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론》 81호(2004.6) 게재논문
이스트 엔드, 가깝고도 먼 곳
이영석(광주대)
1. 이스트 엔드의 이미지
1888년 8월 31일 런던 화이트채플(Whitechapel)의 한 거리에서 나이 지긋한 매춘부 폴리 니콜스(Polly Nichols)가 목에 상처를 입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후 11월까지 이와 비슷한 살인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다섯 명의 창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이 있었음에도 범인은 끝까지 잡히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를 ‘살인마 잭’(Jack the Ripper)이라 불렀다. 그 당시 일간신문과 지역신문들이 이 사건을 다투어 추적 보도하면서 이스트 엔드(East End)의 어두운 밤거리, 매춘부, 술취한 주정뱅이,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혼탁한 거리와 빈민가의 허름한 집들이 더욱더 선명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사실 이스트 엔드는 19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런던 빈민가의 대명사로 불려지지 않았다.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은 아직 이스트 엔드의 빈곤 문제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목사와 저널리스트 또는 외국 방문객들이 이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중대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적이 없었다. 이스트 엔드는 19세기 전반에 이미 빈민지역의 하나로 떠올랐으면서도, 아직까지는 빈민가의 전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트 엔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콜레라 때문이었다. 1849년, 1855년, 1866년 영국에 콜레라 전염병이 돌았을 때 특히 이 지역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1)
날품팔이 노동자와 실업자, 거리의 부랑아와 뜨내기 행상으로 들끓는 이스트 엔드의 이미지는 대체로 1880년대에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우선 이 지역의 빈곤 문제를 다룬 문헌과 팜플렛이 쏟아져 나왔다.2) 이와 함께 토머스 바나도(Dr. Thomas Barnardo, 1845-1905), 옥타비아 힐(Octavia Hill, 1838-1912), 새무얼 바넷(Samuel Barnett, 1844-1913)과 같은 박애주의자 또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이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펴면서 그 실상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찰스 부드(Charles Booth, 1840-1916)가 이곳의 빈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스트 엔드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어느 사이에 빈곤의 대명사로 불렸다. ‘살인마 잭’ 사건은 이스트 엔드의 이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다시 확인하고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1880년대에 이스트 엔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짙어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이 지역을 묘사하고 언급한 공적 언어와 담론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근래 이스트 엔드에 관한 연구로는, 찰스 부드의 사회조사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1880년대 유태인 이민의 삶을 중심으로 이스트 엔드의 사회사를 재구성한 것 또는 개인적 경험을 정리한 회상기들이 눈에 띈다. 이와 함께 1880년대의 소설이나 팜플렛을 통해 이스트 엔드의 이미지 형성과정을 다룬 연구도 있다.3)
이 글 또한 1880년대 평론지(review)에 실린 논설을 특히 주목한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는 ‘잡지의 전성시대’로 알려져 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평론지와 잡지들이 정치・경제・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관해 경쟁적으로 공공 여론을 형성해 나가던 시대였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좀더 광범한 독자들이 전통적인 귀족이 아닌 새로운 문필가들에게서 지식을 얻으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4) 당시 평론지의 필자들은 주로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여기에서는 1880년대 이스트 엔드를 다룬 여러 논설들을 통해서, 당대 중간계급 출신 문필가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또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했는가를 살피려고 한다.5)
2. 지리적 공간과 인구증가
19세기 런던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1801년에 100만 명을 넘지 않았던 인구는 1881년 383만 명, 1891년에는 422만 명에 이르렀으며,6) 그 가운데 30% 이상이 이스트 엔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사실 이스트 엔드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이 말이 공식적인 행정구역을 나타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1886년에 찰스 부드가 이 지역의 빈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설정한 8개 시구를 뜻하는 것으로 한다(지도 참조).7) 이 지역은 원래 런던 항의 부두 노동자들이 주로 거주하던 스텝니(Stepney)를 중심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그 주위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트 엔드는 구 런던시(City of London)의 동쪽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숲과 초지가 널려진 전원적인 분위기가 짙었고, 인구도 조밀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몇몇 시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스텝니는 이스트 엔드의 중심부이다. 지명은 색슨인 ‘스테바(Stebba)의 개간지’ 또는 ‘스테바가 상륙한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이스트 엔드란 이 시구를 뜻했다. 화이트채플(Whitechapel)은 원래 스텝니 교구의 한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이름은 13세기경 흰 돌로 예배당을 지은 데서 유래한다. 런던 동부지역으로 향하는 간선도로가 지나기 때문에 18세기에는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여관과 술집, 마굿간이 들어서서 소란스러웠다.8) 19세기에는 이곳의 싸구려 여인숙에 주로 부두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마일 엔드(Mile End)는 구 런던시에서 1마일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18세기에 이미 인구가 급증하는데, 주민 대부분은 주로 섬유분야의 수공업 장인들이었다.
<지도> 1880년대의 이스트 엔드
이밖에 베스널 그린(Bethnal Green)은 색슨인 ‘빌다(Bilda)의 대지’라는 의미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18세기 이후 견직공들이 집단 이주하여 수공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포플러(Poplar) 구는 원래 이스트 엔드 동쪽의 숲지대였다. 그 이름 자체가 이를 나타낸다. 이 일대를 뒤덮은 숲은 런던 항 부두가 확장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쇼어디치(Shoreditch) 구는 19세기에 목재가공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해크니(Hackney)의 경우 런던 북부의 넓은 지역을 포함하기 때문에 템즈강변 북쪽 좁은 지역에 밀집한 이스트 엔드의 사회적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찰스 부드의 조사 자료에도 이 구의 빈곤인구 비율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더 낮게 나타난다.9)
왜 도심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 지역이 빈민가로 변했는가. 사실 전통적인 도시에서 상인과 부유한 사람들은 도심에서 살았고, 빈민은 도시 외곽에 머물렀다. 런던의 경우 18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인들은 구 런던시 서쪽 교외로 이주하였고, 그 반면에 상당수 노동자와 빈민이 구 런던시 바로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 이스트 엔드에 빈민이 급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 때문이다.
우선, 빅토리아 시대에 런던 도심과 웨스트 엔드 지역에 대형 전시공간과 석조건축물들이 세워졌는데, 이에 따라 건축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런던 도심으로 몰려들었다. 이 공사장 인부들은 자연스럽게 화이트채플과 같은 구 런던시 인근의 싸구려 숙박시설에 머물렀다. 대영박물관, 왕립미술관, 자연사박물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등 이 빅토리아 시대의 대형 석조건물은 그 규모만큼이나 공사기간이 길었으며, 그만큼 더 많은 건축노동자들이 이스트 엔드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19세기에 런던 항의 부두 증설과 함께 하역작업에 필요한 부두노동자의 수가 급증했으며, 이들 대부분이 이스트 엔드에 주거지를 마련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런던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을 높였고, 그에 따라 기존의 런던 항에 새로운 선창과 부두가 들어섰다. 1799년 웨스트 인디아 부두(West India Docks)가 독 섬(Isle of Dogs)에 신설된 이래 와핑(Wapping), 블랙웰(Blackwell), 런던 타워, 밀월(Millwall), 웨스트햄(Westham) 등 템즈 강변에 잇달아 새로운 부두가 건설되었다.10) 19세기에 대형부두 외에도 중소 선창이 대거 들어선 것은 강변 부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그 가치를 인식하여 부두 운영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항만이 커질수록 부두노동자들 외에도 하역작업과 관련된 여러 분야의 고용이 증가하였다. 통메장이(cooper), 밧줄 제조공, 목공 등이 숙련된 부두노동자와 함께 정규적으로 일거리를 맡았다. 그들 아래에는 무수한 임시노동자들이 있었다. 1887년 비어트리스 포터(Beatrice Potter, 1858-1953)는 웨스트-이스트 인디아 부두, 런던-세인트 캐서린 부두, 밀월 부두 등 주요 선창회사를 방문하여 노동자 고용규모를 조사하였다. 세 선창회사에는 정규 및 비정규직 노동자 6,199명이 고용되어 있었다. 중소규모의 부두를 고려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밀월 부두 노동자들이 독 섬에 거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 대부분이 이스트 엔드의 화이트채플에 거주하고 있었다.11)
한편, 19세기에 대륙 출신의 이민이 급증하였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스트 엔드에서 그들의 삶을 꾸려나갔다. 19세기 전반에는 주로 아일랜드 이민이, 그리고 1880년대 초부터는 러시아령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 이민이 이스트 엔드로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유태인 이민이 급증한 것은 1882년 임시규제법 이후 러시아 정부가 자국에서 유태인을 의도적으로 추방하려는 정책을 폈고 여기에 이민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러시아 및 폴란드 해운업자들의 이해가 맞물렸기 때문이다.12) 당시 동유럽 난민들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목적지는 런던이었는데,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 특히 영국은 이민에 대해 별다른 규제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880-1914년 사이에 러시아령 폴란드 및 러시아 유태인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이 이민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물론 미국으로 향했지만, 같은 기간에 적어도 1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국으로 들어왔다.13)
