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시아인가? –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본회 공동대표)

왜 아시아인가?

이광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부산외국어대학 교수)

1. 제국주의의 유산

유럽에서 발달하여 아시아를 침략한 제국주의는 초기에는 조세, 불평등 무역, 노동력 착취 등을 통해서 그리고 후기에는 자원과 자본의 강탈, 식민 시장의 형성 등을 통해 식민지 국가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으나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경제의 파괴로 인한 빈곤과 기아였다.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을 가진 지역이면서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전락한 것은 이 때문이다. 빈곤은 매매춘, 노동력 착취, 인권 유린, 환경 파괴, 도시 문제, 질병 등 현재 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사회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

제국주의는 원활한 식민 통치를 위해 아시아 사회를 근대 사회로 변화시키는데 소극적이었던데 반해, 기존의 봉건 사회 질서를 적극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가부장적 남성 중심 ■ 혈통 중심 ■ 봉건 계급적인 사회 체제가 유지되었고 그러한 체제 안에서 기존의 기득권자들은 새로운 권력으로 재편되었다. 반면 하층 계급의 사회적 상태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근대 유럽에서 발달한 노동자 계급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서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자-자본가의 계급적 갈등 구조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아시아가 인권의 사각 지대인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근대적 의미의 계급 구조가 형성하지 못하는 자리에 종교, 혈통, 지역, 언어 등 봉건적 개념의 집단주의가 자리를 잡음으로서 건전한 사회 비판 능력을 상실케 한다는 사실이다.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데는 민족주의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아시아는 본질적으로 유럽과는 달리 민족이라는 단일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민족주의 (혹은 국민국가주의)는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아시아에서는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국가의 단일 체제가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그 통치의 원활함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국민국가를 도입하였고 그 성립의 이데올로기로는 불완전한 민족주의가 자리 잡았다. 따라서 유럽에서와는 달리 정치적 단일체로서의 국민국가가 아닌 인종이나 종교의 측면에서 지배적 다수의 위치를 차지하는 일부가 주축이 되는 국민국가가 형성되었고 그 안에서 인종과 종교는 국가 권력 형성의 기제로 작용하였다. 국가의 이름으로 소수의 인종과 종교가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 되며 그에 따른 내부 식민주의, 학살 등이 자행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종교 민족주의로 발달하기도 하고 또 다른 편으로는 분리주의 운동으로 발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코소보에서부터 아체까지 이르는 전쟁의 역사가 아시아에서 끊이지 않은 배경이다. 더불어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국가주의 안에서 모든 인권이 유보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이다.

2. 독재의 망령

70년대의 한국의 박정희, 북한의 김일성, 필리핀의 마르코스, 이란의 팔레비,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와 같은 독재자들은 모두 이러한 국가라는 이름 아래에서 인권을 유린한 경우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재자들은 대부분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그 자리를 건전한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인민들이 수십 년 동안 세뇌당해 온 이 국가주의의 망령으로부터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사이에 봉건적 집단주의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메이니가 이끌던 이란의 이슬람사회주의, 탈레반이 이끌던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 전두환 이래로 현재까지 진행형인 한국의 경상도 지역 패권주의 등이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란이다. 아시아적 가치란 가족주의, 정실주의, 인치주의, 권위주의, 공동체의식, 교육열, 근면성 등 주로 유교 사상에서 나온 아시아의 특유한 가치가 아시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안에는 개인주의, 합리주의, 인권주의, 법치주의 등은 서양의 개념이고 이는 아시아인들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논리이다. 이 개념은 1970년대 초 아시아 국가들의 고도경제 성장 요인을 해명하기 위해 서방의 학자들과 매스컴이 일컬어온 개념인데 이를 받아 싱가포르의 리콴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등이 계승 발전하였다. 의심의 여지없는 반민주적, 반인권적 개념이다. 국가주의와 아시아적 가치관은 본질적으로 봉건적이고 그 뿌리는 대단히 깊다. 아시아의 어느 한 지역에서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것 또한 이 국가주의와 봉건주의의 망령 때문이다. 또 인도의 인디라 간디-소니아 간디, 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르나이케-꾸마르 퉁가,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버마의 아웅산 수치 등과 같은 여성 통치자의 예를 보면 아시아 사회가 얼마나 혈통-가족 중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알 수 있다. 최근 박근혜에 대한 최보은의 지지는 바로 이 남근 숭배의 극치이다.

