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힌두 원리주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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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국

Ⅰ. 들어가는 말

종교‧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분쟁을 탐구하려는 필자의 목표에 따라, 인도의 종교적 갈등에 관한 심층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인도에서 종교적 갈등의 뿌리를 이루는 ‘힌두 원리주의(Hindu Fundamentalism)'을 연구하는 게 본 논문의 핵심이다.

종교적 다양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힌두교에서 ‘Hindu Fundamentalism'과 같은 원리주의가 등장한 모순을 어떠한 관점으로 이해해야하는가? 본 논문은 이러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하여 ‘Hindu Fundamentalism'의 탄생과정, 종교‧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배경을 규명하는데 주력한다.

‘Hindu Fundamentalism'은 한갓 종교적인 현상이 아니다. ‘Hindu Fundamentalism'의 원인을 제공한 영국 제국주의 지배, 파키스탄과의 분리 독립, 세속주의 정치로부터 결별에 대한 사전연구 없이 ‘Hindu Fundamentalism'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가 어렵다.
이러한 사전연구를 하기에는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고 연구기간도 짧은 점을 고려하여 2차 자료를 중심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힌두교와 인도 사회에 대한 내재적인 접근을 통해 ‘Hindu Fundamentalism'을 분석하는 게 正道라고 생각한다. 힌두교의 精髓, 힌두교도들의 信心, 무슬림과의 갈등이 일어나는 사회‧정치‧경제적인 근원,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도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 등을 터득함으로써 비로소 내재적인 관점을 정립할 수 있다.

비록 본 논문에 내재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지만 나름대로 심층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反英 투쟁과정에서부터 ‘Hindu Fundamentalism'의 맹아가 내재한 점, 분리 독립 이후의 정치상황과 근대화 과정이 ‘Hindu Fundamentalism'을 증폭시킨 점을 부각시키려 했다.

그리고 ‘RSS 一家’에 대한 분석을 통해 ‘Hindu Fundamentalism'의 구조적인 측면을 다루었다. 특히 아요디야 사태가 발생한 현장에 육박하여 ‘Hindu Fundamentalism' 현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Ⅱ. 'Hindu Fundamentalism'의 개념 정립과 이해

1. 'Hindu'의 포괄성

‘힌두교’는 인도 고유의 종교이지만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종교와 문화 등 인도인의 생활 자체‧사고방식‧세계관이 힌두교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힌두교는 단순한 종교(religion)가 아니다.

힌두교가 한갓 종교가 아니므로 ‘힌두교’에서 ‘힌두(Hindu)'를 따로 떼어내서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하다. 힌두교를 이해하려면 먼저 ’Hindu'가 무엇인지를 규명해야한다.

‘Hindu'란 오늘날 파키스탄을 흐르는 인더스 강(산스크리트어로 Sindhu)의 명칭에서 기원을 갖는 페르시아어로서 ‘인더스 강 유역의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인도(인도 亞대륙)에 침입하여 온 이슬람 교도가 자신들과 종교를 달리하는 인더스 강 유역의 원주민을 ‘힌두’라고 불렀다. 이 말이 '인도인’을 의미하는 데까지 나아갔고, 이 것이 영어 등 유럽어에도 채택되어 힌두의 종교‧문화를 나타내는 ism을 붙여 ‘Hinduism'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힌두교’란 ‘Hinduism'의 우리말 해석이지만, ‘Hinduism'을 종교(힌두교)로만 규정하면 'Hindu' 'Hinduism'의 포괄성이 제약된다. 영어의 'Hinduism'에 정확히 대응하는 인도의 언어가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 'Hinduism'의 이해를 중심으로

힌두 교도 중에 자신들의 종교를 <사나타나 다르마(Sanātana-dharma); 영원한 法> 또는 <바이디카 다르마(Vaidika-dharma); 베다의 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으나,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힌두교(Hinduism)란 말은, 종종 ‘바라문교(敎)’와 구별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바라문교는 불교가 일어나기 전에 바라문 계급을 중심으로 베다 성전(聖典)에 기초하여 발전한 종교를 가리킨다. 힌두교는 기원전 6~4세기에 베다 문화의 틀이 붕괴되고 바라문교가 토착 민간신앙 등을 흡수하여 커다랗게 변모한 형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양자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광의의 ‘힌두교’라는 말을 쓸 때 바라문교도 그 안에 포함된다.

