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버마 난민, 이주노동자의 삶-정정수(사무국장)

태국의 버마 난민`버마 이주노동자의 삶

정정수(아시아 평화인권연대 사무국장)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국적을 가진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만났지만 태국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을 만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러나 2003년 1월 출입국 관리국의 발표에 따르면, 태국은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가 중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나라이다1). 태국은 자국 노동자들을 해외로 송출하는 인력 송출국인 동시에 대메콩권(캄보디아, 라오스, 버마, 태국, 베트남)에서는 주요한 인력 송입국이기도 하다.

버마는 다민족 국가이며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버마족이다2). 대표적인 소수민족은 카렌족, 샨족, 카친족, 아라칸족, 몬족, 카레니족, 친족이다. 버마 종족분쟁의 뿌리는 영국의 식민지배(1889-1947)에 따른 통치원리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의 분할통치는 각 소수 종족의 정체성을 일깨웠고, 이것은 종족간(버마족과 비버마족) 대립을 조장시킨 결과를 낳았다. 식민지 군대의 주력은 다수인 버마족이 아니라 카렌족, 카친족 등 비머마계였다3). 물론 이는 버마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의 세력을 약화시켜 식민지배를 원활히 하려는 의도였다.

지난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가 승리했으나 군부정권은 권력을 이양하기를 거부하고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하였다. 버마에서는 지금도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정부군의 체계적인 강간이 자행되고4), 강제노동,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대한 재배치가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1,000명 이상의 정치범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태국의 버마 관련 NGO들의 현황

태국에는 버마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NGO들이 많이 있었다. 버마의 소수민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소수민족 지원활동을 하는 Burma Issues(매솟 사무실은 카렌족으로, 치앙마이 사무실은 샨족으로 활동가들을 구성하고 있었고 활동가들을 태국에서 교육한 후에 버마 내부로 다시 보내어 마을 사람들을 조직하고 교육활동을 펼치는 한편 기록작업(영상)을 하고 있었음), 난민캠프를 지원하는 BBC(Burmese Border Consortium)`IRC(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 1988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학생운동가 출신이면서 그 자신들이 정치범이기도 했던, 버마 정치범 석방운동을 펼치는 AAPP(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버마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 그룹들-Action Networks for Migrants(태국에서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 단체들로 구성)` MAP(Migrant Assistance Program: 태국의 대표적인 이주노동자 지원단체)`Yaung Chi Oo Workers Association(버마 노동자들이 만든 이주노동자 연합), 어린이 학교를 만들어 운영하는 BMSOH(Boarding Middle School for Orphans & Helpless Youth), Life Pages School, OPC(Opportunity for Poor Children), 청년학교를 운영하는 KYO(Karen Youth Organization), 매솟의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소 Mae Tao Clinic(의사 신시아가 운영하고 있어 신시아 클리닉으로 더 유명함), 샨족 여성 네트워크 SWAN(Shan Women's Action Network), 난민캠프의 카렌족 여성을 위한 정보제공과 소득증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KWO(Karen Women Organization) 등 방콕과 매솟, 치앙마이, 매홍손에서 방문했던 단체들은 각기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었다.

태국의 버마 난민5)

카렌난민위원회(Karen Refugees Committee)의 2004년 1월 보고서에 따르면, 태국-버마 국경의 7개 캠프에 거주하는 승인된 난민의 수는 104,955명에 달한다. 난민캠프에는 이들 난민 외에도 약 3만 명에 달하는 난민 신청자와 난민 지위는 각하되었으나 캠프체류는 허가된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태국에 버마 난민캠프가 설립된 것은, 지난 수십년간이나 지속된 국내 무장투쟁을 피해 이웃한 태국으로 피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버마군부의 엄청난 인권침해로 인해 1980년대 중반 이후 수십만 명의 버마인들이 태국으로 피난했기 때문이다.

