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나라, 인도
이광수(부산외대 인도어과 교수)
콜롬부스가 인도로 가는 까닭은?
인도는 가난한 나라다.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물질로부터 초연하고 정신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난한 것은 –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굳이 단순화의 위험성을 무릅쓰고라도 한 가지의 원인만 이야기한다면 – 200년이 넘는 영국 제국주의의 착취 때문이다.
우리는 콜롬부스가 가고자 했던 나라가 바로 인도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콜롬부스 전에도 그랬고 그 후에도 그랬듯, 제국주의자들이 인도로 인도로 가고자 했던 것은 인도의 부가 탐나서였다. 그들과 장사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만큼 인도는 장사하는 사람들에겐 구미가 당기는 나라였다. 영국이 벵갈 땅에 처음 발을 디딜 때만 해도 벵갈은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이 아닌 벵갈 지방으로 그들이 왔다. 그들이 200년을 지배하고 난 뒤 벵갈 – 지금의 인도의 서벵갈 주와 방글라데시 -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 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은 메뚜기 떼와 같다. 그들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폐허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그들 입으로 자신들의 착취를 '스폰지와 같아, 갠지스 강물을 빨아 들여 템즈 강에 짜놓을 만큼'이라 했을까 ? 그 메뚜기 떼들이 지나가고 난 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는가 ? 그들이 뿌려 놓은 분열과 갈등의 씨는 인도라는 하나의 국민 국가를 형성시키는 데 발목을 잡고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종교 분쟁과 민족 분규, 뿌리 깊은 부패 구조들은 제국주의가 뿌려 놓은 씨로부터 싹튼 것들이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처럼 제국주의의 지배를 오래 겪은 나라들은 모두 이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부와 풍요를 상징하던 인도는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빈국(貧國)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가난함이 모두 도시에서 모여있다. 도시라는 것이 무엇인가. 뜯기고 빼앗긴 인도의 비참함이 한데 몰려 있는 곳이 아닌가. 그곳은 고향을 잃고 처자를 버리고 발버둥치는 인간들이 무작정 몰려드는 곳이다. 그래서 나뒹구는 휴지 조각 같고 폐품 같은 사람들이 사방에 그득하다. 그 도시만 보고 인도에는 거지밖에 없다거나 인도 사람들은 게으르다거나 한술 더떠 물질로부터 초연해 있다고 말하는가 ? 40도, 45도의 살인적인 더위에서도 몇 천 원 하루벌이를 위해 죽기살기로 일하는 그 사람들은 왜 애써 외면하는가. 도시를 보고 그 안에 있는 거지를 보고 인도의 그 무엇을 찾으려 들어서는 안 된다. 도시는 그냥 도시일 뿐이고 거지란 모든 가난한 나라들의 공통 분모일 뿐, 인도만의 그 어떠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다 보니 인도가 가난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인도는 제국주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정신의 나라'라든가 '명상과 요가의 나라'라든가 하는 평가를 받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의 역사가들이나 여행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그들의 정신 세계를 배우고자 그 땅을 찾아간 현장이나 혜초와 같은 승려들조차도 그랬다.
그러던 이 나라가 정신 세계의 '유토피아'로 등장한 것은 산업혁명 즈음 물질 문명에 염증을 느낀 유럽의 낭만주의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들이 꿈꿔 온 유토피아를 찾고자 혈안이었고 그곳을 그들이 갖지 못한 정신 문화를 가진 인도에서 애써 찾았다. 그들은 그래서 인도의 정신적인 면만 보았고 그것을 '인도'로 박제화시켰다. 그렇게 일방적이고 어처구니없이 만들어진 이미지가 지금 우리에게 와 닿고 있다. 우리의 상황이 당시 유럽인들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나'를 찾아 인도로 인도로 떠난다.
그들에게 인도는 땅에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늘에 떠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도를 방랑할 수 있는 곳으로 삼았다. 그러한 목적으로 인도를 대하는 것을 두고 그르다 할 수만은 없다. 인도는 그들이 보고 느끼고 할만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느끼고자 애쓰는 그런 인도가 실제로 살아 있는 인도는 아니다. 그들이 그리는 인도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인도는 아니다.