힌두교는 인도의 각지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힌두교를 의미하는 적당한 말이 인도의 여러 언어 속에 없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힌두교는 개개인에 의해 의식된 신앙의 체계라기보다 종교적인 관념‧의례와 융합된 사회 관습적 성격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Hindu Fundamentalism'을 이해할 때 이러한 힌두교의 성격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개종에 의해 힌두교도가 되는 게 아니라, 힌두교도의 자녀로 태어나는 게 힌두교도의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힌두교가 불교나 기독교 등의 세계종교와 달리 ( 유대교처럼) 민족종교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인도의 종파폭동(Communal riot)의 배후에 있는 ‘Hindu Nationalism’은 바로 ‘민족종교로서의 힌두교’의 속성에서 발원되며, 이러한 ‘Hindu Nationalism'은 ‘Hindu Fundamentalism'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힌두교는 복잡다양한 복합체이며, 이른바 ‘종교’라는 말의 의미를 일탈해 있다. ‘신(神)’ 또는 ‘절대자’를 통해 보더라도 힌두교는 일원론(一元論)이나 일신교(一神敎)의 요소도, 이원론(二元論)이나 다신교(多神敎)의 요소도, 무신론(無神論)도 그 안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복잡다양한 복합체인 힌두교 속에서 왜, 어떻게, 어떠한 경로를 통해 경직된 Fundamentalism이 배태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매우 복잡다기한 논리전개 없이 불가능하며 인도 사회 전체를 조망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인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는 시각이 없이 Hindu Fundamentalism을 단지 극단주의(fundamentalism)로 보면 곤란하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Hindu Fundamentalism'을 ‘힌두 원리주의’라고 부른다. 기독교 근본주의(Christian Fundamentalism; 미국 기독교 우익의 극단주의)의 ‘Fundamentalism'과 구분 짓기 위해서이다 류경희 교수는「힌두 근본주의의 대두와 세속국가로서의 인도」(『宗敎硏究』제10집,1994)라는 논문에서 'Hindu Fundamentalism'을 ‘힌두 근본주의’로 해석한다; 현재 Fundamentalism에 대한 역어로서 원리주의와 근본주의가 사용되고 있고 인도의 경우 Fundamentalism 성격을 나타내는 현상에 대하여 견해와 입장에 따라 Sectarianism, Communalism 그리고 Nationalism 등의 용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근본주의를 사용할 것이고 또한 힌두 민족주의와 힌두 근본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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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등이 배타적인 성격을 지닌데 비하여 본래의 힌두교는 포섭력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것을 흡수하여 성장해왔다. 따라서 힌두교는 극도로 발전한 철학체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원시적인 신앙‧주술까지 끌어들였다. 힌두교는 고도의 신학‧윤리 체계를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카스트(Caste) 제도나 아쉬라마(āśrama;生活期)를 비롯한 인간생활 전반을 규정하는 제도, 법제, 습속 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Hindu Fundamentalism’ 역시 카스트 제도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인도 사회의 각종 제도‧ 정치체제와 연결되어 있다. 인도의 정치 집단이 본래의 힌두교를 왜곡시켜 ‘Hindu Fundamentalism'을 부채질한 배후를 탐구할 때, 힌두교의 위와 같은 성격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힌두교가 종교라기보다 생활의 법(a way of life)으로 일컬어지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힌두교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Hindu Fundamentalism'을 분석할 때 인도인(인도의 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왜 이러한 원리주의가 나왔는지를 탐구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인의 삶 속에서 'Hindu Fundamentalism'의 요소를 발견하는 게 매우 중요함을 다시 강조한다(① 608~609쪽 참조).

3. Fundamentalism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Hindu' ‘Hinduism'을 중심으로 'Hindu Fundamentalism'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이제부터 ‘Fundamentalism’을 중심으로 ‘Hindu Fundamentalism'에 접근한다.

원리주의는, 성전(聖典) 등 그 종교의 권위 있는 원천에 근거를 둔 교의(敎義)나 규범의 형태를 그대로 단호하게 지켜 세속적 자유주의에 대항하려는 종교세력이나 그런 사고유형을 가리킨다. ‘원리주의’란 말은 1970년대 이후 이슬람 부흥세력에 대하여 사용되면서, 세계의 여러 종교에도 적용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현재 이슬람 원리주의(Islam Fundamentalism)는 이슬람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는 ‘정치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일부의 기독교도를 제외하고 ‘Fundamentalist'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당사자 중 일부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라기 보다 ‘이슬람 부흥세력’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으로서의 ‘Fundamentalism’이 여전하므로 '원리주의’란 말을 기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원리주의’라는 용법이 폭넓은 지지를 받을지 아닐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②-18).

