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영국 사회와 유대인 문제

<영국연구> 12호(2004.12),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영국 사회와 유대인 문제




                                                                이영석*




차 례

                                  1. 유대인, 영국사의 이방인

                                  2. 유대인 이민과 이스트 엔드

                                  3. 19세기말 유대인 사회의 변화와 갈등

                                  4. 유대인 혐오증, 편견의 구조화

                                  5. 이스트 엔드의 유산




1. 유대인, 영국사의 이방인




유대인은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졌다. 이들이 언제부터 브리튼 섬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세에도 런던 등지에 유대인들이 거주했지만, 13세기 말에 그들은 모두 해외로 쫓겨났다. 유대인들이 영국에 다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엽의 일이다. 1956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영국 유대인의 예술과 역사’라는 주제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그것은 특히 유대인의 영국 정착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의 대규모 이민은 없었으며 그들만의 집단거주지(ghetto)를 형성하지도 않았다. 17세기 이후 영국에 다시 진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에 기원을 둔 이베리아 계통의 유대인(sephardim)이었다.1) 

1880년대 초에 러시아 및 러시아령 폴란드에 거주하던 유대인들(ashkenazim)이 영국으로 몰려왔다.2) 이 시기에 동유럽 이민이 급증한 것은 1882년 ‘임시규제법’ 이후 러시아 정부가 유대인을 의도적으로 추방하려는 정책을 폈고, 여기에 이민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러시아 및 폴란드 해운업자들의 이해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동유럽 이민들은 런던의 동부지역(East End)에서 집단을 이루며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기성복 분야의 작업장에 고용되어 일하거나 또는 그 자신이 작업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 새로운 이민들은 이전에 영국에 정착한 유대인들과는 문화도 달랐고 또 경제적으로도 뒤떨어져 있었다.

19세기 말 영국의 유대인 사회는 브리튼 섬 태생의 구 유대인과 동유럽 이민이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세계로 나뉘어 있었다. 구 유대인은 이전 두 세기에 걸쳐 점차 영국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경제적으로도 상승하고 있었다. 반면에 새로운 동유럽계 유대인들은 의류, 제화, 가구 분야의 소규모 작업장에서 일하는 빈민층에 가까웠다. 다만 그들 대부분이 러시아 및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또는 지방 상업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스트 엔드의 의류 및 가구분야에 성공적으로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은 1880년대 이후 새롭게 증가한 동유럽 유대인 이민들이 런던의 이스트 엔드에 어떻게 정착하여 그들의 삶을 꾸려나갔는가를 검토한다.3) 여기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1880-1914년 사이에 동유럽 유대인들의 이민과정을 이전 시대의 유대인 이민과 비교하여 살피려고 한다. 이민 추이는 당시의 인구조사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대체로 15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영국에 정착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들은 주로 런던, 버밍엄, 리즈, 맨체스터 등의 도시에 몰려들었다. 이 글에서는 런던의 이스트 엔드에 형성된 유대인 집단거주지의 실태를 분석한다.

다음으로, 동유럽 유대인 이민의 증가는 기존의 영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기성복 및 가구분야의 노동시장에서 위기를 느낀 노동자들 사이에 유대인에 대한 비판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민 증가는 지식인 사회에서도 논란거리였다. 이 글은 1880년대에 이루어진 찰스 부드(Charles Booth)의 사회조사 보고서나 또는 당시 평론지 논설들에서 유대인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당대 여론의 한 단면을 검토하려고 한다. 




2. 유대인 이민과 이스트 엔드




유대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정통 유대 신앙에서는 모계가 유대인이거나 또는 ‘평판 좋은’ 유대 법정(Beth Din)4)의 인도를 받아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겠지만, 평판 좋은 법정이 개종을 인도했다고 해서 기존 사회가 이를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정체성이나 사회적 인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글에서는 자신을 유대인으로 생각하거나 동시대인들이 그렇게 여기는 사람을 유대인으로 간주하기로 한다.

1290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대대적인 추방을 당한 후에도 유대인들은 간헐적으로 브리튼 섬에 들어왔다. 16세기경에 마라노스(marranos) 계통의 유대인 거주지가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들의 이민이 좀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크롬웰 시대에 이민이 증가하는데, 이는 1656년 사적인 신앙을 폭넓게 허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영국으로 들어온 유대인은 대부분 이베리아계 ‘세파르딤’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주로 암스테르담, 이베리아 반도, 카나리아 군도, 브라질, 서인도제도 출신이었다.5) 이들은 구 런던시(City)의 경계에 처음으로 회당(synagogue)6)을 건립하였고, 그 경계밖 마일 엔드(Mile End)의 황야에 매장지를 마련하였다.7)

