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_아프간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광수)

꿈틀거리는 아프간 사람들을 만나보고 왔습니다

이광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 대표)

아프간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벌써 네 번째다. 항상 그렇듯 피하고 싶은 마음과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교차한다. 이번에도 정확하게 또 그랬다. 그래도 이번에는 파키스탄을 거쳐 육로로 카이바르 고개를 넘는 힘들고 불안한 여정이 아니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델리에서 이틀을 묵은 뒤 카불 공항을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과연 카불 공항은 어떤 모습일까? 전쟁의 흔적이 치워지기는 했을까? 두 시간 만에 도착한 카불 공항의 모습에서부터 새로운 아프가니스탄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마중 나오신 정토회(JTS)의 류정길 법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카불 공항에서 전쟁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앞으로 활동하게 될 열흘간의 여정에 대해 류정길 법사님과 논의를 하였다. 그리고 오후에는 우리가 연대하게 될 슈하다(SHUHADA Organization)을 방문하였다. 슈하다는 시마 사마르(Ms. Shima Samar)라는 아프가니스탄 인권 활동가가 대표로 있는 엔지오로서 주로 여성 (특히 과부) 재활, 고아 보호, 문맹 퇴치, 난민 복구 등에 관해 활동하는 단체다. 슈하다 사무실에서 담당자와 두 시간에 가까운 프로젝트 참여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가장 가난한 바미얀 주의 톱치(Topchi) 마을에 마을 회관을 건립하고자 한다. 그곳은 파키스탄에서 난민 생활을 마치고 돌아 온 난민들이 터를 잡고 있는 곳이라 했다. 상당수가 여성들로 전쟁과 피난 중에 남편이나 아이들을 잃은 사람들이라 했다. 마을 뒤에 큰 산이 있으나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은 없고 집도 대부분이 땅 속을 파서 만든 움집 형태거나 동굴을 주거지로 삼고 있다고 한다.

다음 날 4월 18일 아침 일찍 먼동도 트기 전에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류정길 법사 그리고 정토회의 현지 활동가인 하심(Hasim)씨와 함께였다. 11인승 승합차를 타고 가는 시간은 11시간. 원래는 그보다 세 시간 정도 적게 걸리는 길이 있는데, 아직 눈이 녹지 않아 그 길이 폐쇄되어 어쩔 수 없이 옛날 길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길은 실크로드의 일부로서 7세기 승 현장과 8세기 승 혜초 등이 지나가던 길로 유서 깊은 것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좋았다.

저녁 늦게 도착 한 후 여정을 풀고 슈하다의 현지 활동가와 다음 날 방문하게 될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소수 민족인 하자라(Hazara)족인 그 마을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알리(Ali)는 탈리반을 매우 저주하였고 그에 반해 미국의 역할을 크게 기대하였다. 그러면서 한국 또한 미국이 계속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억제되고 덕분에 경제가 크게 발전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반면에 탈리반과 같은 민족인 파슈툰(Pashutun)족 출신인 하심은 이제 전쟁이 지속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군벌들도 상당히 해체되었고, 많은 외국의 엔지오들이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내전이 재발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에 미국은 이제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후자 쪽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과연 미국이 완전히 자리를 비우고 떠나면 (현재 형식적으로는 동맹군 AISF이 주둔하고 있긴 하지만 주력 군은 역시 미군이다.) 정말로 다시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는 일단 차치하고, 내전 종식과 탈리반 축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해줘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무겁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4년간 내전에 시달리고 가난에 찌들어 있는 인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민족적 자존심일까 아니면 최소한의 생존권 보장일까?

4월 19일. 툽치 마을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전체 110 가구에 인구 수 660명 정도 되는 마을. 모두가 다 탈리반이 이 지역을 점거할 때 학살을 피해 설산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 피난 도중에 수 천 명의 어린이와 아녀자들이 얼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만 파키스탄의 한 작은 국경변 도시에 정착하여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다가 작년에 돌아 온 그들이다. 난민 출신이라 하니 무척 반가웠고, 내심 난민들이 돌아 와 재건할 수 있는 사업을 희망하였는데, 그것이 현실화되니 무척 고무되었다. 우리도 비록 다른 곳이지만 당신들과 같은 처지의 난민들을 지난 3년 간 지원해주었다는 말을 그들에게 하였고 그들 또한 그 인연의 아름다움과 사업의 연속성이 주는 의미에 훨씬 만족해하였다. 돌아 갈 고향이랬자 땅도 없고, 친척도 없는 곳. 그래서 정부가 무상으로 불하해 준 이곳 마을에 정착하기로 하고 여장을 푼 것이 작년 11월의 일이었다 한다. 살을 에는 추위가 두려워 일단 땅을 파고, 산을 파 동굴을 파 생활하다가 봄이 되면서 서서히 집을 짓기 시작해 지금은 상당수가 지상 가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지하 움막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고 더군다나 환기도 되지 않은 그 지하 움막에서 유일한 생존의 수단인 카페트 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도 그나마 카페트 짜는 일이 수익성이 괜찮은 편이라 석 달에 한 번씩 약 9,000 아프간 (한화로 18만 원 정도. 6인 가족의 절대 빈곤선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다.) 정도를 버니 일단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 같아 그나마 안심이었다.

