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귀순, 부산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이라던 미국의 세계무역센타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폭삭 내려앉은 9.11사건이 난지 꼭 1년이 되는 날, 나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접경지의 아프간 난민캠프에 있었다. 각국 TV 채널에서는 하루 종일 미국의 슬픔과 비장함을 장황하게 방송하고 있었지만, '보복'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테러로, 폐허가 된 집과 고향을 떠나 1년째 구호물자로 연명하고 있는 아프간 난민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9.11 테러사건 1주년을 맞아 UN사무실을 비롯한 난민관련 모든 NGO들이 휴뮤에 들어가 공식 안전요원 없이 난민캠프 방문을 강행하자 UN고등난민판무관 사무실에서는 나에게 신의 가호를 빌어주었다. '인샬라' 그렇게 밝음과 어두움이 곧 진실과 거짓으로 일치하지 않는 현실에서 나는 늘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않는 진실의 편에 서 있고 싶었다.
지난 3월 아프간 난민캠프를 처음 다녀온 후, 마구 버려지는 음식과 철지난 옷들, 흥청망청한 생활들이 죄악처럼 느껴졌다. 인간 이하의 삶을 살면서도 맑은 웃음과 눈동자를 가진 아프간 어린이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작은 희망을 주자는 얘기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고, 또 정신적으로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한국에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데, 남의 나라 사람들까지 돌볼 필요가 있는냐”는 반문을 하신 분도 있었다. 그러나 과연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데 가까이서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는 거리감은 존재할 수 있지만, 국적과 인종에 따른 차이가 있을까? 오히려 나의 고민은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이지만,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선선히 시작할 용기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된다. 다가올 겨울을 걱정하면서도 먼 곳에서 찾아온 외국인 손님에게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어하는 마음 따뜻한 난민 가족들의 찢어진 텐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질 것만같다.
◑ 다시 아프간 난민캠프로
지난 3월 아프간 난민캠프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난민촌에 살고 있는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안겨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시작한 “아프간 어린이에게 희망을”이라는 작은 사업으로 6월과 7월 사이에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물자들과 기금을 모았다. 어린이옷과 학용품, 생필품 등의 물자는 부산가톨릭교구와 JTS(Joint Together Society), 기회의 학숙, 양산효암고등학교학생회, (주)문화연필에서 후원을 해 주셔서 7월 27일 20feet 컨테이너에 실어 부산항에서 난민캠프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부산가톨릭교구, 기회의 학숙, 양산효암고등학교학생회, 이주여성인권연대, 동아대 정정수교수님과 사회학과 학생들 그리고 뜻을 함께 해주신 개인 분들 (윤경일님, 조현장님…)이 모아주신 기금 7,000$ (한화 8,484,210원)은 난민캠프 어린이들의 학교를 지원하기로 다.(학교지원은 일회로 끝나지 않고 최소한 2년 이상 지원하기로 했다) 따라서 이번 난민캠프 방문은 배편에 실어보낸 물자들의 전달을 확인하고, 난민캠프 어린이학교 운영을 위한 작은 지원금 전달을 위한 방문인 셈이었다.
간밤에 날씨가 흐려 혹시 인천공항에 짙은 안개로 지난번처럼 출발시간을 맞추지 못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부산의 흐린 날씨와는 달리 인천공항의 쾌청하게 맑은 날씨 덕분에 이번에는 넉넉하게 공항에서 출발을 기다릴 수 있었다. 아침 10시 15분 한국을 떠나 5시간 반 후인 오후 1시 50분(태국은 한국보다 2시간이 늦다)에 방콕에 도착했고, 저녁 8시 파키스탄 라호르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덥고 습한방콕공항에서 기다려야 했다.
