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_아프간,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땅(정정수)

정정수(아시아평화인권연대 사무국장)

아시아평화인권연대를 발족하고 그 첫사업은 전쟁의 비참함과 비인간성, 난민생활의 참혹함을 일깨우는 ‘사진전’이었다. 아프간 난민캠프를 가기 이전, 이미 난민캠프의 사람들과 그 일상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지만 막상 캠프로 떠나게 되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동안의 지원이 어떠한 결실을 맺었는지, 어떻게 보탬이 되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일을 담당한 실무자에게 큰 의미였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파병결정을 앞둔 시점에 이슬람 국가를 방문한다는 것에 많은 분들이 염려하셨고 여행의 당사자들 또한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아프간 난민캠프 어린이학교를 지원해주셨던 개인 후원자들, 학교를 후원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주신 가톨릭 부산교구,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 제작된 버튼과 엽서, 머그컵을 구입해주신 많은 분들의 정성을 모아 전하겠다는 의지를 꺾기에는 불안과 걱정은 잠시였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의 처지에서는 지난 2년간의 성과를 둘러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 난민캠프 방문은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만날 많은 이들에게 이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 방문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 있어서도 의미깊은 것이 되었다.

방콕에서 하루를 머문 후, 라호르 신공항에 도착한 것은 14일 오후 2시 30분이었다. 간단한 검색을 마치고 공항대합실로 나왔을 때 우리 일행을 반긴 것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생활하다 본국으로 귀환한 이주노동자 친구들이었다.
귀국전 패혈증과 천식으로 고생했던 부따씨는 구리빛으로 그을린 건강한 얼굴에 멋진 콧수염을 기르고 나타났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소헬은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듬직했고,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난 나임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두 친구가 일하다가 공항까지 마중나온 이유는 인권모임의 친구들이 방문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열일을 제쳐두고 마중을 나온 친구들에게 사무실에서 준비해간 작은 선물들을 전하고 이내 페샤와르로 가는 길에 올랐다. 방콕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연착되면서 예상도착시간보다 늦어졌고, 공항에서 4시간이나 기다렸다는 부따씨와 회포를 풀지도 못한 채 헤어져야 했다.
전년에 이어 올해에도 PTDC의 차량을 이용하여 페샤와르로 이동하였다. 일행을 페샤와르로 데려다줄 20년은 되었음직한 낡은 지프차에서는 연신 기름이 새고 있었다. 이동하는 동안 먹을 식수와 과일을 구입하려 잠시 정차했을 때, 낯선 외국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선량한 파키스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봄날같은 따스한 날씨에 가져간 두꺼운 외투를 벗고 반팔차림으로 돌아다녔는데 그들에겐 이조차 낯설고 이상하게 보였던가 보다. 쉽게 말을 건네지도 못하던 그들은 차가 출발하려하자 그제서야 “Hi” “Hello” 인사를 건넨다.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든 후 다시 페샤와르로 향했다. 오후 3시 무렵 라호르 공항을 출발했던 차량은 밤 11시 20분이 되어서야 페샤와르의 숙소, 로즈호텔에 도착하였다.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내일부터 해야할 일들을 되짚어보다 잠이 들었다.
이번 방문단은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이신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님, 운영위원이신 민주공원 이숙희 부장님, 그리고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나 이렇게 세 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방문은 무엇보다 지난 2년 동안의 지원 성과를 확인하고 처음에 약속했던 3년간의 지원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앞으로 아프간 난민캠프 지원사업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기획되었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1월 15일 목요일)