3. 미국 패권주의

아시아가 근대 이후 독자적으로 존재하게 되기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미국의 덕이 컸다. 그것은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주의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아시아 각국의 독립을 적극 거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은 양극 체제에서 소련과의 끝없는 경쟁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 사수를 절대절명의 과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학살 등이 자행되었고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이라크의 후세인, 파키스탄의 지아 울 하크, 필리핀의 마르코스, 버마의 네윈, 태국의 수친다 등 군부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을 후원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반공 이데올로기만이 유일한 관심이었을 뿐 독재나 민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후 광주, 방콕, 자카르타, 마닐라 등에서 시민 의거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수없는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이것이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잊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양민 학살의 역사인데 그 학살과 미국이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는 반미의 점화지로 부상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양극 체제가 무너지고 이후 유일 수퍼파워로 자리 잡고 미국 경제가 침체되면서 아시아에 대한 패권주의가 노골화되었고 이에 대한 아시아의 반응은 반미 운동이다. 반미 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이슬람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반미주의이고 또 하나는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하는 반미주의다. 전자는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중동의 석유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끝없는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중동에서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해 정당한 방법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 틈새에서 태어난 것이 종교를 통한 성전 이데올로기의 개발이었다. 한 편 전자는 진보 진영의 반미는 여전한 봉건 질서의 틀을 깨지 못한 채 자국민들 간의 갈등으로만 커지고 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적 가치는 사리지고 그 자리를 신자유주의가 차지하게 된다. 최근 한국의 진보 진영의 일각에서 반미에는 열중하면서 그 외 인권, 민주, 복지 등 진보적 가치 체계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진보 진영이 합리적 진보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감성주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이다.

4. 오리엔탈리즘과 Pride of ASIA

아시아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제국주의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제국주의는 오리엔탈리즘의 일란성 쌍생아이고, 오리엔탈리즘은 계몽주의의 또 다른 일란성 쌍생아이다. 유럽과 본질적으로 다른 곳 즉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개인적이고, 비효율적인 결국 ‘야만’의 한 마디로 응축되는 곳. 그곳이 자신들의 동쪽에 있다 해서 East라고 불렸던 곳이 곧 아시아다. 그리고 그 아시아를 계몽시키기 위해 그들을 통치해야 했던 그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현재의 미국 안에 살아 있다. 그런데 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오리엔탈리즘-계몽주의로 무장한 제국주의의 흉내를 내면서 뿌듯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 어느 한 곳 제외할 것 없이 한국 사람들이 진출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은 인권 유린과 노동력 착취이다. 이는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통치와 전혀 다를 바 없다. 한국 사회 내에서 이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는 유럽과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을 대하는 태도보다 훨씬 악질적이다. 그런데 그 오리엔탈리즘은 아시아 각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북한, 조선족 등 우리 민족에게도 통용되고 있다.

한국이 르완다나 잠비아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을 우선 도와야 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지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아시아 사람이라는 문화적 동질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한국이 2002년 월드컵 4강에 진출한 것을 방글라데시나 태국 사람들이 그렇게 기뻐 날뛴 것 또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아시아’로 인해서이다. 한국은 이에 ‘Pride of ASIA’로 화답하고 있다.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성장하면서 내세웠던 이데올로기가 대동아공영 신화와 닮은꼴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시아에 대한 인식은 매우 왜곡되어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 인해 기독교가 추구하는 이상과 정반대로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이슬람은 ‘테러’ 세력이고 이스라엘-미국은 ‘응징’ 세력으로 각인되어 있다. 미국에서의 정보의 발달은 아시아 각국의 언론에 대해 깊은 영향을 끼친다. 미국의 군수 산업체, 정유업체, 언론, 정치는 정권을 잡은 정당의 색깔과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유착되어 있다. 그것이 미국식 국가주의다. 따라서 적어도 미국의 국가주의에 상충하는 정보는 어느 곳에서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문명의 충돌’과 같은 매우 세련된 학문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 안에서 헌팅턴은 ‘충돌’에 대한 원인이 제국주의에 있고 그 빚을 아시아인들이 잊지 않고 있다는 비교적 정확한 분석을 하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사과가 아닌 두려움에 대한 유럽 문명의 단결에 두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염려한 가상은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이러한 지식 또한 전 아시아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결국 아시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미국의 언론과 학문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한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것은 결국 신화다. 그리고 그 신화는 지식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결국 지식은 권력을 낳고 권력은 감시와 통제를 낳고 감시와 통제는 광기를 낳는다. 한국 사회에 아시아에 대한 교육이 시급히 이뤄져야 함은 바로 이러한 인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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