지난 2월 라호르로 가기 위해 대합실에서 기다릴 때는 미국의 아프간에 대한 공습이 계속되고 있었고, 홍콩 포스트지 펄기자의 살해소식 등으로 느껴졌던긴장감과 썰렁함과는 달리 이번에는 탑승을 기다리는 여행객 차림의 외국인도 많았고, 좌석도 거의 다 차는 등 파키스탄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비행기는 방콕을 출발하여 4시간 반 후인 밤 11시 40분(파키스탄은 태국보다 1시간이 늦다)에 라호르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아미드와 소헬이 마중 나와 있어 6개월만에 만난 파키스탄 친구들과 얼싸안았다. 그러나 인도에서 국경을 넘어 저녁 6시경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미란 일행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한국 시간은 이미 새벽 3시를 넘겼지만 한국으로 전화하니, 민정왈 파키스탄 국경에서 입국비자가 없다며 미란 일행은 파키스탄 입국을 거부당해 인도로 돌아갔으며, 비자를 받으려면 델리로 나가 월요일에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인샬라!) 어쨌거나 이 곳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각 자의 길을 가는 수밖에 없어, 예약한 호텔로 옮겨 아미드와 소헬과 함께 오랜만에 얘기를 나누었다. 소헬은 1주일 전에 두 번째 아기가 태어나 몹시 기뻐했지만, 한달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픈 일과 기쁜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아미드는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이제 온전한 파키스탄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파키스탄에서의 첫날은흘렀다.
◑ 사막의 땅 퀘타로
이튿날 다시 퀘타로 가기 위해 라호르공항을 떠났다. 라호르에서 국경변 도시 퀘타까지는 기차로 26시간이나 소요되고, 이번 여행은 시간이 부족하여 별수 없이 너무도 비싼 (4,190루피≒80,000원) 비행기를 타야했다. 기차로 26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비행기로는 단 1시간 반만인 오후 4시 반에 퀘타에 도착했다. 기차여행은 시간이 많이 걸려 피곤하긴 하지만, 평범한 파키스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고, 친구를 사귈 수 있어 좋지만, 비행여행은 시간을 줄일 수 있어 편리한 반면 친구를사귈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파키스탄은 크게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쪽으로 펀잡지방과 NWFP(북서부전선지방), 남쪽으로는 신디지방과 발로치스탄이다. 그 중 발로치스탄은 80% 이상이 사막으로 가장 넓은 지역이지만,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이기도 하다. 발로치스탄의 수도 퀘타로 가는 동안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지역은 오래 전에 지진으로 바다 밑이 솟아올라온 지질학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지역으로 아래의 풍경은 땅이 아니라 바다 밑의 풍경을 온전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온 천지가 노랗고, 붉고 또는 검은흙으로 뒤덮여 있으며 물결의 흐름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아주 인상적인 자연을 만날 수 있다.
퀘타에 도착해서는 지난번에 묵었던, 싸고 친절했던 호텔로 다시 찾아가니 매니저와 직원들이 '그 동안 잘 지냈냐, 반갑다며' 모두 반갑게 맞아주었다. 퀘타를 방문한 한국인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다들 기억하고 있었다. 막 짐을 풀자 퀘타에서 아프간 난민지원활동을 하고 있는 NGO, GMWC(Global Movement for Women & Children)의 Mahira와 Qamal 그리고 Karim이 찾아와 함께 그들의 사무실로갔다.
지난 3월 방문 이후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프간난민촌 아이들의 학교사업이 제대로 진척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는데, 다행히 GMWC는 지난 방문 때보다 훨씬 활발하게 난민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고 있었다. UNHCR의 지원 아래 차만지역 내 5개 난민캠프에 식량과 구호물자 지원사업(Food and non-food distribution)을 하고 있었고, 퀘타 시내의 오래된 난민들을 위한 어린이 학교와 의료사업을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확장된 사업 때문에 너무 바빠 연락을 제대로취하기 어려웠다니 오히려 훨씬 마음이 놓였다.
지난 방문 때는 불행히도 파키스탄의 연휴로 난민캠프 방문허가서를 받지 못해 차만지역의 난민캠프를 방문할 수 없었고, 이번에도 토요일과 일요일이 끼어 차만캠프의 방문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GMWC의 스텝들이 뜻밖에 허가서(NOC-Non Object Certification)없이 함께 캠프를 방문하자고 제안하여 흔쾌히 동의했다. 대신 외국인임이 드러나지 않게 파키스탄 여인들이 쓰는 쇼울을 두르기로 하고 오는길에 시장에서 멋진 쇼울을 샀다.