파키스탄에서의 공식일정은 국경변 난민캠프 방문 허가서를 얻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한국에서 방문계획을 전하고 협조를 부탁해두었던 터라 UNHCR 담당자들과의 면담은 그저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난민캠프의 학교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현지 NGO인 BEST의 대표 하미쉬 칸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BEST와 UNHCR 사무실에 들러 현지에서의 일정과 계획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오후에는 샴샤두 캠프를 방문하였다.
샴샤두 캠프 방문은 지역 경찰이 호위하는 가운데 이루어졌고, 하미쉬 칸이 동행하였다. 1999년 12월 새로 지어진 이 캠프에는 최고 53,000 여명이 거주하던 때도 있었으나 현재는 4,598 가구 26,595명만이 거주하고 있다. 캠프에 거주하던 많은 아프간 난민들은 2002년 3월부터 시작된 UNHCR의 귀환정책에 따라 본국으로 귀환하고 있는 상황이다. 캠프내의 직업훈련학교는 아프간 난민들을 위한 직업기술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남성들에게는 신발, 철제가구, 나무 창틀 제작 기술을 가르치고, 여성들에게는 카펫직조, 양재, 자수 등의 교육을 실시한다고 한다. 직업학교에는 어린 아기들을 위한 탁아방도 있었다. 점심시간에 방문한 터라 훈련생도, 훈련모습도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은 컸다.
캠프의 난민들을 위한 의료시설, BHU(Basic Health Unit)는 굳게 문이 잠겨 있었다. 난민수가 줄면서 진료도 오전에만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앞에서 바라본 캠프 전경은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캠프 곳곳에서는 버려진 흙집과 벽의 일부만 남은 집의 잔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고향의 치안이 어지럽고 기반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고 해도 그 모든 상황들을 무릅쓰고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국경변 난민캠프에서(1월 16일~17일)

16일 새벽, 숙소를 나와 국경변 난민캠프로 향했다. 캠프로 가는 두 가지 길 가운데 긴 노정으로 가는 것만이 허락되었고 7시간 반을 달려 겨우 바주르 에이전시의 바르깔리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키스탄 경찰과 tribal area 경찰의 이중경호를 받으며 가는 길은 약간은 두렵기도 했지만 아무 걱정 말라는 하미쉬 칸의 말을 믿을 수 밖에.
바르깔리 캠프의 입구에는 인권모임이 난민캠프의 어린이학교 설립를 지원하였다는 입간판이 세워져있었다. 캠프로 들어서자 아이들의 작은 놀이터가 시선을 끌었다. 그네, 미끄럼틀을 타고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안도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누런 흙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삭막한 풍경 속에서 그래도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웃음소리가 흘러나와서이겠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천막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난민들은 문도 없는 작은 흙집에서 전기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건설된 학교건물들을 돌아보았다. 방문단은 셋이었지만 100여명의 어린이들이 우리와 함께 움직였다. 흙으로 만들어진 교실에는 덩그러니 칠판만 걸려 있고 그마저도 낡고 부서진 것이었다. 캠프에 있는 총 4곳의 어린이 기초학교 가운데 3곳은 이미 흙과 벽돌로 신축되었고 마지막 학교만 천막학교의 형태로 남아 있다. 천막학교 앞에 간이 식탁이 차려지고 음료수와 사탕, 비스켓을 담은 접시가 나왔다. 천막학교 교장선생님께서는 이 마지막 천막학교도 흙으로 새로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난민캠프 내에 새로 건설되고 있는 병원을 둘러보았다. 아프간 의사 2명이 진료를 담당한다는 이 곳에는 진료실과 입원실 등이 새롭게 마련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정부가 보내준 구급차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다. 이곳 바르깔리 캠프에 2대, 페샤와르에 4대의 구급차가 지원되었다고 한다.
난민캠프가 있는 국경변은 무척 추웠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어린이들의 건강이 크게 염려되는 상황이다. 난민캠프에 부족한 것이 어디 전기뿐이랴. 캠프에 만들어진 공동 우물에서 마실 물은 겨우 해결된다 해도 몸을 씻기에는 태부족일 테지.
우리가 한 일은 그저 학교건물을 지어주는 것에 불과했고 그나마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어린이들을 위해 작으나마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학교에서 배운 짧은 영어로 말을 건네는 어린이들은 한국의 장난꾸러기 어린이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모든 어린이들은 방문단에게 3가지 질문을 던졌다. “Can you speak English?” “What is your name?” “How old are you?”.
아시아평화인권연대가 학교 건물을 짓고 나면, UNHCR에서 건물의 유지,보수와 관련한 비용을 지원한다고 했다. 또 세계 여러 NGO에서 어린이들의 교과서와 교사들의 월급을 지원하고 있었다.