근대 초기만 하더라도 유대인은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 거주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17세기 중엽 이래 이들이 런던의 시티와 이스트 엔드에 활동 및 주거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당시 영국은 대륙의 다른 나라에 비해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이 런던에 정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특별히 법적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법은 유대인을 특수한 신분으로 인정하지도, 또 특별한 신분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영국의 다른 비국교도와 마찬가지로 차별을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국 국교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8)

17세기 후반 런던에 이주한 유대인 집단의 주류는 부유한 상인층이었다. 그들은 런던의 상업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구 런던시, 즉 ‘시티’야말로 그들의 상업적 자질을 발휘하는 데 걸맞은 지역이기도 했다. 이들은 시티에서 은행가나 무역상인, 또는 의사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대륙에 비해 유대인에 대한 차별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자유로운 영업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시티의 영국 상인들은 자신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에 대해 여러 제약을 가했다. 예컨대 주식거래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시참사회(Court of Aldermen)에서 값비싼 면허장을 구입해야 했고, 왕립거래소에서 활동할 수 있는 유대인 출신 거래인은 전체 124명 가운데 12명을 넘을 수 없었다. 소매상인으로 활동하려면 자유민 신분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믿는다는 서약을 전제로 했다.9)

18세기에 런던 서부지역(West End)으로 주거지가 확대되면서 유대인 거주지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이스트 엔드를 떠나 좀더 서쪽으로 이주하였고 그 대신에 이스트 엔드의 화이트채플(White Chapel)이나 스텝니(Stepney)에는 좀더 가난한 새로운 유대인들이 밀려왔다.10) 이들은 대부분 세파르딤이 아니라 동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짐’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슈케나짐의 이민 물결은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전쟁기에 장기간 중단된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민 1세대보다도 영국 태생 유대인 숫자가 더 많아졌다. 이러한 인구구성의 변화는 유대인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인다. 18세기만 하더라도 부유한 세파르딤은 동유럽 유대인들을 경멸했으며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영국 출생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이 두 집단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더욱이 아슈케나짐계 유대인 가운데 상업 및 무역 분야에 진출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한 경멸감도 사라졌다. 

19세기 중엽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가 어느 규모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대체로 1801년경 세파르딤계 유대인은 2,000명 선에 머물렀으며, 아슈케나짐은 그 10배 규모에 이르렀다. 그후 30여 년간 이민의 물결은 사실상 멈춰졌지만, 유대인은 꾸준하게 증가하였다. 동시대 사람들의 추계를 살펴보자. 1830년 프랜시스 골드스미드(F. H. Goldsmid, 1808-78)는 매년 매장되는 유대인 수를 통해서 런던에만 1만8,000명, 영국 전체로는 2만7,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헨리 메이휴(Henry Mayhew)는 1851년 당시 전체 유대인 숫자를 3만5,000명으로, 존 밀(John Mill)은 대략 3만 명으로 계산한다. 이로 보아 19세기 중엽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3만-3만5,000 명, 그리고 런던의 경우 2만-2만5,000명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11)

런던의 유대인 사회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1880년대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에 동유럽, 특히 러시아 및 러시아령 폴란드 출신 유대인들이 대거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왜 이 시기에 이들의 이민이 급증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계 유대인이 직면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에서 유대인은 예속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토지를 빌리는 일도 어려웠다. 전문직업인으로 상승하거나 상업 및 제조업 분야의 대사업가로 진출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징병의 의무는 있었다.12)

러시아계 또는 러시아령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공동의 고통을 겪으면서 서로간의 연대를 강화하였다. 사회적인 고립 때문에 가정생활이 더욱더 중요해졌다. 그들은 도덕은 물론 위생과 식사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근거나 율법학자(rabbi)의 안내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슈케나짐계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서유럽의 유대인에 비해 개인의 경건성과 육체적 근면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러시아 당국의 철저한 차별정책이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셈이었다. 왜냐하면 국가는 유대인 집단을 엄격하게 규제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들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대신, 그들은 자치조직의 지도자나 율법학자들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노제 해방 이후 상황은 더욱더 절망적으로 변했다. 유대인들이 개별적으로 시민권을 갖게 되면서 자치조직은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외부세계에 그대로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 자치조직의 지도자나 율법학자들은 이전에 가졌던 권위를 잃었다. 말하자면, “유대인 개인에게는 모든 것을 허용하지만, 유대 민족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는 것이 러시아 당국의 기본 원칙이었다. 농노 해방은 지금까지 외부문화로부터 유대인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보호해준 방어막을 무너뜨렸던 것이다.13)

