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귀 순,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꼭 1년 만에 다시 캄보디아를 찾았다. 캄보디아에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너무 많아 그 영혼들이 한번 캄보디아를 찾은 사람들을 다시 그 땅으로 부른다고 한다. 아마 그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건기 말, 한낮에는 40도를 넘는 숨 막힐 듯 한 날씨의 프놈펜 공항에 내리니 안양숙씨와 그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김지훈 신부님(한국외방선교회 소속)께서 마중 나와 주셨다. 그 날부터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도 깊고 그로인한 가난도 말할 수 없지만, 왠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그 땅에서 일주일을 보냈고 돌아왔다.
이번 캄보디아 방문은 네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캄보디아 알롱깡안에 짓고 있는 센속중고등학교 건물의 건축현장을 둘러보고 건축비를 전달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도시빈민지역 알롱깡안에서 새로운 지역주민사업(교육사업)의 지원에 대한 의논과 지원결정이 있었고, 셋째는 태국과의 접경지에서 새로 시작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업을 비롯해 캄보디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활동들을 좀 더 둘러보는 것, 마지막으로는 벌써 4개월째 캄보디아에서 의료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안양숙씨를 만나는 것이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캄보디아만 생각하면 커다란 눈빛과 선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 떠오르며 늘 그리운 곳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캄보디아를 어떤 눈으로, 또 어떤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이들, 그곳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친 아름다운 이들과 만났기 때문이리라. 이 어수룩한 활동가를 위해 귀한 시간을 통째로 할애하며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신 김지훈 신부님과 오인돈 신부님, 그리고 그분들을 통해 만난 귀한 인연들께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리며, 그 인연은 오래토록 이어지리라 예감한다.
Ⅰ. 전체 방문 일정
이번 캄보디아에서는 수도 프놈펜에서 시작하여, 서북부에 위치한 바탐방, 그리고 태국과의 국경으로 이동하면서 작은 마을 쩜라우, 시소폰, 접경도시 뽀이뻿을 거쳐, 마지막으로 씨엠립에서 떠나 베트남의 호치민시를 경유하여 부산으로 돌아왔다.
1. 수도 프놈펜
◑ 도시빈민촌 Anlong Kgnan (프놈펜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센속중고등학교 신축건물 건축현 장과 현지 활동 NGO Maryknoll Center
◑ Maryknoll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AIDS/HIV 환자들을 위한 Seedling of Hope Project Center와 말기 AIDS 환 자들의 호스피스센타
◑ Rusian Hispital (AIDS 환자들의 무료병동)
◑ 뚜오슬렝 박물관
2. 바탐방
◑ 한국 원불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의료센타
◑ “Peace for children home” (고아원)
3. 마을 쩜라우
4. 시소폰
◑ JSC in Sereisephone 사무실과 지역사업현장
– 지뢰피해자의 집(집과 휠체어 지원사업)
– 이동도서관(mobile library)
– Cow bank (지뢰피해자 가족에게 소한마리를 주고, 나중에 송아지로 돌려받음)
– 초등학교
– 지뢰매설지역
5. 뽀이뻿
◑ JSC in Poipet의 지역사업이 추진 중인 마을 4곳과 사무실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운영 중인 학교(초등학교와 기술학교)
