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아시아의 창(2003) – 비정상국가 일본의 이해와 극복

비정상국가 일본의 이해와 극복
―한반도 전쟁위기를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서 승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법학부 교수)

1) 침략적 '도미노 이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은 한 달도 못 가서 어이없이 끝났다. 씨름꾼과 갓난아기와의 싸움 같은 전쟁의 승패는 시작하기 전부터 뻔한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 언제 끝날지도 모를 미국의 군사점령이 계속될 것이니 군사점령 종료까지 전쟁은 계속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거기서 미국은 대가를 지불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패배가 곧 정치적인 패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역사의 교훈이다. 광주 민중항쟁에서 힘없는 민중을 상대로한 국군 정예부대가 걷은 피비린내 나는 군사적인 승리는 바로 군부의 정치적 도덕적인 패배가 되어, 전두환 군부지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931년 압도적인 무력에 의한 일제의 만주강점은 15년전쟁으로 그리고 일제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는 미해병대에 대한 일방적으로 패배하면서 그 운동이 시작하여 반세기 후에 일단 승리했다.

당장 지고 이기고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기고 지느냐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대의(大義) 있는 패배는 역사에서 거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얻어 왔다. 발가벗은 폭력에 의해 승리를 얻은 미국은 자기만족과 오만을 위해 국제법 위반, 유엔 무시, 유럽과의 동맹의 균열, 세계의 민심의 이반, 이스람권과의 대립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나 또한편에서 후세인 정권이 대의 있는 패배를 했나가 문제이다. 막대한 인명의 피해를 피해야 하니 전쟁이 빨리 끝난 것을 잘 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나, 많은 사람들은 강도 같은 미국에 대해 이라크가 좀더 의연하게 저항하여 자부심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했었다. 바그다드에서의 혈전과 수많은 희생은 그대로 미국에게 커다란 도덕적인 부채로 씌워질 것이기에 미국의 군사적인 승리는 도덕적인 패배로 바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항다운 저항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결과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미국을 기고만장하게 만들어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는 신보수주의자를 고무하게 된 것이다.

'도미노이론'은 일찍이 월남전에서 미국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여진 논리이다. 월남전쟁에서 지면, 공산주의에 의해 동남아, 나아가서 세계가 석권되니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미국과 직접 큰 이해관계가 없는 월남에서도 '반공 십자군'을 파견하여, 기어코 이겨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것을 가상 방어적 '도미노이론'이라고 한다면, 이라크 전에서는 전쟁승리가 '악의 축'이나 '독재국가'의 연속적인 체제붕괴(regime change)로 이어진다고 기대하므로 '역도미노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주화의 도미노이론'은 월남전 당시의 도미노이론과 달리, 지극히 침략적인 '도미노 이론'인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당연히 북한에 대한 무력 협박이나 침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라크 다음에 표적이 될 수 있는 북한에 대한 침공이 크게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우려는 비단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서민들에 대한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일본정부와 일부 호전적인 신보수주의자는 그것을 호기로 삼으려는 매우 예외적인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평화국가 일본'의 이라크전 지지- '미일동맹'에서 '북한 위협 논으로'
일본에서는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고 과거의 군국주의와의 결별의 징표로 내걸어왔다. 일본헌법9조[전쟁의 포기, 전력 및 교전권의 부인]에서 ①”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 전력은 이를 보지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1947년에 구 대일본제국 헌법을 개정하여 만든 이 헌법은 기본적으로는 일본이 다시는 미국에 대한 도전세력으로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게 철저히 무장해제를 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일본사람 스스로가 지지하여 지켜온 헌법이고 아시아에 대해 다시는 침략 야욕을 품지 않은 증거로 선전 되어오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정부가 아프간 전쟁 때도 해외파병을 억지로 적법화 시키고, 초헌법적인 '테러대책특별조치법 (테러 특조법)'을 제정하여 이지스함 등을 인도양에 파견하여 미국의 침략전쟁수행을 '후방지원'했다. 올해 3월17일에 부시가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선언하자, 맨 먼저 지지하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도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인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경제지원 철회를 비치면서 협박하여, 미국에 대한 지지를 강요하는 공작을 벌여왔다.

