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미루기’에 나선 네오콘들

프란시스 후쿠야마, 실망하고 당혹하다
‘책임 미루기’에 나선 네오콘들

미국 신보수주의의 지주라 할 수 있는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부시 행정부의 실수와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걱정하고 있다. 심지어 후쿠야마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부적절하고 공허하며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네오콘들은 세계적 차원에 걸친 자신들의 ‘오류’와 ‘오만’을 반성하기 시작한 것인가. 물론 아니다. 그저, 더 영악한 네오콘이 더 미수한 네오콘을 꾸짖고 있을 뿐이다.

위베르 베드린(Hubert Védrine)*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 ‘역사의 종말’(1)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작으로 유명해졌으며, 오랫동안 네오콘의 한 사람으로 자처해 온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최근 저작인 󰡔기로에 선 미국󰡕(2)을 통해 모든 네오콘과의 단절은 아닐지라도, 부시 행정부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다.
물론 그는 193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주장해 온 ‘지속적인 반공산주의’라는 사상적 흐름에 대해서는 계속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 흐름을 헨리 키신저의 ‘현실 정치’와 대립시키는 입장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열띤 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후쿠야마는 네오콘이 내세우고 있는 4대 원칙에 동의한다. ‘현실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는 체제의 내적 본질이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으며, 이러한 내적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독제체제를 민주체제로 변환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그는 또한 미국이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그러하듯이 국제분쟁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들의 변화에 대한 과도한 야망을 경계해야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안정과 정의를 가져다 줄 수 없는 국제법과 제도들에 대해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폴 월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2006년 4월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있었던 회의가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외교정책을 통해 체제들의 본질을 파악하는 점에 있어서, 후쿠야마 역시 여전히 일원인 네오콘들과 키신저 식의 전통적 현실주의자들이 가장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다원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네오콘들은 윌슨주의자들(미국의 민주당원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 다시 말해 일반적인 유럽인들)이 주장하는 국제주의적 자유주의와 대립하고 있다. 미국의 개입이 필수적(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이에 대해 ‘필수불가결한 국가’라고 지칭하기도 했다)이라는 점에 대해서 보자면, 그것은 미국이 보여주는 고립주의,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실효성이 없어진 고립주의와도 구분되는 것이다. 네오콘들이 아주 독창적인 하나의 이데올로기 칵테일을 만들어냈지만, 그들은 아주 미국의 전통적인 사상적 흐름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첫 번째 임기동안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그가 행한 일이 착오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쿠야마가 여전히 네오콘의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면, 도대체 그가 누구와 단절했다는 것이며 무엇 때문에 그랬다는 것인가? 본질적으로 그는 이라크 정책으로 인해 부시 행정부와 단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눈에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쟁에서 세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즉 실제 존재하지 않는 위협을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른바 미국적인 ‘선의의 헤게모니’ 행사에 대한 전 세계적인 거대한 반발을 예측하지 못했으며, 마지막으로 이라크의 평화 정착과 재건에 따르는 난점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러한 오류들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선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하는 용어가 매우 부적절하고 공허하며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올리비에 로이와 질 케펠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 그는 미국에서 여전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이슬람주의자들,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들, 이슬람교도들을 한통속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서구 민주주의가 단기적으로 테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아랍세계에 퍼져있는 반미감정이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에 대한 감정과 연계되어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는 미국인으로서 매우 용기 있는 입장 표명임에 틀림없다. 비록 역사를 통해 정당화된 몇몇 예방적 행동들을 언급하고 있고, 역으로 또 다른 예방조치들이 행해지지 못했던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방적 행동에 의해 지연될 수는 있지만 멈춰질 수는 없는 핵개발 계획에 대해서는 예방조치가 극도로 힘들다는 점, 오히려 이러한 조치들이 핵 확산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조치에서 기인한 체제 교체과정이 매우 불확실하다는 점을 후쿠야마는 지적한다.
후쿠야마는 조지 워싱턴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오늘날 예방적 전쟁이라는 위험한 개념을 정당화시키는데 사용되고 있는 미국의 ‘예외주의’(후쿠야마는 여기에서 거의 종교적인 성격을 보고 있다)에 대한 신념과 이에 대한 국제적 합의의 필요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면서 더욱 단호한 입장을 밝힌다. “미국인들이 자신들 선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 역시 이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자신들 개입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헤게모니적인 힘’이 자신들 주장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요컨대 민주당 정책자문인 필립 고든이 <포린 어페어즈>에 기고한 글 「부시 혁명의 종말」(3)에서 직접 밝히고 있듯이, 부시 행정부가 행한 모든 일이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확신만으로는 부족하다”

후쿠야마는 추가로 두 가지 사항을 고찰하고 있는데, 이는 특히 미래의 외교정책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매우 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민주화에 대해서 말하기 이전에 하나의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건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장려는 그 자체로 국가의 건설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다음으로는 외부의 지원,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는 해당국가 내에서 지역적 민주주의 세력들의 수용성은 대부분 해당 사회의 고유한 역사와 일정 수준의 민족주의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외부로부터 쉽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이며, 과거의 식민주의자들이자 오늘날의 지배 세력인 서방 국가들은 이에 대해 여전히 올바른 태도를 취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본인이 수년 전부터 주장해왔던, 필수적이지만 오랜 세월이 걸리며 매우 어려운 ‘민주화 과정’과 특히 외부로터 주어진 ‘순간적 민주주의’라는 환상 사이의 차이를 후쿠야먀 역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내적 요구가 없으면 제도도 없고 민주화도 없는 것이다.