6. 씨엠립
◑ JSC in 씨엠립 사무실
Ⅱ. 프놈펜에서
◑ 알롱깡안 센속중고등학교 건축현장
지난 해 5월, 캄보디아 지원사업의 사전답사 때 방문했던 프놈펜에서 밀려난 도시빈민들의 이주지역인 알롱깡안 지역의 센속중고등학교 (이 학교는 4년 전 한국과 일본의 민간지원으로 지어졌고, 5개의 교실에 현재 학생은 900명 정도)가 2부제 수업으로도 학생들을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있고, 가장 큰 고민은 학생들의 공부할 새로운 건물이 필요한 상태였다. 지난해 11월 학생들이 교과서도 없이 수업하고 있어 교과서 구입을 위한 작은 지원과 함께 뜻있는 분들과의 의논 끝에 센속중고등학교의 새로운 학교건물 짓는 것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학교 측과 협의를 시작했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다행히 기존 학교건물을 지을 때 지원을 했던 일본의 NGO – “Second Hand”에서도 지원의 뜻을 밝혀, 한국에서 1층을, 일본에서 2층을 짓기로 하고 지난 1월 구체적인 결정을 하였다. 학교는 1층과 2층에 각 교실 5개와 별도의 화장실과 물탱크 설치에 총 66,000불(한화 약 6천 5백만원 정도) 소요되어, 한국에서는 <아시아퍙화인권연대>에서 24,000불, <한끼의 식사기금>에서 10,000불을 지원하고, 일본의 에서 32,000불을 지원하기로 하고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현장을 찾았더니 2층 바닥공사가 한창이었다. 건축담당자가 공사 현장을 상세하게 보여주었고,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곧 우기가 시작될 것이니 건기 동안 좀 더 많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잠시 만난 교장선생님은 뜻밖의 방문에 몹시 반갑고 놀라워 하셨고, 오는 9월에 새로운 건물은 고등학교로, 기존 건물은 중학교로 쓰이게 될 것이라 즐거워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캄보디아의 학교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인 교육예산의 부족으로 교사들의 지나치게 저임금(대부분의 교사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으로 인한 교육의 낮은 질과 교과서 부족 뿐 아니라 도서관이 텅 비어있는 등 열악한 교육여건을 해결하기에는 아직도 멀게 느껴진다. 그래도 9월, 새학기에 새로운 교실에서 학생들이 즐거운 얼굴로 공부하는 모습을 그려보며 학교를 떠났다.
◑ 알롱깡안 Maryknoll Team의 지역사업
이른바 도시빈민지역인 알롱깡안(※ 알롱깡안 마을의 실상에 대해서는 <2005년 캄보디아 방문보고서> 참조) 에는 전체 7개 마을에 약 5천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알롱깡안에서 AIDS 환자들을 돌보고, 의려검진과 가난한 아이들의 공부방 등 지역사업을 하고 있는 국제NGO인 Maryknoll Team에서 올 3월 지역사업에 재한 지원을 요청해 왔었다. 현재 조그마하게 운영되고 있는 공부방 몇에 부지를 임대하여 공부방이자 마을회관처럼 사용하기 위한 부지임대와 청소년들과 마을 주부들을 대상으로 생활능력을 갖추도록 기술교육을 계획하면서 컴퓨터와 재봉틀이 필요한데, 지원해 줄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어왔었다. AIDS 환자들이 많고, 가난한 이들이 많은 지역에서 의미 있는 사업이라 판단되어 몇 차례 의논을 거쳐 이번 방문에서 지원을 확정하기로 하여 방문하게 되었다.
알롱깡안 Maryknoll Team의 Director인 Doy씨로부터 지역사업의 구상에 대한 의견을 듣고, 공부방과 기술교육 준비 중인 공간도 들러본 뒤 지원을 결정하였다. 지원은 새로운 공부방 공간의 부지 임대료 부족분 1,342불(캄보디아 정부로부터 3년간 임대)과 컴퓨터 3대(각 300불) 및 컴퓨터 책상(각 38불), 미싱 3대(220불)와 전기발전기(1,000불)을 포함하여 총 4,880불을 전달하였다.
알롱깡안 Maryknoll Team의 Director인 Doy씨는 쉰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여성 활동가이다. 그의 그 열정은 자칫 무리하게 사업을 벌인다는 염려를 살 수도 있겠으나, “필요하면 되게 마련”이라는 그의 소신이 오랜 기간 아프리카를 거쳐 캄보디아에서 일하도록 만든 원천이 아니었을까 싶다.
