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9 캄보디아 방문보고서.pdf2.3M2015년 9월 캄보디아 방문보고서
함께 가는 길
― 2015년 9월 캄보디아 방문보고서
정귀순, (사)이주민과 함께 상임이사
1. 방문 일정 : 2015년 9월 5~14일
2. 방문 프로그램
1) 뽀이뻿
– Partner Group 방문 및 사업협의
(2014.9~2015.8 사업평가 및 2015.9~2016.8 사업계획 및 예산 협의)
– 교사지원프로그램 진행 중인 꼬프람 초등학교 방문 및 신규 추천학교 오르세이르 초등학교 방문 교사 간담회 진행
– <안양숙꿈나무장학기금> 신규 추천 장학생 간담회 및 장학생 선발 (고등학생 6명)
– 마을 방문, 유치원․성당․여학생 기숙사 방문
2) 바탐방 원불교 청수나눔회 센터 방문
– 클리닉, 한국어 교실, 태권도 교실 둘러봄
3) 뿌삿 끄로왓 가톨릭 농업센터 방문 (이경용 신부님 만남)
4) 프놈펜
– 사랑의선교회 운영 에이즈 센터(남․여) 방문
– 헤브론 병원 방문
– 피스카페 & 코미소 공방 방문
– 원불교 언동마을 탁아소 방문
– 반티쁘리업 장애인 기술학교 방문
5) 프레이벵 촘라운 고등학교 방문 및 운영협의
(2014.9~2015.8 사업평가 및 2015.9~2016.8 사업계획 및 예산 협의)
6) 기타
– 킬링필드 유적지 방문
3. 함께 가는 길
하나, 시간의 흐름
어느새 캄보디아를 만난 지 10년이 되었다. 2005년 5월 처음 만난 캄보디아는 한낮의 기온이 40~50도를 오르내리던 건기 말의 무더운 날씨에도 지치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겸손함과 열정에 깊이 감동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은 특별한 인연이 되어 2006년부터 <아시아평화인권연대>의 캄보디아 지원사업으로 이어졌고, 이후 일과 사람이 여러 겹으로 만나면서 캄보디아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의 성장과 변화를 함께 지켜볼 수 있었고, <아시아평화인권연대>의 지원사업 역시 훌륭한 현지 파트너들 덕분에 튼튼하게 성장하고 있다.
그 사이 2005년 첫 방문 때 함께 캄보디아와 인연을 맺었던 나의 벗이자 후배 안양숙은 그 뒤 캄보디아의 가난한 이들 속에 자신을 내어 놓았고,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그를 보낸 뒤 그를 기억하며 뽀이뻿 수녀님들 마당에 심은 망고나무 두 그루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그의 뜻을 기억하며 벗들이 십시일반 조성한 <안양숙꿈나무장학기금>은 지난해 프놈펜 농업대학에 입학한 수언 완나를 첫 번째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그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안양숙 나무>
<안양숙 나무>
<첫 번째 장학생 완나와 함께>
2005년 메콩강가의 호텔들을 제외하고는 높은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프놈펜은 해마다 몰라보게 변하여 이제 카페와 식당과 은행과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 국도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나무로 지은 전통가옥들도 이제 튼튼한 시멘트벽과 유리창으로 외부를 차단한 집들로 변하고 있다. 빠른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아무리 가난하여도 아이들의 환한 미소가 그렇고, 오랜만에 방문하였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내어 묵묵히 어렵고 힘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미소 또한 그러하다.