1880년대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이 급증한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서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1881년 러시아 농촌지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과 학살이 있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러시아 당국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임시규제법’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농촌에서 이탈한 모든 유대인들을 러시아 국내 15개 지역에 집단 수용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 집단적인 유대인 재배치과정에서 이탈하는 유대인이 늘어났다. 이들의 이민에 대해 러시아 당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임시규제법의 이면에는 자국의 유대인을 추방하려는 암묵적인 의도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유대인의 재배치 과정에서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급속하게 붕괴된 것도 이민 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집단거주지의 유대인들은 농촌상인, 중간상, 수공업 장인이 주류였다.14) 특히 유대인 상인의 절반 이상이 농산물 거래에 종사하였다. 1880년의 소요와 그에 뒤이은 임시규제법 아래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농촌상업과 수공업 기반이 무너지면서 그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다.15) 이와 함께 재배치 과정에서 유대인들 사이의 정보의 공유와 확산이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이민 떠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또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민 증가의 배후에 이와 같이 임시규제법과 재배치에 대한 반발, 경제적 몰락, 이민 정보의 확산이라는 요인만이 작용한 것은 아니다. 사실 당시 독일이나 폴란드 해운업자들에게 이민은 무엇보다도 이윤이 남는 사업이기도 했다. 동유럽 이민들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목적지는 런던이었는데,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 특히 영국이 이민에 대해 별다른 규제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걸쳐 러시아 유대인은 150만 명에서 5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880-1914년 사이에 이들 가운데 적어도 200만 명 이상이 이민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물론 미국으로 향했지만, 같은 시기에 적어도 1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국에 그대로 머물렀다.16) 

1880년대 이후 얼마나 많은 동유럽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이주했는지 구체적인 숫자를 알기는 어렵다. 인구조사 자료를 통해 그 추이를 알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1830년대 이래 매 10년마다 정규적인 인구조사가 시행되었지만, 종파를 묻는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구조사 자료에서 러시아계와 러시아령 폴란드계 이민을 분류한 항목이 있으므로, 이들의 추이를 통해서 유대인 이민 규모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인구조사 자료는 영국 및 웨일즈에서 러시아계 이민이 1881년 1만4, 468명, 1891년 4만 5,074명, 1901년 8만 2,844명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런던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이민은 각기 8,709명(60.2%), 2만 6,742명(59.3%), 5만 3,537명(64.6%)로 나타난다.17) 이들을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이 수치는 실제보다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유대인 이민 가운데 인구조사를 회피하거나 누락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 추계에 따르면, 19세기 말에 이스트 엔드에만 적어도 12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18)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이스트 엔드의 화이트채플과 스텝니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17세기부터 세파르딤 계통의 유대인들이 이곳에 회당을 짓고 일상생활을 영위하였고, 그에 따라 그 이후에 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유대인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스트 엔드는 끊임없이 이민을 흡수하고 이국적인 문화의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19세기 전반에는 아일랜드 이민이, 그리고 같은 세기 말에는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스트 엔드가 특히 빈민가의 대명사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1880년대에 이곳의 빈곤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이 빈곤 문제를 다룬 팜플렛과 논설을 다투어 발표하기도 했다. 찰스 부드 또한 1886년경부터 이 지역의 빈곤을 집중적으로 조사한다.19) 그는 조사과정에서 아슈케나짐 이민들이 이스트 엔드의 아일랜드인 거리를 급속하게 잠식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 신참들은 거주지 바깥의 전 구역에서 영국인들을 밀어내고 있다. 수많은 거리와 굽은 길과 좁은 골목들이 그들 수중에 떨어지고 있다. 그들은 거리 전체 블록을 자기들의 집으로 가득 채운다. 그들은 새로운 직종과 새로운 관습을 도입하고 함께 떼 지어 살면서, 그들 주위에 밀려오는 런던 생활의 거대한 본류와 따로 떨어진 채 그들의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20)




이 과정에서 기존의 아일랜드계 주민들과 갈등이 일었다. 물론 이러한 갈등은 종교나 인종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아일랜드 이민은 주로 거리의 행상, 부두노동, 공사판 날품팔이 또는 소작업장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 들어온 유대인들이 그 기반을 잠식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21)

한때 아일랜드인이 들끓던 화이트채플의 거리는 유대인들의 거리로 바뀌었다. 이제 유대인 집단거주지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색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초라한 행색의 유대인들이 소규모 의류공장이나 제화점에서 고된 일을 마친 후에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로 양편을 폐쇄하고서 저마다 촛불을 들고 떼를 지어 걸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리너(greener)’로 불렸는데, 이 말은 ‘미숙련 날품팔이’를 뜻했다. 거주지가 불안정한 사람은 길거리의 악취가 풍기는 벤치 위에서 잠에 곯아떨어지기도 했다.22)