◑ 차만캠프로
이튿날 아침 7시, GMWC의 스텝들과 함께 차만으로 출발했다.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약 3시간 30분만에 차만(Chaman)내 GMWC의 연락사무실에 도착했다. 차만은 'shining place'(아름다운 곳) 혹은 'garden'(정원)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1년 강수량이 6인치(약 15mm)에 불과한 혹독한 사막지역에 그런 이름이 부쳐진 것은 아마 이 지역 사람들의 바램을 담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차만에는 DarraⅠ, DarraⅡ, Killi Faizo, Landi Karaz, Roagni 모두 5개의 난민캠프에 약 100,000명의 난민들이 체류하고 있다. 5개의 캠프 중 Killi Faizo, Landi Karaz, Roagni 3개의 캠프를 돌아보았다. 란디카라즈 캠프에는 약 2,300가족(20,000명)이 체류 중이고, 로가니 캠프에는 약 3,000가족(18,100명)이 체류 중이다. 바로 아프간과 국경초소가 있는 킬리파이조는 Waiting Place라고 불리며 국경을 넘은 난민들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잠시 머물다 다시 아프간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른 캠프로 옮겨가는 임시 캠프라고 한다. 현재 킬리파이조에머물고 있는 난민들은 약 23,000명 정도였다.
온 천지가 노란 흙먼지로 뒤덮여 있는 난민촌은 황량하기만 했다. 란디카라즈 캠프 내 천막학교를 방문했을 때, 일요일인데도 아이들은 수업 중이었다. 외국손님이 온 것에 아이들이 고무되어 선생님이 한 아이를 지명하자 불과 6살 정도의 아이가 일어나 코란을 능숙하게 선창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제비처럼 입을 모아 따라하고, 한 아이가 끝나자 다른 아이들이 서로 일어나 해보려는 적극성을 보여 선생님과 아이들의 열의가 아주 돋보였다. 난민들에게 식량과 담요, 주방세트를 제공하고 있는 GMWC는 식량들이 제 때 도착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며, 캠프 담당자들의 월급도 아직 지불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차만지역 난민들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조직된 것은 불과 6개월 정도에 불과하여, 모든 것이 부족해보였다.
난민캠프를 다 둘러본 후, 다시 퀘타의 GMWC 사무실로 돌아왔다. GMWC의 사업은 지난 3월 의논했던 오래된 난민캠프 아이들의 학교사업보다는 국경 변의 난민캠프 지원활동에 훨씬 많은 비중을 두고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UNHCR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상태여서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아이들의 학교운영을 위한 지원은 이미 지원하고 있는 하나의 학교만 지원하는 것으로 하고 1,000$을 전달했다. 그리고 어렵게 난민캠프 방문을 도와준 GMWC의 스텝들에게 감사하고,헤어졌다.
◑ 고도(古都) 폐샤와르로
불과 3일 머무는 동안 너무 건조하고 흙먼지 때문에 내내 눈이 따갑고 목이 아파 힘들었던 퀘타를 떠나 폐샤와르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퀘타공항을 출발한 지 1시간 10분 후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도착하자, 폐샤와르 PTDC office의 요나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 요나스와 함께 NWFP의 수도이자 파키스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인 폐샤와르로 향했다. 밤 8시경 도착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을 쓰기 위해 호텔 앞의 인터넷카페를 찾았으나, 1시간동안 연결만 시도하다 결국 실패하고 돌아와야 했다. 한국만큼 컴퓨터와 인터넷 시설이잘 된 곳이 있을까?
다음날 UNHCR 페샤와르 사무실을 방문하자 그 동안 난민캠프의 물자지원으로 이미 여러 차례 연락을 해왔던 선임담당자 모하마드 니사르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지난 7월 27일 부산항을 출발했던 구호물자들이 불과 이틀 전에 국경변 바주르캠프에 도착했으며, 내가 난민캠프를 방문하는 날부터 물자를 배분하기로 했다고 했다. 아울러 우리가 난민캠프의 학교지원에 작은 기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자, 바주르캠프의 난민촌 학교운영을 맡고 있는 NGO인 Best(Basic Education & Employable Skill Training)의 담당자를 만나게 해 주었다. Best의 Logistic Manager인 Major Zilla씨로부터 바주르캠프 내에서 진행 중인 학교운영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는 군인 출신답게 절도 있는 태도로 브리핑을 해주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는 이튿날 9월 11일은 9.11 테러사건의 1주년을 맞아 UN사무실을 비롯하여 정부 기관이 이틀간 모두 휴무여서, 국경변의 캠프 방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의논 끝에 11일은 UNHCR의 안내가 필요치 않는 폐샤와르 근교의 오래된 난민캠프 샴샤두캠프를 방문하기로 하고, 다음 날 12일은 약간의 보안문제가 있긴 하지만 UNHCR 직원이 바주르캠프로 안내하기로 했다. 그러나안전은 책임질 수 없다며, 신의 가호를 빈다고 했다.