둘, 미완의 꿈
2009년 1월, 안양숙이 캄보디아로 삶의 현장을 옮기면서 <아시아평화인권연대>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가 크메르어를 배우며 살았던 프놈펜 시 벙꺽 호수 수상가옥 마을은 프놈펜 시의 도시개발붐에 떠밀려 결국 철거당했다. 오랫동안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주민들은 형편없는 보상을 받고 삼엄한 경계 아래 강제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 과정에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고 또 절망스러워 했던 그는 그 후 프놈펜 외곽 공단지역 노동자들의 쪽방촌 작은 쪽방에서 여공 4명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5명이 어찌 살았을까 싶은 작은 방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기꺼이 받아준 여공들에게 더 고마워했고, 그것이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현실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 1년을 살고 2010년 10월, 나의 연구년 말미에 캄보디아를 방문하여 함께 공단과 쪽방촌을 둘러보았다. 한국의 70년대 구로공단이나 사상공단과 흡사했다. 산업화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도시 공장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쪽방촌에 약간 널찍한 집을 하나 구해 노동자들과 함께 살면서 주말에는 모임방이기도 하고 세탁기와 가벼운 진료 등을 제공하는 ‘노동자 쉼터’를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에서의 노동운동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정기검진을 위해 함께 한국으로 왔고, 검진결과는 안타깝게도 유방암이 재발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의 새로운 계획을 기약 없이 뒤로 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항암치료를 시작했고, 다시 그 쪽방촌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안양숙이 살던 공단 쪽방>
<함께 살던 이들과 함께>
3년 후인 2014년 1월 3일 캄보디아 프놈펜 남서부 외곽 카나디아 공단이 있는 웽 스라엥(Veng Sreng) 도로에서 있었던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80에서 $160로 인상)에 헌병들이 발포를 하여 5명이 사망하고 40여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지난 해 6월, 시위의 중심에 서 있었던 노동조합과 공단 내 가톨릭노동사목센터를 방문하여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고, 올해 한 번 더 가보고 싶었지만 결국 가보지 못했다.
<박문진님, 정현주님과 함께>
셋, 동행
이번 캄보디아 일정에는 한사람의 동행이 있었다. 대구 영남대병원 해고자 박문진님이다.
그는 영남대병원 간호사이기도 하고,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첫 번째 해고 후 복직되었다 다시 해고되어 복직 투쟁 중이다. 그를 부산지역 NGO 활동가들을 위한 기금인 <민들레기금>에서 올해 노동부문 특별프로그램으로 진행 중인 성찰프로그램의 후속프로그램으로 ‘수지에니어그램’ 강사양성 기본과정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다. 오랜 해고 상황으로 많이 지치고 내면이 황폐해지지 않았을까 염려한 것과 달리, 그는 밝고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우리의 인연은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네팔의 지진피해 지원활동에 참여하고자 신청하였으나 우기가 시작되어 대부분의 NGOs들이 피해지역으로의 활동이 주춤하여 네팔 행이 연기되어 있는 상태라 그에게 캄보디아에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하게 되었다. 그에게 한국에서의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다른 삶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이력이 양숙과 흡사하여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를 위해 이번 캄보디아 방문은 진행 중인 사업협의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다양한 의료 활동이 진행 중인 기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 그에게 가장 큰 행운은 부산성모병원 의사로 근무하다 2014년 4월 병원을 그만두고 예수회 자원봉사자로 캄보디아 진료활동을 떠난 정현주님이었다. 정현주님은 1년을 약속하였으나 1년을 더 연장하여 캄보디아에서 그를 필요로 하는 여러 기관에서 진료 중이다. 이번 프놈펜에서의 방문했던 기관 대부분은 그가 진료를 나가고 있는 곳이어서 더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를 받았다. 주 6일, 열심히 환자들을 보살피고 있는 그에게 때로 고단함도 느껴졌지만 내가 만난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프놈펜 미란의 방>
또 한사람의 동행은 <아시아평화인권연대> 활동가 미란이다. 2010년 하반기부터 1년 반 동안 뽀이뻿 돈보스코 학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미란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이른바 캄보디아 병을 앓았다.(캄보디아를 그리워하는) 캄보디아로 활동을 장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2014년 12월 29일 캄보디아로 가서 프놈펜에서 크메르어 공부 중이다. 미란은 올 연말까지 1년간 크메르어를 배우며 앞으로의 활동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고, 8개월이 지난 지금은 앞으로 캄보디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조금 구체적인 생각들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적어도 사계절은 지켜보아야 한다’고.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의 시선이 아니라 캄보디아에 삶의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이의 시선으로 캄보디아를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미란은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재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은 그에게 동료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을 포함하여 앞으로 미란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된다.