이 시기 유태인 이민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인구센서스 자료에서 러시아 및 러시아령 폴란드 이민자 수를 통해서 유태인 이민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이민 대부분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및 웨일즈에 거주하는 이들 지역 출신 이민자 수는 1881년 1만 4,468명, 1891년 4만 5,074명, 1901년 8만 2,844명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런던 거주자는 각기 8,709명, 2만 6,742명, 5만 3,537명이었다.14) 이민의 60% 이상이 런던에 몰려 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은 이스트 엔드에서 고달픈 삶을 살았을 것이다. 유태인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이민을 떠났다. 그들에게는 이스트 엔드야말로 생활비가 적게 들면서도 쉽게 일거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류・제화・가구제조업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생산조직이 이 지역의 인구 유입을 자극하였다. 당대 사람들이 고한제(sweating system)라고 불렀던 이 생산방식은 한편으로는 당시의 기술혁신, 시장수요의 변화 그리고 저임 노동인구의 증가라는 새로운 환경의 산물이었다. 양복업의 경우 기존의 고급정장 외에 싸구려 기성복 수요가 늘면서 이러한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만한 새로운 생산조직이 필요하였다. 고한제란 도매상이나 중매상의 하청 일감을 맡은 생산자가 좁은 작업장에서 저임 노동력을 고용하여 생산하는 방식을 가리켰다. 이러한 생산이 가능했던 것은 재봉틀과 같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미숙련노동자들을 광범하게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한제 작업장은 소규모여서 공장법의 적용대상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이와 같은 생산조직은 공장제도가 확대되던 19세기 후반의 추세와 동떨어진 고졸적 형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방식 또한 기술혁신과 소비시장의 변화와 이민 증가라는 새로운 근대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15) 이스트 엔드의 경우 고한제 경영자는 주로 유태인 이민 출신이었다. 좁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저임 노동자들도 그들의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동유럽 출신 유태인들은 가족단위로 이민을 떠났고, 또 대부분 수공업이나 상업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한제야말로 그들의 여건에 가장 적합한 일거리였다. 이스트 엔드에 정착한 초기에는 고한제 작업장에서 일을 배우다가, 시간이 지나면 독립하는 사례가 흔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19세기에 이스트 엔드의 인구 증가는 공사판, 부두 하역작업, 이민, 고한제 등과 직접 연결된다. 이러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9세기 숙련노동자들의 정체성을 뜻하는 자조나 체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임금, 비정규노동, 실업 등의 문제는 항상 또는 간헐적으로 이들의 삶을 괴롭혔다. 이들이 거리의 술집이며 부랑아며 범죄자들의 이미지와 겹치면서 이스트 엔드는 단순한 지리적 실체를 넘어 빈곤을 상징하는 언어로 자리잡았다. 그 언어는 구 런던시나 웨스트 엔드의 번영과 대조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3.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
이 글에서는 1880년대 평론지(또는 정간물)에 실린 논설들 가운데 특히 이스트 엔드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깊이 다룬 36편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발표연도별 분포에서 특이한 것은 1883년과 1888년에 다른 해보다 훨씬 더 많은 논설이 실렸다는 점이다.16) 1883년에는 이스트 엔드의 실태를 다룬 여러 소설과 팜플렛이, 1888년에는 이 지역 주민에 관한 찰스 부드의 논문이 발표된 데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한편 평론지의 정치적 성향에 따른 커다란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빈곤은 정치 성향의 차이를 넘어 당대 지식인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기고자들의 다수는 실제로 자신의 개혁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이스트 엔드에서 사회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국교회 성직자로서 빈민복지관 토인비 홀(Toynbee Hall) 설립을 주도한 새무얼 바넷과 그의 부인 헨리타(Henrita Barnett, 1851-1936), 빈민지역 주택개량운동에 뛰어든 옥타비아 힐, 실론 총독을 역임한 로버트 그레고리 경(Sir Robert Gregory, 1817-92), 찰스 부드와 그의 사회조사에 협력했던 비어트리스 포터[비어트리스 웹] 등이 눈에 띈다. 노조지도자 조지 하월(George Howell, 1833-1910), 경제학자 알프렛 마셜(Alfred Marchall, 1842-1924), 마이클 멀홀(Michael G. Mulhall) 등도 제각기 자신의 경험이나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1880년대에 ‘이스트 엔드’ 지명 앞에는 항상 ‘버려진(outcast)’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브룩 램버트(Brooke Lambert)에 따르면, 이 수식어는 이스트 엔드의 삶의 경험의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불량주택, 빈곤선 이하의 소득,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비롯하는 갖가지 불행이 ‘버려진’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의미들이다.17) 이 시기 평론지나 정간물에 실린 논설들은 이스트 엔드의 어떤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첫째, 이곳의 빈곤 실태를 조사한 찰스 부드의 사회조사 연구를 들 수 있다.18) 그는 처음에는 스텝니만을 조사대상으로 삼았으나 곧 이어 이스트 엔드 전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부드와 그의 동료들은 이스트 엔드 66개 학교운영위원회(school board)를 방문하여 그 등재기록을 검토하고 이밖에 빈민구제위원이나 복지관(settlement) 자료, 인구조사자료 등을 살폈다. 1887년 그의 조사대상에 포함된 이스트 엔드 인구는 90만 8,958명이었다. 그는 소득수준에 따라 이들을 A에서 H까지 8개 집단으로 분류하고 주당 수입 18-20실링 이하의 집단(A, B, C, D)을 빈곤계층으로 설정하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이스트 엔드 주민 가운데 30만 3,196명(35.2%)이 빈곤선 이하에 머물렀다.19) 그의 원래 의도는 이스트 엔드의 빈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다는 점을 밝히는 데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차이는 뚜렷한 것이었다.20) 이러한 차이는 직업구성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스트 엔드에서 비중이 높은 직종은 의류(dress), 가구(furniture), 항만하역 등이었다. 이들 직종 종사자는 전체 노동자의 30%였다. 이스트 엔드를 제외한 런던에서 이들 직종 종사자 비중은 11%에 지나지 않았다.21)
둘째, 빈민의 주거환경 실태를 소개하고 그 개선방안을 다룬 논설들이 있다.22) 이 문제를 다룬 논설들은 이스트 엔드 지역의 불량주택의 실태를 보여주면서 정부와 민간단체들의 개선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는 빈민의 소득수준 및 주택 규모에 비해 집세가 무척 높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구 과밀에 따른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비롯한다. 옥타비아 힐에 따르면, 2-3개 방이 딸린 주택은 노동자들에게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이런 집들에서 살 수 없으며, 기가 죽은 채 뒤편 집이나 후미진 골목에 거주한다. 그렇지만 단칸방 하나를 얻어 커튼이나 칸막이를 쳐서 작은 방으로 나누는 것에 곧 익숙해져서 그런 공간에서도 편안함을 느끼며 친구를 부르기도 한다.”23) 힐은 빈민의 소득 수준을 감안하여 방 한칸 딸린 서민용 주택모델을 개발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택 개량은 정부의 직접 투자보다는 간접 지원을 통해 민간부분에서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직접적인 지원은 지금까지 기금을 운용하면서 근로민중의 빈곤에 대처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해온 사회단체나 개인의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것이었다. 힐은 공적 지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공적 자금의 지원 또는 원조 계획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는 토대 위에서 근로민중의 빈곤에 대처함으로써 그들을 도와온 사회단체나 개인들의 독자적인 활동의 확대를 방해한다. 그들의 자본이 완전히 잠식될 가능성이 엿보이면 위험을 무릅쓸 리 없는 사람들이 지방세나 국가 지원을 받은 건축 때문에 갑작스럽게 손해를 보면서 집이 헐값으로 팔리는 사업에 더 매진할 수는 없는 것이다.24)
빈민가의 주택 개량을 위해 마련된 기존의 법체계는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Acts)을 통해 지방당국이 슬럼가의 불량한 주거환경을 보완하고 상하수도를 비롯한 위생시설을 유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25) 다른 하나는 불량주택의 철거와 재건축에 관련된 일련의 노동자주거법(Artisans and Labourers' Dwellings Acts)이다. 이 법은 지방당국이 불량주택 소유자에게 집의 개량 또는 철거 명령을 내리고, 이와 아울러 개량이 불가능할 경우 소유자의 요청에 따라 지방당국이 매입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규정하고 있다.26)
빈민지역의 주택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일부 논설은 이러한 법체계가 실효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월에 따르면, 그것은 슬럼가의 주택 소유자 대부분이 개축 또는 신축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빈민가의 불량주택에서 대지와 주택 소유권은 분리되어 있다. 주택 소유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고, 지주는 개량비용을 부담하기를 꺼려한다. 또한 도심 지역의 재건축 비용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힐과 달리, 하월은 공적 부문에서 대규모 주택 신축 또는 개축사업을 맡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공채나 국채를 이용하여 대규모 주택건설기금을 조성한 다음에 노동계급을 위한 주택재개발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계산으로는 숙련노동자층의 주택 신축은 연 5%, 빈민층의 경우는 연 1-2.5%의 이윤이 가능한 선에서 공급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27)
여기에서 경제학자 마셜의 위성도시 건설안이 특히 흥미롭다. 런던 교외에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고, 소자본으로 영업할 수 있는 직종(의류 등)을 육성하면서 빈민층 가운데 희망자를 이주시킨다는 내용이다. 멀홀은 이 계획의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고 있다. 그의 계산으로는 이스트 엔드에서 1인당 연간 주거비는 8파운드 15실링 인데 비해, 신도시의 경우 6파운드 10실링에 지나지 않는다. 민간부문의 주도로 단지를 조성해도 수익성이 있다는 것이다.28)
셋째, 상당수 논설들은 이스트 엔드의 노동조건, 특히 고한제 생산방식을 상세하게 검토한다.29) 고한제는 1880년대 빈곤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관심사였다. 특히 1887년 이후 고한제에 관한 상원 조사위원회가 네 차례에 걸쳐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이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30) 비어트리스 포터는 상원 조사위원회 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이스트 엔드의 고한제도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논설을 썼다. 이 생산조직의 확산은 무엇보다도 의복시장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즉 고한제 아래서 생산된 양복은 고급의복이 아니었다. 고한제 경영자는 상류층 인사의 값비싼 양복이며 코트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숙련 양복공의 경우 다량의 기성복을 도매점에 공급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노동의 질과 가격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양복업종의 변화, 지난 30여 년 사이에 일어난 소매업에서 도매업으로의 변화의 결과이다. 이런 변화 자체는 재봉틀 및 분할노동(subdivided labour) 도입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31) 포터가 주목한 것은 의류분야 전체에서 남성노동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주로 이스트 엔드 가내작업장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내 생각으로, 바지 및 조끼 제조분야에서 여성이 만만치 않으면서도 성공적인 경쟁자가 되었다는 것은 수도 런던 전체의 양복분야 인구조사 통계에서 드러난다. 남성 노동자는 1871-81년간에 실제로 감소한 반면에 여성노동자는 25% 증가했기 때문이다. 유태인이 일하는 생산업에서 남성이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는 징후는 없으므로, 외국인 이민이나 여성에 의해 주로 대체되는 부류가 영국인 숙련양복공이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것은 집에서 일하는 가내양복공들의 탓이다. 왜냐하면 가내작업은 소규모 하청업자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의 훈련장이기 때문이다. 가장의 아내와 딸들이 그의 조력자이며 그들은 다른 남성노동자의 경쟁자로 등장한다.32)
