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땅에 드리워진 암흑 : 버마의 근현대사와 국제연대의 의의
– 김종현(나와우리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
1. 서론 :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
'황금의 땅, 불교의 나라'
버마는 한반도의 3배가 넘는 68만 평방킬로미터의 수려하고 비옥한 국토와 석유, 목재, 광물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일년에 3번의 벼수확이 가능한 농업국가이다. 인구의 대부분은 불교신자이다. 버마의 불교는 인도에서 수입되었다. 중국으로 전파된 대승불교가 아니라 개인의 해탈을 중시하는 소승불교(상좌부 불교)이다. 고대왕국에서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도시 곳곳에 거대한 불교식 첨탑들이 황금빛으로 세워져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버마를 흔히들 '황금의 땅'으로 부른다. 이렇게 풍부한 지하자원과 높은 농업생산량, 유구한 불교전통에도 불구하고 버마가 세계 최빈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군사독재라는 암흑 속에서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에게 버마는 생소한 나라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의 나라라는 것과 과거 한국의 한 독재자가 거기에서 죽음을 맞이할 뻔한 사건만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버마는 62년이후 지금까지 무자비한 군사독재가 계속되고 전국의 대학이 폐쇄된 엄혹한 나라이다. 수천명이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며, 국내에서 모든 정치적 자유가 발탁된 나라이다. 더구나 1988년 8월에 발생한 민중항쟁은 수천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경험을 갖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수십만명이 해외에 망명하여 살고 있다. 매년 군사정권에 의한 희생자들이 수백명씩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유홍준 선생님의 말씀은 문화유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접하는 모든 것이 애정을 가지고 접근할 때, 비로소 그것이 우리의 삶에 던지고 있는 문제들을 깨달을 수 있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아마 '왜 우리가 '버마'라는 아시아의 한 나라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품을 지 모르겠다. 또한 '그들과의 연대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인가?'라고 조급하게 물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당신에게 먼저 애정을 가져줄 것을 요청한다. 당신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버마'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시대인에 대한 애정만이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볼 수 있는 가치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2. 버마의 근현대사 :
해결되지 않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과 37간 계속되는 군사정권, 그리고 저항의 역사
버마의 현재 상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버마의 역사를 살펴 보아야 한다. 버마의 근현대사는 상당히 독특하기 때문에 역사를 이해하지 않으면 현재의 군사독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버마의 근현대사는 한국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외국의 식민지를 경험하였고 2차세계대전이후에 독립한 후에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군부 쿠테타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또한 버마는 한국의 5.18광주민중항쟁과 유사한 88년 8월 8일의 버마민중항쟁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버마는 한국과의 정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해방이후 한국은 자본주의 체제를 버마는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던 나라가 유사한 역사적 경로를 밟았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의 원인을 밝혀내는 작업은 한국의 향후 발전방향을 고민하는 데 유의미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배의 유산 : 분열된 불교식 사회주의 국가
버마는 1885년에 서구 제국주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영국에 의해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영국은 버마를 인도의 한 주로 편입함으로써 버마는 행정적으로는 인도의 지배를 받는 이중 식민지가 되었다. 버마는 135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종족국가이다. 영국은 분할통치정책으로 중심부와 산간지역을 구분하여 관리하였다. 영국의 분할통치정책은 인구의 70-80%를 차지하는 중심 부족인 버마족과 친, 까친, 꺼인, 카렌 등 다른 부족을 이간질시킴으로써 민족주의적 대항을 가로막기 위한 조치였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종족분쟁을 분석하다보면 그 근원에는 이러한 식민지 경험이 존재한다. 최근의 동티모르 독립문제 역시 네델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와 포르투칼의 동티모르 지배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영국의 분할통치정책 역시 현재까지 강력하게 발생하고 있는 종족분쟁을 발생하게 하는 근원이 되었다.