UNHCR 사무실을 나와 Major Zilla씨의 안내로 Best 사무실을 방문했다. Best는 조직된 지 6∼7개월밖에 되지 않은 폐샤와르지역의 NGO로 교육 전문단체이다. 현재는 UNICEF의 지원으로 바주르 캠프내 학교운영을 맡고 있었다. 담당자들과 캠프 내 학교운영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바주르캠프에 다녀온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곧 샴샤두방문 허가를 받기 위해 Chief Commissionary office of Afghan Refugee in Peshawar를 방문했는데, 허가 담당자는 지난 번 허가서를 낼 때와는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져 반갑게 맞아주었고, 금방 허가증을 내 주었다. 난민캠프 방문을 위한 절차를 마친 뒤, PTDC office에 가서 폐샤와르에서의 전체일정을 의논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쳤다.
◑ 샴샤두캠프
폐샤와르 시내에서 약 1시간 반정도의 거리에 있는 샴샤두캠프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 직후인 1980년에 세워진 캠프로 1995년 이후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지원이 완전히 끊어진 후 대부분의 난민들이 캠프를 떠났다가, 탈레반 정권이 집권한 후 격렬해진 내전으로 다시 국경을 넘어온 난민들을 위해 1999년 12월에 다시 세워진올드캠프 중 하나이다.
6개월만에 다시 방문한 샴샤두캠프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이십 여명의 난민들이 무슨 일인지 사무실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한참을 웅성대다 돌아가고 난 뒤 물어보니, 캠프 내 치안경찰이 한 난민이 팔고 있는 채소를 값도 치르지 않고 가져가려는 것을 그가 거절하여 실랑이가 벌어졌고, 치안경찰의 횡포에 분개한 주변 난민들이 그 경찰을 징계해 달라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난민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을 보면 그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 더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어디나, 설사 그곳이 UN의 지원으로 살아가는 난민캠프에서 조차 관료들의 뻔뻔함과 비리가존재함을 보면서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샴샤두캠프는 전체 4개의 섹션으로 나뉘어져 있고 현재 3,333가족(약 20,000명)이 체류 중이다. 지난 3월 방문했을 때 약 5만 명의 난민이 체류 중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50% 정도의 난민들이 아프간으로 돌아간 셈이다. 캠프 안을 돌아보니 진흙을 으깨 지은 집들 중 빈집들도 꽤 많이 생겨있고, 다소 적막감이 들었다. 어쨋거나 난민들이 고향으로 많이 돌아간 것은 좋은 현상이다.
캠프 내 병원(보건소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을 돌아보았는데, 여성환자들이 줄을 쭉 서 있었다. 이 병원은 하루 50∼60명의 환자들이 찾고 있으며 1주일 중 4일은 여성환자들을 보고, 2일은 남성환자들을 보는 것으로 정해 두었다고 했다. 좀 특징적인 것은 모든 환자는 진료접수 후 교육실에 모여 건강에 관한 기초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을 담당 의사 역시 아프간 여성인데, 그는 처음에는 환자들을 교육에 참여시키는 것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아프간으로 돌아간 뒤에도 가족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얘기했다. 대기하는 환자 중에 3살 정도인 한 아이는 한쪽 눈이 실명한 상태였고, 지뢰에 다리를 잃은 사람도 둘이나 있었다.