3. 19세기 말 유대인 사회의 변화와 갈등




1880년대에 이스트 엔드에 몰려든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 이민이 독신의 젊은이 위주였던 데 비해 가족이 함께 이동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유대인 이민 가운데 여성 및 어린이의 비중이 높은 것은 이때문이다. 소규모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던 동유럽 이민들이 이스트 엔드에 정착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1901년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및 폴란드계 이민들의 직업별 분포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의류(44%), 상업(15%), 육체노동 및 기타 제조업(13%), 제화(11%) 등이었다.23) 당시 의류와 제화업 분야는 동시대 사람들이 고한제(sweating system)라고 불렀던 새로운 생산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방식은 “공장제가 발전함에 따라 생존투쟁을 벌이는 비정상적인 소규모생산”에 지나지 않았지만,24)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기술혁신, 시장수요의 변화 그리고 저임 노동인구의 증가라는 새로운 환경의 산물이었다. 예컨대 양복업의 경우 기존의 고급정장 외에 싸구려 기성복 수요가 늘면서 이러한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만한 새로운 생산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한제란 도매상이나 중매상의 하청 일감을 맡은 생산자가 좁은 작업장에서 저임 노동력을 고용하여 생산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생산이 가능했던 것은 재봉틀과 같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미숙련노동자들을 광범하게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빅토리아 시대 후기에 이스트 엔드 빈민지역에서 고한제가 확산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당대에 이 문제를 검토한 아서 바우먼(Arthur Baumann)은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한제가 싸구려 제품을 찾는 하층민의 수요를 겨냥한 생산조직으로 생각한다. 생산의 저렴화와 신속화야말로 고한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우먼은 고한제 생산과 하층민용 싸구려 제품을 무조건 연결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항변한다. 고한제는 하층민의 의복 수요와 특히 외국인 이민들의 수요에 맞추어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제도는 대불황기의 소득배분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대불황기에 정규노동자의 생활수준은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장기간의 물가하락과 더불어 오히려 높아지고 있었다. 소득 수준의 상승으로 그들은 노동자 자켓을 벗어버리고 정장에 블랙 코트를 걸치고 중절모를 눌러쓸 수 있었다. 불황과 더불어 사치품 수요는 떨어졌지만, 오히려 실질 소득이 상승한 사람들은 값이 싸면서도 깔끔하고 세련된 의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바우먼에 따르면, 이와 같은 기성복 수요의 변화는 “현대 의복의 민주주의”를 반영한다. 고한제는 이러한 수요변화의 산물이었다.25)

이스트 엔드에서 의류업 분야의 고한제 경영자나 노동자들은 대부분 유태인 이민들이었다. 동유럽 이민은 원래 수공업이나 상업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한제야말로 그들의 여건에 가장 적합한 일거리였다. 그들은 이스트 엔드에 정착한 초기에는 고한제 작업장에서 일을 배우다가, 시간이 지나면 독립하는 사례가 흔했다. 1887년 비어트리스 포터(Beatrice Potter)[비어트리스 웹]는 이스트 엔드 지역의 고한제 작업장을 세밀하게 조사하였다. 이들 작업장은 주로 화이트채플, 마일 엔드, 세인트 조지 등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1평방 마일에 지나지 않는 이곳에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의류작업장에서 일했다. 이 지역을 답사하면서 포터는 거리 곳곳에 히브리 어나 이디시(Yiddish) 어로 씌어진 간판들이 내걸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인구밀도 또한 런던에서 가장 높은 편이어서 에이커당 227명에 이르렀다.26)

비어트리스 포터는 자신의 가족 외에 다른 노동자를 고용한 유대인 코트 생산업자 901명의 자료를 입수하여 분석하였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25명 이상을 고용한 작업장은 1.6%(15곳)에 지나지 않았고, 10-25명 이내가 22.3%(201곳), 10명 미만인 업체가 전체의 76%(685곳)에 이르렀다. 맞춤 위주의 고급 코트를 만드는 업체는 극소수(54곳)였고, 중급 코트 제조가 192곳, 나머지는 모두 최하급의 싸구려 코트를 만드는 곳이었다.27) 특히 마지막 형태의 작업장은 대부분 유대인 소유였다. 이들 고한제 경영자(남성)는 갓 이민온 동유럽 유대인 여성들을 고용하여 싸구려 코트를 만들었다. 소규모 작업장에서도 작업공정은 세분되어 있었다. 작업공정의 세분화와 단순화야말로 미숙련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고한제 경영자들은 수선공(fixer), 가봉공(baster), 재봉공(feller), 미싱공(machinist), 단추구멍 공(button-hole hand), 다림공(presser) 등 고도로 세분된 일꾼들을 거느리고서 20벌 단위로 코트를 생산하고 있었다.28)

