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아시아의 창(2002) : 아프간 난민캠프를 다녀와서

아프간 난민캠프를 다녀와서

정 귀 순(부산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대표)

이번 파키스탄 여행은 짧은 시간이지만, 파키스탄 국경 변의 아프간 난민캠프에 머물면서 자원봉사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여행을 준비하던 지난 12월, 파키스탄 친구 이크발이 심장마비로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어 경과를 지켜보아야 했고, 회복되면 귀국 시 동행이 필요하기도 해서 함께 가기로 하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이크발은 빨리 회복되어 조카 라우프와 함께 2월 초 귀국했고, 나는 20일 후인 2월말에 파키스탄으로 떠날 수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난민캠프 뿐 아니라 이미 귀국한 이크발의 병세도 확인하고, 지난해 결핵으로 사망하고 유해만 가족들에게 보내 마음 아팠던 아시라프의 가족들도 만나보기로 하고 떠났다.

3월 한 달간 파키스탄 곳곳을 누비는 동안 애초 여행을 준비할 때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보고, 또 생각하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여자 혼자서 폐쇄적인 이슬람국가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며 적잖이 염려하였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고 더구나 귀국한 파키스탄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니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파키스탄에서도 때때로 예상치 못한 난관들이 있었지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나는 내가 대단한 행운아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폐샤와르에서 카라치까지 가는 기차여행에서 만난 한 파키스탄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파키스탄에서 좋은 사람들만을 만날 것이며, 당신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당신은 좋지 않은 파키스탄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파키스탄에서 좋은 벗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인샬라', 당신들의 신의 뜻입니다”라고.

이번 여행은 격무에 시달리는 인권모임의 모든 동지들이 흔쾌히 나의 휴가를 동의해 준 덕분에 가능한 귀한 시간이었고, 한울타리 운영위원들의 정신적 물질적 지원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우리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귀국한 파키스탄 친구들의 마음을 다한 배려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 내내 혼자 온 것을 후회했다. 파키스탄의 아름다운 자연과 파키스탄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혼자 즐기기에는 미안했고, 한국에서 고통을 당한 파키스탄 친구들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또 아프간 난민들의 처절한 현실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고통 모두를 가슴에 담고 온 이번 여행은 나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동안 보고 느낀 모든 것 모두를 전하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만, 가능한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지금도 내가 만났던 파키스탄인들과 아프간 난민들의 선한 미소 그리고 하얀 모자를 쓴 듯 산꼭대기에 잔설(殘雪)이 남아있던 아프간 국경 변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생각하면 모두 그립고 가슴 아린다.

◑ 고도(古都) 폐샤와르에서

이슬라마바드를 거쳐 페샤와르로 가는 길은 파키스탄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난 탁실라 등을 거쳐가는 길인 만큼 봄이 막 시작된 산과 강은 푸르고 선명했다. 폐샤와르는 파키스탄의 북서부전선지방(NWFP; North West Frontier Province)의 수도로, 과거 교역의 황금 길이었던 실크로드로도 잘 알려져 있고, 불교문화의 발상지답게 석불을 비롯한 많은 불교문화와 유적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도시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간 수도 카불과 차로 불과 5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까닭에 파키스탄 국경을 넘은 아프간 난민 캠프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나는 폐샤와르에서 아프간 국경 변에 2001년 11월과 2002년 1월에 세워진 두 개의 난민캠프와 두 개의 오래된 난민캠프를 다녀왔고, 퀘타에서는 1996년 이후 세워진 오래된 난민캠프 세 곳을 가보았다. 출국 직전까지 아프간 난민들을 지원하고 있는 서울의 한 NGO 사무실에 연락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얻지 못하고 그냥 몸으로 부딪쳐 보기로 하고 떠났기 때문에 미리 난민캠프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면, 필요한 것들을 많이 준비할 수 있었고 또 적절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을 현지에 와서 해결하는 동안 모든 것이 부족하고 시간의 낭비도 많았다. 그러나 이후에 한국에서 누군가 난민캠프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었다고 위로했다. ,