병원을 나와 학교를 찾았는데, 아주 새로운 모습이었다. 말하자면 기술학교인 셈인데, 학교 안은 수업을 받는 교실과 기술을 배우는 마당으로 나뉘어져 있고,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계산법(산수)를 배우고 있었다. 마당에는 신발을 만들거나, 나무를 잘라 의자나 책상을 만들거나, 양철을 다듬어 양동이나 물통을 만들거나, 진흙을 으깨 벽돌을 쌓는 등 간단한 기술을 가르치는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여학생들의 학교 역시 한 쪽에는 수업이 진행 중이고 마당에는 재봉틀을 배워 옷이나 가방을 만들거나 카펫 짜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수업은오전과 오후 두 반으로 나누어 오전에 일반수업을 받은 학생들은 오후에 기술교육을, 오전에 기술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오후에 일반수업을 받는 것으로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내에서 난민으로 살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간단한 기술을 배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기술학교 수업을 하기에 너무 어린 4살부터 12∼13세 아이들은 그옆의 학교에서 기초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6개월 전에 방문했을 때 보지 못한 새로운 학교교육시스템은 아랍 쪽의 지원으로 시작된 지 4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기초과정을 담당하는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아프간난민출신으로 파키스탄에 온지 16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학교에 10명의 선생님이 필요한데, 현재 5명의 선생님밖에 없어, 5명의 선생님을 요청해 두었지만 답변이 없다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에서 선생님의 월급은 월 4,000루피(80,000원 정도)인데, 난민캠프의 선생님들은 월 2,000루피(40,000원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 일행에게 맛난 차도 끓여준 교장선생은 아이들이 만든 작은 가방을 선물로 주었다. 알록달록한 예쁜 가방을 안고 난민캠프를 떠났다. 그는 언제쯤 고향으로돌아갈 수 있을지…
◑ 바주르캠프에서
다음날 아침, 한국에서 보낸 물자들이 도착해 있는 바주르캠프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왕복 7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여서, 아침 7시 UN사무실에서 안내를 담당한 Mariam과 함께 국경 변의 바주르캠프를 향해 출발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 변에는 파키스탄 영토이지만,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구역, Tribal Area가 있다. 이 지역은 치안이 취약하고 마약과 무기밀매가 성행하는 지역으로 경찰의 허가서와 동행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다. Tribal Area에는 Bajuar Agency, Kybul Agency, Koram Agency 이렇게 세 개의 지역이 있고 각 각 독립된 관할통치권이 주어져 있다. Bajuar camp로 가는 길에는 체크 포인트가 모두 셋인데, 세 번의 점검이 있었고, 호위 경찰 역시 세번 바뀌었다.
산해(山海)라는 표현이 적절한 깊은 계곡을 지나면, 산아래 탁 트인 평지에 난민캠프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3월에 왔을 때는 하얗게 빼곡이 늘어서 있는 텐트들이 이제는 흙과 먼지를 뒤집어써 노란 텐트로 바뀌어 있었고, 군데군데 진흙으로 담벼락을 세워놓고 작은 풀들도 심은 곳이 있어, 난민들의 지친 마음과 그 지친 마음을 달래보려는 애씀의 흔적을 읽게 해 주었다.
바주르캠프는 지난해 10월 미국의 공습이 있은 직후 세워져 현재 약 4만2천명의 난민에 체류 중이다. 캠프는 크게 KotkaiⅠ, KotkaiⅡ와 올 2월에 세워진 Bar Kalay camp 세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Bajuar camp 역시 지난 3월 이후 귀향프로그램의 실시로 약 40%의 난민들이 아프간으로 돌아가 귀향프로그램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편이었다. 그러나 벌써 밤에는 추위가 느껴지는 산악지역인 만큼 아무 것도 없이 겨울을 날 수가 없기 때문에 난민들이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 것이어서 내년 봄까지는 난민의 수가 크게 줄지 않을 것이라고한다.
캠프담당자들과 함께 지원물품의 배분을 위해 바클리 캠프로 갔다. 조그만 텐트에 빼곡이 앉아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 공부하랴, 방문객 구경하느라 바빴다. 나무그늘 하나 없이 내려 쬐는 태양 아래 작은 텐트는 너무 덥고 어두웠다. 그렇다고 햇볕이 내려 쬐는 밖에서 공부할 수도 없으니 결국 텐트 안에서 오글오글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비오고 바람불어 텐트가 여러 번 날아가는 바람에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이 오기 전에 진흙으로 학교를 지을 계획이라고했다.
간단하게 물품들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돌아 나오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던 한 선생님이 멀리까지 따라와 눈이 안보이고, 다리가 없고, 팔이 없고, 귀가 안 들리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명단을 주며 도와달라고 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그 어떤 것도 괜찮다고 했다. 옷도, 신발도, 학용품도, 혹은 의안이나 보청기, 의수나 의족 등 모든 것이 다 필요하기때문이란다. 그 아이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다고 했다.
주변을 서성이던 한 아이를 따라 들어간 텐트에서 만난 부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우선 한 달에 한 번 식량을 배급하지만, 양이 부족해서 23일이나 24일 지나면 바닥이 나버리고, 돈이 있어야 채소라도 사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돈을 벌 수가 없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물었더니, 곧 겨울인데 지금은 갈 수 없다고 했고, 담요가 없어 춥다고 했다. 그의 아내도 파슈툰어로 열심히 하소연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오려니 그의 아내가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붙들었지만 사양하자 아몬드를 한웅큼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따뜻하던지…
돌아가야 할 시간 때문에 충분히 둘러보지도 못하고 다시 캠프를 떠나야 했다. 캠프 담당자들은 언제 또 올 것인지를 물었다. 아이들의 유니폼이 필요하다던 캠프 담당자의 그 말 때문에, 비참한 생활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 때문에 다시 난민캠프를 방문했지만, 언제 다시 그 캠프에 갈 수 있을지 약속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안고 바주르캠프를 떠나 몹시 지친 몸을이끌고 다시 폐샤와르로 돌아왔다.
