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에서 배반당하는 평화

[국제인권] 동티모르에서 배반당하는 평화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의 슬픈 자화상

최재훈 | 경계를 넘어 활동가 14호 | 2006년 8월 / 2006년08월08일 14시57분

우리는 살면서 종종 이런 질문을 주고받곤 합니다. “운동단체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뭐예요?”, “어쩌다가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거죠?” 무늬만 국제연대 활동가인 저 역시도 국제연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참 많이 받는데요, 그럴 땐 대략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제 의식의 변화를 일일이 설명하자니 자칫 얘기가 장황해질 것 같고, 어떤 특정한 사건을 이야기하자니 딱 잘라서 ‘이거 때문이다’라고 얘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래도 상대방의 기대에 찬 눈망울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저는 1999년 동티모르에 다녀온 기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해 8월 치러진 독립 주민투표 당시 민간선거감시단 자격으로 약 보름간 동티모르에 머물렀었거든요. 돌아보면 실제로 그 때의 기억은 제 인생에 있어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략적 중요성이 허가 내 준 침략과 학살

인도네시아 군의 발포로 5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산타쿠르주 학살은 국제여론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학살현장을 조사 중인 유엔 평화유지군.

그런 제게 두어 달 전 동티모르에서 들려온 소식은 당혹스러움과 착잡함 그 자체였습니다. 25년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군사점령 하에서 인구의 약 4분의 1 가량이 희생되면서도 독립의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은 그 꿈을 이뤄냈던 동티모르 사람들. 독립찬반 투표 당일 새벽부터 투표장에 줄지어 서서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한 표를 행사하고는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보복을 피해 산으로 도망치던 사람들의 모습을 전율과 감동으로 지켜보았던 저는 처음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2006년의 봄, 그리고 지금 동티모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이번 호에서는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고자 합니다.

21세기 최초 독립국가 ‘티모르 레스떼’

그 전에 동티모르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간략한 설명부터 곁들일게요. 16세기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처음 서구에 알려진 티모르 섬은 좌우로 각각 서티모르와 동티모르로 나눠져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서티모르는 2차 세계대전 뒤인 1961년에 일찌감치 인도네시아에 편입되게 된 반면, 동티모르는 1974년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1974년 4월,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낸 포르투갈의 청년 장교들이 자국 식민지의 해방을 약속하면서 동티모르 독립의 불씨도 지펴지게 됩니다. 이듬해 11월 28일에는 지금의 집권당이기도 한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자 호시탐탐 동티모르를 노리던 인도네시아가 같은 해 12월 7일, 약 1만 여명의 육·해·공군을 동원해 전면적인 침략을 단행하지요. 전쟁의 결과는 이미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섬 전체를 접수한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아름다운 동티모르의 바다는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전체 인구 70만 명 중에 약 6만 명이 살해되었고, 동티모르는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병합되었습니다.

그 당시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강대국들은 인도네시아 침략의 든든한 후원자, 방조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도미노를 막기 위한 교두보로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 미국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직접 자카르타를 방문해 동티모르 침략을 ‘허가’해주었고, 오스트레일리아도 인도네시아 군대의 동티모르 게릴라 섬멸작전이 한창이던 1979년 2월에 세계 최초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합병을 승인해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1988년에는 티모르 해역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를 두 나라가 공동 개발한다는 합의에 도달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죠. 이 외에도 영국은 호크 전투기를, 네덜란드는 전함을, 프랑스와 캐나다는 탱크와 헬리콥터를, 이스라엘은 기관총을 인도네시아에 판매했습니다. 그 무기들이 직간접적으로 동티모르 민중들을 학살하는데 쓰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방국가들은 두 눈 딱 감고 무기 수출에만 열을 올린 거죠.

