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을 통해 본 전쟁과 평화 그리고 인권
성혜란(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
■들어가며
아직 코트를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며칠 전에는, 눈 내리는 것도 보았다. 한국 이라크 반전 평화팀 2진이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고, 모여 있던 몇몇 평화팀원들이 심란해했다. 어, 한국에서 보는 이번 겨울 마지막 눈이에요. 내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동안 내리는 눈에 시선을 보낸 기억도 난다. 그들의 눈길처럼, 내 카메라도 흩날리는 눈발을 잡았다.
합숙, 촬영, 회의, 짐꾸리기 등으로 3주 정도의 짧은 준비 기간을 거친 후, 나를 포함한 한국이라크 반전 평화팀 2진은 요르단 암만으로 향했다. 2월 16일이었다.
두 달. 바그다드를 세 번 왕래했고, 많은 시간들을 암만에서 보냈다. 한국에서 보았던 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폭설을 암만에서 보았고, 몸으로 훅 끼쳐오는 바그다드의 열기도 느꼈다. 그리고 두 달만에 다시 밟은 한국 땅에는 지천에 봄꽃이 흐드러졌다.
▶“전 세계 사람들의 힘으로 막는 첫 번째 전쟁이 될 겁니다.”
요르단에서는 이라크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애를 써야 했다. 이라크 대사관을 찾아가고, IPT(IRAQ PEACE TEAM)의 숙소를 오가며 이라크에 들어갈 수 있는 방편을 알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열흘을 요르단에서 머물러야 했다. 그 와중에도 요르단에서 기다리는 평화팀의 수는 늘어갔다. 새로운 사람들이 속속 결합했던 것이다.
이렇게 요르단에서 이라크로 들어가기 위한 비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한국팀 외에도 꽤 있었다. 나는 요르단에서 비자를 얻기 위해서 평화팀과 움직이는 것 외에도, 요르단에 머물고 있는 각 국의 평화 운동가들을 만나갔다.
느닷없이 들이대는 카메라에도, 이라크로 들어가는 이는 들어가려는 이유를, 귀국하는 이는 귀국하는 이유를 차분하게 전했다.
“폭력은,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는 소용돌이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것을 멈춰야 합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미국인 찰리는 깊은 눈으로 말했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 그가 평화운동을 시작한 이유도 이것이다. 그가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 또한 누군가 이 폭력을 멈춰야한다는 사실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만드는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 찰리에게, 이번 전쟁은 느닷없는 것이 아니었다. ‘걸프전이 미끄러지듯이 이번 전쟁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베트남전과 정부 기관에서 일하면서 현실을 알게 된 것은 지금의 그를 만들어냈고, 폭력으로 점철된 미국의 과거는 또한 지금의 미국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라크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 폭력을 멈추기 위해.
미국인 환경운동가 마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라크에서 나와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요르단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전쟁을 막기 위한 그녀의 행동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이라크에 남고 싶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돌아가서 의회에 탄원하겠다는 것.
“의회가 부시에게 준 권한, 전쟁을 일으켜도 좋다고 허락한 권한을 다시 빼앗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탄원을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다시 그들을 찾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이 있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막아내는 첫 번째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맴돌았다. 2월 21일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있었을 그녀는, 희망이 무너진 것에 좌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을 멈추기 위한 그녀의 행동은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더 이상은 안 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며 굳은 심지를 보인 그녀를 떠올리면, 미국 어디에선가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녀가 보인다.
한국 평화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자를 기다리는 동안 요르단에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울 정도로, 우리는 이라크에 가기를 원했다. 이라크에 가서, 이라크인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고,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는 희망을 이라크인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리고 전쟁을 막아내고 싶었다.
요르단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의 카메라는 평화운동가들을 향했다. 극단적인 상황, 죽음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먼 타국으로 떠나온 사람들. 그들을 이곳까지 향하게 한 것은 무엇인지, 과연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에게 한 질문은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내가 이라크에서 담아내야 할 것들.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감수해야 할 모든 ‘위험’보다도 그것들이 의미 있는 것인지. 반전평화팀원으로 행하는 모든 활동들 외에도, 이 전쟁과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높일 수 있는 목소리가 카메라였다. 이렇게 요르단에서의 나날은, 이라크로 들어가려는 자신들의 의지와 목표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순간들이었다.
▶보고, 듣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그다드에 발을 들였다. 요르단에서 전해들은 것과는 달리, 바그다드는 평온했다. 아니, ‘평온’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부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과 다른 것은 사실이다. 전쟁을 앞두고 상점 문을 닫고 떠나버린 시민들, 휑하니 비어 있는 바그다드 등등.
2월 말. 우리가 본 바그다드와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일상을 가져가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쇼르주 시장, 새까만 발로 뛰어다니는 올드 바그다드의 아이들, 때 절은 손으로 구두를 닦는 평화팀 숙소 앞의 아이,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며 결혼식을 치르는 사람들.
평화팀은 바그다드에 도착한 첫 날, “전쟁이 일어날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입을 모았다. 그랬다. 바그다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미 바그다드를 떠난 이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떠나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평화팀을 안내한, 카심이라는 현지인은 자신이 살아야할 곳은 바그다드임을 강조했다. 그의 집과 가족과 일터가 있는 바그다드를 떠나서,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라크에 가기 전, 촬영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적지 않게 긴장을 했었다. 하지만 정부 건물 근처에서 카메라를 들었다가, “no photo!” 라는 외마디가 날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 외에는, 생각 외로 그렇게 많은 제약이 따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불쑥 카메라를 갖다 대는 나에게 이라크인들은, “전쟁이 두렵지 않다.“, ”우리는 강하다.“ ,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우리를 안내했던 현지인들 등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자신했다. 하지만 그들의 그 말들을 전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평화팀이 머무르는 숙소의 직원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카메라를 내려놓는 것을 확인하자 씁쓸한 그의 속내를 비쳤다.