◑ 난민촌의 학교운영을 위해 BEST를 지원하기로
페샤와르에서 마지막 날 아침, 남은 일을 위해 UNHCR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방문한 탓에 한참을 기다려 담당자인 니사르씨를 만날 수 있었다. 바주르캠프 방문을 도와 준 것에 감사드리고, 바주르캠프의 학교 지원을 위해 모은 가금 6,000$을 내놓았다. 그러자 그는 몹시 당황했다. 현금을 직접 받은 것이 처음이란다. UNHCR 폐샤와르 사무실에서는 기금을 직접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슬라마바드의 UNHCR head office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한 뒤, 한참을 의논하더니 내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며 얘기했다.
첫째, UN의 후원계좌로 후원금을 입금하되, 사용처를 구체적으로 지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돈은 우선 제네바로 간 뒤, 다시 폐샤와르 사무실로 전달되며, 이 경우 돈이 오가며 수수료의 손실은 있겠지만, UN의 기부자 명단에 이름이 명시되며 이후 UN으로부터 다양한 정보제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둘째, UNHCR 폐샤와르 사무실의 지원 하에 난민캠프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NGO인 BEST를 직접 지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 경우 UNHCR로부터 의 보고서는 받을 수 없지만, BEST로부터 보고서와 직접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두 번째를 선택했다. 그는 BEST를 자신들이 추천한 만큼, 자신들의 확인 하에 돈이 지원되고 보고서가 제출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고, 곧 BEST의 책임자인 Hamish씨가 와서 학교지원에 대한 의견을 전달한 뒤, 기금 6,000$을 전달했다. BEST는 UNICEF의 지원으로 바주르캠프의 코타카이 캠프의 학교운영 활동을 하고 있지만, 기금의 부족으로 학교운영이 어렵고, 바클리캠프의 학교는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 비록 적은 기금이지만,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모쪼록 난민촌의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를 바라며 헤어졌다.
◑ 파키스탄을 떠나며
파키스탄에서의 공식 업무를 모두 마친 뒤, 차를 돌려 폐샤와르에서 난민캠프 방문과 세부 일정들을 도와주었던 PTDC office에 들러 작별인사를 하고, 시간의 부족했지만 아미드의 가족들을 얼굴이라도 볼 요량으로 7시간 걸린다는 거리에 있는 아미드의 집으로 향했다.
아미드의 집이 있는 시알코트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비옥한 편인 펀잡지방에 속하며, 이전에 축구공을 만드는 아동노동으로 악명 높았던 곳이다. 건조하기만 하던 국경 변과는 달리 시알코트는 우기(雨期)여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아미드 가족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 두시간 밖에 머물 시간이 없음을 알고 가족들은 절대로 못 간다고 하면서도 그 사이 사진 찍고,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바빴다. 결혼한 지 3개월밖에 안된 아미드의 아내는 부엌에서 일하느라 얼굴보기도 힘들었다. 부랴부랴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작별 인사를 하면서 공연히 부산만 떨다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가족들과 작별하고출발한 3시간 후 라호르 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한국까지 10시간에 걸친 비행을기다리면서 짧고도 긴 아프간 난민캠프 방문 일정을 돌아보았다. 지난 3월 처음 난민캠프를 방문했을 때 3주에 걸쳐 돌아보았던 곳을 이번에는 10일도 채 못되는 기간동안 돌아보는 바람에, 시간이 부족하여 다소 무리하게 일정을 강행한 탓에 몸은 부서질 것처럼 힘들었지만, 몸보다 더 지친 것은 나의 마음이었다. 이미 산산조각이 난 삶을 살고 있는 아프간 난민들에게 작은희망이라도 안겨주고 싶어 발버둥을 쳤는데, 여전히 고단하고 절망스런 그들의 삶을 보면서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그럴 힘이 있는지 몇 번이나물어보았지만,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2002년 9월 19일 noja@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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