◑ Seedling of Hope
1) 전체 프로젝트
Maryknoll 수도회에서 캄보디아의 AIDS 환자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이 “Seedling of Hope HIV/AIDS Project”는 1996년부터 시작되어, 현재 수도 프놈펜을 중심으로 약 2,200명의 AIDS 환자들을 돌보는 규모가 큰 프로젝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IDS 교육
▪진단을 위한 상담 (검사 전 검사 후 상담)
▪환자의 의료활동
▪홈케어 (가정, 병원, 사무실 방문)
▪호스피스 활동 (24시간) : 12명
▪식량과 쉼터(그룹홈 제공)
▪재활지원
▪AIDS에 감염된 어린이를 위한 지원
▪AIDS에 환자인 산모를 위한 지원
2) 호스피스센타
“Seedling of Hope HIV/AIDS Project” 사무실에서 가까운 거리에 말기 AIDS 환자의 호스피스 센타가 있다. 그곳에는 그날 12명의 환자가 상주하는 의사 한명과 간호인, 음식담당자들과 함께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상태의 환자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불과 며칠을 넘기기 어려워 보이는 환자들, 이곳의 환자들은 모두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임종에 임박한 환자들이라고 한다. 다른 병원의 시설이나 캄보디아인들의 생활수준으로 볼 때,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된다.
아쉽게도 캄보디아는 아직 AIDS 감염자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인의 감염 여부를 알지 못하다가 몸에 이상이 생겨 검사를 했을 때 비로소 발견되기 때문이라 한다. 오히려 꾸준한 교육을 통해 현실적으로는 점차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곳 담당자의 의견이었다. 그것과 더불어 한 가지, 이곳에서는 AIDS 환자들에 대한 배척감이 크지 않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마을 한켠에 AIDS 환자들이 드나드는 센타가 있고, 인근에 호스피스센타가 있음을 한국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본에 건너간 지 꽤 오래되었지만 AIDS에 감염되었음이 확인되어 치료 중, 생의 마지막은 한국에서 맞고 싶다고 간곡하게 얘기하였으나 받아줄 가족이 없어 결국 인권모임이 보호자가 되어 부산대학병원 담당의사와 협의 하에 환자를 공항에서 곧장 병원으로 옮겼으나, 병원 측에서는 다른 환자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를 대며 응급실 복도 한켠에 밀어두었다 결국 다른 병원으로 보내버리고, 그 병원에서도 냉대를 받다 어느 종교쉼터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가엾은 사람이 떠오른다.
◑ Tuol Sleng 박물관 (크메르 루즈 정권시절 S-21 감옥)
뚜오슬랭은 크메르 루즈 정권시절 'Security Office 21(S-21)'이라 불리우는 비밀기관으로, 이전에 고등학교 건물을 무차별한 연행, 취조, 고문, 감금 시설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1975~78년 사이 이곳에 감금된 이들은 모두 10,499명으로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10~15살의 청소년들도 다수였다는 사실이다. 이 박물관은 캄보디아의 깊은 상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곳으로, 당시 수감되고 죽임을 당한 이들의 사진과 고문시설들, 그리고 10명 이상 연결된 족쇄와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그대로 남겨두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든다.
그러나 몇 가지 드는 생각들 중 하나는, 이 박물관을 찾는 99%가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입장료가 1인당 2$이라는 캄보디아 현지 수준에는 비싼 금액 때문일지는 모르나 이 역시 정부가 자국민들로 하여금 역사를 인식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곳을 둘러보며 든 또 하나의 생각은 캄보디아의 역사, 상처와 고통이 한국이 겪은 고통과 많이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총을 겨누고, 죽이고 또 죽임을 당하고도 그 아픔과 고통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위로받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 지난 날 한국이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그리고 가까이 민주화 과정에서까지 겪어야 했던 아픔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한국사회가 스스로 상처와 고통을 하나씩 드러내고 치유해가는 경험들이 캄보디아 민중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나를 붙들었고 앞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Ⅲ. 바탐방에서
◑ 원불교 클리닉에서
캄보디아에서 안양숙씨의 거처이기도 하고, 의료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원불교 클리닉은 마치 친구의 집을 방문하듯 들렀다. 한국의 원불교에서 캄보디아에 세운 교당과 작은 클리닉으로 그곳에서 4년째 일하고 계신 최교무님과 이번에 첫 소임지 캄보디아에서 5개월째 접어드신 서교무님 두 분이 반가운 친구를 맞듯 맞아 주셨다. 1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조금 더 친숙한 것은 지인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곳의 심장병환자였던 17살 소년 손폰산에 대해, 그리고 네 번째 아기를 출산한 산모의 생계문제에 대해 안양숙씨와 의논해 오던 터라 친숙하게 느껴졌으라 짐작한다.