폐샤와르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Pakistan Tourism Development Corp'(PTDC) 폐샤와르 사무실이었다. 그 동안 열심히 읽은 파키스탄 가이드북에 의하면 PTDC는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운영되는 공식 관광정보센타로 비교적 신뢰할만한 곳일 뿐 아니라, 폐샤와르 사무실은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미국의 아프간 침공 이후 전 세계의 기자들이 폐샤와르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무언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PTDC에 들어가 '아프간 난민캠프를 방문하고 싶다'고 하자, 저널리스트냐고 물었다. 한국의 NGO에서 왔다고 하자,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난민캠프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허가서가 반드시 필요하며, 오후 1시 반 이후면 관공서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하며, 월요일에 신청하면 화요일에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그 날이 토요일이었다) 그 때가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PTDC 사무실의 가이드 겸 운전사인 요나스의 차로 약 20분 후 'Commissionary Office of Afghan Refugee Camps in Peshawar'에 도착해 1층의 어느 사무실로 안내해 설명하고, 또 2층의 다른 사무실로 데려가 설명하고 또 다른 사무실로 데려가 설명한 끝에 허가서에 이름을 쓰고 방문희망 일자를 쓴 후 간단한 인터뷰를 한 후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Commissionary Office를 나와 요나스에게 저렴한 숙소를 부탁하자 그는 또 쏜살같이 어디론가 차를 몰아 한 호텔 앞에 세웠다. 그러고는 호텔 리셉션에서 방값을 흥정한 후 방이 괜찮은지 보러가자고 했다. 방은 비교적 깨끗했고, 따뜻한 물도 나온다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하루 300루피(6,000원)란다. 단 1시간 안에 폐샤와르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다. 난민캠프 방문허가서와 안내인, 그리고 저렴한 숙소까지. 그제야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굶고 있었다.

폐샤와르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진 않았지만, 프로에 가까운 요나스의 일 처리 덕분에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에 관심 있어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난민캠프 방문 후 함께 저녁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요나스는 지난주에도 일본의 NGO방문단들을 가이드 했으며 그들도 나와 꼭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리고 2주전에는 한 영국출신의 기자를 데리고 카불에 갔으며 만약 내가 카불에 가보고 싶다면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요나스의 제안에 나는 솔깃했다. 그러나 그 뒷 얘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자는 카불방문 허가서가 없었고, 호텔에서 허가서를 보여주지 못해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이틀 간 감옥에 있다가 풀려나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나스는 다시 카불로 데려가 주겠단다. 얼마나 용감하고 매력적인 사람인가.

◑ 난민캠프의 사람들1 ― 올드캠프

아프간은 지난 20여 년 간 전쟁이 끊이지 않은 비극적인 땅으로 난민캠프는, 북쪽에는 아프간의 수도 카불에서 차로 5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파키스탄의 국경 변 도시 폐샤와르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었고, 남쪽에는 칸다하르에서 5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국경 변 도시 퀘타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있었다. 현재 파키스탄에 있는 아프간 난민 수는 약 100만명 정도라고 한다. 1979년 구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한 직후 처음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온 아프간 난민들로 난민캠프가 새워진 이후 소련이 물러간 후에도 아프간은 끊이지 않는 내전으로 난민들은 계속 존재했다.

지난 9.11 테러사건으로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해 또다시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한 것이다. 새로운 문제는 아니지만, 불행의 연속 속에 아프간인들의 삶은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피폐해진 상태였다.

