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밥] (518재단)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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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분쟁의 기원에서 평화의 시발점으로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주화의 요구가 이집트를 지나 리비아에서 유혈 충돌로 번져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이 독재자에게 학살되었다. 리비아의 상황을 접하는 세계의 많은 시민들은 그 유혈참극을 저지할 어떤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중 아랍연맹이 유엔의 리비아 영공 내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요구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3월 18일 비행금지구역 설정과 함께 ‘보호를 위한 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 R2P)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이 전격 공습을 감행했다. 그런데 아랍연맹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나라가 다국적군의 침공을 주권국가에 대한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여 그것을 규탄하였다. 왜 그럴까? ‘시민보호’가 우선인가 아니면 ‘주권 국가’가 우선인가?
우선 먼 길이지만, 서방과 이슬람권 간에는 왜 그렇게 전쟁을 하는지 그 역사적 배경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자. 배경의 단초는 ‘이슬람’에 대한 유럽의 시각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중동’이라는 지역은 철저히 유럽의 시각에 따라 만들어진 개념이다. 자기네들 동쪽에 있는 곳 가운데 먼 곳(극동)도 아니고 가까운 곳(근동)도 아닌 가운데에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의 동쪽이라는 규정은 어떻게 했을까? 유럽은 그 쪽 사람들이 주로 믿는 종교인 이슬람을 기준으로 삼았다. 어떤 특정 지역을 규정하는 요소란 종교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왜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기준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유럽이 그 지역을 본격적으로 만난 것이 소위 십자군 전쟁이라는 침략 전쟁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위정자들은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기독교를 자신들 정체성의 원천으로 삼고 그것과 다른 전통인 이슬람을 가상의 적으로 삼아 그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은 악마 내지는 사탄이 되었고, 그 후 이슬람은 ‘악마’로서 그리고 유일한 정체성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서방의 많은 사람들은 그 지역의 다양한 운동들을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라벨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모두가 다 ‘이슬람 근본주의’일 뿐이다. 심지어는 다른 지역 사람들일지라도 이슬람을 그 종교로 갖는 사람들을 이슬람 근본주의자라 간주하기까지 한다. 그리고서는 그 이름 아래 그들을 모두 매우 경멸적으로 대한다. 그렇지만 소위 이슬람 근본주이라고 하는 움직임은 사실 유럽에서 일어난 기독교 개혁 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의 종교개혁이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사치에 대한 대응으로 청교도적인 개신교 운동의 전개를 낳았듯 이슬람의 운동들 또한 정권의 타락하고 무원칙한 행위들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다. 당연히 그 운동들은 청교도적인 색깔을 띠었고 유럽이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폭력에 호소하였다. 그러니 유럽 세계가 중동 지역의 이슬람 운동을 이해 못할 바는 없다. 그런데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중동 지역을 여전히 반문명적이고, 파괴적인 인류 공동의 적으로 간주한다. 고의적이고 의도적이고 주도면밀하게. 왜 그럴까?
그것은 그곳에 바로 석유가 있기 때문이다. 중동 지역은 세계 최고의 산유 지역이고 유럽과 미국은 세계 최고의 석유 수요 지역이다. 따라서 서방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을 마다 않고 중동을 장악하려 한다. 물론 그 어떠한 수단은 항상 군사적 침략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산유 지대인 이 중동에는 이른바 보편적 민주주의를 잘 시행하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다. 많은 나라가 절대 왕정 혹은 입헌 군주제 아래의 왕정을 채택하거나 세습 정권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재 권력이다. 사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왕이나 독재자가 국부를 잘 분배하여 잘 먹고 잘 사는데, 왕정이면 어떻고, 독재면 어떤가라고 하는 식의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대표적으로 사우디 아라비아는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누리면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복지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여성 인권의 개념이 전혀 없는 등 여전히 과거의 봉건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은 크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쿠데타를 겪은 후 왕정이 무너진 이집트, 리비아 같은 경우는 군부가 막강한 권력을 유지한 채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해왔으나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의 나라들에 비해 잘 살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반발은 마찬가지로 크지 않았다.