원불교 클리닉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전 8시부터 11시 반까지 진료를 하고, 하루에 110명에서 많게는 180명의 환자가 올 때도 있다고 한다. 환자가 많이 늘었다고 하여, “양숙씨 때문에 한국에서 용한 의사가 왔다는 소문이 난 것 아니냐?”고 했더니, 양숙씨 왈, “제가 미모가 좀 되지요”라고 한다. 이 클리닉 환자 상당수는 영양 부족으로 인한 당뇨와 고혈압(아주 더운 지방에서 먹을 것이 부족하니 지칠 때마다 단 것을 찾게 되고, 반찬도 짠 것을 먹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등 지속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환자가 많아, 섭생에 대한 교육이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얼마 전 마을의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지원도 있었고, 요즘은 오는 움직이기 어려운 환자들을 위한 마을의 방문 진료도 구상 중이라고 한다.
◑ Hope for Children Home (고아원)
원불교 클리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아원 “Hope for Children Home”은 1994년 설립되어 현재 64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소년 40명, 소녀 24명이며, 12살 이하 아이들을 받고, 2살부터 대학재학 중인 아이들까지) 이 고아원은 “컴보디아정의평화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손소메트씨가 대표로 활동 중인 법인 소속으로, 그는 캄보디아의 야당 지도자의 아들로 캄보디아 사회를 위해 헌신한 이로 꽤 잘 알려져 있었다. 이전에 아이들이 살았다는 건물은 지금 강당과 도서관, 교육공간으로 쓰여지고 있고, 아이들의 거처는 그 옆에 일본 NGO의 지원으로 예쁜 2층 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설립 당시는 117명의 아이들의 거처였으나, 지금은 당시에 비해 고아의 수가 많이 줄었고, 요즘은 경제적 능력이 없는 한부모(AIDS 환자 등)의 아이들이 오는 경우와 인신매매 되었다 발견되어 경찰에 의해 위탁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인신매매의 경우 위탁된 아이는 모두 15명이었으나, 3명만이 이곳에 적응하여 남아있고 나머지는 다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걔 중에는 부모가 자식을 8번이나 되판 아이도 있었다고 하여, 아이들의 인신매매가 최근 캄보디아의 또 하나 심각한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고아원은 운영비 대부분을 해외의 지원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앞으로 생활 자립을 위한 새로운 시도로 2년 전 농사지을 땅을 매입하여 올해로 두 번째 농사짓기에 들어갔고, 돼지와 소, 거위 등을 아이들이 돌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적 자립을 위한 노력은 이제 시작 단계여서 아직은 생활비의 안정적인 지원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의 원불교에서 이 고아원 아이들의 식비로 연 4,000불을 지원해 왔으나, 올해가 지원을 약속한 마지막 해여서 원장은 그 이후를 염려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학비는 고아원에 머물고 있음이 확인되면 무료이지만 기타 비용은 부담해야 하고, 해외 지원 단체와의 관계 속에서 해외로 유학을 가는 케이스도 생겼다고 한다.