“1980년부터 8년간 이란-이라크 전쟁이, 1991년에 걸프전이, 그리고 몇 년 지나니까 다시 전쟁이다. 언제나 전쟁이다.”
이제 스물 중반을 넘긴 그의 인생의 절반은 떨어지는 폭탄과 함께였다.
전쟁 전 이라크에서의 나날은,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 그것을 알려내는 일이 중심이 되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바그다드로 들어 온 각국의 평화 운동가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유엔 본부 앞에 한국의 아이들이 만든 플랜카드를 걸고, 중증 장애 아동이 있는 시설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고, 이라크 아이들의 학교에 한국의 아이들이 보내온 사진과 그림을 걸고.
많은 것을 준비해 가지도 못했고, 거창한 계획을 가져간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일정을 모두 가져가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전쟁을 막을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켜보고, 겪어내고, 증언하는 것. 그것이 각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모였던 것이다.
첫 번 째 바그다드 행에서 만난, “당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들은 전쟁을 막을 수 없다.”라고 냉소하던 어느 상점 주인의 말을 난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라크로 들어갔다. 바그다드에서 나온 지 일주일 만이었다. 내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이라크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다시 듣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평화팀의 일정은 여전히 빡빡했다. 나는 그 틈틈이 거리에서, 평화팀의 일정이 진행되는 장소에서, 문법에 맞지도 않는 영어로 이라크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플랜카드를 거는 평화팀을 도와주던 한 군인은, 영국이 전쟁에서 빠진다고 했다며,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평화팀에게 “당신들은 너무 늦게 왔다.” 라며 밝게 웃음을 지었다. 평화팀은 진심으로 그것을 바라며 함께 웃었다. 그러나 그 군인을 만나고 난 며칠 뒤부터, 바그다드는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주유소에서는 미리 기름을 채우기 위해 길게 늘어선 차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 창문에는, X자로 테이프가 붙여졌다. 폭격의 충격으로 유리 파편이 튀지 않고, 유리가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곳곳에서 이렇게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3월 17일 밤. 기름이 떠가는 티그리스 강 위에, HUMAN SHIELDS와 함께 초를 띄어 보냈다. 한국 평화팀이 만든 나무배도 띄어 보냈다. 티그리스 강 주변의 빌딩들 사이로 보름달이 떠 있었다. 만월. 3월 중순으로 개전 시기를 예상한 이들이 내건 단서이기도 했다.
바그다드를 떠나는 버스가 숙소 앞에 대기하고 있던 그 때, 분주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을 촬영했다. 남겠다고 의지를 밝힌 팀원의 손을 부여잡고 이야기하는 떠나는 사람들, 깊게 포옹하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하는 사람들, 우리를 싣고 갈 덩치 큰 버스. 그리고 두려울 정도로 크고 밝은 달. 나도 조금씩 손이 떨렸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버스가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촬영하지 못했다. 숙소 근처의 꼬마들이 모여와 인사하고, 구두닦이 핫산은 “아메리카와 싸우겠다”며 큰 소리를 치고. 그 아이들에게 암만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떨렸다는 것만 기억난다. 울먹이며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는 사람들, 창 밖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월 20일. 텔레비전을 통해서 폭탄이 떨어지는 바그다드를 지켜보던 암만의 평화팀원들은 역시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4월 21일. 다시 바그다드로 향했다. 난민 구호를 위한 현지 조사를 위해서 몇몇의 평화팀만 단출하게 움직였다. 한 달만에 보는 바그다드는, 한 달 동안 겪어낸 일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불타고 무너진 건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여전히 도로에는 미군들과 탱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외신기자들이 머무르는 호텔 주위에는, 전쟁으로 일자리를 잃고 가족을 잃은 이라크인들이 북적댔다. 병원에는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린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구두 닦는 것을 그만두고 미군을 상대로 담배를 판다던 핫산은 그마저도 못하고 있었다. 한 달 전보다 부쩍 말라있던 9살 핫산의 부모님은 전쟁 중에 핫산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개전 직전까지 일상을 유지하며 담담함과 자신감을 내보였던 이라크인들이지만, 그들은 이번 전쟁으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며칠 안 되어 바그다드를 나온 내가, 그들이 잃은 것들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었다.
두 달간의 일정을 일단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달 간, 전쟁을 반대하는 가장 직접적인 행동을 보이기 위해 이라크로 향했던 평화팀은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어야 했다.
전쟁터에서 오고 가는 수많은 말들, 기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확인되지 않은 말들에 밤마다 논쟁을 벌이며 우리의 상을 다시 잡으려고 애썼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그것이 무엇인지도 매번 확인해야 했다. 이것은 분명, 한국에서 출발할 때의 상이 모두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전쟁을 막고자 하는 것,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겠지만 어떤 것이 최선이며,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는 매 순간 판단해야했다.
여전히 이라크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고, 다시 이라크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라크 민중지원을 위해 활동하는 그들은, 단순히 물건을 전달하기 위해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이라크인들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6월 초, 나 또한 카메라를 들고 다시 바그다드를 밟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라크를 떠나올 때 내가 보았던 것들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전쟁의 흔적을 떨치고 일어서는지, 그들과 함께 하는 평화팀원들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지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