포터는 이스트 엔드 지역에서 가족 외에 다른 노동자들을 고용한 유태인 코트 생산업자 901명의 자료를 입수하여 분석했다. 조사 결과, 25명 이상을 고용한 작업장은 1.6%(15곳)에 지나지 않았고, 10-25명 이내가 22.3%(201곳), 10명 미만인 업체가 전체의 76%(685곳)에 이르렀다. 맞춤 위주의 고급 코트를 만드는 업체는 극소수(54곳)였고, 중급 코트 제조가 192곳, 나머지는 모두 최하급의 싸구려 코트를 만드는 곳이었다. 이들 작업장은 화이트채플, 마일 엔드 및 세인트 조지의 일부지역에 몰려 있었다. 1 평방마일 면적의 이 지역에 수 만 명의 유태인 이민들이 살고 있었다.33) 이들 작업장에 관련된 자료를 살펴본 끝에, 포터는 당대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우선, 고한제 경영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신문에서 그리는 고한제 경영자의 이미지는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작업장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다.34) 그러나 포터가 조사한 자료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다. 유태인 코트 제조업자의 근면성은 정평이 나 있었다. 사실 이스트 엔드의 유태인 사회는 극빈층이 밀려드는 “밑바닥 인생의 저수지”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 자리 잡은 코트제조업 또한 “가장 낮은 임금의 일거리, 가장 황폐한 작업장, 가장 더러운 건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근면한 유태인들은 좀더 여건이 나은 지구나 직종으로 옮기면서 이 열악한 생산조직을 다른 신참에게 넘기는 것이었다.35)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한제와 하청제(subconstracting system)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상원 조사위원회 보고서나 일반 언론에서도 고한제는 하청제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고한제는 “생산자가 아닌 상인이 중간업자(middleman) 또는 고한제 경영자(sweater)와 하청 계약을 맺어 상품을 확보하는 생산조직”으로 여겨졌다. 포터에 따르면, 이 두 개념을 동의어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다. 하청제는 전국의 어느 산업분야에서나 광범하게 나타난다. 이에 비해 고한제는 장시간 노동, 저임금, 나쁜 위생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 생산 형태만을 가리킨다. 즉 “하청제는 고한제 없이도 존재하고, 고한제는 하청제 없이도 존재한다.”36)
그렇다면, 이스트 엔드와 같은 빈민지역에서 고한제 생산조직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서 바우먼(Arthur Baumann)의 설명을 참조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한제가 싸구려 제품을 찾는 하층민의 수요를 겨냥한 생산조직으로 생각한다. 생산의 저렴화와 신속화야말로 고한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우먼은 무조건 고한제 생산과 하층민용 싸구려 제품을 연결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항변한다. 고한제는 하층민의 의복 수요와 특히 외국인 이민들의 수요에 맞추어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제도는 대불황기의 소득배분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대불황기에 사람들의 소득 수준이 낮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간의 물가하락과 더불어 정규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은 높아지고 있었다. 정규 노동자, 서기, 상점주, 그밖에 고정 소득을 올리는 많은 사람들이 비록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상승하고 싶은 열망과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 자켓을 벗어버리고 정장에 블랙 코트를 걸치고 중절모를 눌러썼다. 불황과 더불어 사치품 수요는 떨어졌지만, 오히려 실질 소득이 상승한 사람들은 값이 싸면서도 깔끔하고 세련된 의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바우먼에 따르면, 이와 같은 기성복 수요의 변화는 “현대 의복의 민주주의”를 반영한다. 고한제는 이러한 수요변화의 산물이었다.37)
이스트 엔드의 노동실태를 언급하면서 부두노동을 빠뜨릴 수 없다. “부두나 가라”(Go to the docks)라는 말은 희망이 없는 상태를 비유하는 19세기의 언어였다. 일반 사람들은 부두노동자들을 “가망이 없는 빈털터리”(irrecoverable never-do-wells), 또는 “추락한 천사”(down-fallen angel)로 표현했다. 그들은 막노동자의 부두 유입을 경계하였고, 박애주의자들은 자극적인 어조로 부두의 범죄를 강조하기도 했다.38) 부두노동자들 가운데 외국인 이민은 별로 없었다. 이들은 대체로 소수의 정규노동자와 다수의 비정규 노동자로 구성되었다. 비어트리스 포터의 자료에 따르면, 그녀가 조사한 6,199명의 부두노동자 가운데 정규직은 35%를 차지했다. 그러나 중소부두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낮아질 것이었다. 정규노동자들은 숙련공과 같은 체통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당소득이 20실링 이상이어서 빈곤선 이하 집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나머지 부두노동자들은 모두 빈곤선 아래에 머물렀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임감이 있을 때 우선 고용되는 사람들(ticken men)이고, 다른 부류는 일감이 넘쳐날 경우에 고용 기회를 얻는 사람들이었다. 계절적 불황이나 경기변동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바로 이 마지막 부류였다. 이들이 때로는 이스트 엔드 지역의 범죄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었다.39)
넷째, 이스트 엔드에서 봉사활동 경험을 소개하거나 이 지역에 대한 일반인의 뿌리 깊은 편견을 비판하는 논설들도 많다.40) 예컨대 케티 카우퍼(Katie Cowper)는 성공회의 한 여성전도단체에서 활동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녀는 학교 어머니회 모임에서 전도를 하기도 하고, 부녀 클럽에서 함께 바느질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에 관한 강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소녀들의 모임을 이끌면서 카드 게임이나 도미노 놀이 또는 알파벳 놀이를 소개하여 열띤 호응을 얻었다.41) 카우퍼가 보기에, 이스트 엔드 주민들에 관한 풍문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이스트 엔드 전체가 온갖 사악함과 부도덕으로 가득하다는 상식적인 견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구역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런던의 그 지역 사람들에게서 내가 보았던 모든 것으로 미루어, 지나친 음주나 부도덕은 내가 맡았던 다른 지역의 교구보다 덜한 편이었다.42)
종교단체나 또는 다른 사회단체의 일원으로 이스트 엔드에서 활동한 인사들은 한결같이 극소수를 제외하면 빈민가 주민들의 삶이 부도덕하거나 타락해 있지 않다고 강변한다. 그들에게 적절한 휴식과 교육, 그리고 리크리에이션의 기회를 제공하면 할수록 암울한 분위기가 사라지리라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인내에 경탄을 보내기도 한다.43) 빈민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주장 또한 근거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스트 엔드 빈민들 사이에 삶의 고통을 인내로 참아나가는 경향이 짙은 것은 그들이 단순한 신앙, 특히 영생에 대한 암묵적인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메리 진(Mary Jeune)에 따르면, 이러한 신앙에서 배태된 희망이야말로 지상에서의 삶을 참아낼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었다. “천국이 부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물려받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내게 보이지 않았다.”44)
마지막으로, 이스트 엔드 유태인 이민 문제를 다룬 논설들이 있다.45) 1880년대 초부터 급격하게 증가한 유태인 이민에 대해 영국인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물론 영국에서는 대륙의 경우와는 달리 유태인 혐오증(Judaeophobia)이 사회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을 사회 외부의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편견은 뿌리 깊이 남아 있었다. 어떤 필자들은 이 혐오증의 기원을 그들의 ‘종족적 배타성’(tribal exclusiveness)에서 찾는다. 골드윈 스미스(Goldwin Smith)에 따르면, 유태인들은 오랫동안 편협하게도 자민족 위주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이 혐오증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유태인은 그들만의 고유한 종교적 우상에 집착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모든 다른 민족은 적어도 인류에 대한 헌신을 공언한다. 그들 모두는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보편적 형제애가 실현될 날을 기대한다. 유태인만이 자기네 종족이 인류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다른 민족과의 궁극적인 연대가 아니라 다른 종족 모두에 대한 승리를 대망한다.”46)
그럼에도 몇몇 논설들에서 유태인의 근면성에 대한 경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포터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작업장의 상태가 생각만큼 열악하지 않다는 점을 강변하는데, 이는 영국인 공장주가 낮에 자신의 사무실이나 집에 머무는 반면, 유태인 마스터들은 노동자와 함께 작업하기 때문이다.47) 데이빗 실로스(David Schloss)는 이스트 엔드의 유태인 양복업자와 의류 제조업자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근면한 생활태도를 칭송한다. 여기에서는 유태인 이민 급증에 따른 실업의 두려움이나 극단적인 유태인 혐오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화이트채플에서 만난 한 기계공은 매주 3일씩 시간급을 받으며 작업장에서 일했는데, 근무하는 날이면 14시간 이내로 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는 항상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일하려고 했다. 대다수 영국인 노동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이다.48)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유태인 노동자는 여러 경우에 유태인 아닌 이웃보다 더 장시간 일하려고 한다. 유태인은 낮은 임금을 받고서도 일하려고 한다는 통념은 내가 보기에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숙련이 없는 노동자는 유태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불행하게도 어떤 종류의 임금이든 제아무리 임금이 낮더라도 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숙련을 지닌 유태인들이 많으며, 그들은 비유태인 노동자들 못지 않게 높은 임금을 받는다.49)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들은 이 지역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빈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특히 1880년대는 주기적 불황, 농업공황, 이민, 치열한 생존경쟁이 점철된 시기였다. 음주, 조혼, 무모한 다산, 만성질환 등으로 시달리는 극빈층은 실제로는 ‘가망 없는 계급’(hopeless classe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씌어졌다.50) 찰스 부드도 처음 사회조사를 시작할 때에는 가난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진정한 노동계급’과 극빈층을 구별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 논설들은 그 극빈층에서도 개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난, 질병, 저소득 등 여러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일반의 편견과는 달리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인구과잉과 조혼과 이민이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일 뿐이었다.
4. 빈곤과 이데올로기
이스트 엔드에 관심을 기울인 박애주의자들은 실제로 당대의 문학 속에서 형상화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월터 베산트(Walter Besant)의 소설 『만인의 생활상(All Sorts and Conditions of Men)』(1882)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고등교육을 받은 부유한 상속녀 안젤라 메신저(Angela Messenger), 젠틀먼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이 원래 화이트채플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에 이스트 엔드에서 평범한 가구공으로 살아가는 해리 가슬릿(Harry Goslet), 두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이스트 엔드 주민들에게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문화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기쁨의 궁전’(Palace of Delight)을 세운다.