살아 있는 인도만이 실존의 대상일 뿐이다. 그렇다, 분명 인도에는 정신 세계를 추구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실로 존경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명리를 탐하지 않고 진리를 찾고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그들의 세계를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이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의미를 파악해보자는 것이다. 우선 많은 이들이 읽고 익혀 온 그러한 모습은 대부분 경전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런데 인도의 사상이라는 것이 그렇다. 그것은 물질 세계를 저버리고 정신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일부가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인도 사상은 사회 내의 질서를 최고 가치로 두고 있다. 이것이 삶의 세계로 표현된 것이 바로 카스트 세계다. 이 카스트 세계에서는 결혼하고, 마누라하고 즐기고, 자식 낳고, 부모 공경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식 마누라 사랑하고, 부지런히 돈벌고, 그 돈으로 이웃 생각하고, 나와 우리 잘되라고 신에게 빌고 … 그런 일을 하면서 산다.
그 세계야말로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의 세계이다. 산이 물 되려고 하지 말고 물이 산 되려고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있는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일만 묵묵히 하라는 바로 그 의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물질 세계이지 정신 세계는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처럼 부모 자식간에 효(孝)가 있고, 남녀간에 차별이 있으며, 형제간에 우아래가 있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다. 다만 우리와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우리는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을 중요시 한 반면 그들은 이 모든 사회 질서를 지배하는 법을 중시한다는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로부터 떠남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의 삶을 기준으로 보면, 제일의 덕목이야말로 뭐니뭐니 해도 정상적인 사회 질서일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들은 그러한 전통 내에서 주어진 직업에 충실하고 그 안에서 물질을 생산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우선시 했다.
이처럼 풍요를 추구했던 삶의 모습은 종교 속에도 잘 드러나는데, 인도인들은 땅을 어머니로 돌을 남근으로 보며 그 둘의 결합을 통해 풍요로움을 추구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우리 나라나 중국, 아프리카, 멕시코 등에서도 보편적으로 볼 수 있다. 인도인들도 여느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모든 통과의례를 중요시하고, 그 안에 항상 풍요를 기원하는 상징을 담아 왔다.
인도의 상징물들이 난잡하기도 하고 괴기스럽기도 하며 야만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은 상징을 표현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이들 모두가 다 생산력의 추구이고 그 상징의 중심에 항상 성(性)이 놓여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들은 풍요를 추구하고 그것이 그들의 종교 속에 잘 드러난 것이다.
사람들이 항상 신의 세계를 쳐다보고 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풍요로움을 추구하고, 그 풍요로움은 신들의 세계의 소관 사항이라는 우주적 법칙을 알고 그것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들은 매사에 신과 더불어 살고 또 그렇게 사는 자는 금새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다. 더불어 신들의 삶 또한 그렇도록 인간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신들마저도 인간 세상으로부터 초연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이라 함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종교적임을 꼭 탈물질적이고 탈세속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인도와 인도 사람들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쯤 정도로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사는 나라다, 인도는. 나는 애써 이를 말한다.
결국 모두가 다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추구하자는 것인데, 인도에서는 그 바라는 바가 너무 심하게 굳어 버린 경향이 있다. 본래의 뜻은 갈수록 퇴색하고 상징성은 오히려 사람들을 옭아매는 도구로 변해버린 것이다. 상징이 의례가 되고 그 의례는 다시 기계적 의식으로 변질되다 보니, 그 상징 안에 녹아 있던 성(性)의 의미 즉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그 소박한 바람들은 극단적인 성(聖)과 속(俗)으로 바뀌고 혹은 나아가 저주로 변질되어 버렸다.