이들 작업장에 관련된 자료를 살펴본 끝에, 비어트리스 포터는 당대의 사람들이 유대인에 대해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우선, 고한제 경영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신문에서 그려지는 고한제 경영자의 이미지는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작업장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다.29) 그러나 그녀가 조사한 자료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다. 유대인 코트 제조업자의 근면성은 정평이 나 있었다. 사실 이스트 엔드의 유대인 사회는 극빈층이 밀려드는 “밑바닥 인생의 저수지”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 자리 잡은 코트제조업 또한 “가장 낮은 임금의 일거리, 가장 황폐한 작업장, 가장 더러운 건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근면한 유대인들은 좀더 여건이 나은 지구나 직종으로 옮기면서 이 열악한 생산조직을 다른 신참에게 넘기는 것이었다.30)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은 대부분 부드가 조사한 이스트 엔드 주민 중에서도 빈곤인구에 속했다. 주로 고한제 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기존 세파르딤계의 후예나 또는 영국 태생의 유대인 집단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시티에서 활동하는 부유한 유대인들은 신규 유대인들에게서 동질감을 가질 수 없었다. 두 집단 사이의 거리는 그들의 신앙과 종교생활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몇 가지 갈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나고그에 대한 태도에 차이가 있었다. 18세기 이래 런던의 3대 시나고그(Great Synagogue, Hambro's Synagogue, New Synagogue 등)는 기존 세파르딤 또는 영국 태생 유대인들 중심의 회당이었다. 이들의 종교 및 일상생활의 중심은 이 시나고그였다. 그러나 동유럽 유대인 이민들은 기존의 회당에 출입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했다. 회당에는 그들을 위한 좌석이 마련되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종교적 열정이 있는 유대인들은 스스로 소규모 신앙모임(Chevras)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한편으로는 사망하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 서로 돕기 위한 일종의 공제조직의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을 지키고 탈무드를 공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신앙모임의 규모는 다양했지만, 그 명칭은 참여자들이 떠나온 러시아나 폴란드의 마을 이름을 따오는 경우가 많았다. 동향인 중심의 모임이기 때문에 그만큼 결속력이 높았을 것이다. 헌신적인 사람들은 아침 일찍 또는 밤 늦게 이곳에서 만나 성서를 낭송하고 기도하며 탈무드를 공부하였다.31) 이들 신앙모임은 때로는 그들 전용의 작은 예배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헌신적인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예배에 집착했는데, 아마도 그것이 추방당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배 자체가 그들의 고향인 러시아나 폴란드에 대한 통한스러운 집착을 나타냈다.32) 예컨대, 유대인 작가 이스라엘 장윌(Israel Zangwill)은 그의 소설 『게토의 아이들(Children of Ghetto)』(London, 1892)에서 동유럽 유대인사회에서 신앙생활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예배당은 두 개의 커다란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방은 하나로 틀 수도 있다. 뒷방은 남자 옆에 앉으면 그들에게 홀려 영적인 것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가발을 쓴 다소곳한 여성들을 위한 것이다. 그 방의 가구란 간소한 나무의자와 커튼을 두른 언약궤 뿐이었다. 그 속에는 모세 5경을 기록한 두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 외에 각각 은제 교편, 은종, 그리고 석류나무 열매가 있었다.‧‧‧(중략)‧‧‧ 신자들은 하루에 두 번 또는 가끔은 세 번씩 이곳에 들려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서, 윤리적이라기보다는 성서 해석에 치중하는 강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때가 덕지덕지 묻은 겉옷 위에 쓰러져 울부짖듯이 기도하는데, 그들의 열정으로 유리창틀이 흔들릴 정도였다. 열명의 집회정족수(minyan)에 미달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33)




부드에 따르면, 1888년 당시 런던에서 이와 같은 소규모 신앙모임에 참여하는 유대인은 약 1만 2,000 내지 1만 5,000명에 이르렀다. 기존의 시나고그 중심의 종교와 소규모 신앙모임의 관계는 영국 국교회와 비국교회 사이의 그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사실 시나고그나 작은 예배당이나 그 기능은 동일하였다. 회중에게 그곳은 신앙만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과 기예와 글을 배우는 장소였다. 그것은 전능한 신의 성소이자 그들의 고향이며 때로는 동료와 친교를 맺는 사교장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나고그와 작은 예배당은 계층별로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전자가 미들 클래스에 속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한다면, 후자는 좀더 가난하지만 오히려 좀더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빈층에 속하는 유대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이와 같은 소규모 신앙모임이나 예배당에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34)