-'카차가리 캠프'
폐샤와르 시내에 위치한 '카차가리캠프'는 올드캠프 중의 하나로,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 후 세워진 캠프로, 이미 20년이 넘게 유지되어 온 곳이었다. 캠프는 진흙을 으깨어 세운 벽과 지붕, 한마디로 진흙으로 지은 컴컴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그 안에는 작은 시장과 음식점과 가구를 만드는 목공소들이 어지럽게 섞여있었다. '카차가리캠프'에는 약 10만 명의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1995년 파키스탄 정부에서 등록된 난민들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끊었고, 지금은 캠프 내 학교와 건강센타, 펌프시설은 다른 나라로부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고된 잡역직 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여성들의 경우 집에서 카페트를 짜거나 구걸을 하는 이들이 많다. 캠프 안에서 난민들은 공동체를 구성해 가족 당 매월 20루피 씩 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돕고 있다고 했다. 그 곳에서 만났던 한 난민은 그가 30살 젊은 날에 소련의 침공을 피해 아프간을 떠나 지금 53살이 되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는 꼭 아프간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의 선한 얼굴에 만들어진 굵은 주름살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가?

-'샴샤두 캠프'
폐샤와르 시내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 또 다른 올드캠프인 '샴샤두캠프'가 있다. 샴샤두캠프 역시 1980년에 세워진 캠프이지만, 1995년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지원이 완전히 끊어진 후 대부분의 난민들이 캠프를 떠났다가, 탈레반 정권 이후 격렬해진 내전으로 다시 국경을 넘어온 난민들을 위해 1999년 12월에 다시 세워졌고, 약 5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까닭에 UN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지원은 기본적인 식량만 배급받는데 상당수의 난민들은 국경 변의 뉴캠프로 옮겨가고 있는데, 그곳은 그나마 식량배급 사정이 이곳보다 낫고 아프간으로 돌아가기로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올드캠프의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의 교육문제라고 했다. 샴샤두캠프 내에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이 단 3클래스 밖에 없었다. 3클래스를 마친 이이들은 더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없고, 더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미래는 대단히 어두운 것이었다. 그리고 또 여성들을 위한 산부인과 진료센타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진료소가 있지만, 영양실조나 전염병을 예방하는 수준의 의료는 이루어지지만, 그 외 진료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부족한 식량지원을 해결하기 위해 난민캠프 내에서는 아이들과 여자들은 집안에서 카페트를 짜고 있었다. 한 달에 하나 정도의 카페트를 짤 수 있으며, 카페트는 대략 2천루피 정도에 팔린다고 했다. 그들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5∼7살 정도의 아이들이 틀에 매달려 카페트를 짜고 있는 것을 과연 아동노동 혹은 아동노동의 착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샴샤두 캠프에서 만난 아가(Dr. Noor Agha Galladar)는 비록 누추한 차림의 난민이지만 그는 영어를 비롯하여 6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의사출신의 인텔리로, 캠프를 방문하는 이들의 통역과 안내를 돕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전쟁 때 이미 돌아가셨고, 그는 삼촌과 함께 99년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지금까지 이 캠프에 머무르고 있으며, 아직 미혼인 그는 어떤 일이든 좋으니 NGO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알아봐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나는 지금도 그의 간절한 눈빛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이주노동자와 난민(Migrant Workers & Refugees)
올드캠프의 난민들은 개별적인 편차는 있지만 이미 이주민에 가까워 보였다. 카차가리캠프의 난민들이 이미 파키스탄에 온지 10년 이상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의 자녀들은 파키스탄에서 나서 또 파키스탄에서 자라고 있어, 비록 아프간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파키스탄 인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된다. 마치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 중 5년 이상 된 이들은 이미 한국인에 가까운 사고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본국으로 귀국해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와 비교되었다. 상당수의 난민들은 아프간 내에 마을도 집도 일자리도 없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에서 보듯이, 비록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일자리와 주거공간이 있는 파키스탄 캠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외형상으로는 파키스탄 내에서 파키스탄인들이 기피하는 힘들고 험한 막노동을 주로 하고 있는 난민들의 생활이 보다 나은 삶과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는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외부로부터 전쟁에 이은 내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는 자유로운 선택이 존재할 수 없으며, 미래라는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점이 차이점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들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난민'이라 불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아프간 난민을 돕는 사람들

폐샤와르에서 요나스의 안내로 아프간 난민들을 지원하는 NGO들을 몇 곳 찾아갔었다.