Ⅳ. 쩜라우에서
바탐방 이후 방문지의 안내를 예수회 소속의 오인돈 신부님께서 해주시기로 하고, 바탐방을 떠나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쩜라우로 이동했다. 마을로 오는 중에 비구름기둥을 통과하면서 앞이 안보일 만큼의 굵은 비가 쏟아졌지만, 그 지역을 벗어나면 새파랗게 개인 하늘을 볼 수 있는 우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며 깊은 산속인 듯도 하고, 평온한 마을인 듯도 한 곳을 지나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불교국가인 캄보디아에서 보기 드물게 작은 마을의 100가구 다수가 카톨릭 신자인 마을로 이곳의 성당에서 다음 날 아침 오신부님께서 일요일 미사를 위해 방문하길 하였으니, 캄보디아의 작은 마을에서 하루를 지내보는 것도 좋으리라는 신부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도시에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쩜라우는 아주 평화롭고 생활도 크게 부족함 없는 그런 마을이었다. 농사를 짓는 것이 전부인 이곳의 생활에서 젊은이들이 할 일이 없는 것이 큰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태국의 국경을 넘어 이주노동을 꿈꾸고 있었다. 맑고 커다란 눈을 가진 아이들, 캄보디아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영양부족으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15살의 아이가 한국의 11~12살 정도의 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그 선한 눈빛의 아이들에 둘러싸여 한나절을 보내고 떠나올 때 한 아이는 꼭 안겨 떨어지지 않았다.
Ⅴ. 시소폰에서에서
쩜라우를 떠나 시소폰에 도착하여 캄보디아의 가난한 지역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JSC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인상적인 활동가 한사람을 만났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더위, 그리고 휴일임에도 먼 곳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여, 기꺼이 사무실로 나와준 JSC office in Sereisephone의 Director 석앵씨.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하자마자, 사무실 벽에 붙여진 그 지역의 지도(Area & View of Work), 자신들의 활동을 그림으로 정리한 도표(Part & Staffs of Work), 그리고 2006년 진행 중인 사업을 꼼꼼이 기록한 챠트(Process of Work)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 여 동안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아마 오신부님께서 저녁 약속이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밤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는 캄보디아의 난민촌의 난민으로 JSC를 만나, 93년부터 난민촌에서 함께 활동을 시작했고 96년부터 지뢰피해자가 많은 시소폰 지역의 지역활동가로 10년째 일하고 있는 훌륭한 여성활동가였다.
◑ 지역사업 “To the Poor and Handicapped in Cambodia”
JSC의 지역사업의 주요 대상은 가난하고 장애를 입은 이들, 특히 지뢰피해로 생활능력을 잃은 이들이다.
이 사업의 12 point는,
1. House
2. Food
3. Water
4. School
5. Health Service
6. Income generating
7. No mine
8. Land
9. Prostheties, Wheelchairs etc.
10. Road
11. Examples (Work)
12. Aware (지뢰경고표지판)
◑ 현장들
석앵씨는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방문할 수 있는 지역에서 진행 중인 사업 중 다섯 가지를 보여주었다.
1) 지뢰피해자
첫음 방문한 곳은 지뢰피해자의 집이었다. 37세의 여성은 팔 하나가 없고, 다리를 쓰지 못했다. 4년 전 밭에서 일하다 지뢰가 터져 남편은 죽고 본인은 그리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더 이상 돌볼 수 없어 친척들에게 보냈고 구걸하며 살던 중 JSC team을 만났다고 한다. JSC team에서는 이 여성에게 가장 어려운 지뢰피해자에게 지원하는 ‘House program’인 집을 지어주었고, 휠체어 제공, 그리고 Health Service를 지원해 주고 있었다.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 이 옷들도 다 다른 사람들이 준 것이고 ……”
방문객들에게 이렇게 쉴새 없이 얘기하는 그를 보면서, 그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의 그 억척스런 삶의 의지였다. 그 집을 나오며 문득 떠오른 (구)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김형율씨의 절규,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2) 모바일 라이브러리(이동 도서관)