다음으로, 기존의 율법학자에 대한 태도도 두 집단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원래 유대인에게 종교란 지상의 삶의 법칙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유대인 사회에서 율법학자가 갖는 지위는 강력했다. 이들은 로마 정복 이후 유대교의 사제계급이 사라진 후 실제로 유대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는 중추세력으로 활동해왔다. 그들은 각기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를 자문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최고율법학자(chief rabbi)는 유대 법정(Beth Din)을 통하여 종교적 의무의 상세한 사항을 규정하기도 하고, 가족 갈등, 직종 및 노동의 분쟁, 부부싸움, 아내의 도망, 심지어 약속 파기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사회에서 나타나는 일상생활의 갈등까지도 중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 유대인 사회의 최고율법학자 나단 아들러(Nathan Adler)는 국제적으로 평판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헤르만 아들러(Herrman Adler)가 그 지위를 계승한 후에, 동유럽 이민들은 헤르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민사회에서 그는 존경보다는 오히려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는 그의 우파적 정치관과 자유주의적 종교관 때문이었다. 정통신앙을 고수한 아수케나짐계 유대인들은 헤르만 아들러의 전제적인 스타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실제로 1891년 동유럽 이민들은 헤르만에 맞서서, 헬싱키 출신의 율법학자 아브라함 베르너(Avraham Aba Werner)를 새롭게 초빙하기에 이르렀다. 구 유대인과 동유럽 이민 사이에 일종의 종교적 문화투쟁이 벌어진 것이다.35)

마지막으로, 1880년대에는 도축업자(shochet)36)를 둘러싼 갈등도 나타났다. 원래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은 대부분 율법과 성서적 근거의 지배를 받는다. 정통 유대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정결법’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주로 구약에 나오는 위생 및 식생활에 관한 사항들이 이 법의 주요 내용을 이루며, 도축행위(shechita)는 전통적으로 유대인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원래 유대인들에게 도축은 종교적 행위로서 가축 도살에 관한 여러 상세한 규정과 관행이 전해져 내려왔다. 이것은 도살할 수 있는 가축을 정하고 도살하는 방법과 먹을 수 있는 동물의 부위, 그리고 제식에 올릴 부위가 정결한지 여부를 조사하는 방식까지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근대적인 도축장에서는 사전 검사, 도살, 그 후의 과정 등으로 나누어 작업이 전문화되어 있지만, 전통적인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축업자가 이 모든 작업을 주관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다년간의 수련이 끝나면 율법학자로부터 면허증(kabbalah)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 면허증을 발급한 율법학자의 권위와 명성을 근거로 도축업자를 신뢰하였다.37)

19세기 초 런던의 3대 시나고그 지도자들은 도살에서 소매업까지 전 과정을 감독하는 도축위원회(Board of Shechita)를 구성하여 육류의 도살 및 판매에 관한 상세한 지침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동유럽 유대인 이민들은 이미 최고율법학자의 권위를 무시했기 때문에 기존의 제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축위원회의 지침과는 달리 그들 독자적인 관행을 내세우며 별도의 도축업자들을 지정하였고, 새로 초빙된 율법학자가 그 면허장을 발급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1880년대 이후 세파르딤계 또는 영국 태생 유대인과 동유럽 출신의 아스케나짐계 유대인 사이에는 동일한 인종집단으로만 취급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 시나고그와 소규모 예배당으로 구별되는 이 두 사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세파르딤계 영국 태생 유대인들이 주로 웨스트 엔드에 살았던 반면, 동유럽 이민자들은 이스트 엔드에 몰려들었다. 그들의 직업과 경제적 수준에서도 뚜렷한 구분선을 그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금융, 무역, 의료업이 주류를 차지하였고, 동유럽 이민들은 주로 양복, 가구업의 고한제 경영자 또는 종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이분 구도는 적어도 1차대전기까지 지속된 것처럼 보인다.




4. 유대인 혐오증, 편견의 구조화




세파르딤계 유대인들은 대체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영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세기에 영국 태생 유대인이 증가하면서 이들은 영국사회에 동화하는 데 별로 거부감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구 유대인 사회는 100여 부유한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시티의 상업 및 무역활동에 경제적 기반을 두었다. 예컨대 1880년대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인 라이오널 코헨(Lionel Louis Cohen)이나 새무얼 몬테규(Samuel Montagu)는 모두 은행가 출신이었다. 특히 1828년 가톨릭 해방법 이후 공적 활동의 자유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심 또한 높아졌다. 1845년 이후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공직 참여의 기회가 주어졌고, 이후 유대인 유력인사들이 자유당 후보로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38) 중간계급 출신 유대인들은 동유럽 이민의 특이한 옷차림이나 말투 또는 태도가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낳는다고 보고, 교육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들이 유대인 집단거주지에 유대인 주간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한 것도 동유럽 유대인의 ‘영국화’를 이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동유럽 이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그들은 여전히 전통과 신앙을 지키고자 했으며 오히려 세파르딤 계통이나 영국 태생 유대인들이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비난하였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에 동유럽 이민들이 이스트 엔드에 대거 진입하면서, 동시대 영국인들 또한 이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의 신문이나 의회조사보고서들은 한결같이 유대인 증가에 따른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언급한다. 영국인들 사이에 한동안 약해졌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다시금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사실 이스트 엔드의 빈민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부드의 경우도 유대인에 관한 서술에서 이들에 대한 그 자신의 편견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의 주요 평론지들 또한 가끔 유대인 문제를 다룬 논설을 싣고 있다. 그 가운데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설도, 그리고 이들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논설도 있다. 여기에서는 부드의 저술에 나타난 편견과 일부 평론지 논설 내용을 단편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부드 또는 비어트리스 포터는 유대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부드는 이스트 엔드 주민에 대한 조사 자료를 편집하여 1889년에 두 권짜리 책을 출판하였고, 이를 더욱더 보완한 후에 17권에 달하는 증보판을 펴냈다. 특히 1889년판에는 유대인에 관한 별도의 장을 마련하여 유대인 이민의 역사와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여러 가지 사항을 수록하고 있다.39) 부드가 보기에 동유럽에서 새롭게 이주한 유대인들은 런던 생활의 주류 밖에서 함께 모여 살다가 죽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배타성이야말로 이른바 유대인 혐오증(Judaephobia)의 원인이었다.

