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에게 희망을>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된 것은 2003년부터입니다.
2002년 아프간 난민캠프를 방문했던 정귀순 공동대표는 한국에서 일하다 사망했던 이주노동자의 가족과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그 후 몇달 후 결국 사망하고 만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02년 5월,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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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파키스탄으로 가는 길은 멀다. 한국에서 직항노선이 없기 때문에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방콕을 경유해서 파키스탄 라호르로 가는 노선을 선택하고, 2월 28일 아침 김해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임시체류 허가 상태를 정리하고 6년만에 귀향하는 파키스탄 이주노동자 공동체 대표인 아미드와 함께 출국하기로 한 까닭에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과 인천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방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천공항에 짙은 안개로 비행기의 착륙이 불가능하여 비행기는 김포에 다소 지체하여 착륙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항공사에 연락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조금만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탄 후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아미드에게 수정을 채운 것이었다.
그는 혹시 출국 전에 달아날 수 있음을 염려하여 규정을 지켰을 뿐임을 강조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보는 버스 안에서 그것도 자발적인 의사로 출국하는 외국인에게 취하는 처사로서는 최악이었다. 마치 무슨 중대한 범죄라도 저지른 범죄인을 호송하는 분위기였다. 격렬한 항의 소동으로 버스 안의 모든 승객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는 규정임을 계속 강조하기만 하여 본부에 과도한 처사임을 항의한 후에야 아미드의 수정은 풀어졌다.
더 이상 가족을 위해 일할 수 없는 슬픔 – 이크발과의 재회
파키스탄의 아침은 모스크의 아잔(기도소리)과 함께 시작된다. 새벽 6시경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아잔 소리와 새소리, 아이들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 일찍부터 아미드의 집에는 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모두 누나 보러 온 거야”라는 아미드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다.
6년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미드를 핑계로 나를 보러온 것이었다. 나는 그 마을을 찾아온 첫 번째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친척들은 물론이고 이웃들로 마당에는 사람들로 그득했고, 대문밖에는 구경온 아이들로 가득했다. 집 바로 옆 초등학교 학생들은 수업 중에 구경을 와서 들어오라고 하자 아이들은 물밀듯이 들어와,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외국인을 신기해했고, 또 만져보고 싶어했다. 처음 온 외국인이 자신들과 크게 거리감을 두지 않음을 알게된 이웃들도 서슴없이 내 손을 잡고 또 안아보고 만져보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가까이 하고 싶어했다.
아침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아이들을 뒤로 하고, 이크발의 집으로 향했다. 이크발은 (한국에서) 2001년 12월 7일 급성심장마비로 백병원에 입원해서,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기고 호전되어 지난 2월 7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비록 그는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휠체어를 타고 갔지만, 그가 살아서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했는지…. 약 3시간 걸려 사칼가르 마을에 도착해서 이웃들에게 물어 찾아간 이크발은 어두운 방에 혼자 누워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친척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외출 중이었고, 그의 아내와 15살인 그의 딸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여전히 유린 백을 단 채 다리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이크발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면서 비가 쏟아졌고, 그 비를 맞고 그의 아들 압둘이 들어왔다. 9살, 초등학생인 압둘은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 한눈에도 이크발 가족들의 경제적 사정이 그리 넉넉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크발은 더 이상 가족들을 위해 일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병원 치료비를 필요로 하는 환자이기 때문에 단정하고 다정한 미소를 가진 그의 딸과 압둘의 미래가 어두웠다. 그의 아내와 딸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쏟아지는 비 때문에 돌아갈 길이 염려되어 오래 머무를 수 없어 꼭 자고 가야한다는 이크발을 달랜 후,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치료비로 작은 돈을 남기고 그의 집을 떠났다.
이크발이 가족들과 함께 편안한 모습으로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의 가족들이 헤쳐나가야 할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도 귀엽고 총명하게 생긴 그의 아들 압둘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아이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계속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 산이 거의 없는 펀잡지방의 평원들은 이제 막 봄에 물들기 시작했다. 푸른 밀밭과 싹을 틔우기 시작한 키 큰 기까르(펀잡지방에 가장 많이 자라는 나무) 나무들의 푸름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있었다.
의수와 오토바이 – 나딤
지난 해 2월 급성결핵으로 사망해 유해를 가족들에게 보낸 아시라프의 집으로 가는 날은 기막히게 화창한 날씨로 다소 덥게 느껴졌다. 아시라프의 집으로 향하던 길에 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와 잠시 멈추었다. 아미드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그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미드 집으로 갔다가 우리가 떠났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뒤따라 온 그의 이름은 '나딤', 지난 해 경북 김천에 있는 한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 3개월만에 프레스에 팔이 절단되는 대형사고를 당했고, 회사측에서 그의 산재보험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어 인권모임으로 연락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보험처리가 끝난 후 귀국한 것이다.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그의 오른손은 의수였다. 아마 그 오토바이는 그의 보험금으로 산 것이리라.
내가 이 마을이 온 것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나딤의 사고소식도 온 마을이 알고 있었다.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이들에게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한국인들은 무심하지만, 이곳에서는 마을 전체가 마치 한 가족과 같아 개개인들에게 일어나는 작은 일에도 결코 무심하지 않다. 기쁜 일은 함께 기뻐하고, 또 슬픈 일에는 함께 슬퍼하는 공동체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는 하찮은 이방인 취급받는 이들이 가족들에게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인지.
떠난 사람 뒤에 남겨진 사람들 – 아시라프의 가족
시알코트에서 약 1시간 거리, 인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 아시라프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아시라프의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안고 울었다. 그는 오른쪽 눈을 잃은 상태였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가 만들던 중인 듯 옷들이 널려 있었고, 한 방에 여러 칸의 침대와 궤짝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와 다섯 아이들이 그 방에서 살고 있었다. 세워진 사진을 유심히 보자 그는 금방 아시라프의 영정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우리가 아시라프의 유해와 함께 보낸 사진이었다. 막내아들은 아시라프가 한국으로 간 뒤 태어나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다.
초록색 옷을 입은 두 딸과 세 아들, 온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는 그의 고단한 삶을 보면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온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몰려 들었고, 외출했던 아시라프의 아버지가 들어섰다. 아시라프의 아버지는 우리를 보자 소리내어 울었다. 그 작은 방에 앉아있던 모두가 그렇게 울었다.
아시라프를 돌봐주고 또 그의 유해를 보내 준 것이 너무 고맙다며, 아내는 자신이 만든 옷과 신발을 선물로 주고 싶어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너무 일찍 떠나버려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아시라프를 대신해 적은 금액을 그의 아내에게 주자 그는 너무 고마워했다. 슬픔이 넘치는 그 방에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들어 점심을 준비하겠다는 것을 말린 후 그 집을 떠났다. 헤어질 때 그는 자신의 반지를 빼 내 손에 끼워주었다(아시라프의 아내로부터 받은 옷과 신발, 그리고 반지에 담긴 그 마음만 내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고, 내게 사랑을 주었던 다른 이들에게 선물로 남겨주고 왔다).
아시라프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급성결핵으로 병원에 입원시킨 지 1주일만에 그가 내 앞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세심하게 그의 건강을 보살폈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아시라프의 수줍은 미소가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