– 아프간 여인, 말라카
난민 캠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말라카는 6년 전 탈레반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카불을 탈출했다. 말라카의 남편은 라디오 아나운서였고, 말라카 역시 기자였던 까닭에 그들의 신변은 안전하지 못해, 두 아들과 세 딸을 데리고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다. 그는 3개월 전부터 작은 단체(Afghan Peace Seeker Women Council)를 만들어 난민 여성들에게 옷과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말라카는 조만간 카불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중이라고 했는데, 고등학생인 두 딸도 어머니처럼 대단히 활동적이었다. 그렇게 활동적인 여성들을 부르카를 씌워 집안에만) 있도록 한 탈레반 정권 하에서 그들의 삶이 과연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 난민 정보센타 (ACBAR Resource And Information Centre)
ARIC는 아프간 난민을 지워하는 세계 각국의 NGO들의 네트워킹인 ACBAR에 의해 1989년에 설립된 아프간 난민 관련 자료센타로 아프간 난민 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난민에 관한 UN을 비롯한 각 기관에서 발간한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방문객들이 필요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도록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었고, 마당에는 아프간 난민들의 취업을 비롯한 각종 정보 게시판도 만들어져 있었다.

– Afghan Refugee Hospital
이 병원은 아프간 난민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곳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도 감동적인 곳이었다. 병원 마당과 문밖에는 난민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작은 병원 건물에는 접수코너부터 시작해 아이들을 위한 진료실과 영양실조로 판정된 아동을 위한 식품지급코너가 있었고, 성인 남 여 진료실과 X-rey 촬영실, 물리치료실이 있었다. 이 병원은 JIFF(Japan International Friendship and Welfare Foundation & Josai Hospital)에 의해 운영되는 병원으로 벌써 10년째 활동 중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과 주로 일본에서 유학한 아프간 의사들 반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병원 전체를 관장하는 코디네이터 역시 일본인과 아프간인 두 명으로 구성되어 병원지원 파트와 환자진료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루에 평균 1,300명의 환자가 찾아오며,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 반까지 진료하고 그 이후에는 캠프를 방문하는 방문진료활동을 하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다양한 후원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이 병원에는 JR(일본철도)노동조합 역시 후원을 하고 있으며, 조합원들이 정기적으로 5∼6명씩 방문하여 1주일정도 머물며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이 병원에 파견된 지 4개월 됐다는 코디네이터는 며칠 후 일본에서 예정된 보고회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병원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아프간 내의 병원설립을 위해 카불을 방문했던 당시 촬영한 영상도 보여주었다. 음식과 물이 부족하고 주거환경이 열악하여 난민들은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어 완전히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이 병원은 난민들에게 대단히 필요한 시설이었다. 이미 10년 전에 이 곳 폐샤와르에 병원을 설립해 아프간 난민들을 도와온 이들을 보며, 일본인들이 다시 보였다. 이주노동자를 돕는 일본의 NGO와의 교류를 통해 이미 매사에 조용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경험한 바지만, 요란하기만 하고 실속 없고 지속적이지 못한 한국의 많은 NGO 활동들과 대조되어 부끄러웠다. 폐샤와르를 떠나기 전 이 병원에 다시 들러 한국에서 준비해 간 작은 성금을 전달했다. 일본에서 열심히 후원하고 있겠지만, 열심히 활동하는 곳일수록 재원이 늘 부족하기 마련이라 우리의 작은 마음을 보태고 싶었다.(성금은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에서 지난 연말 아프간 난민을 돕는 바자회에서 모은 성금과 인권모임의 성금을 보탠 것이다)