부드의 저술에서 드러나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주로 그들의 기질과 배타성에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유럽인과 다른 그들의 이국적인 용모가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독특한 외관 때문에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곧바로 유대인임을 알 수 있었다. 화이트채플의 어느 거리를 지나던 부드의 조사보조원 르윌린 스미스(Llewellyn Smth)는 자신과 마주치며 지나가는 한 유대인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조심스러운 보행자는 높은 광대뼈에 두터운 입술을 가진, 아마도 러시아나 폴란드계 유대인처럼 보인다.” 특히 길고 짙은 턱수염이야말로 자신이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징표였다.40)

또 유대인이 머리가 좋다는 통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통념은 영리하거나 약다고 하는 부정적인 인상과 맞물려 있었다. 자영업(self-employment)은 유대인들이 “강렬하게 집착하는 자연스러운 야망”인데, 이 또한 그들의 기질에 적당한 것이었다.41) 부드에 따르면, 폴란드계 유대인은 두뇌회전이 빠르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이 모든 종족 가운데 가장 뛰어난 도박 재주를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빈민가의 어린 유대인 소년이 혼자서 카드놀이나 동전치기를 하면서 비굴한 모습으로 운명의 법칙을 골똘하게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린다.”42) 

한편, 유대인들의 내향적이고도 이기적인 태도 또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유대인들의 신앙은 엄격한 식사관행과 위생의 준수를 요구한다. 이러한 계율은 유대인들의 건강과 정신적 활력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지만, 그 대신에 가족의 유대만 지향하는 내향적인 기질을 낳았다. 비어트리스 포터에 따르면, 화를 내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 자존, 자의식, 개인적인 위엄과 감수성이 폴란드계 유대인의 기질을 형성한다. 이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은 억압을 당하면 냉정하게 우스갯소리로 조롱하면서 견뎌낸다. 모욕을 당하고 욕설을 들을 경우에도 그는 침묵을 지킨다. 당신의 상대방을 이겨내야 할 때 왜 화를 낸단 말인가. 은밀하게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 왜 굳이 고함을 지르고 싸우는가.”43)

이와 아울러 수전노라는 전통적인 이미지도 더욱더 강화되었다. 비어트리스 포터는 유대인들의 경제적 수완과 근면함에 대해 거듭 감탄한다.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을 유럽 금융의 지도자로, 황제와 국왕들의 은행가로 만든 것은 바로 이런 본능이다.”44) 경제생황의 측면에서 보면 구약과 탈무드 자체가 돈을 벌어들이는 지침서이다. 유대인 이민들은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신분상승을 꾀한다. 유대인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다. 그러나 비어트리스 포터는 이 경쟁심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부드의 사회조사원으로 참여하면서 유대인을 관찰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외국에서 이주한 유대인의 경우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 자존심에 제약당하지 않고, 자기 계층에 대한 충성과 직종에의 정직성이라는 사회분위기의 제약도 받지 않는 경쟁에 매진하는 것이다. 결국 폴란드계 유대인들은 경제적 인간의 화신(economic man incarnate)이다. 그는 신념과 경험을 합쳐서 합리적 계산행위를 낳는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경제학자들이 인류를 위해 마련한 처방전이 아니었던가!”45)