마을 주민들을 만나 JTS에서는 마을 회관을 지어 주고 (약 30,000 달러 소요) 우리는 프로그램 운영비로 카페트 짜기와 문맹 퇴치 프로그램을 위해 연간 10,000 달러를 후원하기로 했다. 처음 슈하다에서는 이 두 프로그램 외에도 장신구 가공, 포테이토 칩 가공, 깔개 (rug) 짜기 그리고 보건소 운영을 후원해주었으면 하는 사업 제안서를 우리에게 제출하였다. 전체 70,000 달러 정도가 소요되는 사업이었고, 이 제안에 나는 우리 여력을 감안해 일단 첫 해에는 카페트와 문맹 퇴치 프로그램만 후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1년이 지나고 난 후 상황을 보고 사업의 확장에 대해 다시 논의하자는 말로 마무리는 하였지만 더 많이 지원해주지 못하는 심정이 안타까웠다. 지원금은 JTS에서 건물을 짓고 난 후에 절반을 지원하고, 그 후 6개월이 지난 후에 나머지 절반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2년차와 3년차 사업은 추후에 계속 논의하기로 했다. 지원 내용은 카페트 짜는 기계 (loom) 3대, 실, 기술자 월급, 배우는 사람들 최소한의 식비, 문맹 퇴치 교사 월급 등이다. 카페트 짜는 기계 한 대에 네 명씩 붙어 기술을 익히고 3개월에 한 팀씩 새로 충원하면 1년에 16명 정도가 그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이것이 3년간이면 48 명 정도로 불어날 것을 생각하니 애써 마음이 뿌듯해졌다. JTS에서는 사업 전체가 잘 진행되면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건물을 짓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규모의 건물을 확장 건립하겠다고 했고, 그럴 경우 우리도 프로그램을 확대해서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작은 엔지오가 감당해야 할 부담에 마음이 무거웠으나 목표가 더 명료하게 드러난 이상 보다 전문적으로 사업을 꾸려 나가야 하는 의지가 굳어졌다.

카불로 돌아 온 다음 날 ‘분쟁방지센터’라는 일본인들이 하는 엔지오를 방문했다. 두 시간여에 걸친 대담을 하면서 정말 부끄러웠다. 그들은 무자히딘 전사들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는 군벌들을 만나 무장해제를 하고 그 전사들을 사회로 통합시켜 재사회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전사들을 한데 모아 직업 훈련을 시키고 그 훈련원에서 만든 제품들을 마을에 공급하고 또 마을 사람들과 서로 만나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주선하여 자신들 스스로 화해를 하고 그 화해 위에서 주체적으로 과거를 청산하게끔 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역사학자로서 바로 이것이야 말로 과거 청산의 가장 좋은 방편임을 깨달았다. 내전 중 무자히딘 전사들은 마을에서 악명을 떨쳤고 살인과 강간 등과 같은 악질적 범행을 수도 없이 자행하였다. 그렇지만 그들 또한 역사의 희생자이고,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안고 가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었다. 역사의 의미는 실천 속에서만 있다는 요즘의 내 화두를 직접 목격하는 것에 다소 흥분되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실천의 사역이 물질 속에서 주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직업 훈련을 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물질 구조를 공동체가 공유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엔지오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었다. 역사학자 개인으로서 가슴 벅찬 만남이었다.

다시 돌아 온 카불. 카불은 움직이고 있었다. 인터넷 까페에 놀랐고, 중국 음식점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놀랬다가 그 옆 자리에 아가씨가 시중드는 모습에 더 놀랐다. 지금 이라크는 포르노가 범람하고, 성범죄가 만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 곳 모두 정부가 사회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프가니스탄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또 밀려들었다. 보수적인 아프간 사람들 눈에 이런 모습들에 얼마나 가슴이 상할까를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이러다가 또 다시 보수 반동의 광풍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노심초사하는 내 모습에 나도 놀라면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혹여 일로 인해 내가 이러는 것은 아닐까, 과연 나는 평화 인권 활동가로 이렇게 노심초사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하는 사업이 성공리에 잘 마무리되어 나도 뭔가 이바지하는 일이 있어야 할 텐데 하는 소리(小利)의 욕(慾)으로 인해서 일까. 얼치기 활동가의 착잡한 마음에 또 하루가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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