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김정하/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자문위원. 한국해양대 교수

총선이 다가오고 있지만, 과연 그 소동이 진정 ‘시민의 잔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선 선거에 임하는 당사자들의 매너나 태도부터 엉망이다. 무조건 나만 옳다는 주장으로 상대를 몰아붙여 상대를 헐뜯는다. 모처럼 민주주의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와 함께 TV를 보기조차 두려워지는 시즌이다. 앞으로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쏟아져 나올 공약은 미리 떠올려 봐도 끔찍하다. 차림새는 푸짐해도 먹을 것 없는 음식상처럼, 대부분이 오래 전 나온 것들의 재탕, 삼탕인데다 서로 표절한 것도 적지 않다. 대안 제시가 어려운 문제 제기도 많고 의당 해야 할 일을 선심 쓰듯 제시하는 예도 적지 않다. '부패 척결'과 '빈부격차 해소', '경제 안정'과 '지역감정 해소', '사회통합 달성'처럼 엄청난 일을 단번에 이루어내겠다고 과욕을 부린다. 양심적인 시민단체들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점검하고 고치느라 애를 써온 문제를 제목만 베껴서 '왕창떨이 세일'로 내놓는 예가 적지 않다.

자, 선거나 정치는 아직도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그런데도 현장정치가 여태껏 유용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시민들이 나서서 사회를 개선할 통로가 마련되지 않아서일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선거 – 그 반(反)문화적이고 비(非)지성적 소동에서 확인할 것이라곤 언제나 보혁(保革)구도가 우려수준이라는 정도일 게, 또한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도 이번 총선에서 적지 않은 시민단체들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겠다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앞에 나열한 공약의 즉흥성과 그로 인한 진실의 결여, 민주원칙의 포기와 막가파식 정치 술수, 그 어느 것이 정상적이고 양심적인 시민단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아무리 짚어 봐도 맥이 닿질 않는다.

시민단체란 그 자체가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를 능가하는 존재다. 말 못하는 약한 시민을 위해 존립하기 때문에 행정부 위에 있으며, 양심을 담은 성명 한 줄로 입법부의 기능을 초월할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현장정치에서 생긴 ‘적과 동지', ’세대.지역.계층의 굴레'를 단죄할 수 있어 사법부조차를 넘어선다. 공무원을 비판하고 정치인을 꾸짖으며 사법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특권은 오로지 시민단체에게만 있다. 그런 엄청난 권한을 갖고도 정치판에서 뭔가를 얻겠다니 시민단체의 순수성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힘이 필요해서, 선거를 통해 이를 얻겠다는 말도 그럴싸하다. 하지만 제도로 보장된 힘은 어느 구석이든 반드시 부패하게 마련이다. 대통령의 아들이 이권을 챙기고 국정을 농단하거나 정치브로커가 '윗분'을 내세워 돈을 챙기는 일은 정치만능풍토가 빚어낸 타락상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타락은 당사자의 도덕성이 결여돼서만이 아니라 제도권으로부터 힘의 뒷받침을 받기에 가능하다. 그에 비해 시민단체는 전문성과 자유혼(自由魂)으로써 제도권에 기생하는 무리들과의 대척점에 존재한다. 그 대척(對蹠)의 각도와 거리가 조금만 달라져도 시민들이 보기엔 시민단체와 권력의 무리가 서로 구분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선거를 치르다보면 유권자와 나누어야 할 상대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유권자들의 이익과 관심에 따라 공약을 마련해야 할 경우 시민단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원래가 시민들이 시민단체에 거는 기대는 정치권에 거는 그것과 내용은 비슷해도 차원이 다르다.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모처럼 만들어낸 선거공약 따위는 시민단체 스스로를 구속하는 올가미가 될 것이다.

선거판은 항용 기쁨과 꿈보다 허위와 증오로 오염되기 일쑤다. 시민단체가 그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어렵사리 가꾸어온 '시민 참여'의 고귀한 이상도 오염될 수 있다.
님이여, 부디 그 물을 건너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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