R.E.Frykenberg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Fundamentalism은 다섯 가지의 ‘기반적(foundation)적’ 특징과 세 가지의 ‘기능적(function)'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 여기서 다섯 가지의 ’기반적(foundation)' 특징은 ① 진리 ② 메신저 ③ 공동체 ④ 운명 ⑤ 악이고 세 가지의 ‘기능적(functional)' 특징은 ① 급격한 개종 ② 부흥주의 ③ 분리주의이다. 힌두교 민족주의를 Fundamentalism의 다섯 가지 기반에 적용해보면 ① 진리-Hindutva ② 메신저-사바르카르와 그 후계자인 헤드게바‧골왈카 ③ 공동체-힌두 민족(Hindu Rashtra) ④ 운명-람 라지야로의 필연적인 회귀 ⑤ 악-힌두 문화를 오염시키는 이질적이고 유해한 불순물들 곧 외부적인 요소들이다(Ⓐ-53쪽).

Frykenberg는 이처럼 Hindu Fundamentalism과 힌두교 민족주의가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Hindu Fundamentalism은 경전의 자리에 ‘성스러운 탄생’ ‘성스러운 땅’을 대신 놓음으로써 Hindu Nationalism을 강조한다.

한편 원리주의를 판별하는 기준 중 하나는 ‘세속주의(secularism)'에 대한 태도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 각지에서 사회생활 가운데 종교적 요소를 강화하려는 종교세력의 움직임이 돋보인다. 사회생활을 종교적 요소와 세속적(비종교적) 요소가 다투는 장(場)으로 파악할 경우 후자의 요소를 축소하고 전자의 요소를 확대하려는 움직임 가운데에서 ‘원리주의’가 탄생한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제도의 원칙 중 하나인 정교(政敎)분리에 대하여 부정적이며 공적생활에 종교의 영향이 미치는 것을 시인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여기에서 원리주의가 한갓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움직임‧사회제도(사회체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위와 같은 경향은 이슬람‧유대교‧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보이고 있으나, 힌두교‧불교 등의 종교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공적 영역을 포함한 사회생활의 넓은 범위에 걸쳐 세속적 생활의 축소와 종교적 생활의 확대를 요구하는 사고방식‧주장을 ‘반(反)세속주의로서의 원리주의’라 부를 수 있다(②-18).

이와 같은 원리주의와 세속주의의 다툼은 인도의 현대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으며 인도의 각종 종교분쟁의 원인 제공자가 되고 있다. 그러면 ‘힌두 원리주의(Hindu Fundamentalism)'을 명백하게 이해하기 위해 인도의 현대사에서 나타난 ’세속주의와 원리주의의 다툼‘을 소개한다.

4. ‘원리주의와 세속주의의 다툼’

세속주의로 번역되는 ‘secularism'은 일반적으로 신교(信敎)의 자유를 기초로 한, 종교에 대한 국가의 중립성‧불개입(不介入)이나 국가에 의한 특정종교의 우대 금지 등을 의미한다. 정치(국가운영)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점에 착목하면 정교(政敎) 분리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다.

남아시아에서 파키스탄‧방글라데시의 이슬람, 스리랑카의 불교 등 종교를 국가운영의 기본적인 이념으로 하는 나라가 많으나 인도는 이런 나라들과 대조적으로 ‘secularism'을 내걸고 있다. 인도의 세속정치(정교 분리주의 정치) 아래에서 성장한 인도의 ‘Hindu Fundamentalism’과 세속정치가 뿌리내리지 못한 파키스탄의 ‘Islam Fundamentalism'은 양자가 모두 'Fundamentalism'이지만 내용에 있어서 사뭇 다르다.

인도 헌법은, 그 전문에 인도가 세속국가(secular state)임을 선언하고, 본문에서도 신교(信敎)의 자유(25조)를 비롯하여 종교에 관련된 사무관리의 자유(26조), 특정종교를 포교하기 위한 과세금지(27조) 등의 규정이 있다.

인도에서 세속주의는 고유한 뜻을 갖는다. 서구에서 세속주의는 종교에 대해 무관심할 정도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고 反종교적이라는 함의도 갖고 있으나, 인도에서 세속주의는 이런 의미보다는 인도에 있는 모든 종교들에 대해 평등하게 지원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전자를 엄격한 중립성(strict neutrality)에 기반한 세속주의라 한다면, 후자를 우호적 중립성(benign neutrality)에 기반한 세속주의라 할 수 있다(Ⓐ-36쪽).

인도가 세속주의를 국시(國是)로 한 것은, 국내에 많은 종교가 존재하여(힌두교도 약 8할, 이슬람 약 2할 등), 국가가 특정 종교를 편들면 국민통합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관용을 주장해온 간디의 정신(Gandhism)을 이어받은 국민회의(INC; Indian National Congress)가 집권하면서부터 세속주의 원칙을 확고하게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힌두교도가 다수라고 해서 특정종교(힌두교)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종파주의(Communalism)를 펼치면 국민통합이 불가능해진다.