베산트의 소설에서 박애주의자의 꿈을 보여주는 ‘기쁨의 궁전’은 그 몇 년 후에 현실로 나타났다. 소설의 내용에 공감한 박애주의자들의 모금활동에 힘입어, 이스트 엔드의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시설 ‘인민궁전’(People's Palace)이 세워진 것이다. 이곳은 원래 ‘기쁨의 궁전’을 모방하여 음악당, 도서관, 여가 시설, 체육관 등 주민들에게 문화활동과 리크리에이션의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888년 개관한 이후 이 시설은 베산트의 소설에 나오는 원래의 구상과는 상당히 다르게 운영되었다. 모금 규모가 예상을 밑돌게 되면서 인민궁전 운영자들은 수입을 늘리기 위해 중간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90년대 이후에는 기술교육기관으로 바뀌었다.51)
빈민에게 문화를 제공한다는 원래의 계획에서 보면 이것은 “실패한 사회공학”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52) 실제 인민궁전에서 내세운 ‘문화’라는 구호는 1870년대 이전 상대적 번영기에 더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빈민과 노동자에 대한 문화적 관심은 웨스트 엔드 부유층 사이에 박애주의가 깊이 뿌리내리고 그 반면에 차티즘과 같은 급진적 노동운동이 기세를 잃은 빅토리아 시대 중기에 오히려 더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880년대는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이전과 뒤바뀐 시대였다. 경제불황, 만성적인 주택 부족, 빈곤의 심화, 사회주의 운동, 노동불안이 잇달았다.
인민궁전의 실패는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의 관심이 결국 빈민의 시각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빈민을 새롭게 주조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선행위 가운데 상당수는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에 따르면, 빈곤을 취급하는 적절한 길은 “가난이 나타날 수 없는 그런 토대 위에 사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이러한 목적의 장애일 뿐이다. 이타적 동기로 자선을 행하는 것은 문제를 실제로 분석하는 것과 다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독설을 서슴치 않는다. “자선은 무수한 죄악을 만든다.”53) 실제로 와일드는 소설가 베산트를 겨냥하여 비판하기도 한다. “엄청나게 그리고 매일 증가하는 소설가라는 작자들, 그들에게 태양은 항상 이스트 엔드에서 떠오른다. 그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인생이 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점이다.”54)
비단 와일드의 조롱이 아니더라도, 당대에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갖가지 구호활동이 난무하면서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나도 박사를 둘러싼 추문 사건이다. 그는 이스트 엔드 빈민가 어린이들의 참상을 목격한 후, 중국에서 의료 선교를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이 어린이들의 구호활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설립한 구호단체인 ‘이스트 엔드 청소년 전도단’(East End Juvenile Mission)은 이 지역 자선운동의 대표적인 단체로 성장하였다.55)
1877년 봄 바나도는 창녀와 사통, 기부금 횡령 등의 추문사건에 휘말려들었는데, 특히 이 사건의 진상조사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자선조직협회’(Charity Organization Society)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이에 바탕을 둔 합리적 대안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종교단체의 기금이나 구호활동에 대해 불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바나도 박사 추문사건은 “종교적 자선과 세속적 구호, 전통적 구호와 과학적 접근” 사이의 갈등을 나타내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트 엔드 자선활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자선협회 인사들은 바나도를 비롯한 종교단체의 자선이 겉으로 종교적 열정과 고결함과 진정성(truthfulness)을 표방하더라도 실제로는 빈말(cant)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자선이란 빈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그들은 과학적 조사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빈민이 자조를 통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끄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56)
COS는 1833년 신빈민법(New Poor Law)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단체였다. 그들은 공적 구호와 개별적인 자선을 엄격하게 구별하고자 했다. 그들은 1870년대 이후 여기저기 난립한 개별 자선단체들이 오히려 신빈민법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사적 자선은 ‘자선을 받을 만한’ 빈민에게만 선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자선을 받을 수 없는’ 빈민(pauper)이 바로 공적 구호의 대상이었다.57)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인격’(character)이었다. 인격을 가진 빈민은 자조를 통해 빈곤 상태에서 벋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선은 그들의 자조를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바넷이나 힐과 같은 COS의 주요 인물들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별적인 자선행위, 즉 원외구호가 오히려 빈민을 더 나태와 타락으로 빠뜨리고 부도덕을 낳고 있다고 생각했다.
1880년대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을 쓴 지식인들의 언어에는 진화론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포터, 마셜, 윌리엄 부드(William Booth) 등이 도시 빈민을 가리키는 언어로 즐겨 사용한 ‘찌꺼기’(residuum)라는 말은 다윈의 ‘자연도태’ 개념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1882년 앤드류 먼즈(Andrew Mearns)가 자신의 책 이름58)에 처음 사용한 이래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버려진 런던’(outcast London)이라는 말도 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 과정에서 생존에 적합한 사람들이 승리를 거두는 반면, 적합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도태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빈곤층이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기묘한 현실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게 보였다. 도태된 사람들이 생존한 것은 문명이 그들을 방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의 세계와 다른 점이었다.59) 스테드먼 존스(J. Stedman Jones)에 따르면, 이 시기에 사회진화론은 도시 빈곤지역을 설명할 수 있는 유력한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대도시 빈민은 “원시종족”(primitive tribes) 또는 “야만인”으로 비유할 수 있고, “메울 수 없는 유전적 결함”(ineradicable hereditary gap)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사회진화론은 “기존의 사회관계를 정당화하고 그와 동시에 인종 및 계급 불평등에 대한 믿음을 전파하는”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60)
과학적 조사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부드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은 ‘자연선택’의 구현체였다. 기업가들의 이기심이야말로 “생산, 분배, 경영”의 추진동력이며, 그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맡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을 것이었다.61) 1888년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그가 고한제 경영자를 중간착취자로 바라보는 견해를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오히려 고한제 경영자들은 “산업을 선도하는 지성과 판단력을 갖춘,” 그리고 “부를 자본으로 바꾸고 그 자본을 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타성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슬로건을 무조건 높이 평가할 수 없었다.62) 다만, 문명사회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조치를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선에 머물러야 했다. 사회주의는 문명의 기반인 개인주의를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제한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63)
박애주의나 체계적인 사회조사를 표방한 도덕주의자들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일종의 생물학주의(biologism)와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진화가 반드시 진보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다. 인간은 자신의 물질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일 환경이 악화되었을 경우 사람들은 이에 적응하여 타락한 존재로 변모할 것이다. 타락한 환경 아래서는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결국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바넷이나 힐은 국가의 지원을 주장하면서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을 통한 문제 해결의 길을 모색했다. 이를테면 힐이 빈민주택 개량활동에 참여하면서도 적정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민간사업의 모델을 구현하고자 노력한 것도 이러한 사회관에서 비롯하였다.64)
5. 지식인과 이스트 엔드의 거리
1880년대 평론지의 논설들은 대부분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의 ‘사회적 양심’을 강조하는 박애주의 경향을 보여준다. 논설의 필자들은 빈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빈민의 자구적인 노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여건의 조성, 즉 간접적인 지원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자조’의 가치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65) 이들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량주택 개량에 관한 기존의 법체계를 보완하고 특히 지방당국이 구체적인 집행능력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조혼과 다산을 막기 위한 계몽과 아울러 이민에 대한 규제조치가 필요했다. 이와 함께 좀더 많은 사회단체와 개인들이 이 지역의 빈곤 퇴치에 참여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들의 관심과 후원이 증가할수록 이스트 엔드 빈민과 노동자들 또한 ‘자조’를 통한 삶의 향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은 이스트 엔드의 다양한 사회적 풍경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설을 썼고, 이를 통해 공공 여론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 어느 면으로 보면 이들의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논설을 통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의 논설 자체가 이스트 엔드의 빈곤과 타락을 더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물론 당시 지식인들의 대다수가 자조의 측면에서 빈곤문제의 해결만 강조했던 것은 아니다. 페이비언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국가 간섭의 강화와 국가 주도에 의한 해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와 주장은 당시 식자층 일반에게 널리 읽혔던 잡지와 발행부수가 많은 평론지보다는 이들 단체가 펴내는 기관지(機關紙)에서나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영향력 있는 잡지라면 그 정치적 성향이 무엇이든, 여전히 1834년 신빈민법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빈곤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국가 간섭과 사회주의적 대안이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은 다음 세기에 접어든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1880년대에 평론지 논설의 필자들은 이스트 엔드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섰는가. 여러 가지 헌신적인 활동과 빈곤에 대한 깊은 성찰에도 불구하고, 중간계급 출신 도덕주의자들은 이스트 엔드 주민들의 삶을 어디까지나 자신의 시각을 통해 바라보았다. 자선과 봉사도 중간계급의 의도대로 그들을 변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아직도 빈곤은 사회구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스트 엔드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그들에게 먼 곳일 뿐이었다.
<Abstract>
The East End: A Land Close, Yet too Far
Youngsuk Lee
The East End has been known as one of the poorest districts in London for a long time. Its image which reminds us of slums, urban crimes, drunkards and unemployed labourers, was engraved among the people in the 1880s. One of important causes that accelerated the formation of such an image was public languages and discourses in the 1880s. This study analyzes about thirty-five articles published in six major reviews at the time in order to examine how the middle-class intellectuals saw the East End and what image they formed.
Most of articles in the reviews emphasizes their indirect support on the poor which enable to extract the self-effort from them. In this point it represents the value of self-help in the mid-Victorian age. Writers of the articles were interested in various problems of the East End. For example, they tried to seek some methods for the housing improvement of the slums, or discussed labour conditions of the sweating system. They also introduced their experience of charity activities in the East End to the readers, and dealt with the Jewish immigration.
These intellectuals wrote their articles on the basis of scientific inquiry data, and they hoped that their articles could contribute to the formation of social opinion on this district. They seemed to be affected by social Darwinism. Their articles drew social interest on the East Enders, while they were also helpful in making negative images of the East End by picturing the social landscape of the region.
How close did the writers in the 1880s approach to the East End? In spite of their devotion and reflection on the region, they saw inhabitants' life of the East End on the basis of their own perspectives. The writers supported the inhabitants in order to suit the East Enders' life to their own intentions. According to their views, poverty stemmed not from the social structure, but from individual activity. Although the writers tried to get nearer to the East End, the region was still too far to them.