암소의 경우가 그렇고, 사띠의 경우가 그렇고, 목욕의 경우가 그런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인도라는 나라의 독특한 성깔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들의 지나온 과거를 보면 그야말로 섞임의 역사였다. 지구상에 인도만큼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가 섞여 온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을까. 동서의 폭과 남북의 길이를 합한 길이가 가장 긴 나라가 바로 인도다. 거기에 삼면은 바다요 또 다른 면은 세계에서 가장 험한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북부 일부 지역을 가느다란 목으로 하는 호리병같이 생긴 나라다. 그 안으로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오게 되면 모든 것은 섞일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그들은 융합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서로에 대해 비판하고 자신의 유일성과 정체성만을 추구하면 이 나라는 본질적으로 존재 그 자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역사를 통해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공존이 바로 그들의 게임의 법칙이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회 질서 중심의 세계관과 세상을 떠나는 세계관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음양일치의 물질 세계에서 찾고자 하는 세계와 명상의 정신 세계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쉬바 같은 신은 성(性)을 통해 물질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하면서 명상을 통해 정신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신들도 참으로 가지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이 죽고 사랑하고 거짓말하고 비열한 짓을 하고 요가하고 섹스하고 하는 등등을 하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힌두 신의 세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 세계 그대로이다. 모든 종교에서의 신의 세계라는 것이 다 인간 세계의 반영이라지만 힌두 신의 세계의 경우는 다른 경우에 비해 그러한 특질이 독보적이다.
그것은 다른 나라는 인도와 같이 다양함이 공존하는 역사를 가지지 못했기 (혹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의 경우에는 그리스-로마 신화가 단일성을 추구하는 기독교에 의해 그 자리를 떠 밀려났기 때문에 그 다양함의 폭이 인도와 같지 않게 된 것이다.
깔리와 같은 여신이 힌두 신화에만 나타나고 사두라는 존재가 인도에만 있으며 밀교가 인도에서 유독 발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인도의 공존의 가치관을 유럽인들의 세계관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도의 문화를 시도 때도 없이 매도하고 저주했던 것이다. 다만 때로는 '야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신비'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만 다를 뿐 그들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시각의 본질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인류 구원의 유일한 방안인 모더니즘 즉 근대주의의 기초가 된 것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근대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근대주의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하고, 발전의 필요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그 안에서 근대 사회가 바로 인류의 이상적 사회가 되었고 그것에 관한 한 유럽인들은 일종의 메시아 역할을 하였다. 그 안에서 인간 행위의 역할은 국가가 담당하였고 그것이 학문적으로 사회 과학의 급부상을 낳았다.
하지만 20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근대주의가 추구하는 발전은 인류에게 공존공영을 가져다 주는 대신 인류를 막다른 골목 안으로 몰아 넣었을 뿐이었고 근대주의에 입각한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소외, 환경 문제의 폭발, 남북 문제, 전쟁과 분규, 질병의 공포 등으로 확산되어갔다. 그래서 이제는 “사회과학이여 떠나라!”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총체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로 서있다.
인도인들이 사는 방식이 옳고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도 우리처럼 산다는 것이다. 빛깔과 색깔과 맛깔은 다르지만 그들이 사는 방식도 여럿 중의 하나로 인정을 하자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상대주의의 세계가 옳을 수도 있고 유럽인들이 주장하는 절대주의의 세계가 옳을 수도 있다.
다만 나는 그들의 세계도 유럽인들의 그것만큼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모든 이가 평등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그래서 나는 더불어 사는 세계가 좋다. 더불어 사는 인도 사람이 사는 나라 인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를 항상 마음 속에 지니는 것이 옳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편견으로부터의 탈피다. 많은 편견들은 다 그들의 사고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서이고 그들을 우리 식으로 해석하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인도'라는 화석을 깨뜨리는 작업 즉 우상 파괴의 작업의 필요성을 제기해 보자.
다음으로 역사성과 사회성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사회적 의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내 자신 위주로 만들어져 간다. 그런데 그 대상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들의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삶을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보다 절실해진다.
우리에게 특별히 부족한 것 즉 복합적 사고 체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일체의 다름을 싫어하는 우리의 문화를 가지고서는 다른 세계를 볼 수가 없다. 인위적인 정리가 미덕으로 자리잡은 세태 속에 자연의 질서란 있을 수 없다. 그 속에 더불어 같이 사는 삶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질서와 연속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만이 과연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 우리와 다른 복합 사회를 보는 자세를 키워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 바로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를 되내이자. 그들이 사는 방식은 우리와 다를 뿐 틀린 것도 아니요 그릇된 것도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더불어 사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