되돌아보면, 조선전쟁(6?25)을 계기로 맥아더의 지령에 의해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가 창설된 이후, 일본정부는 헌법9조와 자위대란 이름의 군대의 존재의 정합성을 임시방편의 억지논리를 써서 호도해 왔다.

①경찰예비대는 군대가 아니다.
②근대적인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헌법이 금하는 전력에 해당하지 않는다.
③필요최소한의 실력조직이며, 헌법상 허용된다.
④전수방위(專守防衛), 즉 국내에서만 활동하여 해외파병하지 않으니 헌법위반이 아니다.
⑤유엔결의 하에 해외에 나가니 헌법위반이 아니다.

이런 억지를 부려도 넘을 수 없었던 벽은 '집단적 자위권' 즉 미일동맹에 기초하여, 어느 한편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한편이 자동적으로 개입 참전하는 제도 는 아무리 헌법을 확대해석해도 '자위'의 범위를 벗어날 수밖에 없기에 법적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러나 1997년의 미일안보조약의 가이드라인의 개정. 1999년의 주변사태 법제정으로 일본에 대한 직접 공격이 없어도 세계의 어디서든지 미군에 대한 '후방지원' 명목으로 참전할 수 있게 되어 헌법은 공동화되었다. 이어 테러 특조법이 제정되어 인도양에 자위대의 이지스함 등이 출격하였다. 그때 일본 내각 법제국장은 “미사일발사 중의 미 군함에 급유 등의 '후방지원'을 하더라도 미사일이 적에게 떨어질 때까지는 전투구역이라고 간주되지 않기에 ('후방지원'으로)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하는 황당한 답변을 하였다.

최근 일본 여론에서도 마냥 미국 시키는 데로 질질 끌려 다니긴가 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종전과 달리 혁신계보다는 주로 신 우익 쪽에서 제기되기도 하지만, '미일동맹'이라는 무조건성의 呪術은 일본 정치외교를 반세기 이상에 걸쳐 사고정지 시켜왔다. 그러나 이번에 유엔 결의를 거치지 않고 국제법위반인 선제공격을 감행한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해서는 '유엔 결의 없는 무력행사'에 대한 지지를 어떻게 정당화하느냐는 문제에 일본정부가 고심했다. 결국 종전의 '미일동맹'의 소중함만 가지고서는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한 코이즈미는 자민당등 정부여당의 의견에 밀려 '북한 위협론'을 들고 나왔다. 즉 “지금 미국을 지지하지 않으면, 북한과 전쟁이 벌어질 때에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논리로 이라크침략 지지를 표명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함은 한일 양국이 모두 미국의 전쟁지지라는 결과에 있어서는 같을지라도, 우리 나라는 적어도 논리상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막아내기 위해 미국에 대한 발언권을 유지해야 하기에 지지한다는 것이며, 일본은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의 무력으로 북한을 떼려야 한다는 논리이므로 양자는 정반대 입장인 것이다. 즉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전제하여 행동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또 많은 일본 사람은 이러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은 남북 모든 겨레의 전멸에 이어지므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한반도 주민들에게 매우 도발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논리는 북한과 명시적인 군사적대의 입장에 서게 되어, 북한과의 대립의 골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코이즈미 스스로가 최대의 외교적성과로 자랑하고 싶은 북일 '평양 선언'의 성과를 무화시키고 대 북한 대화통로를 끊어버릴 '극약처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일 정상 회담 후 불거져나온 '납치'문제는 극단적인 반북분자와 극우 일본정치가에 의해 주도되어 언론의 선정적인 과잉보도에 의해 극도로 일본국민의 반북감정을 악화시켰으며, 그것을 배경으로 '북한 위협론'이 정면에 부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본의 반북여론은 어제오늘에 드러난 것이 아니다. 냉전 붕괴 후, 새로운 '적'을 찾아 미국에서는 이른바 '불량국가'론이 제기 되었고 그에 맞장구를 치며, 일본에서는 마치도 “물에 떨어진 개를 매질”하 듯이 야비하고 가학취미적인 '북한 악마론'이 풍미해 왔다. 그 여론을 지렛대로 일본의 군사화가 급진전했고 1997년에 '미일안보조약의 재정의', 미일안보조약의 가이드라인의 개정, '주변사태법'의 제정, '테러 특조법', 또한 올해 봄에는 일본전체를 전쟁할 수 있는 전시체제로 만들기 위한, 자위대법개정을 포함하는 '유사법'의 입법화를 바라보고, 나아가서 헌법9조의 폐지, 자위대의 '합법화'를 포함한 개헌까지 다가서게 된 것이다. 게다가 1998년의 북한 미사일발사 실험에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일본이 당초의 미국의 반대도 무릅쓰고 지난 3월28일에는 북한 미사일에 대한 감시와 그에 대한 선제공격을 의식한 군사첩보위성을 발사했고, 미국의 MD (미사일 방위 체계)에 대한 가담을 결정했으며, 또한 작년 5월 후쿠다(福田)관방장관이 “핵보유는 위헌이 아니다”라고 한 말도 핵무장의지의 표명으로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급기야 최근에는 확신범 적인 극우군사주의자인 이시바(石破) 방위청장관은 북한 미사일 기지에 대한 선제공격까지 공언하게 되었다.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방위적 선제공격론'을 펴는 부시 독트린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북한이 미사일 발사 단추를 눌러버리면 때는 이미 늦으니, 단추를 누른다고 판단될 때 먼저 부셔야 한다”는 논리로서, 이러한 난폭하고 호전적인 논리가 점차 일본여론에 침투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군사정보는 미국이나 일본정부의 일부가 독점하고 있어서 북한이 당초에 손을 댄 순간을 누가 정확하게 아는가.

