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4 [베트남 방문 소감]

베트남을 다녀와서

박숙경, (사)에코언니야 대표

1. 사람이 좋다.

오랜 인연들이 곁에 있어서였던지 이번 방문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시간이었다.
2004년 나를 베트남으로 떠밀어, 결과적으로 귀한 인연을 맺게 해준 정귀순대표는, 그때로부터 9년, 장학사업 6년 만에 비로소 동행을 하게 된 셈이다. 6년 동안 변함없이 장학사업을 꿋꿋이 감당해온 정수, 그리고 두 번째 인연을 맺으며 앞으로 베트장학사업의 공식 코디네이트로 역할을 맡은 나현, 캄보디아 돈 보스코 학교에서 자원활동 중에 깜짝 멤버로 합류한 미선, 그리고 나 이렇게 총 다섯 명의 여자들이 7박8일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번 방문에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은 역시나 ‘사람’이다. 작년 가을 민들레기금의 베트남 해외연수에서 우연한 재회를 했던 구수정, 엄청 바쁜 그녀가 이번 방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었다. 그녀를 통해 만난 반 레 선생님 – 살아있는 베트남 혁명전사, 시인이자 소설가, 다큐멘터리감독-과의 만남도 무척 좋았지만 ‘전쟁증적박물관’의 2시간은 그녀의 젖은 눈빛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 시간은 ‘충격’과 ‘슬픔’의 시간이었다. ‘전쟁범죄전시관’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전쟁증적박물관’이지만 앞으로는 평화박물관으로 성격을 바꿔나간다는 구수정의 설명을 통해 전쟁기념관이라는 말이 가당치않은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왜 전쟁이 안 되는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을만큼 끔찍한 전쟁범죄의 증거와 흔적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어 있었다. 볼 때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사진이 있다면 바로 중부 선미마을에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피하는 어린형제의 그것이다. ‘미라이 학살’로 더 많이 알려진 이 마을의 학살사진은 또 한 번 우리 모두의 눈시울을 적셨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총탄에서 온몸으로 동생을 뒤덮으며 죽어갔던, 그 자신도 아직 어릴 뿐이었던 착한 형의 동생은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사살하라는 익숙한 ‘명령어’가 그 어린 것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죽여도 된다는 말이라는 것, 융단폭격이라는 말이 베트남전쟁에서 처음 생긴 세상에서 가자 무서운 말이었다는 것을, 구수정의 떨리는 목소리로 들으며 희미해진 기억이 바보처럼 꿈틀거렸다. 나는 그날 이후로 ‘융단폭격’이라는 말을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한국의 선술집과 같이 정겨운 구수정의 ‘아지트’에서 사이공 비어를 들이켰다. 싱싱한 베트남 해물들과 함께. 80년대 그 시대의 불온(?)한 사람들의 가슴을 시뻘겋게 불타오르게 했던 ‘불꽃처럼 타올라라’는 책, 바로 그 주인공인 젊은 혁명가에 반해 베트남에 왔다는 구수정(믿거나 말거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마주 앉아 있는 내내 구수정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건강을 빈다.

2. 장학사업, 그리고 함께한다는 것

이번 방문에는 정귀순 대표님이 함께한 만큼(!!) 그동안 놓쳤던 것들, 대충 지나갔던 것들을 총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다. 우스갯소리로 만만디라고 얘기하는 베트남 사람들까지 정귀순 대표의 ‘군기’에 직·간접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굵직한 회의를 하였다.(ㅎ) 인민위원회와 그동안의 장학사업을 함께 점검하고 고등학생 장학사업과 여러 필요한 것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결과로 지난 5년과 앞으로의 함께 보내야할 숱한 세월을 기약하는 합의서를 만들었다.(귀순언니, 정수, 나현이 뚝딱 뚝딱, 나와 미선은 탱자 탱자^^)

“아시아의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의 시민단체 <아시아평화인권연대>는 지난날 베트남의 미국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많은 희생에 대해 양심적인 한국인들의 깊은 역사적 반성의 마음과 아울러 그 전쟁에 참여하여 사망한 한국의 고 박순유의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 역시 우리가 함께 풀어가야 할 역사적인 상처임을 인식하고, 고 박순유 가족들의 마음을 담아 지난 상처를 증오가 아닌 화해와 우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뜻에서 베트남에서의 장학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이미 빠른 정치경제적 발전으로 나라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교육 사업에 많은 관심과 지원들이 있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미래를 제대로 꿈꾸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에 놓인 청소년들에게 꿈을 포기하지 않고 키워갈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하고 조금 더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이런 <아시아평화인권연대>와 <고 박순유가족>의 뜻을 충분히 헤아려준 푹호아사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학교관계자들의 도움으로 이 장학사업을 준비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푸억호아사의 장학사업 프로젝트 2차 협의서 전문」

합의서를 만들면서 정귀순 대표는 내게 말했다.

“사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과’는 가족들이 표현하기 어려운 말이다. 가족들의 언어라기보다는 그것은 아시아평화인권연대와 같은 평화단체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참전 유가족의 입장에서 하기 힘든 이야기를 결코 '당위‘로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장학사업의 씨앗을 뿌렸던 가족의 역할과 이후 공식적이고 지속적으로 장학사업을 책임져나가야할 ‘아시아평화인권연대’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지고 협력이 근거가 더욱 분명해진 것 같다. 가족들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소박한 의미에서 시작했던, 그래서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업이 아시아평화인권연대라는 정직하고 믿음직한 날개를 달고 한국과 베트남을 오랫동안 비행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역시 우리 가족의 첫마음을 담아 그 곁을 지킬 것이다.

4. 전쟁 대신 평화, 내게 남은 일

뉴스에서는 연일 시리아의 내전소식이 들려온다. 어린이를 인간방패로 내세우고 기저귀도 못 뗀 아이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들은 멀뚱히 지켜본다. 마치 그런 우리를 꾸짖기라도 하듯 절규에 찬 한 남자가 소리친다.

“what is this? nobody help us! why? we are the people, not the animal!”(이게 뭡니까? 왜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겁니까? 우리는 사람이지, 동물이 아닙니다.)

맨 처음 베트남에서 돌아오고 나서 나는 바오닌의 ‘전쟁의슬픔’을 여러 권 사서 가족들과 친우들에게 선물하였다. 그것이 전쟁을 반대하는 한 개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한동안 절판되었던 ‘전쟁의 슬픔’이 재발행 된다니 이 일은 계속 할 수 있는 일이겠다.

전쟁 대신 평화를 ‘진심’으로 원하는 나, 이제 남은 일은 베트남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유가족으로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당사자들을 만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정이 따라준다면.(!) 간혹 0000부대 동지회라며 전쟁 당시 사진을 게시해두는 블러거들을 보게 된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기에, 죽음을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이후와 가족은 사랑하는 국가에서 꼭 지켜 주리라 굳건히 믿었건만 그들의 현재는 어떠한가? 무심히 흐른 세월 속에 꽃같던 청춘들은 사라지고 이에 더 이상 들어주지 않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그들만의 기억으로 고독하게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년이면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40주기가 된다. 어쩌다보니 국립묘지에 못가본지 3~4년이 흘러버렸다. 내년엔 아들과 남편의 손을 잡고 꼭 가봐야겠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앉으면…….할 말이 너무 많을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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