영국의 분할통치정책에도 불구하고 버마의 좌파 독립운동은 계속해서 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는 코민테른과 연결된 공산당이 등장하였지만 주류는 자생적 사회주의그룹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자 버마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을 이용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버마의 독립운동세력들에게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지만 일본의 파시즘과 손잡을 수 없다는 공산주의 계열의 원칙론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우선 과제라는 자생적 사회주의 그룹의 현실론이 충돌하였다. 버마의 국부로 추앙받는 자생적 사회주의 그룹의 아웅산(Aung San) 장군은 현실론을 주장하고 '30인 지사'를 결성하여 일본에서 특수 군사훈련을 받았다. 아웅산 장군을 위시한 독립군은 일본과 함께 영국군을 격퇴하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국군은 버마에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버마를 독립시켜 주지 않고 새로운 식민지배를 노골화하였다. 일본의 지배에 맞서 아웅산 장군은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세력들을 모아 1944년 반파시스트민중자유동맹(AFPFL)를 조직하고 연합군과 함께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 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버마는 1947년 제헌의회 선거를 거쳐, 1948년 1월 4일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국내 정적에 의해 암살당함에 따라 버마의 독립은 내부분열과 혼란으로 점철되게 되었다.
버마는 역사적으로 인도와 중국에 의해 수시로 침략을 받으면서 성장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식민지배와 일본의 식민지배를 겪으면서 반외세 감정이 극도에 달하였다. 특히 자본주의의 병폐로 나타난 제국주의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버마 독립운동 세력의 대부분은 사회주의로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아웅산 장군은 1947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버마는 정통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불교라는 버마의 정신적 기반이 사회주의의 유물사관과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아웅산 장군을 이은 AFPFL의 지도자 우누(U Nu)는 영국 페이비언사회주의에 심취하여 혼합 경제체제와 다당제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체제, 불교를 종교의 중심으로 하는 '불교식 사회주의'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우누의 불교식 사회주의는 공산당과 소수종족으로부터 배격당하였고 곳곳에서 공산당과 소수종족에 의한 무력무쟁이 발생하였다. 무력분쟁의 발생은 영국의 분할통치정책으로 인한 종족분열과 일본과의 협력을 두고 벌어졌던 정치적 분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렇게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는 종족분열과 정치적 분열, 반외세 감정과 반자본주의라는 유산을 남겼고 버마는 혼란스러운 불교식 사회주의라는 체제를 건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군사 정권시대의 개막과 버마식 사회주의
버마의 군대는 독립군에서 출발하여 이루어졌다. 영국과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군부가 보여준 헌신성으로 인해 군대는 국민적 신망을 얻기도 하였다. 1962년 쿠데타를 일으킨 네윈은 아웅산 장군이 이끌던 '30인 지사' 중 한명이었다. 군대가 독립전쟁과정을 이어 탄생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군대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다. 그러나 군부는 그러한 국민적인 신망을 권력욕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하게 되었다. 심지어 1958년 우누 정권은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1960년 총선까지 군대에 위기관리를 넘겼다. 이 위기관리 기관동안 군부의 영향력은 확장되었다. 1960년 총선에서 다시 정권을 잡은 우누는 군대의 정보수집활동을 제한시키고, 군부의 경제개입도 제한하면서 군부 권력을 제압하기 위한 활동들을 펼쳤다. 이러한 우누의 정책은 군부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네윈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혁명평의회에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켰다. 네윈은 '쿠데타는 미얀마의 국민통합과 사회주의 경제의 건설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이익집단으로서의 군부의 이익이 침해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네윈은 의회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를 건설하고 다른 정당 활동을 불법화함으로써, 군,당,정이 일체화된 강력한 독재체제를 건설하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한 이유는 당시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상황에서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즉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민들의 정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국민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이념적 지향의 필요성, 군부의 젊은 장교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 경향을 흡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치기반의 안정화, 냉전체제 속에서 정권유지를 위해 중국정부와의 유대강화의 필요성 등이 그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에서 표방된 사회주의라는 기치는 계급적 분석과 생산관계의 철저한 개조를 수반하지 못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실패와 독재정권의 강화