(Gwangju University/ longstone21@hanmail.net)
주제어
1. 이스트 엔드(East End)
2. 박애주의자(philanthropist)
3.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4. 버려진 런던(outcast London)
5. 고한제(sweating system)
◆ 가우리정보센터<GBC>
이스트 엔드, 가깝고도 먼 곳
이영석(광주대)
1. 이스트 엔드의 이미지
1888년 8월 31일 런던 화이트채플(Whitechapel)의 한 거리에서 나이 지긋한 매춘부 폴리 니콜스(Polly Nichols)가 목에 상처를 입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후 11월까지 이와 비슷한 살인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다섯 명의 창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이 있었음에도 범인은 끝까지 잡히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를 ‘살인마 잭’(Jack the Ripper)이라 불렀다. 그 당시 일간신문과 지역신문들이 이 사건을 다투어 추적 보도하면서 이스트 엔드(East End)의 어두운 밤거리, 매춘부, 술취한 주정뱅이,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혼탁한 거리와 빈민가의 허름한 집들이 더욱더 선명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사실 이스트 엔드는 19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런던 빈민가의 대명사로 불려지지 않았다.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은 아직 이스트 엔드의 빈곤 문제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목사와 저널리스트 또는 외국 방문객들이 이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중대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적이 없었다. 이스트 엔드는 19세기 전반에 이미 빈민지역의 하나로 떠올랐으면서도, 아직까지는 빈민가의 전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트 엔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콜레라 때문이었다. 1849년, 1855년, 1866년 영국에 콜레라 전염병이 돌았을 때 특히 이 지역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1)
날품팔이 노동자와 실업자, 거리의 부랑아와 뜨내기 행상으로 들끓는 이스트 엔드의 이미지는 대체로 1880년대에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우선 이 지역의 빈곤 문제를 다룬 문헌과 팜플렛이 쏟아져 나왔다.2) 이와 함께 토머스 바나도(Dr. Thomas Barnardo, 1845-1905), 옥타비아 힐(Octavia Hill, 1838-1912), 새무얼 바넷(Samuel Barnett, 1844-1913)과 같은 박애주의자 또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이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펴면서 그 실상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찰스 부드(Charles Booth, 1840-1916)가 이곳의 빈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스트 엔드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어느 사이에 빈곤의 대명사로 불렸다. ‘살인마 잭’ 사건은 이스트 엔드의 이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다시 확인하고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1880년대에 이스트 엔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짙어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이 지역을 묘사하고 언급한 공적 언어와 담론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근래 이스트 엔드에 관한 연구로는, 찰스 부드의 사회조사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1880년대 유태인 이민의 삶을 중심으로 이스트 엔드의 사회사를 재구성한 것 또는 개인적 경험을 정리한 회상기들이 눈에 띈다. 이와 함께 1880년대의 소설이나 팜플렛을 통해 이스트 엔드의 이미지 형성과정을 다룬 연구도 있다.3)
이 글 또한 1880년대 평론지(review)에 실린 논설을 특히 주목한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는 ‘잡지의 전성시대’로 알려져 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평론지와 잡지들이 정치・경제・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관해 경쟁적으로 공공 여론을 형성해 나가던 시대였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좀더 광범한 독자들이 전통적인 귀족이 아닌 새로운 문필가들에게서 지식을 얻으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4) 당시 평론지의 필자들은 주로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여기에서는 1880년대 이스트 엔드를 다룬 여러 논설들을 통해서, 당대 중간계급 출신 문필가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또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했는가를 살피려고 한다.5)
2. 지리적 공간과 인구증가
19세기 런던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1801년에 100만 명을 넘지 않았던 인구는 1881년 383만 명, 1891년에는 422만 명에 이르렀으며,6) 그 가운데 30% 이상이 이스트 엔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사실 이스트 엔드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이 말이 공식적인 행정구역을 나타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1886년에 찰스 부드가 이 지역의 빈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설정한 8개 시구를 뜻하는 것으로 한다(지도 참조).7) 이 지역은 원래 런던 항의 부두 노동자들이 주로 거주하던 스텝니(Stepney)를 중심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그 주위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트 엔드는 구 런던시(City of London)의 동쪽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숲과 초지가 널려진 전원적인 분위기가 짙었고, 인구도 조밀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몇몇 시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스텝니는 이스트 엔드의 중심부이다. 지명은 색슨인 ‘스테바(Stebba)의 개간지’ 또는 ‘스테바가 상륙한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이스트 엔드란 이 시구를 뜻했다. 화이트채플(Whitechapel)은 원래 스텝니 교구의 한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이름은 13세기경 흰 돌로 예배당을 지은 데서 유래한다. 런던 동부지역으로 향하는 간선도로가 지나기 때문에 18세기에는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여관과 술집, 마굿간이 들어서서 소란스러웠다.8) 19세기에는 이곳의 싸구려 여인숙에 주로 부두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마일 엔드(Mile End)는 구 런던시에서 1마일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18세기에 이미 인구가 급증하는데, 주민 대부분은 주로 섬유분야의 수공업 장인들이었다.
<지도> 1880년대의 이스트 엔드
이밖에 베스널 그린(Bethnal Green)은 색슨인 ‘빌다(Bilda)의 대지’라는 의미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18세기 이후 견직공들이 집단 이주하여 수공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포플러(Poplar) 구는 원래 이스트 엔드 동쪽의 숲지대였다. 그 이름 자체가 이를 나타낸다. 이 일대를 뒤덮은 숲은 런던 항 부두가 확장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쇼어디치(Shoreditch) 구는 19세기에 목재가공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해크니(Hackney)의 경우 런던 북부의 넓은 지역을 포함하기 때문에 템즈강변 북쪽 좁은 지역에 밀집한 이스트 엔드의 사회적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찰스 부드의 조사 자료에도 이 구의 빈곤인구 비율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더 낮게 나타난다.9)
왜 도심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 지역이 빈민가로 변했는가. 사실 전통적인 도시에서 상인과 부유한 사람들은 도심에서 살았고, 빈민은 도시 외곽에 머물렀다. 런던의 경우 18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인들은 구 런던시 서쪽 교외로 이주하였고, 그 반면에 상당수 노동자와 빈민이 구 런던시 바로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 이스트 엔드에 빈민이 급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 때문이다.
우선, 빅토리아 시대에 런던 도심과 웨스트 엔드 지역에 대형 전시공간과 석조건축물들이 세워졌는데, 이에 따라 건축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런던 도심으로 몰려들었다. 이 공사장 인부들은 자연스럽게 화이트채플과 같은 구 런던시 인근의 싸구려 숙박시설에 머물렀다. 대영박물관, 왕립미술관, 자연사박물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등 이 빅토리아 시대의 대형 석조건물은 그 규모만큼이나 공사기간이 길었으며, 그만큼 더 많은 건축노동자들이 이스트 엔드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19세기에 런던 항의 부두 증설과 함께 하역작업에 필요한 부두노동자의 수가 급증했으며, 이들 대부분이 이스트 엔드에 주거지를 마련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런던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을 높였고, 그에 따라 기존의 런던 항에 새로운 선창과 부두가 들어섰다. 1799년 웨스트 인디아 부두(West India Docks)가 독 섬(Isle of Dogs)에 신설된 이래 와핑(Wapping), 블랙웰(Blackwell), 런던 타워, 밀월(Millwall), 웨스트햄(Westham) 등 템즈 강변에 잇달아 새로운 부두가 건설되었다.10) 19세기에 대형부두 외에도 중소 선창이 대거 들어선 것은 강변 부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그 가치를 인식하여 부두 운영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항만이 커질수록 부두노동자들 외에도 하역작업과 관련된 여러 분야의 고용이 증가하였다. 통메장이(cooper), 밧줄 제조공, 목공 등이 숙련된 부두노동자와 함께 정규적으로 일거리를 맡았다. 그들 아래에는 무수한 임시노동자들이 있었다. 1887년 비어트리스 포터(Beatrice Potter, 1858-1953)는 웨스트-이스트 인디아 부두, 런던-세인트 캐서린 부두, 밀월 부두 등 주요 선창회사를 방문하여 노동자 고용규모를 조사하였다. 세 선창회사에는 정규 및 비정규직 노동자 6,199명이 고용되어 있었다. 중소규모의 부두를 고려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밀월 부두 노동자들이 독 섬에 거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 대부분이 이스트 엔드의 화이트채플에 거주하고 있었다.11)
한편, 19세기에 대륙 출신의 이민이 급증하였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스트 엔드에서 그들의 삶을 꾸려나갔다. 19세기 전반에는 주로 아일랜드 이민이, 그리고 1880년대 초부터는 러시아령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 이민이 이스트 엔드로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유태인 이민이 급증한 것은 1882년 임시규제법 이후 러시아 정부가 자국에서 유태인을 의도적으로 추방하려는 정책을 폈고 여기에 이민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러시아 및 폴란드 해운업자들의 이해가 맞물렸기 때문이다.12) 당시 동유럽 난민들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목적지는 런던이었는데,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 특히 영국은 이민에 대해 별다른 규제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880-1914년 사이에 러시아령 폴란드 및 러시아 유태인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이 이민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물론 미국으로 향했지만, 같은 기간에 적어도 1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국으로 들어왔다.13)