유대인에 관한 부드와 비어트리스 포터의 서술은 근본적으로 그들 자신의 가설적인 편견에 의거한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당대의 사람들이 공유했을 것이다. 유대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술에서도 비슷한 편견이 깃들어 있다. 고한제 아래서 일하는 유대인들은 근면하고 악착같이 돈을 버는 기질을 가졌으나, 대부분 마스터로 상승하려고 발버둥친다는 내용이 바로 그렇다. 당시 이스트 엔드 유대인들에게서 이러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면, 그것은 그들 특유의 인종적 기질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소수자로서 이민 집단이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태도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동시대 문필가들의 논설에서 유대인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19세기(Neneteenth Century)》지나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실린 논설들은 유대인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반(反)비판이 주류를 이룬다. 특기할 만한 것은 반 비판 논설 대부분이 유대인 출신 지식인들에 의해 씌어졌다는 점이다.46) 먼저 비판적인 논설들은 당시 유럽에 만연한 유대인 혐오증의 기원을 그들의 ‘종족적 배타성’(tribal exclusiveness)에서 찾는다. 골드윈 스미스(Goldwin Smith)에 따르면, 유태인들은 오랫동안 편협하게도 자민족 위주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이 혐오증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유태인은 그들만의 고유한 종교적 우상에 집착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모든 다른 민족은 적어도 인류에 대한 헌신을 공언한다. 그들 모두는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보편적 형제애가 실현될 날을 기대한다. 유태인만이 자기네 종족이 인류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다른 민족과의 궁극적인 연대가 아니라 다른 종족 모두에 대한 승리를 대망한다”47)




물론 이에 반론도 있다. 헤르만 아들러(Hermann Adler)나 프레데릭 도셋(Frederick Dorsett) 등은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오랫동안 진행된 유대인 박해의 부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종교적 배타성에 대해서도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서로 만나서 함께 생활하기로 한 두 남녀가 종교에 관해서 일치된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가정의 평화와 행복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신앙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국에서도 개신교와 구교도 사이의 결혼은 비교적 드물다. 기독교도와 힌두교도, 개신교도와 그리스 정교회 신자와의 결혼은 더욱더 드물다. 그는 유대인의 신앙 또한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을 배타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유대인 박해가 뿌려놓은 편견이라는 것이다.48)

부드와 비어트리스 포터의 사회조사 또는 동시대 평론지의 논설들은 일종의 공적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적 언어가 이스트 엔드의 유대인, 그리고 나아가서 종족적 맥락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더욱 더 심화시켰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민족의 기질이나 성격에 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실제로는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1880년대 이전에 영국의 지식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 문제를 다룬 공적 언어를 내놓지도 않았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 또한 사람들의 내밀한 의식에 잠겨 있었을 뿐이며, 오히려 영국 태생 유대인의 비율이 증가하면서 유대인 차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은 뒤바뀐다. 유대인 문제가 지식인들의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공적 담론의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내밀한 의식에 깃들어 있던 편견이 새롭게 구조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5. 이스트 엔드의 유산




유대인들은 영국 사회의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이들이 영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한 전람회나 축제는 이전부터 있었다. 1887년 로열 앨버트 홀의 ‘영국 유대인 전람회’, 1951년 유니버시티 칼리지가 기획한 브리튼 축제의 ‘유대인 전시회’, 1956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잉글랜드 유대인의 예술과 역사’ 전시회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 기획에서 빅토리아 시대 후기 이래 이스트 엔드에 이주한 동유럽 유대인의 삶과 풍경은 빠져 있었다. 이들 전시회는 대부분 세파르딤계 또는 영국 태생 유대인의 문화적 성취를 수집하고 전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뿐, 이스트 엔드 유대인들의 경험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들의 경험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1980년에 처음으로 이스트 엔드 유대인 생활경험을 반추하는 전시회가 열렸다.49) 불과 100여년 전의 삶의 경험들이 이제 겨우 역사 속에 복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1880년대 이후 동유럽 유대인들은 이스트 엔드 지역이 빈곤의 대명사로 불리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유럽 이민들은 기존의 유대인 사회에도 혼란을 초래하였고, 영국인들의 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일깨워 다시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부드의 사회조사나 동시대 문필가들의 논설 또한 이러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편견을 구조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스트 엔드의 유대인 사회는 양차대전 사이에 다시 급속하게 해체된다. 이민 2세대는 그 부모 세대와는 달리 영국화에 적극적이었으며, 근면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나은 위치로 올라설 수 있었다.50) 도시 빈민지역에서는 대체로 빈곤의 세습과 빈곤의 재생산이 문제가 되곤 한다. 그러나 유대인 사회에서 빈곤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기보다는 단절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이스트 엔드에서 웨스트 엔드로, 또는 미국으로 유대인의 공간적 이동은 항상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인도계, 벵갈인,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들어섰다. 동유럽 유대인 이민들에 의해 빈곤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이스트 엔드가 그들이 떠난 뒤에도 새로운 이민을 통해 여전히 그와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이다. 이스트 엔드 유대인 사회가 해체된 이후에야 비로소 최근에 이들의 삶의 경험을 복원하고 또 그 경험에 관한 역사서술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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