네윈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1960년대는 소련의 소비에트형 산업화 방식이 전세계적으로 제3세계의 대안체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네윈 역시 버마식 사회주의의 기치아래 국유화와 국가계획통제경제를 추진하였다. 군부는 '기업국유화법'과 '사회주의 경제건설보호법'을 제정하여 15,000여개의 기업과 22개의 외국은행도 국유화하였으며 '인민상회'를 통해 가격통제와 도,소매 판매할당 등의 유통을 장악해 나갔다. 자력갱생정책과 폐쇄적인 대외정책도 네윈 경제정책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자원수탈형 식민지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외국인에 의한 경제지배를 배제를 요구하는 당시 국민들의 일반정서와도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네윈의 이러한 정책은 실패로 드러나게 된다. 1960년대 버마는 우누시대의 4-5%에 달했던 연평균 경제성장률에도 못미치는 1.4%의 연평균경제성장 경제성장률과 4번의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다. 실패의 원인은 중앙계획을 효율적으로 수립, 수행할 국가기구가 부재한 상황에서 과도한 국유화를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지배의 소유권을 외국 자본가들의 손에서 군부 관료들의 손으로 넘긴 것에 다름 아니었다. 버마식 사회주의는 토니 클리프가 이야기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네윈이 폐쇄적인 대외정책과 자력갱생정책을 펼침에 따라 필요한 자본재나 원자재를 수입하지 못한 것도 경제정책의 실패 원인이었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실패와 함께 인위적인 국민통합 역시 중대한 문제를 노정하고 있었다. 버마족 중심의 민족주의 정책 때문에 소수종족들은 무장투쟁을 확대하였다. 일련의 정책실패에 따라 1970년대부터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반정부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산 속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네윈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민간화 정책을 펼쳤다. 1972년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을 강조하였고, 1974년 헌법을 개정하고 혁명평의회의 권한을 국가평의회와 인민의회로 이행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민간화 정책은 네윈이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의 의장, 대통령, 국가평의회의 의장을 모두 겸직함으로써 오히려 독재체제를 강화한 기만적인 정책이었다.
폭발하는 국민들의 저항과 신군부의 등장 : 8888 버마민중항쟁
네윈정권의 귄위주적인 군부통치에 대한 저항은 계속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특히 87년에 원조혜택을 받을 수 있는 최빈국 지위를 UN에 요청할 정도로 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1988년에 국민들은 드디어 독재정권에 대대적으로 저항하였다.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988년 3월, 군사정권은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42명의 학생들을 최루탄 가스로 질식사시켰다. 6월 21-22일의 시위에서는 양곤대학생 9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이 두사건을 계기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7월 22일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88년 7월 23일, 네윈은 긴급특별회견을 통해 당의장직 사임을 공식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네윈이 대리자로 내세운 신군부는 국민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고, 국민들의 혁명적 열기는 확산되었다. 특히 어머니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영국에서 귀국한 국부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지여사는 군대의 총을 바로 앞에 두고 시민들에게 연설을 감행함으로써 일약 국민적인 영웅으로 등장하게 된다. 1988년 8월 8일 8시 8분에는 10만 이상의 시민, 학생들과 버마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인 승려들이 수도 랑군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군부대는 시위대에 발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최소한 200명의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시위는 계속해서 신군부의 퇴진과 직접 다당제 총선을 요구하면서 확장되어 나갔다. 특히 민중들의 저항은 '해방구', '시민자치기구'를 형성하는 등 혁명적인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신군부는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를 구성하고 전권을 장악한 후 대대적인 강경진압을 계속하였다. 8888 버마민중항쟁으로 최소 2,000명에서 최대 20,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아직까지 제대로된 진상과 사망자수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90년 총선에서의 NLD의 승리와 거부된 민주화