◑ 난민캠프의 사람들2 ― 뉴캠프

아프간과의 국경 변에는 트라이블 에어리어(Tribal Areas: 종족지역)가 존재하는데, 이 지역은 다시 바주르에이전시, 카불에이전시, 코람에이전시 세 지역으로 나뉘어진다. 이 지역들은 파키스탄의 국경 내에 존재하지만, 행정적으로는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전혀 통제 받지 않는 지역이다. 각 에이전시는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작은 왕국과 같고, 그래서 이 지역은 총기밀매와 마약밀매, 밀입국으로 유명한 지역일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다. 비단 외국인 뿐 아니라 파키스탄인 조차도 이 지역에 들어가는데는 허가서가 필요하며, 이 지역 끝에 세워진 아프간 난민캠프는 그 예민한 사안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립에 가까운 유엔고등난민판무관(UNHCR)이 전체적으로 관장하고 있다.

– 바주르캠프(Bajure Camp)
UNHCR의 담당자들과 함께 페샤와르에서 트라이블 에어리어로 접어들자 바주르에이전시의 경찰로 호위가 바뀌면서(경찰들의 복장이 다르다) 승객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캠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시간도 지정했다. 갈색 평원을 지나, 산 전체가 대리석인 석산 들을 지나 끝없이 오르고 난 뒤, 산허리를 막 돌아서자 탁 트인 산 아래를 볼 수 있었다. 멀리 연이은 산봉우리엔 아직도 하얗게 잔설이 남아 있었다. 아프간 난민캠프로 가는 길은 그렇게 장엄하고 경이로운 자연으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산꼭대기에서 구불구불한 산허리를 돌아 한참을 내려간 저 끝에 하얀 텐트들이 빼곡한 난민캠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샤와르를 출발한지 3시간만에 바주르캠프에 도착했다.

바주르캠프를 총 관할하고 있는 칸씨는 먼저 캠프를 둘러본 뒤, 자기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했다. 캠프 내 치안 경찰의 안내로 먼저 둘러본 것은 캠프 내 병원이었다. 병원은 〈진료소 – 수술실 -응급실 -약국과 영양실조 아이들을 위한 식품배급소〉가 각각 작은 텐트로 나뉘어져 있었고, 하루에 300∼500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하며 남녀 2명의 의사가 진료하고 있었다. 전체 캠프 내에는 이런 병원이 3군데 있었다. 내게 설명을 해 준 의사는 지난 11월 캠프가 설치된 후부터 죽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고, 힘든 일에도 그의 표정은 대단히 밝았다. 다음은 캠프 내 하나의 학교를 둘러봤는데, 학교는 학생이 582명(소년 376명, 소녀206명), 교사가 50명(파키스탄인 6명, 나머지 아프간인)이었고, 얼마 전에 책과 노트가 지급됐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족의 텐트에 들어가자 그들은 차도 끓여주었는데, 그 가족들은 다른 가족들에 비해 약간 여유 있어 보였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아프간에서부터 카페트를 만들어온 기술자였고, 지금도 카페트를 만들어 인근 마을의 상인을 통해 판돈으로 채소와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는데, 카페트는 한 장에 2,800루피 정도에 팔린다고 했다. . 가족의 가장은 자신들이 짜고 있는 카페트를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하는 품이 내가 그 카페트를 사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으로 차만 얻어 마시고 나와 그 옆 텐트에 들어가 보니, 한 여인이 침대 커버에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는 미망인이었고, 한 달에 한 장 정도의 침대커버를 만들 수 있으며, 500루피 정도를 받는다고 했다. 난민으로 등록을 하면, 먼저 텐트하나와 키친세트, 담요 1장, 쌀과 밀가루, 오일, 물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것만을 UNHCR로부터 지급 받기 때문에 그 나머지 부분은 개인적인 능력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결정적인 차이는 아니지만, 난민들 사이에도 작은 경제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넓은 텐트촌 사이에는 채소와 옷가지들을 파는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머리를 깎는 이발사들은 열심히 사람들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바주르캠프는 미국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2001년 11월에 설치되어 이제 4개월 째 접어들었고, 이 캠프 내에 머무는 난민들은 2만여 명 (3,221가족 총 20,433명)이었다. 대부분이 가족단위로, 한 가족 당 평균 6∼7명인 셈이다. 내가 방문하기 이틀 전부터 귀향을 원하는 난민들의 신청을 받고 있었고, 귀향하는 가족들에게는 100불씩의 지원금과 차량을 제공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막 시작한 탓에 아직 신청자가 거의 없다고 했다.