미국의 신나치 정당인 국가사회주의자운동(NSM)의 당원들이 미시간주 이스트 랜싱에 모여 집회를 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그렇다고 해서 후쿠야마를 유럽의 다원주의적 지식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미국이 주장하는 ‘선의의 헤게모니’는 그 한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후쿠야마는 국제적 제도들에 대해 유럽인들과 미국 좌파가 가지고 있는 환상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는 유엔의 존재 자체가 이러한 주제에 대한 고찰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유엔은 개혁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로 내세우면서, 그는 가장 공식적이고 정당성을 갖춘 기구인 유엔에서부터 기업규약들, ISO, Icann(4) 등 가장 비공식적인 기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국제협력 형태가 만개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가장 합법적이라고 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후쿠야마가 다른 어떤 미국인들보다 미국의 리더십을 더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윌슨주의자들과 미국의 네오콘들, 대다수의 비정부기구들, 서구 여론과 마찬가지로, 그는 결코 포교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비민주적 체제들을 변화시킬 필요성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주의가 갖는 한계들을 인식하고 있고, 현실주의적인 윌슨주의자로서 국제적 제도들의 출현을 기다리는 일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그에게 이러한 문제는 어떤 명목으로, 그리고 어떻게 제기될 수 있는 것일까?
후쿠야마는 그 자신이 신봉해왔고, 여전히 상당부분 신봉하고 있는 네오콘의 사상들이 잘못된 수단들에 의해, 잘못된 곳에서, 그것도 최악의 방식으로 실현되었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네오콘의 사상들이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여느 나라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할 경우, 그리고 미국의 힘이 생각보다 더욱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세계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신뢰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후쿠야마는 향후 미국이 취해야할 또 다른 대외정책을 위한 유연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 정부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예상하고 있다. “미국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단지 공적 관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진영과 새로운 정책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 영악하게 네오콘을 전파하라!

후쿠야마의 이 책은 아주 좋은 성찰거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비록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찰이 매우 강력하고 그의 논지가 아주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의 논지는 유럽인들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대시위는 실제로는 더욱 심층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서구 세계의 공조를 감추고 있다. 생각보다도 많은 유럽인들이 네오콘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거기에는 프랑스의 좌파 세력들도 포함된다.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 서방세계 즉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매우 오래된 문명 전파의 사명을 절감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는 지구상의 다른 나라들, 즉 러시아, 중국, 아랍-이슬람 세계, 아프리카를 민주화시켜야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언론매체의 입장에서나 정치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상업·에너지 등의 보다 낮은 차원의 이유들로 인해 ‘인권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주의적’ 정책들, 곧 편리한 희생양을 비판하는 것이 하나의 공론이 되었다. 인권을 전파해야 한다는 서구세계의 정당성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서구세계가 이러한 작업을 효과적이고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역시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입장들의 기본 전제는 확고부동하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을 이야기하려들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이 원칙적으로 일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목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목적에 이르는 수단, 즉 군사력에 의존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프랑스의 좌파와 우파 세력들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 5공화국의 외교노선(그것이 계속 추구되었다는 전제 하에)을 포기하고 더욱 호전적인 정책, 미국의 라이스 국무장관의 말에 따르면 ‘변형적인’ 외교정책을 채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놓고 벌어지는 여러 논쟁들은 네오콘 정책과 마찬가지로 실망과 환멸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논쟁들이 네오콘의 정책에 대한 희미한 모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문명의 의무’를 지고 있는 야윈 말 위로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모든 위험을 무릅쓴 채 다시 올라타기 전에, 그들은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무엇 때문에 미숙한 자들이 되어버린 옛 동지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는지를 관심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La Fin de l'histoire et le dernier homme)>, Flammarion, Paris, 1992.
(2)프란시스 후쿠야마, <기로에 선 미국(America at the Crossroad)>,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2006.
(3)<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 Palm Coast(플로리다), 2006년 7-8월호.
(4) ISO(국제표준화기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표준화기구로서 기술적 규범들의 고안을 주요 임무로 하고 있다. 1998년에 창설된 ICANN(인터넷주소관리기구)는 인터넷 통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비록 캘리포니아 법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이 기구는 전 세계적인 활동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이 기구의 결정은 세계 여러 국가들에 적용된다.

위베르 베드린 프랑스 전 외무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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