캄보디아는 형식적으로 모든 교육은 국가에서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캄보디아 정부는 교육에 투자할 예산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교육은 절대적으로 부실한 상태이다. 많은 학교건물도 외국의 지원으로 지어졌거나 지어지고 있고, 교사들의 월급도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아이들의 교육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그나마도 제때 지급되지 않는 경우조차 있다고 한다. 무상으로 지급되어야 할 교과서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중에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이해가 깊은 JSC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 교육용 자료들을 많이 만들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이런 책자들을 포함하여, 성인용 잡지 등을 담은 도서 박스(펼치면 3칸의 작은 책꽂이 모양)를 마을 곳곳에 비치하여, 이동용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초등학교 바로 앞의 한 집에 평상과 함께 이 이동용 도서관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 집은 이 초등학교 교사의 집이고, 그의 아내가 도서를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한쪽 벽에는 도서 목록과 책의 숫자, 이용 횟수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 약 20곳 정도의 이동용 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위해 동화책과 교육용 자료들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3) 학교
JSC team를 통해 해외의 지원을 받아 지어진 작은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이 학교는 손님들이 오자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왔다. 지금 이 학교는 교사가 없어 교장선생님과 스님 한분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불교국가인 캄보디아는 스님은 대부분 교육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편이며, 평생 승려로 사는 것이 아닌, 남학생들도 방학기간 동안 한두달 승려로 수행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한 교실에 두 그룹(학년)이 동시에 수업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와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아이들이 어울려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4) 카우뱅크(Cow Bank)
방문한 집은 지뢰피해자 및 가난한 이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하나로 중 'Cow Bank' (소 은행)에 의해 소를 받은 집이었다. 이것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지뢰피해자에겐 의미가 불가능 한 일이지만, 가족들이 열심히 살려는 의지가 있고, 소를 키울 사람이 있는 경우 소 한 마리를 주고, 그 소를 키워 새끼를 낳으면 새끼로 돌려받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돕지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원을 모색한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5) 지뢰매설지역
바탐방을 비롯하여 서북부 접경지역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지뢰피해가 많은 지역이다. 지뢰매설지역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너무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직도 매년 800명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피해자 대부분은 가난한 이들이 나무를 베러 지뢰매설지역에 들어갔다가 피해를 입거나, 땅이 없는 이들이 농사지을 땅을 개간하다 피해를 입는다고 한다. JSC team에서는 지뢰매설지역에 지뢰표지판을 세우는 일, 지뢰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가끔 지뢰가 제거된 지역도 hf 수 있었지만, 캄보디아에 남아있는 지뢰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한 백년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풀풀 흙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오토바이로 우리를 안내했던 JSC office in Sereisephone의 강직하고도 선량한 미소를 가진 스탭과 작별인사를 하고 국경도시 뽀이뻿으로 향했다.
Ⅵ. 뽀이뻿에서
이번 캄보디아의 마지막 방문지 뽀이뻿, 뽀이뻿은 태국과의 접경도시로 캄보디아 전역에서 태국으로 가려는 이들이 내리는 버스의 마지막 종착지이자 태국으로부터 많은 물건들을 실어오고, 날마다 태국으로 가서 일하고 돌아오는 일당노동자들로 그 어느 곳보다 바삐 움직이는 삭막한 도시의 느낌이 강한 곳이었다. 이 도시에 올해 초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지역사업을 시작한 수녀님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 마을 순례
도착하자마자 카르멘 수녀님은 우선 자신들이 지역사업을 시작한 마을부터 가보자고 하여, 뽀이뻿의 중심을 벗어난 시골 마을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뢰매설지역이던 접경지의 지뢰를 제거하고, 캄보디아 정부는 가난한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주면, 일정한 땅을 나눠주겠다고 하여 캄보디아 전역에서 많은 이들이 몰려왔으나, 뒤늦게 온 이들은 땅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빈곤으로 내몰려 결국 태국 국경을 넘어 일당 1~2$의 노동자 일하고 있다고 한다. 수녀님의 안내로 4개의 마을에서 가장 심각한 상태에 놓인 이들을 만났다.
