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3_아프간 난민캠프를 다녀와서(정귀순)

정귀순, 부산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이번 파키스탄 여행은 짧은 시간이지만, 파키스탄 국경 변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캠프에 머물면서 그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지난 12월 급성심장마비로 사경을 헤매다 다행히 빨리 회복되어 2월 초 귀국한 이크발도 만나보고, 지난 해 급성결핵으로 사망해 유해만 가족들에게 보내 마음 아팠던 아시라프의 가족도 만나보기로 하고 2월 28일 파키스탄으로 떠났다.

3월 한 달 동안 아프간 난민캠프와 파키스탄 곳곳을 누비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많은 것들을 보고 또 생각하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여자 혼자 폐쇄적인 이슬람국가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적잖은 염려를 했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고 더구나 귀국한 파키스탄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니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행 내내 혼자 온 것을 후회했다. 한국에서 고통을 당하고 돌아온 파키스탄 친구들의 가족들의 슬픔과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처절한 현실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하다 돌아와, 자신만을 위한 삶에만 몰두하는 우리들의 삶이 너무 낯설고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지금 먹을 물도, 식량도 부족하고, '살아가는 것' 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에 불과한 아프간 난민들의 가슴에 작은 희망을 남겨주고 싶다. 보다 나은 삶을 꿈꾸다 이루지 못한 파키스탄 친구들에게 꿈을 갖게 하고 싶다. 그래서 가슴이 탄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선한 미소 그리고 하얀 모자를 쓴 듯 산꼭대기에 잔설(殘雪)이 남아있던 아프가니스탄 국경 변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생각하면 모두 그립고 가슴 아린다.

◑ 고귀한 사람들

아프간은 지난 20여 년 간 전쟁이 끊이지 않은 비극적인 땅이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처음 난민이 발생했고, 소련이 물러간 후에도 끊이지 않는 내전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난민들과 지난 9.11 테러사건으로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해 다시 수 십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여 현재 파키스탄에 있는 아프간 난민 수는 약 100만 명 정도이다. 연속된 불행 속에 아프간 인들의 삶은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피폐해진 상태였다.

난민캠프로 가는 길은 갈색 평원과 전체가 대리석인 석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산허리를 막 돌아서자 탁 트인 산아래 하얀 텐트들이 빼곡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유엔의 마크가 찍힌 하얀 텐트들이 줄지어 있고, 간이 화장실과 물탱크 외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벌판에 외국인을 구경하러 몰려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아이들만이 살아있는 생명을 느끼게 했다. 사는 모습을 보러 텐트를 기웃거리자, 아프간 여인은 선뜻 들어오라고 했다. 나 같으면 이 비참한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을텐데, 선선히 냄비와 밀가루와 담요가 뒤엉킨 채 아이들을 끌어안고 내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아이를 많이 낳고 그것을 기쁨으로 아는 이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아이들을 버리지 않는다. 부모가 어려우면 사촌들이라도 돕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 아마 이들은 낙천적인 모양이다.

캠프 내 학교는 텐트만 달랑 친 맨바닥에 아이들이 100명 혹은 120명씩 콩나물 시루처럼 빼곡이 들어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환한 미소에 순간 당황했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렇게 환한 미소를 가질 수 있다니…

세계 곳곳에서 물품들을 보내오지만 금방 금방 바닥이 나버리는데, 보내는 측에서는 한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모든 것이 부족했다. 학교를 열어 아이들은 신났지만, 옷도 신발도 학용품도 부족했고, 캠프 측에서는 혹시 가능하다면 아이들의 유니폼을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내게 물었다. '노력해 보겠다'고 답했다.(나는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 난민 캠프 곳곳에 일본, 쿠웨이트, 캐나다의 마크가 선명한 텐트와 물품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자원봉사활동을 나온 사람들을 만났지만, 한국 마크가 찍한 물건이나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한국인은 만날 수가 없었다.