이 시기 유태인 이민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인구센서스 자료에서 러시아 및 러시아령 폴란드 이민자 수를 통해서 유태인 이민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이민 대부분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및 웨일즈에 거주하는 이들 지역 출신 이민자 수는 1881년 1만 4,468명, 1891년 4만 5,074명, 1901년 8만 2,844명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런던 거주자는 각기 8,709명, 2만 6,742명, 5만 3,537명이었다.14) 이민의 60% 이상이 런던에 몰려 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은 이스트 엔드에서 고달픈 삶을 살았을 것이다. 유태인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이민을 떠났다. 그들에게는 이스트 엔드야말로 생활비가 적게 들면서도 쉽게 일거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류・제화・가구제조업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생산조직이 이 지역의 인구 유입을 자극하였다. 당대 사람들이 고한제(sweating system)라고 불렀던 이 생산방식은 한편으로는 당시의 기술혁신, 시장수요의 변화 그리고 저임 노동인구의 증가라는 새로운 환경의 산물이었다. 양복업의 경우 기존의 고급정장 외에 싸구려 기성복 수요가 늘면서 이러한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만한 새로운 생산조직이 필요하였다. 고한제란 도매상이나 중매상의 하청 일감을 맡은 생산자가 좁은 작업장에서 저임 노동력을 고용하여 생산하는 방식을 가리켰다. 이러한 생산이 가능했던 것은 재봉틀과 같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미숙련노동자들을 광범하게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한제 작업장은 소규모여서 공장법의 적용대상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이와 같은 생산조직은 공장제도가 확대되던 19세기 후반의 추세와 동떨어진 고졸적 형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방식 또한 기술혁신과 소비시장의 변화와 이민 증가라는 새로운 근대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15) 이스트 엔드의 경우 고한제 경영자는 주로 유태인 이민 출신이었다. 좁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저임 노동자들도 그들의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동유럽 출신 유태인들은 가족단위로 이민을 떠났고, 또 대부분 수공업이나 상업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한제야말로 그들의 여건에 가장 적합한 일거리였다. 이스트 엔드에 정착한 초기에는 고한제 작업장에서 일을 배우다가, 시간이 지나면 독립하는 사례가 흔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19세기에 이스트 엔드의 인구 증가는 공사판, 부두 하역작업, 이민, 고한제 등과 직접 연결된다. 이러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9세기 숙련노동자들의 정체성을 뜻하는 자조나 체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임금, 비정규노동, 실업 등의 문제는 항상 또는 간헐적으로 이들의 삶을 괴롭혔다. 이들이 거리의 술집이며 부랑아며 범죄자들의 이미지와 겹치면서 이스트 엔드는 단순한 지리적 실체를 넘어 빈곤을 상징하는 언어로 자리잡았다. 그 언어는 구 런던시나 웨스트 엔드의 번영과 대조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3.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
이 글에서는 1880년대 평론지(또는 정간물)에 실린 논설들 가운데 특히 이스트 엔드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깊이 다룬 36편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발표연도별 분포에서 특이한 것은 1883년과 1888년에 다른 해보다 훨씬 더 많은 논설이 실렸다는 점이다.16) 1883년에는 이스트 엔드의 실태를 다룬 여러 소설과 팜플렛이, 1888년에는 이 지역 주민에 관한 찰스 부드의 논문이 발표된 데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한편 평론지의 정치적 성향에 따른 커다란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빈곤은 정치 성향의 차이를 넘어 당대 지식인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기고자들의 다수는 실제로 자신의 개혁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이스트 엔드에서 사회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국교회 성직자로서 빈민복지관 토인비 홀(Toynbee Hall) 설립을 주도한 새무얼 바넷과 그의 부인 헨리타(Henrita Barnett, 1851-1936), 빈민지역 주택개량운동에 뛰어든 옥타비아 힐, 실론 총독을 역임한 로버트 그레고리 경(Sir Robert Gregory, 1817-92), 찰스 부드와 그의 사회조사에 협력했던 비어트리스 포터[비어트리스 웹] 등이 눈에 띈다. 노조지도자 조지 하월(George Howell, 1833-1910), 경제학자 알프렛 마셜(Alfred Marchall, 1842-1924), 마이클 멀홀(Michael G. Mulhall) 등도 제각기 자신의 경험이나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1880년대에 ‘이스트 엔드’ 지명 앞에는 항상 ‘버려진(outcast)’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브룩 램버트(Brooke Lambert)에 따르면, 이 수식어는 이스트 엔드의 삶의 경험의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불량주택, 빈곤선 이하의 소득,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비롯하는 갖가지 불행이 ‘버려진’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의미들이다.17) 이 시기 평론지나 정간물에 실린 논설들은 이스트 엔드의 어떤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첫째, 이곳의 빈곤 실태를 조사한 찰스 부드의 사회조사 연구를 들 수 있다.18) 그는 처음에는 스텝니만을 조사대상으로 삼았으나 곧 이어 이스트 엔드 전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부드와 그의 동료들은 이스트 엔드 66개 학교운영위원회(school board)를 방문하여 그 등재기록을 검토하고 이밖에 빈민구제위원이나 복지관(settlement) 자료, 인구조사자료 등을 살폈다. 1887년 그의 조사대상에 포함된 이스트 엔드 인구는 90만 8,958명이었다. 그는 소득수준에 따라 이들을 A에서 H까지 8개 집단으로 분류하고 주당 수입 18-20실링 이하의 집단(A, B, C, D)을 빈곤계층으로 설정하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이스트 엔드 주민 가운데 30만 3,196명(35.2%)이 빈곤선 이하에 머물렀다.19) 그의 원래 의도는 이스트 엔드의 빈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다는 점을 밝히는 데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차이는 뚜렷한 것이었다.20) 이러한 차이는 직업구성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스트 엔드에서 비중이 높은 직종은 의류(dress), 가구(furniture), 항만하역 등이었다. 이들 직종 종사자는 전체 노동자의 30%였다. 이스트 엔드를 제외한 런던에서 이들 직종 종사자 비중은 11%에 지나지 않았다.21)
둘째, 빈민의 주거환경 실태를 소개하고 그 개선방안을 다룬 논설들이 있다.22) 이 문제를 다룬 논설들은 이스트 엔드 지역의 불량주택의 실태를 보여주면서 정부와 민간단체들의 개선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는 빈민의 소득수준 및 주택 규모에 비해 집세가 무척 높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구 과밀에 따른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비롯한다. 옥타비아 힐에 따르면, 2-3개 방이 딸린 주택은 노동자들에게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이런 집들에서 살 수 없으며, 기가 죽은 채 뒤편 집이나 후미진 골목에 거주한다. 그렇지만 단칸방 하나를 얻어 커튼이나 칸막이를 쳐서 작은 방으로 나누는 것에 곧 익숙해져서 그런 공간에서도 편안함을 느끼며 친구를 부르기도 한다.”23) 힐은 빈민의 소득 수준을 감안하여 방 한칸 딸린 서민용 주택모델을 개발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택 개량은 정부의 직접 투자보다는 간접 지원을 통해 민간부분에서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직접적인 지원은 지금까지 기금을 운용하면서 근로민중의 빈곤에 대처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해온 사회단체나 개인의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것이었다. 힐은 공적 지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공적 자금의 지원 또는 원조 계획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는 토대 위에서 근로민중의 빈곤에 대처함으로써 그들을 도와온 사회단체나 개인들의 독자적인 활동의 확대를 방해한다. 그들의 자본이 완전히 잠식될 가능성이 엿보이면 위험을 무릅쓸 리 없는 사람들이 지방세나 국가 지원을 받은 건축 때문에 갑작스럽게 손해를 보면서 집이 헐값으로 팔리는 사업에 더 매진할 수는 없는 것이다.24)
빈민가의 주택 개량을 위해 마련된 기존의 법체계는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Acts)을 통해 지방당국이 슬럼가의 불량한 주거환경을 보완하고 상하수도를 비롯한 위생시설을 유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25) 다른 하나는 불량주택의 철거와 재건축에 관련된 일련의 노동자주거법(Artisans and Labourers' Dwellings Acts)이다. 이 법은 지방당국이 불량주택 소유자에게 집의 개량 또는 철거 명령을 내리고, 이와 아울러 개량이 불가능할 경우 소유자의 요청에 따라 지방당국이 매입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규정하고 있다.26)
빈민지역의 주택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일부 논설은 이러한 법체계가 실효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월에 따르면, 그것은 슬럼가의 주택 소유자 대부분이 개축 또는 신축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빈민가의 불량주택에서 대지와 주택 소유권은 분리되어 있다. 주택 소유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고, 지주는 개량비용을 부담하기를 꺼려한다. 또한 도심 지역의 재건축 비용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힐과 달리, 하월은 공적 부문에서 대규모 주택 신축 또는 개축사업을 맡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공채나 국채를 이용하여 대규모 주택건설기금을 조성한 다음에 노동계급을 위한 주택재개발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계산으로는 숙련노동자층의 주택 신축은 연 5%, 빈민층의 경우는 연 1-2.5%의 이윤이 가능한 선에서 공급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27)
여기에서 경제학자 마셜의 위성도시 건설안이 특히 흥미롭다. 런던 교외에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고, 소자본으로 영업할 수 있는 직종(의류 등)을 육성하면서 빈민층 가운데 희망자를 이주시킨다는 내용이다. 멀홀은 이 계획의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고 있다. 그의 계산으로는 이스트 엔드에서 1인당 연간 주거비는 8파운드 15실링 인데 비해, 신도시의 경우 6파운드 10실링에 지나지 않는다. 민간부문의 주도로 단지를 조성해도 수익성이 있다는 것이다.28)
셋째, 상당수 논설들은 이스트 엔드의 노동조건, 특히 고한제 생산방식을 상세하게 검토한다.29) 고한제는 1880년대 빈곤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관심사였다. 특히 1887년 이후 고한제에 관한 상원 조사위원회가 네 차례에 걸쳐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이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30) 비어트리스 포터는 상원 조사위원회 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이스트 엔드의 고한제도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논설을 썼다. 이 생산조직의 확산은 무엇보다도 의복시장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즉 고한제 아래서 생산된 양복은 고급의복이 아니었다. 고한제 경영자는 상류층 인사의 값비싼 양복이며 코트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숙련 양복공의 경우 다량의 기성복을 도매점에 공급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노동의 질과 가격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양복업종의 변화, 지난 30여 년 사이에 일어난 소매업에서 도매업으로의 변화의 결과이다. 이런 변화 자체는 재봉틀 및 분할노동(subdivided labour) 도입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31) 포터가 주목한 것은 의류분야 전체에서 남성노동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주로 이스트 엔드 가내작업장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내 생각으로, 바지 및 조끼 제조분야에서 여성이 만만치 않으면서도 성공적인 경쟁자가 되었다는 것은 수도 런던 전체의 양복분야 인구조사 통계에서 드러난다. 남성 노동자는 1871-81년간에 실제로 감소한 반면에 여성노동자는 25% 증가했기 때문이다. 유태인이 일하는 생산업에서 남성이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는 징후는 없으므로, 외국인 이민이나 여성에 의해 주로 대체되는 부류가 영국인 숙련양복공이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것은 집에서 일하는 가내양복공들의 탓이다. 왜냐하면 가내작업은 소규모 하청업자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의 훈련장이기 때문이다. 가장의 아내와 딸들이 그의 조력자이며 그들은 다른 남성노동자의 경쟁자로 등장한다.32)