4. 뽀이뻿 지역 교육 사업
하나,
<아시아평화인권연대>의 뽀이뻿 지역 교육사업은 크게 두 개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일찍부터 일터로 내몰리지 않고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장학사업(Scholarship Project)과 가난한 마을 아이들 대부분이 다니는 공립초등학교 교육의 부실함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교사지원프로그램(Teachers’ Support Program) 이다. 장학사업은 대부분이 가난하지만 그 중에서도 ‘더 가난한’ 집의 아이들, 부모가 없거나 혹은 태국으로 일하러 가 할머니가 돌보고 있는 아이들, 부모가 아프거나 한부모인 아이들, 형제나 자매가 많아 가난한 부모들이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아이들 중 80명을 선발하여 한국의 가족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지원하고 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 중 8월에 2주간 특별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 프로그램에 한국의 자매결연 가족방문단이 참여해서 학예회와 소풍도 함께하고 아이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둘,
지난 1년 동안 유난히 장학생들의 교체가 많았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그 사정이 이해되었다. 지난 해 태국에서 캄보디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대거 추방하였고, 뽀이뻿 주민들 대부분이 태국 국경변 농장에서 일일노동을 하거나 밀입국으로 태국에 가서 일하고 있고 이들 중 상당수도 추방되어 실업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다시 태국으로 이주노동을 떠나는 것 외 다른 선택이 없어 보였다. 장학생들 중 고학년들은 장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생필품(매월 쌀 20kg, 통조림, 비누, 칫솔, 치약 등) 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일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아이들은 공부 보다 일을 하도록 요구받게 된다. 아이들 중 몇몇은 태국으로 일하러 갔고, 또 몇몇은 부모를 따라 농장에 가서 일하거나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 일터로 갔다.
그럼에도 2007년부터 시작한 장학사업은 이제 중학생 13명, 고등학생이 3명이 되었다. 자매결연을 맺은 한국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아이가 공부를 중단하게 될까봐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렇다고 가족과 분리하여 그 아이만을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가 장학생에서 탈락하면 수녀님들도 우리도 안타깝기만 하다. 캄보디아의 NGO 메콩펀드(Mekong Fund) 성적이 좋은 아이들 중 장학생을 선발하여 부모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되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아이들은 이 NGO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참동안 한국의 현실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셋,
올해 뜻 깊은 일 중 하나는, 장학사업의 담당자로 수녀님들과 함께 일하는 멩라이가 그동안 주말에 다니던 시소폰의 대학을 졸업하게 된 것이다. 그의 학비를 포함했던 우리의 장학사업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그가 수녀님들과 함께 일할 것이라 하여 더 기뻤고, 이제 대학졸업 학력을 갖춘 그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앞으로 장학생들 중 상당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뽀이뻿에서 아이들을 위해 활동하거나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어 준다면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큰 자극이 되리라 생각한다.
넷,
수녀님들과의 장학사업은 가난한 아이들의 기초교육에 집중하고, 고등학생 장학생들은 <안양숙꿈나무장학기금>에서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하여 대학에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하였다. 기존 고등학생 장학생 3명(11학년)과 돈보스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하는 학생 3명(10학년), 모두 6명과 간담회를 갖고 장학생으로 선발했다. 장학금은 가족들에게 지원되는 생필품과 학생들에게 지원되는 학용품과 과외비, 통학용 자전거 등을 포함하여 정리하고 월 1회 정기 모임을 갖기로 했다.
<장학생들과 간담회를 마치고>
다섯,
캄보디아의 초등학교 공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교사의 열악한 조건이다. 신임 교사는 1년간 월급이 유예되었다 1년이 지난 후 6개월 치씩 나누어 지급된다. 2년차가 되면 6개월씩 월급이 지급되고, 3년차가 되면 매달 월급을 받게 된다. 따라서 교사들은 생존을 위해 정규수업 보다 과외에 더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 과외를 할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의 학력은 더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장학생들에게 과외를 시키기보다 학생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교사들에게 수업시간을 제대로 지키고 학교 전체의 관리수준을 높이고 아이들의 학력을 높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교사지원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초등학교들 중 코프람 초등학교에서 시작한 <교사지원프로그램>은 올해 4년차에 접어든다.(교사 11명, 학생 500명) 동시에 시작한 껀달 초등학교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의 책임감이 너무 낮아 2년간 지원 후 프로그램을 종료한 반면, 꼬프람 초등학교는 지난해부터 교사지원금을 월 25$에서 35$로 인상하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반갑다친구야> 그룹과 함께 어린이날 행사를 열고 유치원 리모델링과 특별 후원인의 지원금으로 도서관 지원사업(도서관 기자재 지원 및 도서구입) 등, 많은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다.