8888 민중항쟁을 강경진압하며 정통성없이 등장한 신군부의 SLORC는 89년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전환한다. 이러한 전환은 시위대에 대한 무력진압에 따라 실추된 대외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SLORC은 어떠한 정통성도 없는 불법적인 단체이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세력들은 '미얀마'라는 국명을 거부하고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글 역시 '미얀마'라는 국명 대신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한다.) 1990년 SLORC은 합헌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들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다당제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SLORC의 이러한 결정은 시위대의 혁명적 열기를 선거라는 공간을 이용해 잠재울 수 있다는 판단과 총선으로 통해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총선은 모든 예상을 뒤업고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의 압승으로 귀결되었다. NLD는 59.9%의 득표율을 보이며 전체의석수의 80.8%를 획득하였던 것이다. 승리를 자신하던 신군부에게 이런 결과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90년 7월 27일에 공식적으로 정권이양을 거부하고 행정, 입법, 사법의 전권을 SLORC가 계속 수행한다고 선포하였다. 군사정권은 NLD의 국회의원 당선자들과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강행하였다. 수천명이 감옥에 끌려갔으며 10,000여명의 학생들과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은 태국과 인도로 도피하게 되었다. 정통성을 전혀 확보할 수 없게 된 SLORC는 이후에 가혹한 공포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계속되는 인권침해, 학살, 계속되는 저항
버마 군사정권은 96년 이후 시위를 이유로 전국의 대학을 폐쇄하였고 최근에는 초중고 모든 학교를 폐쇄하였다. 현재 정치활동, 집회, 결사의 자유는 전면적으로 부정되어 있고 약 1200명 이상의 양심수가 투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99년 9월에는 고등학생을 포함하여 500여명이 체포되었다. 3호담당제가 실시되어 세집마다 감시원이 존재하고 있으며, 연좌제가 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해외와의 정보교류가 완전하게 차단되어 있다. 정부 허락을 받지 않은 모뎀의 사용과 팩스를 통한 교신은 3년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알려져 있다. 99년 7월에는 엠네스티가 3살짜리 여자 어린아이가 불법집회 참여를 이유로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힘에 따라 버마의 폭압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국제노동기구(ILO)는 99년 6월 총회에서 버마 군사정권이 국가사업에 미성년자과 노인들을 강제노동시키고 있으며 노조를 광범위하게 탄압하고 있다고 밝혔다. UN인권위원회는 인권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거의 매년 채택하고 있다. 소수종족 문제는 현재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 사안이다. 소수종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진행되어 매년 수백명의 사람들이 무차별하게 학살당하고 있으며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있다. 특히 91-92년에는 20만명의 소수종족들이 태국으로 집단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현재 버마를 탈출해서 태국으로 도망간 난민과 버마-태국 국경 근처의 난민캠프에 있는 난민들은 합쳐서 최대 1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버마의 현재상황은 한국의 일제시대 말기와 비유할 수 있다. 국내의 활동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상징적으로 아웅산수지는 버마에서 NLD 본부를 유지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세력은 해외에 망명정부와 민주화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SLORC의 탄압으로 인하여 해외로 망명한 민주인사들은 태국에 민족민주동맹 자유지역 (NLD-Liberlated-Area) 본부와 미국에 망명의회(National Coalition Government of the Union of Burma : 90년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미국에 설립한 망명의회)를 구성하였다. 학생운동단체인 전버마학생민주전선(ABSDF)는 버마와 태국 국경지대에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캠프를 설치하고 투쟁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NLD는 국제연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해외에 망명지부를 건설하고 있으며 현재 뉴질랜드, 일본, 미국 등 10여개 지부를 건설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Amnesty International 과 Human Rights Watch 등이 버마 관련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 또한 버마 인권상황개선과 민주화를 지지하는 단체들도 수십개 존재한다. 대표적인 버마를 위한 인권운동단체인 Free Burma coalition의 경우 그안에 크고 작은 60여개의 단체들이 존재한다.
버마 민주화를 이루거나 연대의 운동방식은
첫째, NLD를 중심으로 평화적 노선이 있다. 이를 통해 국제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겠다는 전략이다. NLD는 90년 총선이후 국내의 활동은 축소하고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버마군부의 탄압에 기인한 전략이기도 하지만 국제사회의 여론을 이끌어 내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NLD가 국내적으로 내거는 중심적인 요구는 버마 군부가 대화에 나서라는 것이다. 또한 국회를 열 것을 보장하고 제헌의회를 열자는 것이다.