누가 보더라도 국내외 정황은 동티모르 민중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인도네시아 군대의 ‘포위섬멸작전’으로 저항운동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시기에 나타난 지도자 사나나 구스망(Xanana Gusmao)이 조직을 다시 추슬러 민족해방군(FALINTIL)을 창설하고, 전선운동조직을 재편해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라 밖에서는 주제 라무스 오르따(Jose Ramos Horta, 1996년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와 마리 알카티리(Mari Alkatiri)를 중심으로 한 망명 활동가들이 온갖 냉대와 모멸감을 견뎌내며 국제사회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은 민중들이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정신적인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반란과 폭동 뒤에 숨겨진 진실은?

이런 완벽한 역할분담(?) 덕택에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동티모르의 독립에 조금씩 서광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특히 1991년 11월,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발포로 5백여 명이 사망한 ‘산타크루즈 학살’이 외부세계에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여론은 급격히 인도네시아에 불리해졌고, 강대국들도 하나둘씩 인도네시아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결국 인도네시아는 1999년 5월, 동티모르의 독립 여부를 동티모르인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주민투표 실시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고, 뒤이은 8월 30일의 독립투표에서 98.5% 투표율에 78.5%의 찬성으로 동티모르의 독립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는 ‘티모르 레스떼(Timor Leste)’라는 이름의 21세기 최초의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됩니다.

확실한 친오스트리아 노선을 걷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스망 대통령

이제 다시 2006년으로 되돌아와, 한동안 잊혔던 동티모르는 반란과 폭동이라는 우울한 단어로 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아납니다. 겉으로 알려진 사건의 발단은 승진, 보수에 있어서 차별을 당했다고 여긴 서부지역(서티모르가 아닙니다) 출신 군인 6백여 명이 2월부터 파업을 벌이고, 마리 알카티리 총리가 이끄는 정부가 이들을 강제전역 조치시키자, 4월 28일부터 남은 정부군 및 경찰과 해직군인들 사이에 유혈사태가 벌어진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 뒤 국방, 내무장관이 잇따라 해임되고, 호주를 비롯한 뉴질랜드, 포르투갈, 말레이시아 4개국 2,700여 명의 다국적군이 파견되었으며, 결국 6월 26일 마리 알카티리 총리까지 사임한 뒤 7월 8일 주제 라무스 오르따 외무장관 겸 임시조정장관이 새 총리로 지명되면서 사태는 외형상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몇 가지 의문점은 풀리지 않은 채로 남게 됩니다. 반란을 일으킨 해고 군인들의 유일한 요구사항이 왜 하필 알카티리 총리의 사임이었을까? 반란군들이 대통령의 요청으로 순순히 무기를 반납하고 대통령은 그 대가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걸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대통령과 총리가 함께 파병요청을 하기 전까지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겠다던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천 3백 명이나 되는 군대를 서둘러 파병했으며, 왜 다국적군은 적극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들 말입니다.

이에 대해 동티모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번 사태는 마리 알카티리 총리를 겨냥한 ‘외부세력을 등에 업은 권력 내부의 쿠데타’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군대 내의 출신지역에 따른 차별이 진짜 원인이었는가를 짚어보지요. 지금의 동티모르 군대(F-FDTL)는 총사령관인 타우르 마탄 루악(Taur Matan Ruak)을 비롯해 대다수가 과거의 민족해방군(FALINTIL) 출신들입니다. 독립운동 당시 동부지역에서 FALINTIL의 세력이 더 컸었고, 상대적으로 서부지역은 친인도네시아 민병대 세력이 세긴 했었지만, FALINTIL 내부에 동서로 나뉜 지역 간, 인종간의 갈등은 없었다고 합니다. 즉, FALINTIL 출신들로 구성된 지금의 군대에도 지역갈등의 징후는 애초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 대신, 군 내부에서 알카티리 정부에 대한 쿠데타 시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존재해왔습니다. 루악 사령관조차도 작년 4월과 올 초, 쿠데타 제안을 받고 거절한 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짐작해보면, 군 내부의 지역 차별은 처음부터 실재한 것이라기보다는 알카티리 총리를 몰아내고자 하는 그 ‘누군가’에 의해 부추겨지고 왜곡, 과장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지요.