<꼬프람 초등학교 도서관>
<꼬프람 초등학교 도서관>
<꼬프람 초등학교 도서관>
<아이들의 신발>
<보충수업 중인 아이들>
<꼬프람 초등학교 유치원>
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4명의 교사가 나와 있었고 뜻밖에 두 개의 교실에서 보충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물론 학생들로부터 별도의 수업료를 받고 진행하고 있으리라 짐작되었지만 교사 개인이 아니라 학교 차원에서 준비되고 진행되고 있음도 큰 진전이라 생각되었다. 이번에 유치원 교사 두 명이 비주얼아트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거기서 배운 내용들이 아이들 수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난해 유치원 리모델링 후 아이들이 70여명으로 늘어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유치원 교실을 하나 더 리모델링하기로 했고, 도서관의 서가도 새로 구입했고 책도 많이 늘었다. 꼬미 수녀님은 이번엔 도서관에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아이들이 책보기 좋은 책상과 의자를 구입하자고 했다. 아이들이 볼만한 책들도 아직 더 많이 필요하다.
여섯,
이번 회기부터 새로운 학교로 <교사지원프로그램>을 늘렸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교사 8명, 학생 500명의 ‘오르세이 르 초등학교’로 비교적 안정적인 마을이고 마을공동체와 학교의 관계가 좋다는 추가 설명이 있었다. 캄보디아로 출발하기 전 <아시아평화인권연대> 내부 회의에서는 새로운 학교지원은 현재 교사지원프로그램 후원으로는 부족하니 1년 후로 연기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의견을 가지고 갔다.
학교에 들어서니, 3년간 <교사지원프로그램>을 진행해온 꼬프람 초등학교의 학교 정돈상태와 활기 등 분위기에 큰 차이가 느껴졌다. 학교를 둘러보고 교사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근속연수가 10년 이상인 교사들이 많아 안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학교의 어려움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들을 내놓는 등 교사들의 기대가 크고 이미 학교 측과 많은 협의가 진행되었다면 연기가 어려운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학교의 <교사지원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니 좋은 방법이 생기리라 믿으며…….
<오르세이 르 초등학교>
일곱,
올해는 약간의 우려를 안고 파트너그룹 수녀님들을 방문했다. 그동안 이 공동체의 책임자였던 카르멘 수녀님이 지난 해 전체 수녀회의 부총장으로 선출되어 캄보디아를 떠나 모원인 스페인으로 갔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새로운 소임지 캄보디아에 파견되어 공동체의 어른으로 구심 역할을 해왔던 미카 수녀님이 건강 때문에 최근에 스페인으로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새로 부임한 수녀님이 두 분 있지만 아직 캄보디아에 충분히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상태라 짐작되었다. 일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 그 일을 감당할 사람은 부족한 상태에서 공동체가 재정비 중이지 않을까 짐작되었다.
뽀이뻿에 도착해서 만 이틀 동안 지내면서 수녀님들의 공동체에서 특별히 부족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넓은 품으로 늘 사람들을 품어주는, 사람 좋은 하수 수녀님에게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공동체 대표로서의 역할이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공동체에 합류한 새내기, 따뜻하고 유쾌한 성정을 가진 졸리 수녀님이 공동체에 부드러움을 채워주리라 생각한다. 10월부터 3년에 3개월씩 주어지는 휴가를 가지게 된 꼬미 수녀님은 그동안 지쳤는지 휴가 얘기만 해도 얼굴이 환해진다. ‘사람은 줄고
<하수 수녀님, 졸리 수녀님의 생일파티~>
일은 늘어나서 어떻게 하냐’는 나의 질문에 ‘신의 섭리대로’라는 답변,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정신인 만큼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채워가리라 생각한다.