둘째, 소수민족과 학생단체를 중심으로 한 무장운동 방식이다. 소수민족은 밀림지역에 캠프를 설치하고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 학생운동 그룹은 현재 무장운동과 평화적 노선이 대립하고 있다. 학생운동 그룹은 무장투쟁을 통해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군부에 대한 비타협적 운동을 상징적으로라도 보여주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작년 태국의 버마 대사관 점거는 학생운동 그룹이, 태국에 있는 병원을 점거한 것은 소수민족 그룹이었다.
셋째, 연대의 방식은 주로 유럽과 미국 등의 국가적 차원과 UN등 국제기구의 움직임이다. EU와 미국은 버마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으며, UN 인권위는 매년 결의문을 채택하여 국제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넷째, NGO들의 흐름이다. NGO들의 흐름도 여러 가지 갈래가 있으나 대표적인 그룹이 자유버마연대(Free Burma Coalition) 이다. 이들은 남아공의 아라파트헤드의 경험을 참조하여, 외국 기업의 버마 진출에 반대하면서 버마 진출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나아가 각 지방 정부가 버마와의 무역거래를 금지할 것을 조례로 정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방관하는 국제사회
1989년 사회주의 노선을 공식적으로 탈피하고 대외개방과 시장경제원리를 천명한 SLORC는 무역증진과 외국투자유치, 해외관광객 유치를 꾀하고 있다. 이는 정통성의 부재에 따른 국민들의 저항을 경제성장을 통해 무마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1997년에는 ASEAN에 가입하고 SLORC를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아시아 금융위기로 경제난은 악화되고 있으며, 일년에 3기작이 가능한 자연환경에도 불구하고 식량난이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군사정권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버마의 경제적 잠재력으로 인한 강대국들의 방관에 한 원인이 있다. 버마는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과 관광상품, 값싼 노동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자본의 진출이 미비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아시아의 마지막 시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시장진출을 위한 각국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버마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국유화되어 있고, 자본진출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군사정권과 거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외국자본의 진출과정에서 얻은 이익들이 군사정권 유지비용을 충당하는 주 자금원이다.
중국은 버마 군사정권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다. 경제적 원조 및 투자, 소비재의 수출, 그리고 무기지원에 이르기까지 버마 군사정권의 후원자 노릇을 하고 있다. 이는 버마 서쪽 해안을 이용하여 인도,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경제적, 군사적 이유, 천안문사태이후 서구의 인권문제제기에 대한 공동대응, 버마내에서의 경제적 이익의 증대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ASEAN은 각국의 상황에 대해 철저하게 불간섭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버마의 국내 인권상황에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경제교류의 강화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이 권위주의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버마의 후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인도등은 아웅산 수지의 민주화 노력에 대해 지지를 표하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 막대한 투자를 통해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실용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다. 현재 버마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EC등 서구 강대국이다. 하지만 버마로의 시장진출을 위해서 제한적인 압력만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목적은 중국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버마의 민주화 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자국에 유리한 정권을 설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웅산 수지는 이런 움직임에 대응하여 '경제교류와 관광은 민주화 이후에'라는 구호를 제기하고 있다. 현재 경제교류와 버마로의 관광은 버마 민중들에게 가혹한 군사통치를 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NGO들도 버마로 진출하는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여내고 있다.
