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아시아정책: 안정유지 세력인가, 패권국인가?
신상진 (광운대 중국학과)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외교부 홈페이지에서 삭제한 후 국내에서 중국이 과연 동아시아의 책임 있는 강대국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을 더 이상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 상대로 보기 보다는 우리의 영토주권까지도 넘보는 안보 위협국가로 간주해야 한다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국위협론”에 동조하는 주장들이 호응을 얻고 있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최근 북한 핵문제 해결과정에서 중국이 보여주었던 대국으로서의 자세와는 달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중국에 대한 한국 내 기대감을 일거에 말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중국은 과연 동아시아에서 지역 패권국으로 등장하고자 하는가?
1990년대 초 천안문사건과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대내외적 위기상황 속에서 중국은 실력을 감추고 능력을 키우는데 집중한다는 내용의 韜光養晦(도광양회)를 외교전략의 기조로 삼아 왔다. 소련 붕괴 이후 유일 패권국으로 부상한 미국에 비해서는 국력 면에서 월등하게 낙후하기 때문에 우선 국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두면서 주변환경의 평화와 안정유지 정책을 채택하였다. 중국화물선 “銀河號(은하호)”가 공해 상에서 미국 함정에 의해 수색을 당하고, 2000년 하계 올림픽 개최 시도가 미국의 반대 입장으로 인해 좌절되고, 미국의 대만 지지정책으로 대만 내에서 독립지지 세력이 강화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미국과 대항하기 보다는 협력을 모색해 왔다.
그리고 중국은 주변국가들과 선린우호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천안문사건 이후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의 대중 견제망을 타파하고 대내 경제건설에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폴 등 동남아국가들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구축하여 북부지역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을 해소하였다. “완전한 해결은 후대에 맡기고, 공동으로 개발하자”(擱置爭議, 共同開發(각치쟁의, 공동개발))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20개 접경국가와 영토분쟁 소지를 해소하는 데에도 성의 있는 자세로 임하였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주변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미국의 중국 포위전략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수단으로 보고 주변국과 교류와 협력을 확대했던 것이다. 북한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이 한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러한 중국의 전략적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선 현재도 중국외교는 여전히 “전면적 소강사회” 실현에 유리한 외부 여건을 조성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지만, 후진타오-원쟈바오 지도부는 과거에 비해 국제무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필요할 때 참지 않고 할일을 한다는 有所作爲(유소작위)를 강조하고, 평화적으로 우뚝 일어선다는 내용의 和平崛起(화평굴기)를 주창하고 있는 것은 발전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확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의지는 대미 인식과 정책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9·11 테러사건 이후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신쟝성의 동투르키스탄 테러분자 대처를 위해 미국의 반테러전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도, 이라크문제 등 국제문제를 미국의 군사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엔을 통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행태를 견제하고자 했다.
중국의 대미 견제정책은 다자외교를 통해서 더 분명하게 구현되고 있다. 과거 중국은 다자 국제기구를 미국이 중국을 포위하고 봉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가하고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 왔지만, 최근에는 미국의 양자동맹을 통한 세계 패권유지 전략을 약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무대로 간주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러시아와 4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상하이협력기구”(SCO)를 결성하여 서북부와 북부지역의 정치군사적 안정을 도모하고 세계질서의 다극화를 꾀하고 있다. “상하이협력기구”가 제3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아시아 지배를 약화시키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하이협력기구”는 현재 존재하는 국제 안보기구 중 유일하게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다자 안보기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북핵 6자회담을 동북아 다자 안보기구로 격상시키는 데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도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고려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북핵 6자회담을 중국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북핵 6자회담의 동북아 다자 안보기구화로 한반도문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강화와 미국의 지배권 약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만문제와 중국 내 인권문제 등으로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동북아 다자 안보기구 창설은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지역 다자안보 논의 활성화를 통해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의 결속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이 지역 다자 안보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또 다른 전략적 의도는 “중국위협론”을 불식시킴으로써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동아시아질서를 변화시키려는데 있다. 아세안이 주도하고 있는 “아세안지역포럼”(ARF)에 참여함으로써 동남아국가들의 대 중국 불신과 위협인식을 완화하고 있다. 필리핀과 베트남 등 남사군도 영유권문제로 분쟁을 겪고 있는 국가들과 갈등을 완화하고 분쟁을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한다. 지역 다자 안보기구 참여를 통해 중국이 평화와 안정을 지향하는 강대국이라는 점을 주변국들에게 주지시키려 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중국의 외교행태에도 과거와 달리 강경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중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기 때문에 중국은 지속적 경제발전을 위해 일본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중국은 러시아 극동지역의 에너지 자원 확보를 둘러싸고 일본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러시아가 경제적 고려와 전략적 이유로 중국이 희망하는 앙가르스크-다칭(大慶) 노선 보다 일본이 추진해 온 앙가르스크-나호트카 노선의 송유관을 건설하기로 내부적으로 확정한 상태이지만, 이번 달 원쟈바오 총리 러시아 방문의 중요한 목적을 러시아 에너지의 안정적 확보방안 논의에 두고 있다.