내가 만나본 난민들은 난민캠프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물이며, 작은 돈이라도 벌 수 있도록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아프간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만큼, 당장은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렸다가 안정된 후에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걔 중에는 아프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캠프로 돌아온 이도 있었다.

2시간 정도 캠프를 돌아본 후, 칸씨와 잠시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먼저 캠프운영에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서슴없이 얘기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어렵게 운영하는 그에게 '난민들이 물이 부족하다더라'는 얘기는 별 의미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물을 퍼 올리는 펌프시설의 부족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는 세계 곳곳의 NGO에서 물품들을 보내오지만, 그 물품들 대부분은 소비품들이어서 지속적인 공급이 필요하지만, 보내는 측에서는 일회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물품이 늘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의 유니폼을 지원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아이들을 위해 학교는 열었지만, 아이들의 옷이 부족하고 더구나 물이 부족해서 자주 세탁할 수 없는 만큼 짙은 색의 옷으로 만든 유니폼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했다. 나는 대답했다. “노력해 보겠다고” 그는 조심스럽게 혹시 가능하다면, 아이들의 신발과 모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것도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의 마음은 무거워졌지만.

바주르캠프는 크게 두 개로 나뉘어지는데, A camp에 아이들이 모두 4,920명, B camp에 아이들이 모두 1,500명, 모두 약 6,500명이었다. 4세부터 9세까지가 65%이고 4세 미만이 35% 정도라고 했다. 곧 여름이 다가오는 만큼, 아이들에게는 땀 흡수가 잘되는 얇은 옷이 필요했다. 난민들의 상황과 숫자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상태에서 들고 간 아이들의 연필들은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래도 그들은 좋아했다.

– 살만 캠프(Salman Camp)
국경 변의 또 하나의 캠프인 살만 캠프로 가는 길은 파키스탄에서 관광코스로도 유명한 카이블계곡을 지나가는데, 지난 날 영국군이 엄청난 인력과 비용을 들여 깎아지른 카이블 계곡을 통과하는 철도를 놓아 물자를 수송했는데, 오늘날 그 기차는 단체관광객들이 예약할 때만 운행한다(기차 예약은 1,000$이란다) 이 계곡을 따라 만든 도로가 지금은 그 유명한 카이블 패스다. 구불구불한 산과 계곡을 지나 바로 눈앞에 있는 꼭대기에 잔설을 안은 산이 아프간의 '비키'산이라고 했다.

불과 1km 앞이 아프간 국경이란다. 우리 바로 앞에는 트럭에 가재도구와 함께 탄 아이들이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했는데, 그들은 지금 아프간으로 돌아가는 가족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 나무 한 그루 없는 온통 검은 산에 둘러 쌓인 저 아래 하얀 텐트촌이 드러났다. 살만 캠프다. 살만 캠프는 앞쪽에 듬성듬성 이제 캠프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듯했고, 뒤쪽으로는 빼곡이 텐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뒤쪽이 살만Ⅰ, 앞쪽이 살만Ⅱ다. 바주르캠프와는 달리 살만 캠프 지금도 새로운 난민들이 도착해서 등록을 하고 있었다. 살만 캠프의 책임자인 사딕씨는 난민들의 등록증을 확인하고 사인을 하고 있었다. 캠프에 도착한 난민들은 먼저 등록절차를 밟은 후, 전염병 예방 백신을 맞게되고, 텐트와 담요, 주방용품셋트, 물바케스와 함께 15일치의 식량이 주어지고 그 날 점심과 저녁식사가 제공된다. 물품과 식량의 상당수에 USA라는 마크가 찍혀있었다. 얼마나 기막힌 현실인가. 이 많은 난민들을 만들어 낸 미국에서 보낸 식량으로 이들이 연명하고 있다니 말이다.