◀ 지난 8월 여름캠프에서 2주간 자원봉사로 Art 수업을 맡았던 <이주민과함께> 일요일 무료진료소 자원활동가 이은지님은 수녀님들의 지나치게 소박한 살림살이에 마음 아파하며 냄비, 전기포트를 비롯한 주방 살림 한보따리를 수녀님들께 전해달라고 했다. 새 주방용품들로 가득한 수녀님들의 주방. 은지씨는 밤마다 아이들 꿈을 꾸고 있다고 내년 여름캠프에도 자원봉사를 가겠다고 한다.♬
5. 프레이벵 ― 쩜라운 비체아 고등학교
하나,
학교에 들어서자 이제 막 보충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우르르 자전거를 타고 나가고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수준 높은 고등교육을 목표로 설립한 이 학교는 개교 8년차를 맞는다. 그 사이 학교는 학력에서뿐 아니라 학교시설의 측면에서도 훌륭한 학교로 자리 잡았다. 프레이벵 가톨릭 주교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대한 특별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알베르트 신부님이 이 학교를 설립하여 기본적인 틀을 만들 후 이탈리아로 돌아가셨고, 그 후 책임자로 오신 한국외방선교회 김주헌 신부님은 학교의 시설과 수준을 높여놓았다. 그 덕분에 얼마 전 두 분의 주교님들이 방문하여 행사를 가져 이 학교가 교구로부터 충분히 인정받는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학교에 열정을 쏟은 두 분의 신부님들께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신축 도서관 건물>
<보충 수업 중>
< 도서관 실내>
둘,
학기를 마치고 졸업시험을 친 12학년들은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방학 중이지만 10~11학년들은 학교에서 보충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신입생 신청을 한 학생들은 2주간의 관찰학습 중이었다.(서류 만 보고 학생들을 선발하기보다, 학습능력, 학습태도 등을 파악해서 학생을 선발한다는 방침 아래 관찰 수업 후 신입생 선발) 올해는 221명이 신청해서(40명 정도 선발 예정), 그만큼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니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옆 중학교를 빌려 수업을 진행하는 등 약간의 어려움도 겪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책임자인 김주헌 신부님으로부터 예비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의 성적별로 60명 정도를 1차 선발하고 가정방문을 통해 가난한 학생들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졸업 시험 결과는 총 36명의 학생이 응시를 하여 1명이 낙방하고 35명이 패스하였고 학교 설립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B등급 3명, C등급 13명, D등급 6명, E등급 13명으로 C등급을 받은 상당수의 학생도 B등급에 가까운 높은 점수를 받았단다) 또 졸업생 중 8명의 학생들이 국가 장학금에 선발되었고, 프랑스 메콩 NGO의 장학생으로 5명의 학생이 합격한 상태이고 내년 졸업하는 학생들의 학력은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셋,
학교를 둘러본 뒤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들, 2년간 부부가 함께 와서 영어교사를 한 뒤 프랑스로 돌아갔다 두 달간 다시 자원봉사를 온 드미트리씨, 짧은 자원봉사활동 이후 다시 와서 1년간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미소 씨와 우리 일행이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드미트리씨가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이 학교가 캄보디아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수준의 교육이 교육에 대한 애정과 열정만 있다는 그리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학교가 가능하도록 지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가 캄보디아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신부님은 학교운영의 검증이 끝나고, 학교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학생들의 지원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지금, 학교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 보아야 할 때라고 얘기했다. 단순히 학력 수준 높은 사립 고등학교가 아니라, 이 학교가 다른 학교와 다른 교육의 가치를 실현하는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선발과 운영, 교육과정에 그 가치들이 담겨있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수준 높은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지만, 보다 다듬어진 교육철학이 필요한 때라 여겨진다. 그런 얘기들을 나눈 그날의 점심은 유난히 맛있었다.
6. 귀한 사람들
이번 방문 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환대와 보살핌을 받았고 또 신세를 많이 졌다.
뽀이뻿의 수녀님들과 프레이벵의 김주헌 신부님 뿐 아니라, 거의 10년 만에 방문했음에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갑게 맞아 주셨던 바탐방 청수나눔회 최지운 교무님, 끄로왓의 농업센터에서 유기농, 농업교육, 농민활동가 양성을 비롯하여 자연과 영성이 함께하는 센터의 꿈을 활짝 펼쳐보여 주셨던 이경용 신부님, 2005년 처음 캄보디아 방문 때 깊은 감동을 주었던 예수회 소속 강인근 신부님은 ‘종교 간의 대화’라는 특별한 소임으로 스리랑카와 영국에서 불교 공부를 한 뒤 지난해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개학을 앞두고 밤을 새워 준비해도 부족한 시간을 헐어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주었다. 프놈펜에서 우리의 일정을 준비하고 안내하랴, 진료하랴, 설명하랴 몹시 바빴던 정현주님 (나는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 헤브론병원 원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 프놈펜 외곽 언동마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탁아소를 하고 계신 청수나눔회 정승원 교무님, 에이즈환자 및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계시는 <사랑의선교회> 수사님들과 수녀님들, 지뢰피해를 입은 장애인들을 위해 설립한 <반티쁘리업 장애인기술학교>는 캄보디아에서 정신지체장애인으로 범위를 넓혀나가기로 하고 새롭게 책임자로 부임한 권오창 신부님, 그리고 캄보디아에 진출한 회사의 여러 가지 업무에도 불구하고 프놈펜에서 머무는 동안 불편하지 않게 많은 배려를 해주셨던 정철상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이 분들로 하여 캄보디아에서 우리의 시간이 더 풍요로웠고, 캄보디아 사회 역시 그러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