1. 결핵으로 앓고 있는 소녀
영양실조 상태의 아이들이 작은 질병과 함께 앓게 되는 가장 많은 질병이 결핵이라고 한다. 덥고 습한 캄보디아에는 빗물을 받는 커다란 장독의 숫자가 그 집의 부의 척도가 된다고 할 만큼 물이 귀하다.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만큼 위생적인 측면도 열악하지만, 무엇보다 빈곤으로 인한 영양부족이 특히 다산(多産)이곳에서는 아이들이 쉽게 영양실조에 빠지기 쉽다. 그나마 과일이 풍부함이 유일한 위안이라고 할까 ……
가르멘 수녀님의 안내로 만난 아이는 13세의 여자아이로, 장결핵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이웃의 도움으로 얻은 작은 나무집에 부모와 동생 넷, 모두 여섯 가족이 살고 있는 이 집의 가장은 태국으로 건너가 하루에 2$ 미만을 번다고 한다. 일이 없는 경우에 그나마도 벌지 못해 생계가 위태로운 가족이었다. 이 여자아이는 배가 몹시 아파 병원에 가서 장 수술을 하였으나, 수술 후에도 통증이 너무 심해 다시 확인한 결과 장결핵임을 알게 되었고, 2주째 결핵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가 결핵약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널부러진 상태의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고통이 너무 커 보였다. 소모성 질환인 결핵은 잘 먹고 잘 쉬면 빨리 회복되는 질병으로 이미 한국에서는 결핵이 가벼운 질병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절대적인 가난과 영양부족의 이곳에서는 아주 심각한 질병일 수밖에 없다. 아이가 좋아한다는 우유를 전해주면서 카르멘 수녀님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이에게 우유와 과일 등 영양이 많은 음식을 주고 싶지만, 가족 전체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아이에게만 음식을 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환경의 그곳에 그대로 두면 좋아질 가능성이 적어보이고, 널부러진 딸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아이 엄마의 눈빛, 방문객들에 신난 배가 볼록한 동생(아마 영양실조로)을 뒤로 하고 나오는 발길이 몹시 무거웠다.
2. AIDS 모녀
다음 마을에서 쓰러질 듯 기울어진 집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 네 모녀가 살고 있었다. 엄마는 AIDS 환자로 태국에 일하러 갔다가 불법취업으로 잡혀 감옥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막내를 낳았다고 한다. (태국은 불법취업자를 감옥에서 평균 3~4개월 가두어 둔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AIDS 감염 및 양성임이 확인되었고, 집으로 돌아와 둘째딸 (5살) 역시 AIDS 양성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제 태어난 지 3개월 된 막내는 너무 어려 검사가 불가능하지만, 역시 AIDS에 감염되었을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미 결혼한 남자로 아들을 얻을 욕심으로 이 여인과 관계를 가졌으나, 막내까지 딸임을 알고 여인을 버렸다고 한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아이들을 돌볼 수 없음을 알고, 두 아이를 그 남자에게 보냈으나, 그 남자는 다시 돌려보냈다고 했다. 여인인 AIDS 환자를 돌보는 NGO로부터 아기의 우유와 생활용품 등을 지원받고 있지만, 막내를 수녀님들께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AIDS에 감염된 아이들을 보호해 줄만한 곳이 부족하여 아직 제대로 조처를 취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아마 조만간 아이들의 엄마는 세상을 뜰 것이고, 아이들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3. 지뢰피해가족
마지막으로 만난 가족, 여덟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바로 앞에서 지뢰가 터져 두 팔과 두 눈을 잃었다. 아직 눈에서 진물이 흐르는 그는 2년 전 사고를 당했으며, 살고 있는 집은 이웃이 살도록 허락해 준 집이라고 한다. 두팔과 두눈을 잃은 상태에서도 그와 그의 아내는 태국 접경지에서 사람들의 물건을 날라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남편 곁에서 떠나지 않고 팔과 눈이 되어주고 있는 그의 아내, 슬픔과 그늘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들의 미소가 그나마 위안이 아닌가 싶다.
◑ Another World – 카지노
마을을 다 돌아보고 수녀님들과 뽀이뻿의 다른 세상, 다름 아닌 ‘카지노’의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초라하고 먼저 푸석한 도시의 한켠에 현대식으로 들어선 커다란 건물들 입구에 경비를 지나 들어선 그곳은 정확하게 지금까지 본 캄보디아와 전혀 별개의 ‘Another World'였다.