난민캠프에 거주하는 난민과 난민 신청자의 70% 이상이 카렌족인데, 이는 버마 난민을 관할하는 태국정부가 ‘전투 피난민’만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6). 그래서 버마군부의 강제적인 소년병 징집, 강간, 강제이주, 마을 파괴와 같은 인권침해를 피해 피난온 소수민족 출신들은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이들은 태국정부에 붙잡혀 추방되거나7) 혹은 이주노동자로 살아남거나 불법적으로 캠프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이러한 차별적인 정책의 결과, 국경지역에서 국제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캠프에도 수용되지 못한 200,000명이 넘는 샨족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었다8). 태국 정부는 버마 출신의 몇몇 소수집단에 대해서는 일시적인 보호 대상자로도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것은 샨주가 마약의 생산`밀수와 관련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난민으로 승인된 사람들은 태국-버마 국경에 설치된 난민캠프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캠프의 난민들이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경을 가로질러 버마군의 공격이 반복되고 있어서 난민캠프를 떠나는 난민들도 발생하고 있다. 맬라 캠프에는 약 45,000명의 난민과 난민신청자들이 머물고 있는데, 그곳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9).

2004년 1월부터 UNHCR은 새로운 신규 난민신청자-난민지위결정-에 대한 심사를 중지하는 한편, 제 3국으로의 재정착 기회를 확대하는 문제를 미국, 태국정부와 함께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의 출발은 미국이 방콕과 다른 도시에 거주하는 4,000명에 달하는 UNCHR에 등록된 난민들과 난민 신청자들을 제3국으로 재정착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부터이다. 이것은 불안한 지위에 머물러있는 버마 난민들에게 환영할만한 발전임에는 분명하지만, 국경캠프에 거주하고 있는 난민들은 이 재정착 프로그램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UNHCR이 더 이상 난민지위결정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UNHCR에 등록되지 않은 새로운 난민신청자를 보호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많은 버마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체포, 구류, 추방, 뇌물 지급, 석방, 다시 체포.. 로 이어지는 끝없는, 값비싼, 불안한 순환이다.
태국 정부는 도시에 거주하는 난민들의 제 3국으로의 재정착 프로그램을 논의하는 한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추방을 진행하고 있다. 2003년 6월, 태국 외무부 장관은 버마 내부에 화해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제부터 태국은 난민들을 그들의 출신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버마나 다른 이웃나라로부터 유입되는 난민들을 더 이상은 환영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간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라고 SPDC에 압력을 가하는 다른 아세안 국가들과는 달리, 2001년 탁신 수상의 취임 이후 태국정부는 버마 군사정부와의 관계를 서서히 진전시켜 왔고 버마 난민, 이주노동자, 난민 신청자들에 대해서는 점점 가혹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 지난해 5월 30일에 발생한 아웅산 수지 여사에 대한 버마군부의 공격과 감금에 항의하던 버마 활동가들을 체포하여 구치소에 수감하고 있다. 탁신 수상은 이들을 체포한 후, “버마인들은 우리가 제공한 캠프에서 그들의 정부에 반대하여 항의할 권리가 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방콕에 와서 항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도 용납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10).

사실 제 3국으로의 재정착을 논의하기 이전에 태국정부는 도시에 거주하는 난민들을 국경 난민캠프로 재배치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난민들은 주로 버마의 정치적 망명자, 반체제 인사, 1988년 민주화 시위 후 버마를 탈출한 학생 출신 운동가 등이다. 따라서 이들을 국경캠프로 재배치한다는 것은 난민들의 정치적 활동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다.

태국의 버마 이주노동자들

태국에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모국을 떠난, 약 100만명으로 추산되는 버마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있으며 이 가운데 약 30만명이 노동허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난민지위를 신청했다가 각하되거나 혹은 심사중인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주노동을 하게 되는 사람들과 버마 군사정권하에서 강제 징집, 즉결 처형, 강제 재배치, 강제노동, 강간, 경제적 궁핍 등을 피해 태국에서 이주노동을 택한 사람들이다.
단속되어 버마로 추방당할 경우, 버마 당국으로부터 심각한 보복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태국 정부는 매달 수천명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여 추방하고 있다11).
태국에서 이주노동자를 추방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현재 태국에서 전개하고 있는 새로운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캠페인은 불법적인 이주노동자의 증가가 태국사람의 직업을 빼앗고, 경제`안전`공중보건문제를 야기시킨다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12). 태국정부는 2003년 11월부터 미등록 노동자가 60일 이내에 정부에 등록하지 않을 경우, 체포하여 추방할 것이라는 것을 공표하고 이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오고 있다13).