3. 아시아 민중의 전략적 연대 – 평화, 인권의 전면화
식민지 시대와 냉전체제의 유산 : 권위주의 정권
버마의 근현대사와 한국의 근현대사가 식민지시기,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 민주화 운동 등의 비슷한 과정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식민지 시대와 냉전체제라는 세계적 조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의 과제는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고 식민지의 모순에서 벗어나 인권, 평화, 경제적 평등의 실현되는 자립 국가의 건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는 모든 계급, 계층과 정치세력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정치적 대결과 혼란은 숙명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버마의 종족과 이념분쟁, 한반도의 이념분쟁은 이러한 상황에 연유한 것이다. 또한 식민지의 저발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국가체제의 최고의 목표는 경제성장을 중심으로한 근대화 전략이다. 냉전체제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근대화 전략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의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었다. 또한 냉전체제로 인하여 강대국들의 패권을 강화되는 상황은 군사적 긴장을 높히고 각 국은 군사력을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버마는 사회주의와 친중국적인 비동맹 중립노선을 선택하게 되고, 한반도는 분단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남한의 친미적인 자본주의로의 길과 북한의 자주적인 사회주의로의 길도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버마와 한반도가 다소 상이한 (한국과 비교하면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지만 양자 모두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하기에 유리한 조건들이 창출되었다. 정치적 혼란의 극복, 경제발전, 냉전대결에서의 생존은 권위주의 정권이 등장하는 명분이 되었고, 강력한 군사력은 권위주의 정권의 물적 기반이 되었다. 버마와 남북한에 공통적으로 권위주의 정권이 등장한 상황은 식민지 시대와 냉전체제라는 세계체제의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계체제 틀 속에서 인식할 때, 버마, 남북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라오스, 대만 등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갔던 아시아 국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한 원인을 알 수 있다. 결국 식민지 유산의 청산, 평화·인권의 보장,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통한 자립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아시아 민중들의 열망은 식민지 유산과 냉전체제를 통해 억압당하였던 것이다.
설상가상 – 자본의 지구화와 미·중·일의 패권경쟁
식민지 지배와 냉전체제는 경제적 군사적 요구에 따라 인권과 평화를 파괴하는 체제였다. 이러한 세계체제의 모순은 아시아의 약소국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아시아는 현재까지 강대국들의 식민지 쟁탈전과 냉전체제의 유산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유지되고 있으며, 한국 역시 민주화되었다고 하나 권위주의의 잔재가 국가운영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시아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의 지구화와 미·중·일 강대국의 패권경쟁의 가속화이다.
현재까지 국제관계의 중심은 경제와 군사이다. 평화와 인권은 국제관계에서 부차적인 요소이거나 무시되는 요소이다. 버마에서 다른 국가들과의 경제관계가 군사정권을 유지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의 지구화는 미국등의 강대국과 초국적 자본에 의해 주도 되면서 전세계적인 경제적 자유권의 확대를 가속하고 있다. 경제적 자유권의 확대에 따른 평화와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질서는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경제력을 중심으로 한 미·중·일의 패권경쟁이 가속화됨에 따라 아시아 민중들의 열망이 왜곡되고 뒤틀릴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재 버마의 군사정권이 미국과의 패권 경쟁을 노리는 중국의 후원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가능성의 한 예이다.
아시아 민중의 전략적 연대
현재 아시아 민중들은 권위주의 체제의 완전한 청산과 자본의 지구화, 강대국의 패권경쟁에 대항한 평화와 인권의 확대라는 공통의 과제를 지니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과 자본의 지구화가 세계체제의 변동에 따라 발생한 것이므로 이의 해결 역시 세계체제적인 대응을 동반할 때 가능한 것이다. 평화와 인권의 보장을 위해서는 일국내에서의 노력과 함께 전세계적인 민중연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경제적 자유 중심의 세계질서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평화와 인권을 확장시키기 위한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 민중들은 전략적으로 평화와 인권을 위한 연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4. 결론 : 한국사회가 풀어가야 할 새로운 과제
한국의 진보운동은 그동안 국제연대를 소홀히 하였다. 이는 분단의 특수성에 대한 매몰, 단일 민족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의 지구화는 국제연대를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소로 만들고 있다. 또한 한국은 아시아 민중들과 평화, 인권을 위한 연대를 창출하기보다는 공격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제국주의적 속성마저 보이고 있다. 아시아 민중연대는 한국의 공격적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적 속성을 성찰하고 한국 내에 인권, 평화라는 가치를 확장시켜내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이다.
버마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는 한국 진보진영의 한계를 극복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버마의 인권상황개선과 민주화는 전세계적인 관심이며, 많은 NGO들이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사안에 동참함으로써 아시아에 폭넓은 연대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버마 민주화를 위한 적극적인 아시아 민중연대의 창출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특히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의 존재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사업을 보장할 수 있으며, 상호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버마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와의 연대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공격적 민족주의를 성찰하게 하는 좋은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