동티모르는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오늘날이 동티모르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된 나라에서의 평화로운 일상'일까요? 오늘의 동티모르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그 ‘누군가’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동티모르 정부의 권력 내부, 구체적으로는 과거 독립운동을 같이 한 동지들 간에 갈등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동티모르의 정치 형태는 4권 분립(대통령,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체제입니다. 2001년 8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전체 88석 중 55석을 차지한 집권당 FRETILIN의 알카티리 총리가 헌법상 정부수반으로서 국정을 주도하고, 사나나 구스망 대통령은 대외관계에서 상징적인 역할만을 하는 체제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았다 해서 한 때 구스망 대통령을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요, 사실 구스망 자신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원했다가 뜻대로 안되자, 아무런 권한이 없는 대통령직에는 관심이 없다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려고도 했다죠.

아무튼 국정운영권을 쥔 알카티리 전 총리는 재임 기간 중 ‘문 뒤에서 향연을 벌이는 부자들’이 없는 점진적인 개발 정책을 취했습니다. 동티모르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노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도 거리를 유지하려 했고, IMF와 세계은행의 개발자금을 거부하기도 했죠. 이런 알카티리를 가리켜 구스망과 그의 지지자들은 ‘앙골라 공산주의자’라 부르곤 했습니다(알카티리는 아프리카에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카티리 전 총리가 외국자본에 무조건 적대적인 반자본주의자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취임 이듬해부터 인도네시아를 찾아가 인도네시아 자본의 투자를 호소하기도 했고, 유럽연합과 중국 등과 유전개발권을 놓고 협상을 벌여왔기 때문입니다. 다만 알카티리는 민족주의자로서 동티모르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지요. 그에 반해 구스망 대통령은 확실한 친 오스트레일리아 노선을 걸었습니다. 그의 수십 년 동지이자 이번에 신임 총리로 지명된 오르따와 함께 말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미국’을 자임하는 나라입니다. 미국도 그걸 인정하고 있구요. 1999년 독립선거 이후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들의 난동으로 동티모르가 쑥대밭이 되어 유엔 산하의 다국적군이 구성될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가장 많은 군대를 파병하면서 동티모르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그런 오스트레일리아가 바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바로 티모르 해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권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동티모르를 발판으로 동남아시아 역내 주도권과 영향력을 유지, 강화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알카티리 정부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호주 최대 일간지 <더 오스트레일리안(the Australian)>의 외신부장 그렉 쉐리던(Greg Sheridan)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약 알카티리가 총리직을 유지한다면,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1,300명의 군인들과 50명의 경찰관, 수백 명의 지원인력, 수많은 구호물자를 쏟아 붓고도 이 재앙에 가까운 마르크스주의자 총리를 제거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국익을 증진시킬 능력이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확실한 증거만 없을 뿐, 오스트레일리아가 ‘반알카티리 쿠데타’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동티모르 권력 내부에서 쿠데타를 실행에 옮긴 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구스망과 오르따? 아니면 제3의 세력? 글쎄요…. 어찌 됐건 FRETILIN 내부에 지지 세력이 남아있긴 하지만 알카티리는 이제 총리직에서 물러나 정적제거 음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습니다. 반란 군인들은 총을 내려놓고 복귀를 준비하고 있으며, 내각은 새로운 인물들로 다시 채워졌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장갑차를 타고 순찰을 도는 거리에서는 총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과거의 끔찍했던 학살과 약탈의 공포를 떠올리며 집을 떠났던 15만 명의 난민들은 다시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20만의 생명을 역사의 제단에 바치면서까지 동티모르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된 나라에서의 평화로운 일상’일까요? 오늘의 동티모르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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