정보가 조작될 가능성은 98년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시, 미국은 한달 전에, 일본정부도 며칠 전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는 의도적으로 알리지 않고 “흙발로 안방에 뛰어 들었다”라는 표현에 나타나 듯이, 기습성을 부각하면서 일본국민을 공포와 전율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은 일을 되새겨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그 미사일이 일본을 겨냥하는 것인지 어떤지는 누가 알겠으며,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방위적인 선제공격론을 공식화한다면 상대에게도 같은 논리가 허용됨으로 상호 군비확장과 선제도발의 악순환을 초래할 것이며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진짜 튀어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에 미국은 일찍 로마제국도 대영제국도 누릴 수 없었던 절대적인 제국으로 등장했다. 게다가 '테러에 대한 전쟁'은 국내치안과 주권국가간의 전쟁 사이에 있었던 종전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미국을 위한 경찰치안행동이 곧 대외적인 전쟁이 된 것이다. 이런 국제정치의 틀의 근본적인 변화는 근대이래 따져진 주권국가를 단위로 하여, 민족자결의 존중, 내정불간섭, 전쟁의 금지, 유엔에 의한 분쟁처리와 집단안보체제라는 원칙을 완전히 망가뜨려 놨다.

신처럼 오류를 범하지 않는 절대적인 선의의 미국을 상정하지 않은 이상, '민주주의의 제국' 미국의 독선은 일류의 미래에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이러한 미국의 행동을 어느 정도 제약하여 국제사회를 정상적인 틀에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한편에서 국제적인 힘의 균형을 형성하는 일이며, 또 다른 한편에서 국제사회의 가장 끄트머리에 밀린 이슬람이나, 미국으로부터 '범죄자', '불량자'로 몰리거나 이른바 '국제화' 속에서 탈락된 광범한 대중을 규합하여 반미연대를 구축하는 길 외에는 찾기 힘들 것이다.

