)가 거센 무장투쟁을 벌여온 게 눈에 띄는 정도다. 여기다 인디아의 마오이스트공산주의자센터(MCC)가 전통적인 무장투쟁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버마공산당(CPB)이 이빨 빠진 호랑이로 밀림을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아시아의 무장혁명 단체들마저 199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저마다 얼굴을 가린 채 ‘이념’ 대신 ‘자치’나 ‘분리독립’처럼 현실 접목이 용이한 목표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현지 주민들이 원하는 주제를 들고 나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철 지난 느낌이 드는 공산주의만 내걸고는 현실적으로 먹히지 않는다.” 디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외치는 마니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장혁명 단체 캉레이팍 인민혁명당(PREPAK) 대변인 로버트가 달포쯤 전 찻잔 위에 흘린 말이다. 아시아의 이념투쟁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징후다.

그리고 9·11 이후 아시아 분쟁지도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테러전쟁 탓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현대식 대량살상무기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미국판 전면전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강타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장 두개가 아시아에 형성되면서 소규모 분쟁들을 흡수해버린 꼴이다. 대테러전쟁을 내건 두개의 국제전은 아시아 각 분쟁 당사국 정부에 무장철학을 주입시키고 무력동원의 정당성을 제공해 아시아 전역의 분쟁을 오히려 격화시켰다. 두개의 대형 전쟁에만 정신을 판 국제사회와 언론들이 다른 아시아 분쟁을 무시해버려 시민들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대아체 공격과 필리핀 정부의 대민다나오 작전이 대표적인 경우다.

대테러전쟁 이후 무장혁명 단체들쪽에서도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각 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들 사이에 불길한 ‘이라크 환상’이 덧씌워지고 있는데, 이른바 투스텝(two step) 혁명으로 부를 만한 새로운 유행이 불어닥쳤다. 예컨대 버마쪽 일부 민족해방·민주혁명 단체들처럼,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가 무력 개입을 포함해 어떤 형태로든 철옹성 같은 버마 군사정부를 물리쳐주면 그 다음 자신들의 목표를 향해 가겠다는 논리다. 버마 민족해방·민주혁명 단체들의 연합체인 격인 버마연방민족회의(NCUB)가 국제사회의 적극적 개입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빠르게 날려 그런 현상을 가시화했다.

무장혁명 단체들의 불길한 ‘이라크 환상’

이런 분위기 속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거리는 분쟁 당사자들이 곳곳에서 평화회담과 휴전협정을 놓고 담판을 벌이는 모습들이다. 미국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정착을 위한 ‘로드맵’을 제시하고부터 요즘 아시아 분쟁지역에서는 내남 없이 로드맵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분쟁 당사국 정부나 반군 모두에게 ‘때를 놓칠 수 없는’ 기회의 시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모양새다. 아시아 전역 분쟁지역이 요즘처럼 일제히 평화니 휴전을 들먹인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분쟁 당사국 정부 입장에서는 ‘테러’만 내세우면 만사형통인 지금이 반군들을 공략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고 동시에 평화 과시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대가를 거둬들일 수 있는 사업의 계절이기도 한 탓이다.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는 무기시장과 지천에 깔린 정부개발원조자금(ODA)이 함께 ‘수혜자’를 노리고 있는 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사업적 결단이 휴전과 평화의 배경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반대쪽 무장혁명 단체들에게는 자신들이 결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데다, 한편으로는 정부군의 강공책에 무너진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 확보가 절박했던 탓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0월로 시간이 다가온 필리핀 정부와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사이의 평화회담,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타이거의 휴전협정, 최근 박살나긴 했지만 네팔 정부와 마오이스트 게릴라 사이의 휴전협정, 카슈미르를 낀 인디아-파키스탄의 화해 분위기,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로드맵이다. 한꺼번에 밀어닥친 평화회담과 휴전협정을 굳이 나무랄 일도 아니지만, 수상한 동력에 밀려 마주 앉은 회의에서 근본적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아시아의 문화와 경제가 아시아 시민들의 몫이듯 아시아의 분쟁해결과 평화정착도 모두 아시아 시민들의 몫이다. 이번주 ‘아시아 네트워크’는 아시아의 분쟁지도를 놓고, 아시아를 함께 고민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아시아의 분쟁을 노려본다면, 그 해결책도 반드시 나올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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