꼬뜨까이 캠프에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tribal area로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를 호위해주던 경찰들은 6시까지만 호위업무를 담당하기로 되어 있어서 서둘러 캠프를 둘러볼 수 밖에 없었다. 인권모임의 지원으로 지어진 작은 도서관은 이후 다른 기부자에 의해 책과 자료를 공급받고 있다고 한다. 지나치게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도서관의 상태는 오히려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방한다는 말을 믿어야 하겠지만 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수송창고 때문에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게 했다.
캠프 부근의 작은 숙소에서 그날밤을 보내었다. 정전으로 어두컴컴해진 숙소로 캠프 관계자들이 방문하였다. 아프간 난민의 상황과 문제점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으나 피로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식사도 거른 채 일찍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자리를 함께 한 이광수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그날의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난민정책은 귀환 위주로 전환되었고 2002년 3월부터 귀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페샤와르내의 올드 캠프(까차가르 등)는 거의 소개되고 일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05년까지 난민캠프를 운영할 것을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양국정부에서 합의한 바 있으나 카르자이 아프간 국가 수반이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당분간 더 지속시켜 줄 것을 요청한 상태이다. 아프간 난민들의 아프간으로의 귀환은 대세이지만 아프간 현지에는 일할 곳도 치안도 사회적인 기반도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라 난민들의 귀환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UNHCR이 아프간 난민지원 사업예산을 삭감하면서 샴샤두 캠프의 장애인 기술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직업기술학교의 지원이 중단되었다. 직업기술학교의 필요성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으며 이의 설립은 난민캠프가 아닌 아프간 본국이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였다.