살만 캠프 2002년 1월에 만들어져 3,200 가족, 18,00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내가 도착한 그 날 오전에도 17가족이 등록절차를 밟고 있었다. 새로 도착하는 난민들은 아프간에서 국경을 막 넘어온 이들보다 폐샤와르에서 가까운 곳에서 지내던 난민들이 식량이 배급되고 아프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용이한 국경 변 캠프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살만 캠프에는 학교들이 불과 며칠 전에 문을 열어 텐트만 치고 맨바닥에 아이들이 100명 혹은 120명씩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수업을 하고 있었다. 콩나물시루처럼 빼곡이 들어찬 캠프에서 만난 그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환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들 중 한 파키스탄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2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서 걸어와야 한다며, 캠프 관리자들에게 자신이 캠프 내에 머물 수 있도록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를 안내했던 분은 캠프 내에 모두 3개의 학교를 NGO들의 지원으로 며칠 전에 열었는데,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학교와 함께 BHU(Basic Health Unit)도 세 개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기본적인 진료실과 남녀치료실, 응급실, 영양실조 아이들을 위한 식품보급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여성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캠프 밖 공터에서는 난민들에게 그 날 도착한 지원물품인 옷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3월 중순인데도 벌써 무더운데 나무 한 그루 없이 내려쬐는 태양을 고스란히 받아야하는 이곳에서 다가오는 여름을 어떻게 날 것인지 염려되었다. 그리고 살만 캠프에 난민의 대부분은 아프간의 소수민족인 페르시안 이었다. 바주르캠프의 대부분이 파슈툰이었던 것을 보면, 난민들도 같은 민족끼리 모이는 것 같았다.

“어때요? 난민캠프가 살만합니까? 당신에게 이 캠프에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사딕씨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 꽂혔다.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많이 지쳤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또 너무 절망적이었고, 나는 너무 무력했다. 달랑 천막 하나에 의지해 살아가는 난민들의 삶은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고, 단지 생존하고 있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따라다니던 호위경찰과도 카이블 에이전시가 끝나는 지점에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폐샤와르로 돌아왔다.

◑ 황량한 퀘타에서

폐샤와르에서 난민캠프 방문이 끝난 후 나는 파키스탄을 종으로 가로지르는 가장 긴 철도노선인 카리치행 기차를 탔다. 카라치에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오는 파키스탄 친구들의 상당수가 카라치 출신이어서 그곳을 보고 싶었다. 카라치에서 3일을 머문 후 다시 퀘타로 향했다. 퀘타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발로치스탄의 수도라고 하지만, 작고 황량했다. 퀘타의 PTDC 사무실은 초라하고 활기가 없었다. 매니저에게 아프간 난민캠프에 가고 싶다고 하자, 그는 일언지하에 자신들은 아무 것도 도와줄 수가 없다고 했다. 특히 외국인의 안전문제로 개별적인 방문은 허락되지 않으니, 퀘타 시청에 가보라고 했다. 퀘타시청으로, UN사무실로, 아프간난민사무실로 뛰어다녔으나 국경 변에 있는 난민캠프를 방문하기 위한 허가서를 얻는데는 족히 1주일 이상이 걸릴 예정이어서(3월 23일은 파키스탄의 기념일이어서 그 전후로 관공서가 모두 쉬는 날이었다) 결국 국경 변의 뉴캠프를 가는 것은 포기하고, 퀘타에서 만난 한 NGO의 도움으로 퀘타 시내의 캠프를 방문할 수 있었다.