이런 상태는 미국의 비호 아래 잘 유지되어 왔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석유 자원을 강탈하기 위해 독재 정권이나 왕정을 비호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가 이에 속한다. 하지만 미국의 그런 제국주의적 태도는 중동 지역에 호전적인 이슬람 급진주의와 반미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리비아가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그 반미주의는 반미의 민심에 편승해 독재 정권을 유지한다. 이 저래 모두 독재 아니면 왕정인 셈이고, 그 어느 경우든 미국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풍요로운 부를 기반으로 친미와 반미가 적대적 공범이 되어 독재가 일상화 된 중동 지역에서 민주화이 운동이 터진 것은 그 기반이 되는 풍요로운 부가 일부에서 흔들리고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주체할 수 없는 실업과 물가고는 서민들을 빈곤의 사지로 몰았고, 그것은 군부를 비롯한 일부 특권층의 부의 독점과 부패와 비교되면서 불만의 원천이 되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 등 현재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에 들어 가 있는 모든 나라들이 경우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부분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결국 민주화의 열망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그런데 그 진앙이라 할 수 있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독재자가 사임하였으나, 리비아에서는 독재자 카다피가 사임은커녕 시민군을 상대로한 무고한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러자 그 잔혹한 학살을 보다 못해 주위의 아랍권과 아프리카는 물론 많은 나라들이 카다피의 양민 학살을 중지하고 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엔이 리비아 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은 시민의 보호를 위해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였고, 유엔의 결의안을 근거로 카다피 군에 대한 일대 공습을 감행했다. 그러면서 사태는 국제 전쟁의 모양이 되어 버렸다.
전쟁의 모양새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비슷한 꼴을 보이고는 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분명 다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별의 별 핑계를 댔으나 결국에는 미국의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한 침략 전쟁임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번 리비아의 경우는 그와는 달리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을 당하거나 더 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물론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에 따른 계산도 없지는 않겠으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방지’라는 대의명분 앞에서 그 나라의 역사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워야 한다는 논리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한 주권 국가의 영토가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대상일지, 그 국가의 시민이 학살당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도록 보호 받아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 후자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결국 다국적군의 군사적 개입은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상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다국적군이 공습의 목표를 어디에 둘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 표방한대로 정말 ‘시민보호’에만 그 목표를 두는 것인지, 한 발 짝 더 나가 카다피 축출에 그 목표를 두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둘 것은 프랑스든 미국이든 그들이 리비아 시민의 보호를 위해 최소한의 개입을 하는 선을 넘어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확장한다면 전쟁은 결국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다를 게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제 사회가 ‘시민보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군사적 개입을 한 첫 사례는 여지없이 깨지고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과연 명분은 이론으로만 유효할 것인지 아니면 ‘시민보호’의 새 역사가 중동 전역으로 확산될 것인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런데 섣부른 판단이겠지만 그 동안의 역사와 국제 정치의 성격을 볼 때 명분은 이론으로만 유효한 채 침략 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장기전으로 들어가면서 서방 측은 부담감을 가진 채 카다피 정부에 저항하는 반군들에게 군사 원조를 통해 무장을 강화할 생각을 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금 당장에는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지원하는 반군 세력이 초기 민주화 운동을 요구한 시민들이 주축이 된 시민군인지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의 수호와는 관계없는 또 다른 세력인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카다피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민주주의는 자신의 손으로, 자기 힘으로만 세워질 수 있는 가치이자 제도다. 다소 시간이 걸리고, 희생이 있더라도 필요한 과정을 밟으면서 치를 값은 치러야 한다. 안타깝지만, 자기희생을 치르지 않고 세운 민주주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양민 학살까지도 그 치러야 할 대가로 삼자는 것은 아니다. 국제 사회가 도울 것은 돕고, 막을 것은 막되 결정은 그들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 사회의 개입은 최소화 되어야 하고, 그 초점은 온전히 시민의 보호에만 두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는 그들을 격려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리비아에서 민주주의가 수립되는 조건이다. 그리고 그 단추가 잘 꿰어지면 레바논, 예멘 등 지금 들끓고 있는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민주주의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화약고에서 이 세기가 고대하는 반전평화의 첫 메시지가 울려 퍼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