미국의 공습 이후 세워진 국경 변의 난민캠프는 모두 세 곳으로, 한곳에 대략 2만여 명의 난민들이 가족단위로 거주하고 있는데, 내가 도착한 그날 오전에도 새로운 가족들이 등록절차를 밟고 있었다. 캠프에 도착한 난민들은 등록절차가 끝나면, 전염병 예방 백신을 맞고, 텐트 하나와 담요 하나, 주방용품세트, 물바케스와 함께 15일치의 식량이 주어지고 그 날 점심과 저녁식사가 제공된다. 물품과 식량의 상당수에 'USA'라는 마크가 선명했다. 이 많은 난민들을 만들어 낸 미국에서 보낸 식량으로 이들이 연명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현실인가. 캠프에는 기본진료소(Basic Health Unit)도 세 개 있는데, 진료실과 남녀치료실, 응급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위한 식품보급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여성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었다. 캠프 밖 공터에서는 난민들에게 그 날 도착한 지원물품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3월 중순이지만, 나무 한 그루 없이 내려 쬐는 태양을 고스란히 받아 벌써 무더운데, 어떻게 여름을 날 것인지 걱정되었다.

폐샤와르 시내에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 직후 세워진 난민캠프가 셋 있는데, 오래된 난민캠프의 사정은 더 열악했다. 1995년 파키스탄 정부에서 난민들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끊어, 남자들은 도로공사나 파키스탄 가정에서 하인과 같은 노동일을 하고, 여자들은 집에서 카페트를 짜거나 구걸을 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퀘타지역 난민들의 사정은 좀 더 열악했다. 식량, 전기, 가스 등 아무 것도 지원 받지 못해,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난민의 생활 그 자체가 이미 인간으로서의 삶이라 말할 수 없지만, 가장 비참한 곳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식량이 배급되고 아프간으로 돌아가기도 수월한 국경 변의 난민캠프로 가고 싶어했다.

◑ 난민캠프에서 만난 사람들

난민 캠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말라카는 6년 전 탈레반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카불을 탈출했다. 말라카의 남편은 라디오 아나운서였고, 말라카 역시 기자였던 까닭에 그들의 신변은 안전하지 못해, 두 아들과 세 딸을 데리고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다. 그는 3개월 전부터 난민 여성들에게 옷과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말라카는 조만간 카불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중이라고 했는데, 고등학생인 두 딸도 어머니처럼 대단히 활동적이었다), 그렇게 활동적인 여성들을 부르카를 씌워 집안에만) 있도록 한 탈레반 정권 하에서 그들의 삶이 과연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캠프를 방문하는 이들의 통역과 안내를 돕고 있는 닥터 아가는 비록 누추한 난민의 차림새이지만 영어를 비롯하여 6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텔리다. 그의 부모님은 전쟁 때 돌아가셨고, 삼촌과 함께 99년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캠프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좋으니 NGO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간절한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 아프간 난민을 돕는 사람들

아프간 난민들을 돕는 사람들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폐샤와르에 있는 아프간 난민 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일본의 한 민간단체 (Japan International Friendship and Welfare Foundation & Josai Hospital)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병원으로 마당과 문밖은 난민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작은 병원 건물에는 접수코너부터 아이들을 위한 진료실과 영양실조 아동을 위한 식품지급코너, 성인 남 여 진료실과 X-rey 촬영실, 물리치료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과 주로 일본에서 유학한 아프간 의사들 반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후원에 참여하고 있는 JR(일본철도)노조에서는 조합원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미 10년 전부터 아프간 난민들을 위해 조용히 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다시 보였다 .

퀘타에서 아프간 난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작은 NGO,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지구촌 운동”(Global Movement for Children and Women)은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는 고사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뒤지는 난민 아이들을 위해 난민캠프 내에 학교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100명∼200명 규모의 작은 학교 하나를 운영하는데 한 달에 100$(130,000원)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학교를 언제 열 것인지 묻자,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기금이 마련되는 그 날'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학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기를,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아프간 난민캠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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