PMS 방문(1월 17일 토요일)
캠프에서 다시 페샤와르로 들어와 그곳에서 의료활동을 벌이고 있는 일본 NGO를 방문하였다. PMS(Peshawar-kai(Japanese) Medical Services Hospital)는 나병환자를 중심으로 진료활동을 펼치는 의료전문 NGO Peshawar-kai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며 아프간 난민 뿐 아니라 파키스탄 사람들 역시 돌보고 있었다. 지금의 번듯한 새 병원건물은 지난 1998년 건립되었다고 한다. 무정치, 무종교, 무급여의 세 가지 원칙을 갖고 운영하고 있고, Peshawar-kai의 대표인 나카무라씨는 일본내에서 다양한 강좌를 통해 활동을 소개하고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일본에 10,000여명의 회원이 3,000엔씩을 회비로 납부하고 있어 현재의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일행에게 많은 설명을 해준 후지타씨는 간호사로서 12년째 그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Peshawar-kai는 페샤와르 뿐 아니라 아프간 본국에도 세 곳에 사무소를 두고 의료지원 사업과 함께 우물 만들기, 농업기술을 함께 교육하고 있다. 의료진에 대한 교육은 PMS에서 교육, 훈련시킨 후 다시 현지로 파견하는 방식을 사용하며 아프간 의사를 고용하여 진료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지불되는 임금은 의사에게는 월 15,000루피, 그 외 의료진(진료 보조, 조제 등 업무 담당)에게 월 15,000루피 정도라고 한다. 현지에서 일하는 일본인 스탭들은 1개월 일하고 난 후에는 다시 페샤와르에서 1개월 일하게 하는 순환근무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아프간 본국지원을 시작했을 초기에는 의료활동과 물품을 배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많은 이들이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해 설사로 사망하는 모습을 보고 우물을 만들어주고 농사기술을 스스로 익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 일본에서 일흔이 넘은 농업전문가가 1년에 몇차례씩 현지를 직접 방문하거나 혹은 페샤와르에서 농사법을 가르치거나 스탭들을 교육시켜 안정적인 농사가 가능하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방문 당시 병원에는 일본인 스탭 8명과 파키스탄 스탭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Peshawar-kai에서는 난민캠프 지원은 사람들을 의존적으로 만들 뿐 자립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고 그래서 현지를 지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페샤와르에는 원래 일본 NGO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두 곳이었다고 한다. 지난번 정귀순 대표님께서 방문하셨던 병원은 일본의 JIFF가 설립한 병원이었고 이 병원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로 옮겼다고 한다. 현지 지원이 더 필요하고 긴급해서이기도 하지만 세금 문제로 파키스탄 정부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철저히 아프간 사람들만 고용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있지만 이들이 파키스탄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Peshawar-kai의 경우에는 병원 직원의 50% 정도가 파키스탄인이어서 세금을 납부하고 있어 이런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방구 구입 및 전달(1월 17일)
아프간 난민캠프로 떠나는 방문단에게 가톨릭 부산교구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학용품을 대신 구입해서 전달해 주었으면 하는 의사를 전했다. 방문단은 BEST 대표 등과 함께 문방구점을 방문하여 3,000불의 예산 범위 내에서 난민캠프의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색연필, 연필, 지우개, 칼, 공책, 스케치북 등과 교실 운영에 필요한 분필, 출석부 등을 구입하여 대금을 지불하였다. 다른 상점보다 유난히 북적이던 그곳은 중국으로부터 밀수한 문방구를 판매하는 곳이었고 우리가 구입해준 물품 역시 모두 MADE IN CHINA였다. 문방구 구입을 마친 후 숙소 근처 시장에서 아프간 어린이들의 의복을 구입하였다.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아프간 난민캠프의 어린이들을 소개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아프간 난민캠프의 어린이들을 위하여(1월 17일)
늦은 밤, 다시 BEST사무실에서 회의를 시작하였다. 그동안의 진행상황에 대한 보고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의견을 조율하는 시간이다. BEST에서는 지난번 지원금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밝히는 상세한 내역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현지 물가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는 무용지물이란 생각이 든 것 또한 사실이다.
방문단은 올해가 약속했던 3년째이고 어느 부분에 지원할 것인가에 대해 결정한 바가 없음을 미리 밝혔다. BEST는 우리의 지원이 필요한 부분을 크게 두 부분으로 얘기하였다. 하나는 바르깔리 캠프의 마지막 남은 천막학교를 흙과 벽돌로 새로 신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르깔리의 기초학교 4곳을 모두 인권모임과 아시아평화인권연대의 이름으로 짓게 된다. 다음 하나는 UNHCR의 예산삭감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기술학교를 지원하는 것이다. 방문단은 각각의 필요예산과 우리가 지원하기를 바라는 액수를 자세한 계획과 함께 메일로 알려주기를 부탁했다. 메일로 보내온 내용을 바탕으로 본국으로 돌아가 의논후에 결정된 지원금을 송금하기로 한 것이다. BEST는 우리가 좀더 기술학교 지원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라는 듯한 인상이었고 이와 관련한 자료를 준비하여 방문단에게 건넸다.
우리는 돈을 내고 BEST는 그 돈으로 사업을 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심사숙고하고 더 많은 일들을 함께 제대로 할 수 있을 듯 한데 지금과 같이 1년에 한번씩 점검하는 상황에서는 제한적인 일들, 그것도 BEST에서 제안하는 수준 이상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앞으로 BEST가 발행하는 소식지를 이메일로 발송해주는 것을 포함해서 자주 연락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난민캠프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파키스탄은 이른 봄날처럼 따뜻했고 들에는 파아란 새싹이 돋아나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난민캠프에는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프간으로 돌아간 난민수가 많다고 하나 여전히 파키스탄에는 100만명이 남는 난민이 살고 있다. 우리의 도움을 받는 이는 그 중에서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상심하기도 했다. 조금더 우리들의 지원규모와 활동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한국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할 것이다. 어떻게 한국사람들을 설득하고 지원을 이끌어낼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