태국정부는 정부에 등록한 이주노동자에게는 노동허가를 주는데 노동허가를 얻기 위해서는 1년에 4,450바트(1바트=약 30원) 혹은 110$을 지불해야 한다. 매솟14)의 경우, 100,000명 남짓한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오직 35,000명만이 노동허가를 가지고 있으며, 의복 공장의 80~85%는 버마 노동자들에게 법정 최저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않는데 노동허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매솟의 하루 최저임금은 133바트(올해 135바트로 인상됨)인데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하루 50~90바트를 받을 뿐이다.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태국의 각지에서 공장 노동자로, 건설 노동자로, 농업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버마 이주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지급을 요구할 경우, 이들의 신분증을 압류하고 있던 고용주는 노동허가를 관청에 반납해 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반납 즉시 이들의 노동허가는 취소되면서 체류상태는 곧장 불법으로 바뀌고 버마로 추방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을 지원했던 활동가들 또한 위협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Yaung Chi Oo Workers Association(영치우노동자연합)의 대표인 Moe Swe는 버마 이주노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파업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사업가단체는 현상금을 걸고 폭력배를 동원하여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태국의 대표적인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인 MAP(Migrant Assistance Program)은 최저임금의 지급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해 버마로 강제송황될 뻔한 Nut Knitting Partnership Co. Ltd 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에게 안전가옥을 제공하고 이들의 최저임금 지급소송을 지원하고 있다. 2003년 12월, Nasawat Apparel Factory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던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그 즉시 해고되고 버마로 강제 송환되었다. 지난 4월 5일, 탁주의 태국 노동부가 회사에게 최저임금을 지급명령을 내렸으나 사업주는 반발하여 지급을 거부하고 법원에 항소할 것이라고 한다15).
태국정부와 버마 군부와의 관계가 완화되면서 양국은 지난해 6월, 양자합의를 통해 태국에서 여권, 비자, 공식계약, 제한된 기간의 체류를 보장받은 이주노동자의 노동력 수립체계를 수립하기로 하였다. 태국정부가 SPDC와 이러한 노동력 조달 정책을 체결함으로써 SPDC가 승인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은 다 추방되거나 버마 이주노동자 가운데 정치활동가들을 추방하는 데에도 사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경제적`정치적 이유로 버마를 도망쳐나온 사람들이 버마로 되돌아가서 태국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법적 서류를 구비한다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합의는 오는 9월부터 실시될 예정이며, SPDC는 태국으로 합법 노동력을 수출함으로써 버마 출신의 불법 노동자들은 합법 노동자로 대체하게 된다. 랑군의 군사정부는 태국으로 유입되는 버마 이주노동자의 흐름을 통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재정적으로 이익을 취하게 된다. SPDC의 승인을 받지 않은 노동자들, 특히 추방된 정치적 반체제자들은 태국에서 일할 수 있는 정부허가를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민족 활동가들의 조직은 서로 유사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나 단체마다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매우 불안정할 뿐 아니라 종종 첩자의 침입으로 위기를 겪었던 것이 그 이유중의 하나인 듯 하다. 이들은 활동자금의 대부분을 국제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카렌 여성 조직의 활동가는 너무 많은 단체가 한정된 자금을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어 예전처럼 활동을 꾸리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다. 버마 군부와 카렌민족연합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카렌족 활동가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섞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유화국면이 태국에서 활동하는 자신들의 입지를 좁히거나 위협하지는 않을까, 다른 소수민족들처럼 카렌족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채 SPDC에 이용당하는 건 아닐까를 걱정하고 있었다.