이라크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유럽이나 세계의 광범한 반전 여론은 그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가상 그때 유럽이 하나의 축이 되어, 동아시아가 또하나의 축이 되어 전쟁반대의 분명한 목소리를 내었더라면 미국이라 할지라도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노무현 새정부의 동북아 중심의 안전보장, 경제체제 구축이라는 정책 방향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경제적인 가능성 면에서도 지역 평화를 위한 당위성 면에서도 동북아의 지역공동체론이 거론된 지는 오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되어,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이 본궤도에 올라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듭함과 동시에 중국이 미국에 대한 유일한 대항 강대국으로 지목되어, 남북화해정책이 진전되면서 그 가능성과 당위성이 부쩍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이 지역이 어느 정도의 구심력을 가지고 협동을 이루어낸다면, 미국에 대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축으로 등장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거의 유일한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것이 아시아에 등을 돌려 맹목적인 대미추종을 일삼는 일본의 외교 안보정책이라 하겠다. 일본이 동북아와의 과거청산과 화해를 이루어내고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발벗고 나선다면, 남북한의 협력, 화해, 통일과 동북아의 앞날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평화헌법을 가진 일본이 무리 없이 지역 리더로서의 역할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최선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음에 검토해보기로 하자.

3) '비정상'국가 일본
북일 평양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사실을 시인하고 북일국교정상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비정상적인 시대에서 일어난 문제들은 정상화의 과정에서 해결하자”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공동선언에서 명시한 국교정상화교섭커녕 일본은 '납치'문제를 빌미로 광란적인 반북 캠페인을 벌리고, 북한에 대한 가지가지의 적대행위 뿐만 아니라, 총련(재일조선인 총연합회)을 불법화하여 와해시키기 위해 '파괴방지법'의 적용을 들먹거리고 총련계 동포들에 대한 박해를 자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 있는 외국인 학교졸업자에 대입 자격을 부여함에 있어서 구미계 학교에는 자격인정을 하여, 아시아계 학교(조선학교 12, 한국학교 2, 중화학교 2, 인도네시아 학교 1)에게는 인정을 아니하는 노골적이고 몰상식한 차별정책을 표명하여,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아 일단 유보하게 되기는 했으나, 이렇게 볼 때, 일본이야말로 '비정상'국가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의 비정상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①천황제국가와의 연속성 : 민주국가를 표방하는 일본 헌법 제1장 8개 조항이 천황에 대한 규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천황이 명치유신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의 일본군국주의의 침략, 대량살륙등 인도에 대한 범죄의 면책을 받으면서 일본의 국가범죄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자가 없어졌다. 구 제국헌법이 폐지되지 않고 개정이라는 연속성을 가진 것은 구 헌법의 '國家無答責' 즉 개인이 국가(천황)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를 유효하게 하고, 일본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련의 '전후 보상'재판에서 일본제판부는 기각결정을 내려왔는데 주된 근거로, 시효와 국가무답책의 논리가 사용되어 왔다. 일본이 전쟁범죄를 인정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천황'의 책임을 면할 수 없기에 세계적인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런 억지를 부려왔다. 천황제를 전제로 하는 이상 일본이 과거로부터 단절하는 것을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화의 근본이 과거의 권위주의체제의 극복에 있다면, 일본은 아무리 훌륭한 헌법을 가지고 '아시아의 최초의 가장 성숙한 민주국가'를 자처한들 아무런 설득력을 가질 수 없으며, 그 동안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착실하게 민주화의 방향으로 발전해왔는데 반하여 일본이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를 여기에 찬을 수 있을 것이다.

②보편적인 인식의 결여 : 이시하라(石原) 동경도지사를 포함한 일본의 정치가들의 많은 부분은 산 증인이 있고 일본을 제외한 세계의 공통의 인식인데도, 남경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한다. 더욱이 그러한 망언이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찬미 등의 범죄적 주장이나 민족차별이 아무런 처벌이 없이 당당하게 횡행하고 있다.