일본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인접한 동중국해에서 천연가스와 원유 개발노력을 강행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연간 1억 톤 이상의 원유를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고 향후 에너지 부족문제가 호전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황해와 동중국해 등에서 중국은 주변국의 반발을 무시하고 자원개발 시도를 더욱 적극화 할 전망이다.
2001년 이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정상외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한 중국의 보복정책 때문이다. 대일관계의 악화를 감수하고라도 일본 내 보수우익화 경향에 따른 일본의 군사대국화 기도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2002년 9월 국교정상화 30주년이라는 뜻 깊은 시기에도 중국 최고지도부는 일본 지도자들과 이렇다할 접촉을 하지 않았다. 중·일간 과거사문제로 인한 갈등은 중국정부로 하여금 상하이-베이징 고속전철 건설사업에 일본 기업의 참여를 배제시키는 요인이 될 정도로 중·일관계에 장애가 되고 있다. 동북아 지역의 두 강대국 사이에 비정상적인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지역안정과 번영에 결코 이롭지 않다.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에 대해 중국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지역에서 일본의 영향력 강화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아시아국가 중 유일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지역 정치대국으로서의 위상에 도전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동남아에 대해서도 중국은 적극적인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2002년 11월 주룽지 총리는 2010년까지 아세안과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기로 합의했고, “남중국해 행동선언문”을 체결하여 남사군도 영유권문제로 인한 중국과 아세안간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2003년에는 역외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동남아우호협력조약”에 가입하였다.
자국민의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이라크 무장단체의 요구를 수용하여 필리핀과 미국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재선에 성공한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의 방중을 초청하여 우호관계를 다진 사실도 동남아에 대한 중국의 외교가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증거다.
대만 독립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강경태도가 어느 때 보다 단호하게 표출되고 있다. 지난 8월 22일 덩샤오핑 탄신 10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대만의 독립을 분쇄할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할 수 있다”는 강경발언을 했다. 당 총서기에 취임한지 3년째이지만 여전히 권력기반이 공고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만문제 등 국가주권문제에 대해 강경입장을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후진타오를 위시한 4세대 지도부는 대만 천수이볜 정부의 독립지향 노선에 쐐기를 박아야만 한다는 절박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천수이볜이 우여곡절 끝에 대만 총통에 재선된 후에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지 않고 2006년 독립헌법 제정, 2008년 독립헌법 시행이라는 대만 독립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 지도부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후진타오 지도부는 대만문제가 중국의 평화적 발전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치르지 못하는 불상사를 초래할지라도 대만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초강경 자세를 보이고 있다. 7월 24일 정치국회의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경제와 국방의 협력발전을 강조한 것도 대만 독립을 막기 위해서 군사력을 동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이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에서 삭제하고 동북지역 유적지를 정비하고 있는 것은 국가통일, 민족단결 그리고 변경지역 안정유지 등 대내적 목적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관광객들이 연변지역 조선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일부 정치인들이 “간도는 우리 영토”라면서 고토회복을 주창한 것이 중국으로 하여금 “동북공정”을 추진하도록 자극했다는 것이다. 신쟝성 웨이우얼 자치구와 시장 자치구 소수민족분리운동 그리고 대만의 독립 움직임으로 변방지역 소수민족문제가 중국 안정유지의 핵심 이슈로 부각된 상황에서,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대내 안정유지 차원에서 수세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시각에서 본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분명 패권적 행태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북한의 붕괴와 한반도 통일에 대비한 전략 포석이라는 공세적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가 한국에 의해서 통일되었을 때 수 많은 북한난민이 중국으로 유입될 수 있고, 중국 내 조선족들이 중국 보다 한국에 귀속감을 갖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역사 정비작업을 단행하고 있다. 심지어는 북한 유사사태를 대비한 개입명분 축적작업이라는 주장마저도 제기되고 있다.
중국은 주변국가들과 선린우호관계를 강화하고, 미국 등 강대국들과 동반자관계를 구축하고, 국제 다자안보논의와 세계무역기구 등에 참여함으로써 평화유지 세력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변국가들에게 비쳐지고 있는 중국의 모습은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중화질서를 재현하려는 패권국으로 더 각인되고 있다. 최근 중국의 공세적 대외정책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위협론”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20개국이나 되는 주변국들이 중국을 위협국으로 간주할 때,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20세기 중반까지 목표로 하는 현대화 건설을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국이 대내외에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아의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