포터는 이스트 엔드 지역에서 가족 외에 다른 노동자들을 고용한 유태인 코트 생산업자 901명의 자료를 입수하여 분석했다. 조사 결과, 25명 이상을 고용한 작업장은 1.6%(15곳)에 지나지 않았고, 10-25명 이내가 22.3%(201곳), 10명 미만인 업체가 전체의 76%(685곳)에 이르렀다. 맞춤 위주의 고급 코트를 만드는 업체는 극소수(54곳)였고, 중급 코트 제조가 192곳, 나머지는 모두 최하급의 싸구려 코트를 만드는 곳이었다. 이들 작업장은 화이트채플, 마일 엔드 및 세인트 조지의 일부지역에 몰려 있었다. 1 평방마일 면적의 이 지역에 수 만 명의 유태인 이민들이 살고 있었다.33) 이들 작업장에 관련된 자료를 살펴본 끝에, 포터는 당대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우선, 고한제 경영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신문에서 그리는 고한제 경영자의 이미지는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작업장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다.34) 그러나 포터가 조사한 자료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다. 유태인 코트 제조업자의 근면성은 정평이 나 있었다. 사실 이스트 엔드의 유태인 사회는 극빈층이 밀려드는 “밑바닥 인생의 저수지”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 자리 잡은 코트제조업 또한 “가장 낮은 임금의 일거리, 가장 황폐한 작업장, 가장 더러운 건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근면한 유태인들은 좀더 여건이 나은 지구나 직종으로 옮기면서 이 열악한 생산조직을 다른 신참에게 넘기는 것이었다.35)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한제와 하청제(subconstracting system)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상원 조사위원회 보고서나 일반 언론에서도 고한제는 하청제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고한제는 “생산자가 아닌 상인이 중간업자(middleman) 또는 고한제 경영자(sweater)와 하청 계약을 맺어 상품을 확보하는 생산조직”으로 여겨졌다. 포터에 따르면, 이 두 개념을 동의어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다. 하청제는 전국의 어느 산업분야에서나 광범하게 나타난다. 이에 비해 고한제는 장시간 노동, 저임금, 나쁜 위생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 생산 형태만을 가리킨다. 즉 “하청제는 고한제 없이도 존재하고, 고한제는 하청제 없이도 존재한다.”36)
그렇다면, 이스트 엔드와 같은 빈민지역에서 고한제 생산조직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서 바우먼(Arthur Baumann)의 설명을 참조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한제가 싸구려 제품을 찾는 하층민의 수요를 겨냥한 생산조직으로 생각한다. 생산의 저렴화와 신속화야말로 고한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우먼은 무조건 고한제 생산과 하층민용 싸구려 제품을 연결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항변한다. 고한제는 하층민의 의복 수요와 특히 외국인 이민들의 수요에 맞추어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제도는 대불황기의 소득배분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대불황기에 사람들의 소득 수준이 낮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간의 물가하락과 더불어 정규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은 높아지고 있었다. 정규 노동자, 서기, 상점주, 그밖에 고정 소득을 올리는 많은 사람들이 비록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상승하고 싶은 열망과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 자켓을 벗어버리고 정장에 블랙 코트를 걸치고 중절모를 눌러썼다. 불황과 더불어 사치품 수요는 떨어졌지만, 오히려 실질 소득이 상승한 사람들은 값이 싸면서도 깔끔하고 세련된 의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바우먼에 따르면, 이와 같은 기성복 수요의 변화는 “현대 의복의 민주주의”를 반영한다. 고한제는 이러한 수요변화의 산물이었다.37)
이스트 엔드의 노동실태를 언급하면서 부두노동을 빠뜨릴 수 없다. “부두나 가라”(Go to the docks)라는 말은 희망이 없는 상태를 비유하는 19세기의 언어였다. 일반 사람들은 부두노동자들을 “가망이 없는 빈털터리”(irrecoverable never-do-wells), 또는 “추락한 천사”(down-fallen angel)로 표현했다. 그들은 막노동자의 부두 유입을 경계하였고, 박애주의자들은 자극적인 어조로 부두의 범죄를 강조하기도 했다.38) 부두노동자들 가운데 외국인 이민은 별로 없었다. 이들은 대체로 소수의 정규노동자와 다수의 비정규 노동자로 구성되었다. 비어트리스 포터의 자료에 따르면, 그녀가 조사한 6,199명의 부두노동자 가운데 정규직은 35%를 차지했다. 그러나 중소부두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낮아질 것이었다. 정규노동자들은 숙련공과 같은 체통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당소득이 20실링 이상이어서 빈곤선 이하 집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나머지 부두노동자들은 모두 빈곤선 아래에 머물렀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임감이 있을 때 우선 고용되는 사람들(ticken men)이고, 다른 부류는 일감이 넘쳐날 경우에 고용 기회를 얻는 사람들이었다. 계절적 불황이나 경기변동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바로 이 마지막 부류였다. 이들이 때로는 이스트 엔드 지역의 범죄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었다.39)
넷째, 이스트 엔드에서 봉사활동 경험을 소개하거나 이 지역에 대한 일반인의 뿌리 깊은 편견을 비판하는 논설들도 많다.40) 예컨대 케티 카우퍼(Katie Cowper)는 성공회의 한 여성전도단체에서 활동한 경험을 소개한다. 그녀는 학교 어머니회 모임에서 전도를 하기도 하고, 부녀 클럽에서 함께 바느질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에 관한 강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소녀들의 모임을 이끌면서 카드 게임이나 도미노 놀이 또는 알파벳 놀이를 소개하여 열띤 호응을 얻었다.41) 카우퍼가 보기에, 이스트 엔드 주민들에 관한 풍문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이스트 엔드 전체가 온갖 사악함과 부도덕으로 가득하다는 상식적인 견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구역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런던의 그 지역 사람들에게서 내가 보았던 모든 것으로 미루어, 지나친 음주나 부도덕은 내가 맡았던 다른 지역의 교구보다 덜한 편이었다.42)
종교단체나 또는 다른 사회단체의 일원으로 이스트 엔드에서 활동한 인사들은 한결같이 극소수를 제외하면 빈민가 주민들의 삶이 부도덕하거나 타락해 있지 않다고 강변한다. 그들에게 적절한 휴식과 교육, 그리고 리크리에이션의 기회를 제공하면 할수록 암울한 분위기가 사라지리라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인내에 경탄을 보내기도 한다.43) 빈민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주장 또한 근거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스트 엔드 빈민들 사이에 삶의 고통을 인내로 참아나가는 경향이 짙은 것은 그들이 단순한 신앙, 특히 영생에 대한 암묵적인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메리 진(Mary Jeune)에 따르면, 이러한 신앙에서 배태된 희망이야말로 지상에서의 삶을 참아낼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었다. “천국이 부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물려받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내게 보이지 않았다.”44)
마지막으로, 이스트 엔드 유태인 이민 문제를 다룬 논설들이 있다.45) 1880년대 초부터 급격하게 증가한 유태인 이민에 대해 영국인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물론 영국에서는 대륙의 경우와는 달리 유태인 혐오증(Judaeophobia)이 사회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을 사회 외부의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편견은 뿌리 깊이 남아 있었다. 어떤 필자들은 이 혐오증의 기원을 그들의 ‘종족적 배타성’(tribal exclusiveness)에서 찾는다. 골드윈 스미스(Goldwin Smith)에 따르면, 유태인들은 오랫동안 편협하게도 자민족 위주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이 혐오증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유태인은 그들만의 고유한 종교적 우상에 집착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모든 다른 민족은 적어도 인류에 대한 헌신을 공언한다. 그들 모두는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보편적 형제애가 실현될 날을 기대한다. 유태인만이 자기네 종족이 인류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다른 민족과의 궁극적인 연대가 아니라 다른 종족 모두에 대한 승리를 대망한다.”46)
그럼에도 몇몇 논설들에서 유태인의 근면성에 대한 경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포터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작업장의 상태가 생각만큼 열악하지 않다는 점을 강변하는데, 이는 영국인 공장주가 낮에 자신의 사무실이나 집에 머무는 반면, 유태인 마스터들은 노동자와 함께 작업하기 때문이다.47) 데이빗 실로스(David Schloss)는 이스트 엔드의 유태인 양복업자와 의류 제조업자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근면한 생활태도를 칭송한다. 여기에서는 유태인 이민 급증에 따른 실업의 두려움이나 극단적인 유태인 혐오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화이트채플에서 만난 한 기계공은 매주 3일씩 시간급을 받으며 작업장에서 일했는데, 근무하는 날이면 14시간 이내로 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는 항상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일하려고 했다. 대다수 영국인 노동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이다.48)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유태인 노동자는 여러 경우에 유태인 아닌 이웃보다 더 장시간 일하려고 한다. 유태인은 낮은 임금을 받고서도 일하려고 한다는 통념은 내가 보기에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숙련이 없는 노동자는 유태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불행하게도 어떤 종류의 임금이든 제아무리 임금이 낮더라도 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숙련을 지닌 유태인들이 많으며, 그들은 비유태인 노동자들 못지 않게 높은 임금을 받는다.49)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들은 이 지역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빈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특히 1880년대는 주기적 불황, 농업공황, 이민, 치열한 생존경쟁이 점철된 시기였다. 음주, 조혼, 무모한 다산, 만성질환 등으로 시달리는 극빈층은 실제로는 ‘가망 없는 계급’(hopeless classe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씌어졌다.50) 찰스 부드도 처음 사회조사를 시작할 때에는 가난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진정한 노동계급’과 극빈층을 구별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 논설들은 그 극빈층에서도 개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난, 질병, 저소득 등 여러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일반의 편견과는 달리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인구과잉과 조혼과 이민이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일 뿐이었다.
4. 빈곤과 이데올로기
이스트 엔드에 관심을 기울인 박애주의자들은 실제로 당대의 문학 속에서 형상화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월터 베산트(Walter Besant)의 소설 『만인의 생활상(All Sorts and Conditions of Men)』(1882)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고등교육을 받은 부유한 상속녀 안젤라 메신저(Angela Messenger), 젠틀먼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이 원래 화이트채플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에 이스트 엔드에서 평범한 가구공으로 살아가는 해리 가슬릿(Harry Goslet), 두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이스트 엔드 주민들에게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문화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기쁨의 궁전’(Palace of Delight)을 세운다.