태국은 카지노가 불법이어서, 캄보디아의 접경도시 뽀이뻿에 태국의 자본으로 거대한 카지노가 들어서고 태국으로부터 몰려드는 손님들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찾는 관광객들 역시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걔중에는 한국인 고나광객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탓에 야외 식당 입구에 한글로 된 메뉴판도 보였다. 우리도 1인당 2.5$ (가난한 한 가족의 하루 생활비 이상)의 거창한 뷔페에서 캄보디아 음식 뿐 아니라 한국김치까지 맛 본 캄보디아에 머무는 동안 가장 호사스런 저녁식사를 했다.
◑ 새로운 제안
다음 날 아침 뽀이뻿을 떠나기 전, 수녀님들의 숙소이자 사무실에 들러 함께 아침식사를 하며 수녀님들과 이곳 활동과 사업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곳에는 지금 페루 출신의 간호사인 카르멘수녀님을 비롯하여 세분의 수녀님이 함께 일하고 계신다. 수녀님들은 올 1월부터 이곳으로 옮겨와(이전에 바탐방에서 지역사업 준비기간을 거쳤음) 매일 한 마을씩 방문하여 주민들의 생활과 실태를 파악하면서, 자신들이 이 지역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정해나가고 있었다. 현재는 7개의 마을에서 매일 이동검진과 의료교육을 실시하고 있었고, 심각한 환자 특히 결핵과 AIDS 환자들의 의료지원과 생활지원을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로 의료센타를 만들고, 문맹율이 높은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교육사업, 심각한 문제인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녀님들은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어제 구석구석 보여준 마을,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어려운 이들, 그 중에서도 결핵과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을 돕는 사업을 하고 싶다고, 아이만을 지원하는 것인 불가능함으로, 결핵과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가 있는 가족에게 하루 1$의 생계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싶은데,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한 가족에게 하루 1$, 한달이면 30$, 한화로 3만원 정도이다. 작은 마음만 내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싶다. 그래서 수녀님들께 구체적인 숫자와 필요한 금액 등을 정리한 사업계획서를 보내주시면, 한국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의논해보겠다고 하니, 수녀님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한사람이 한 가족을 돕는다면, 필요한 가족의 숫자만큼 주변의 이들이 마음을 낸다면, 캄보디아에서 가난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온전한 삶을 살아보지도 못하게 될 아이들에게 꿈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뜻있는 일인가 싶다.
가난한 수녀님들께서 평소에 아껴 드시지 싶어 보이는 버터와 쨈까지 등장한 정성스런 아침을 먹고, 캄보디아를 떠나는 씨엠립으로 출발했다.
Ⅶ. 캄보디아를 떠나며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역사 유적지이자 최고의 관광지이기도 한 씨엠립에 있지만, 이번에도 앙코르와트는 아직 인연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씨엠립의 JSC 사무실을 잠시 들러 그곳에서 잔나렛씨를 만났다. 지뢰피해로 두 다리를 잃은 그는 절망의 긴 늪에서 벗어나 자신처럼 지뢰피해자와 장애인들을 위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불과 30분 정도의 짧은 만남에서 그는 내 마음 깊이 각인되었다. 그는 그의 삶을 나름대로 표현하고 정리한 원형의 Life Map 모양으로 만든 작은 화단, 그리고 그 화단을 따라 걷고 난 뒤 그것의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동안 그가 지난 세월동안 겪었던 고뇌와 고통이 순식간에 나의 가슴으로 옮겨와 숨막히게 하는 그 특별한 느낌 때문이었다.
캄보디아에서 만난 훌륭한 두 활동가 석앵씨와 잔나렛씨, 그 사람들을 만난 것으로도 이번 방문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훌륭한 활동가들이 그 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안내의 역할을 한 JSC, 그동안 캄보디아에서의 활동을 진지하게 재검토하고 미래를 위해 모색하는 성실한 자세를 가진 그 단체가 더 빛나 보인다.
안양숙씨와는 일주일간 함께 지내며 밤마다 4개월간 캄보디아에서 느낀 점들을 얘기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끊이지 않고 얘기하다 보니 돌아오는 날, 갑자기 자신의 일부를 그곳에 남겨두고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캄보디아의 현실, 캄보디아인의 마음에 훨씬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 있음을 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결핵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했던 소녀 꾼띠어가 원불교 클리닉으로 와서 그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