③가해자 의식의 결여 :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의 원폭피해가 일본사람의 가해의식을 희석하여, 피해의식만을 조성케 했다고 한다. 같은 원폭피해자 속에서도 5만 명의 사망, 10만 명의 피폭이라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오랫동안 의식되지 않았으며, 원폭 피해자 원호에서 일본사람과의 차별은 오늘까지도 이어져왔다. 특히 작년 평양 조일 정상회담 이후, '납치'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사람의 피해자의식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④겉치레와 속내의 괴리 : '평화헌법'을 자랑하면서도 세계 2,3위의 군사예산을 지출하여, 미국의 전쟁을 앞서 지지하고 있다.

⑤자주성의 결여 :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을 자랑하면서, 일본의 외교안보정책은 미국 추종일변도고, 거의 자주적 결정을 한 바가 없다.

⑥배외주의와 아시아멸시 : 일본은 구미에 대해 비굴하리 만치 숭배하여, 아시아 특히 조선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왜곡된 우월감으로 일관해 왔다. 종전부터 아시아인이나 재일 동포들에 대한 입주거부 등의 차별이 행해졌으나, 최근에는 치마저고리 자르기나 치마저고리를 입은 학생들에 대한 승차거부, 공갈 협박 등이 그 정도는 정상을 벗어나고 있다.

⑦탈식민지화의 실패 : 탈식민지화란 식민지지배를 경험한 민족이 식민지 통치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제도, 문화, 인적구성, 사람의 마음의 성향까지도 낡은 틀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는 '친일파문제'에 대표되는 탈식민지화의 과제를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천황제의 연속성의 문제를 포함하여, 탈식민지화(과거청산)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일본이 천황을 의해 충성을 다한 皇軍 장병들에게는 막대한 恩給을 지출하고 있으면서, 일제 때 '치안유지법'등의 국가폭력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고 있으며, 국민이 대부분은 지극히 무관심하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의 나라에서 국가폭력에 대한 피해자의 명예회복 보상법의 제정이 요즘 급진전하고 있는 현상이나 세계적으로 스스로의 정부의 권력행사의 과오에 대해 과거 청산을 하고 있는 현상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하지 않는 나라가 아시아의 여러 민족에게 '전후보상'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이상에서 '무법자 미국'의 등장으로 인류의 '평화'는 크게 위협을 받고 있으며, 일본이 동아시아와 한반도 평화 실현과 화해, 번영의 길에서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도탄에서 우리 겨레와 동아시아 민중을 구해 낼 수 있는 길은 동아시아 민중의 연대로 반전 평화운동을 더 한층 거세게 벌여나가는 일임은 물론이고, 과거의 피상적이고 구호적인 '반일감정'에서 벗어나서, 일본이 지닌 본질적인 문제를 냉철하게 인식하면서 일본 사람이 스스로가 달라질 수 있게 일본사회의 양식 있는 세력을 북돋아주고 일반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거기서 우선 시급한 것은 정부와 민간의 두 가지 차원에서 한반도 남북의 불가분 함을 일본사람에게 인식시키고 무분별한 북한 적대, 총련동포들에 대한 가해해위를 분명히 비판해야 할 것이며, 일본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함께 과거를 극복하여 공동의 미래를 열어나가야 함을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1997년이래 7년에 걸쳐 대만, 제주, 오키나와, 광주, 일본 교토, 여수 등지에서 6차례에 걸쳐 한, 일, 대만, 오키나와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개최해온 '동아시아 인권 평화 학술대회'와 같은 목적의식을 가진 민간차원의 교류, 연대운동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반동적인 정치구도를 하루아침에 뒤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일본군'위안부', 교과서문제 등에서 부문별로 이루어져 왔던 동아시아의 과거청산운동을 민간차원의 '동아시아 진실 화해 위원회'와 같은 총체적인 운동으로 승화시켜나가는 일도 생각해 봄직하다.

이전에는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외치면서도 실제 그렇게 되기에는 아직도 멀다고 하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이 한발 내디디면 전쟁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악몽이 현실화 되어가고 있다. 그것도 바로 한반도 문제를 빌미로 삼아서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일본문제와 제대로 마주서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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