베산트의 소설에서 박애주의자의 꿈을 보여주는 ‘기쁨의 궁전’은 그 몇 년 후에 현실로 나타났다. 소설의 내용에 공감한 박애주의자들의 모금활동에 힘입어, 이스트 엔드의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시설 ‘인민궁전’(People's Palace)이 세워진 것이다. 이곳은 원래 ‘기쁨의 궁전’을 모방하여 음악당, 도서관, 여가 시설, 체육관 등 주민들에게 문화활동과 리크리에이션의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888년 개관한 이후 이 시설은 베산트의 소설에 나오는 원래의 구상과는 상당히 다르게 운영되었다. 모금 규모가 예상을 밑돌게 되면서 인민궁전 운영자들은 수입을 늘리기 위해 중간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90년대 이후에는 기술교육기관으로 바뀌었다.51)
빈민에게 문화를 제공한다는 원래의 계획에서 보면 이것은 “실패한 사회공학”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52) 실제 인민궁전에서 내세운 ‘문화’라는 구호는 1870년대 이전 상대적 번영기에 더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빈민과 노동자에 대한 문화적 관심은 웨스트 엔드 부유층 사이에 박애주의가 깊이 뿌리내리고 그 반면에 차티즘과 같은 급진적 노동운동이 기세를 잃은 빅토리아 시대 중기에 오히려 더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880년대는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이전과 뒤바뀐 시대였다. 경제불황, 만성적인 주택 부족, 빈곤의 심화, 사회주의 운동, 노동불안이 잇달았다.
인민궁전의 실패는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의 관심이 결국 빈민의 시각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빈민을 새롭게 주조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선행위 가운데 상당수는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에 따르면, 빈곤을 취급하는 적절한 길은 “가난이 나타날 수 없는 그런 토대 위에 사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이러한 목적의 장애일 뿐이다. 이타적 동기로 자선을 행하는 것은 문제를 실제로 분석하는 것과 다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독설을 서슴치 않는다. “자선은 무수한 죄악을 만든다.”53) 실제로 와일드는 소설가 베산트를 겨냥하여 비판하기도 한다. “엄청나게 그리고 매일 증가하는 소설가라는 작자들, 그들에게 태양은 항상 이스트 엔드에서 떠오른다. 그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인생이 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점이다.”54)
비단 와일드의 조롱이 아니더라도, 당대에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갖가지 구호활동이 난무하면서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나도 박사를 둘러싼 추문 사건이다. 그는 이스트 엔드 빈민가 어린이들의 참상을 목격한 후, 중국에서 의료 선교를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이 어린이들의 구호활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설립한 구호단체인 ‘이스트 엔드 청소년 전도단’(East End Juvenile Mission)은 이 지역 자선운동의 대표적인 단체로 성장하였다.55)
1877년 봄 바나도는 창녀와 사통, 기부금 횡령 등의 추문사건에 휘말려들었는데, 특히 이 사건의 진상조사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자선조직협회’(Charity Organization Society)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이에 바탕을 둔 합리적 대안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종교단체의 기금이나 구호활동에 대해 불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바나도 박사 추문사건은 “종교적 자선과 세속적 구호, 전통적 구호와 과학적 접근” 사이의 갈등을 나타내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트 엔드 자선활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자선협회 인사들은 바나도를 비롯한 종교단체의 자선이 겉으로 종교적 열정과 고결함과 진정성(truthfulness)을 표방하더라도 실제로는 빈말(cant)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자선이란 빈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그들은 과학적 조사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빈민이 자조를 통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끄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56)
COS는 1833년 신빈민법(New Poor Law)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단체였다. 그들은 공적 구호와 개별적인 자선을 엄격하게 구별하고자 했다. 그들은 1870년대 이후 여기저기 난립한 개별 자선단체들이 오히려 신빈민법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사적 자선은 ‘자선을 받을 만한’ 빈민에게만 선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자선을 받을 수 없는’ 빈민(pauper)이 바로 공적 구호의 대상이었다.57)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인격’(character)이었다. 인격을 가진 빈민은 자조를 통해 빈곤 상태에서 벋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선은 그들의 자조를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바넷이나 힐과 같은 COS의 주요 인물들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별적인 자선행위, 즉 원외구호가 오히려 빈민을 더 나태와 타락으로 빠뜨리고 부도덕을 낳고 있다고 생각했다.
1880년대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을 쓴 지식인들의 언어에는 진화론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포터, 마셜, 윌리엄 부드(William Booth) 등이 도시 빈민을 가리키는 언어로 즐겨 사용한 ‘찌꺼기’(residuum)라는 말은 다윈의 ‘자연도태’ 개념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1882년 앤드류 먼즈(Andrew Mearns)가 자신의 책 이름58)에 처음 사용한 이래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버려진 런던’(outcast London)이라는 말도 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 과정에서 생존에 적합한 사람들이 승리를 거두는 반면, 적합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도태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빈곤층이 광범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기묘한 현실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게 보였다. 도태된 사람들이 생존한 것은 문명이 그들을 방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의 세계와 다른 점이었다.59) 스테드먼 존스(J. Stedman Jones)에 따르면, 이 시기에 사회진화론은 도시 빈곤지역을 설명할 수 있는 유력한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대도시 빈민은 “원시종족”(primitive tribes) 또는 “야만인”으로 비유할 수 있고, “메울 수 없는 유전적 결함”(ineradicable hereditary gap)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사회진화론은 “기존의 사회관계를 정당화하고 그와 동시에 인종 및 계급 불평등에 대한 믿음을 전파하는”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60)
과학적 조사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부드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은 ‘자연선택’의 구현체였다. 기업가들의 이기심이야말로 “생산, 분배, 경영”의 추진동력이며, 그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맡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을 것이었다.61) 1888년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그가 고한제 경영자를 중간착취자로 바라보는 견해를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오히려 고한제 경영자들은 “산업을 선도하는 지성과 판단력을 갖춘,” 그리고 “부를 자본으로 바꾸고 그 자본을 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타성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슬로건을 무조건 높이 평가할 수 없었다.62) 다만, 문명사회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조치를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선에 머물러야 했다. 사회주의는 문명의 기반인 개인주의를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제한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63)
박애주의나 체계적인 사회조사를 표방한 도덕주의자들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일종의 생물학주의(biologism)와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진화가 반드시 진보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다. 인간은 자신의 물질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일 환경이 악화되었을 경우 사람들은 이에 적응하여 타락한 존재로 변모할 것이다. 타락한 환경 아래서는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결국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바넷이나 힐은 국가의 지원을 주장하면서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을 통한 문제 해결의 길을 모색했다. 이를테면 힐이 빈민주택 개량활동에 참여하면서도 적정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민간사업의 모델을 구현하고자 노력한 것도 이러한 사회관에서 비롯하였다.64)
5. 지식인과 이스트 엔드의 거리
1880년대 평론지의 논설들은 대부분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의 ‘사회적 양심’을 강조하는 박애주의 경향을 보여준다. 논설의 필자들은 빈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빈민의 자구적인 노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여건의 조성, 즉 간접적인 지원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자조’의 가치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65) 이들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량주택 개량에 관한 기존의 법체계를 보완하고 특히 지방당국이 구체적인 집행능력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조혼과 다산을 막기 위한 계몽과 아울러 이민에 대한 규제조치가 필요했다. 이와 함께 좀더 많은 사회단체와 개인들이 이 지역의 빈곤 퇴치에 참여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들의 관심과 후원이 증가할수록 이스트 엔드 빈민과 노동자들 또한 ‘자조’를 통한 삶의 향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은 이스트 엔드의 다양한 사회적 풍경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설을 썼고, 이를 통해 공공 여론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 어느 면으로 보면 이들의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논설을 통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의 논설 자체가 이스트 엔드의 빈곤과 타락을 더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물론 당시 지식인들의 대다수가 자조의 측면에서 빈곤문제의 해결만 강조했던 것은 아니다. 페이비언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국가 간섭의 강화와 국가 주도에 의한 해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와 주장은 당시 식자층 일반에게 널리 읽혔던 잡지와 발행부수가 많은 평론지보다는 이들 단체가 펴내는 기관지(機關紙)에서나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영향력 있는 잡지라면 그 정치적 성향이 무엇이든, 여전히 1834년 신빈민법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빈곤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국가 간섭과 사회주의적 대안이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은 다음 세기에 접어든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1880년대에 평론지 논설의 필자들은 이스트 엔드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섰는가. 여러 가지 헌신적인 활동과 빈곤에 대한 깊은 성찰에도 불구하고, 중간계급 출신 도덕주의자들은 이스트 엔드 주민들의 삶을 어디까지나 자신의 시각을 통해 바라보았다. 자선과 봉사도 중간계급의 의도대로 그들을 변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아직도 빈곤은 사회구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스트 엔드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그들에게 먼 곳일 뿐이었다.
<Abstract>
The East End: A Land Close, Yet too Far
Youngsuk Lee
The East End has been known as one of the poorest districts in London for a long time. Its image which reminds us of slums, urban crimes, drunkards and unemployed labourers, was engraved among the people in the 1880s. One of important causes that accelerated the formation of such an image was public languages and discourses in the 1880s. This study analyzes about thirty-five articles published in six major reviews at the time in order to examine how the middle-class intellectuals saw the East End and what image they formed.
Most of articles in the reviews emphasizes their indirect support on the poor which enable to extract the self-effort from them. In this point it represents the value of self-help in the mid-Victorian age. Writers of the articles were interested in various problems of the East End. For example, they tried to seek some methods for the housing improvement of the slums, or discussed labour conditions of the sweating system. They also introduced their experience of charity activities in the East End to the readers, and dealt with the Jewish immigration.
These intellectuals wrote their articles on the basis of scientific inquiry data, and they hoped that their articles could contribute to the formation of social opinion on this district. They seemed to be affected by social Darwinism. Their articles drew social interest on the East Enders, while they were also helpful in making negative images of the East End by picturing the social landscape of the region.
How close did the writers in the 1880s approach to the East End? In spite of their devotion and reflection on the region, they saw inhabitants' life of the East End on the basis of their own perspectives. The writers supported the inhabitants in order to suit the East Enders' life to their own intentions. According to their views, poverty stemmed not from the social structure, but from individual activity. Although the writers tried to get nearer to the East End, the region was still too far to them.
(Gwangju University/ longstone21@hanmail.net)
주제어
1. 이스트 엔드(East End)
2. 박애주의자(philanthropist)
3.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4. 버려진 런던(outcast London)
5. 고한제(sweating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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