1)불법체류외국인 289,239명 중 관광 등 단기체류목적 입국자들이 208,782명으로 72%를 차지하고 있고, 국적별로는 중국 149,346명, 태국 19,934명, 필리핀 18,128명, 방글라데시 16,170명, 몽골 13,638명 순임(2002년도 체류외국인 및 출입국자 통계, 출입국관리국, 2003.1).

2) 버마족의 정확한 인구비율은 알기 어렵다. 자료에 따라 버마족의 비율을 작게는 58%부터 많게는 78%까지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매솟의 카렌족 활동가들은 공통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서 카렌족은 더 많은 권리를 가졌고, 더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음을 얘기했다. 이들에게 있어 버마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고, 카렌족의 정체성과 자치 보장에 대한 욕구가 높았다. KYO에서 운영하는 청년학교에서는 카렌족의 역사, 영어, 국제법, 인권 등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 커리큘럼은 다른 청년학교에서도 유사하였다.

4) 샨주에서 버마군사정권이 여성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강간실태를 보여주는 ‘Licence to Rape(SWAN, 2002)’은 버마군부에 의한 강간이 어떻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자행되어 왔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5) 1951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에 따르면,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특정 사회 단체 참여 등의 이유로 인한 박해의 공포를 피해 조국을 떠난 후, 귀환하지 못하거나 귀환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6) 2004년 1월, 버마 군부와 KNU(Karen National Union;카렌 민족 연합)간에 휴전협상이 진행되기 이전까지 카렌족은 버마군부와 무장투쟁을 지속하는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다. 이전까지 무장투쟁을 지속했던 다른 소수민족들은 차례로 버마군부와 휴전협상을 맺으면서 무력충돌은 잦아들었다. 때문에 아직도 무장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카렌주 출신의 카렌족과 기타 소수종족만이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7)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을 그들의 목숨과 자유가 위협당할지도 모르는 본국으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태국은 국제법의 non-refoulment 원칙(농르플르망; 망명자를 박해가 우려되는 국가에 송환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8) 1996년 태국으로 유입되는 샨족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샨주 13개 지구에서 SPDC가 실시한 3개년 강제이주 캠페인 때문이다.

9) 맬라캠프(Mae la camp)는 1990년 설립되었으며, 한눈에도 안정적인 상태로 보였다. 캠프 내에는 유치원 20개, 초등학교 15개, 중학교 4개, 고등학교 4개가 있었다. 난민캠프의 젊은이들은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없는 난민캠프의 생활에 좌절을 경험하고, 캠프에서 경제활동은 제한되므로 돈을 벌고 싶어하는 이들은 캠프를 떠나 도시에서 미등록 상태로 일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10) 태국 외무부 대변인은 인터뷰에서 “버마 난민들은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 행동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여기에 손님으로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11) 2004년 1월 출입국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03년 한해 동안 체포된 미등록 노동자 189,486명 가운데 버마 출신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115,633명이었다. 이는 체포된 전체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61%에 달하는 수치이다.

12) 버마 이주노동자와 난민을 추방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탁신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자리에 머물러야 하며, 통제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태국에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는다. 그들은 우리 학생들에게 총을 쏘고, 우리 국가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졌던 질병들(결핵, 상피병 등)을 다시 나타나게 했다. 그들은 마약을 팔고 도둑질을 하고 우리 국민들을 죽인다”.

13) 정부의 단속이 시작되면 이주노동자들은 일하던 공장을 떠나 인근 산속으로 대피한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은 이들을 위해 모포나 음식 등을 제공하고 단속이 완화되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14) 매솟은 버마에서 하루 비자를 받고 태국으로 입국할 수 있는 곳이며, 하는 버마 사람들(카렌족이 대부분)이 많이 살고 있다.

15) Nasawat Apparel Factory는 269명의 버마 노동자를 고용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여성들이었고, 일당은 50바트 정도였다. 매솟의 법정 최저임금은 당시 133바트였고, 피고용자들은 초과근무를 하도록 요구받았으나 시간당 겨우 8바트만 지불되고 있었다. 법정 초과근로수당은 시간당 25바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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