◑ 퀘타의 난민캠프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지구촌운동 (Global Movement for Children & Women”에서 일하고 있는 카림과 아시프의 안내로 퀘타 시내의 아프간 난민캠프 3곳을 방문했다. 한 곳은 30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다른 한 곳은 약 60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규모의 캠프였고, 나머지 한 곳 내가 본 난민의 생활 중 가장 비참한 곳이었다. 퀘타지역의 아프간 난민들은 주로 칸다하르를 비롯하여 아프간의 남부지방 출신들이며, 파슈툰보다는 소수민족인 페르시안,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들이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언어도 파슈툰어가 아니라 페르시아어, 우즈벡어, 타지키스탄어 등 다양한 언어를 쓰고 있었다. 각 난민캠프는 규모에 상관없이 공동체를 구성해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고 있었지만, 심각한 문제는 식량, 전기, 가스 등 아무 것도 지원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일부 난민들은 식량이 지급되는 국경 변의 난민캠프로 옮겨가기 위해 등록절차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낮에는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난민의 생활 그 자체가 이미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낯선 외국인이 찾아오자 아이들은 혹시 먹을 것이라도 줄까하여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 곳에서 만난 55세의 Mohammad Jane은 아프간에서 공무원이었지만, 그가 처음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던 것은 소련이 침공한 직후인 1981년이었고, 소련이 물러간 후 1991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이번에는 내전으로 더 이상 살 수 없어 1995년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아프간 증명서에는 말쑥한 양복차림의 지적인 젊은이가 있었고, 그 젊은이가 Jane의 젊은 날의 모습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가 말했다 '지금은 아무도 같은 사람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라고'.

1m 앞도 안보일 만큼, 불어오는 모래바람 속에서도 구석구석 나를 안내해준 카림과 아시프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난민 아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심어주고 싶어하는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퀘타에서의 짧은 아프간 난민캠프의 방문을 끝냈다.

–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지구촌운동 (Global Movement for Children & Women)”
UNHCR 사무실 앞에서 만난 파키스탄인 카림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의 뒤편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그 집은 GMCW의 일원인 남아프리카 출신의 마히라의 집이기도 하고, 그들의 사무실이기도 했다. GMCW은 퀘타를 중심으로 발로치스탄 지역의 아프간 난민을 위한 활동을 해 오던 몇몇의 활동가들이 1년 전에 의기투합해 만든 작은 NGO이었다. 현재 이들이 하고 있는 주요 활동으로는, 퀘타시내에 학교는 고사하고 주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주워 팔기도 하고 또 먹기도 하는 대부분의 난민 아이들을 위해 정규 학교가 파한 뒤 학교 건물을 빌려 오후 3시부터 '어린이노동자 기초학교 (Child Labor Primary School)'을 열고 있었고, 무료진료와 식품지원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금 난민캠프 내에 아이들의 학교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작은 학교 하나를 운영하는데 한 달에 100$(130,000원)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 적은 금액으로 학교를 하나 운영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들은 무조건 지원하기보다 난민공동체와 공동으로 운영할 계획이었고 학교의 공간마련과 청소, 교사는 난민공동체에서 제공하는 대신, GMCW에서는 교사의 월급과 아이들의 책과 학용품, 음식을 책임진다는 계획이었다. 학교는 아이들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에 공동체 단위로 만들고, 한 학교에 100명∼300명 정도의 규모로 여러 개를 만들고 싶어했다. 학교를 언제 시작할 것인지를 묻자, 카림은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기금이 확정되면 바로 시작할 것'이라 했고, 그 날 저녁에도 기금마련을 위해 UNICEF 담당자와 미팅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퀘타를 떠나는 날 안 사실은 UNICEF와의 미팅이 아무런 소득이 없어 이들은 적지 않게 상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금액이지만, 학교를 위해 100$을 남기고 왔다) 나는 그 학교에 아이들의 웃음이 넘쳐나기를,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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