한편 국가가 세속주의에 따라 각 종교를 평등하게 취급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수파인 힌두교도 가운데 ‘무슬림 등의 소수파를 부당하게 대우한다’는 불만이 누적되면서 ‘Hindu Nationalism'이 강화되고 인도에 힌두국가(Hindu Nation)를 세우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여론을 규합한 인도 인민당(BJP; Bharathiya Janata Party)이 힌두교도의 이런 불만을 끌어들여 힌두교‧힌두교도 옹호의 슬로건을 내걸고 1990년대에 약진했다.

BJP는 1999년까지 3차례의 연립정권을 주도하고 있다. BJP의 이념은, 정교 일원화(政敎一元化)를 강조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원리주의(Hindu Fundamentalism)의 측면이 강하므로, BJP의 집권은 인도의 세속주의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① 400~401쪽 참조).

인도에서 세속주의와 Hindu Fundamentalism 사이의 갈등을 거론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세속주의에 대한 평가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네루의 시대에 세속주의는 ‘시대의 정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보편성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 종교 민족주의자들이 보기에 세속주의는 기독교의 산물이며 서구의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는 서구에나 적용될 수 있는 특수한 것이고 이에 대한 강요는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본다(Ⓐ-39쪽).

따라서 Hindu Fundamentalism이 비판하는 세속주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비판의 논점이 네루시대의 국민통합형 세속주의에 있지 않고, 인디라 간디 정권 이후 INC 정치의 타락상을 뒷받침한 세속주의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인도에서 세속주의와 Hindu Fundamentalism간의 갈등관계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말고 시대 상황에 따라 매우 역동적으로 접근해야하는 게 바람직하다.

5. 힌두‧무슬림 분쟁의 뿌리

1) 분쟁의 원인에 관한 견해

1947년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인도는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인도(힌두 중심의 사회)‧파키스탄(이슬람 국가)으로 분리독립한다. 1947년의 분리독립은 거의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힌두‧무슬림 분리는 왜 일어났는가? 1947년 분리독립 이후 끊임없이 발생하는 힌두‧무슬림 분쟁의 역사적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관하여 3가지 대표적인 견해가 있다(⑤-2쪽).

첫째, 힌두와 무슬림의 공동체(community)간의 갈등이 종교분쟁의 뿌리를 이룬다는 견해이다. 분쟁의 ‘내부 요인설’쪽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Qureishi(③)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인도 亞대륙에는 기본적으로 힌두와 무슬림이라는 두개의 공동체가 있다. 이 두개의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인도 땅’ 주민의 주류이므로 두 공동체의 다툼이 종교분쟁으로 쉽게 번지며 한번 분쟁이 발생하면 매우 심각한 갈등 양상을 보인다.

이 견해는 파키스탄의 대표적 의견이며, community를 원초적(primordial), 자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사람은 태어난 토지나 종교‧언어‧사회관습‧문화에서 이끌어낸 ‘애착’을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 이 것이 ‘ethnicity', 나아가서는 국민의 핵을 이룬다(⑥-102쪽).

이러한 사고방식은 ‘두 국민(two nation)설’로 이어진다. ‘두 국민설’이란 힌두와 무슬림은 각각 국민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는 사상으로, 1940년 ‘인도 무슬림 연맹’의 라호르 결의 대회 이후 급부상한 뒤 인도‧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가져온 생각이다.

둘째,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독립한 것은 영국의 분할통치의 결과라는 견해이다. 분쟁의 ‘외부 요인설’에 가까운 것이다.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를 분할통치하기 위해 ‘인도 무슬림 연맹’ 등을 육성하여 (인도의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과의) 갈등을 유발한 끝에 분리독립하게 되었다. 본래 무슬림은 인도의 외래(外來) 정복자로서 힌두사원의 파괴‧ 강제적인 개종(힌두교도의 이슬람에로의 개종) 등 힌두교 억압정책을 실시했다. 따라서 인도 땅의 주인이라고 생각해오던 힌두교도들의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 체화(體化)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도 땅을 지배했던 무슬림이 ‘또 다른 외래 정복자’인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하지 않고, 영국의 분할통치 정책에 빠져 ‘인도 무슬림 연맹’을 만듦으로써 분리독립의 큰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외래 정복자이었던 무슬림이 인도의 통일에 역행함으로써 인도의 분열에 앞장섰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간디(M.K. Gandhi)는 반드시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지 않으나, 인도 땅의 많은 민족이 독립운동 속에서 통합되어 하나의 국민이 될 수 있었는데 ‘인도 무슬림 연맹’ 등 무슬림쪽의 판단착오로 통일의 계기를 상실했다고 보았다(④-32쪽).

위의 주장은 인도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의견이다. ‘무슬림=영국의 앞잡이’설의 난점은, 다수파=힌두에 걸맞게 자기변호하는 경향이며, 영국 통치가 끝난 지금도 일어나는 분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게 다소 곤란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주장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헌데 이 주장을 넓게 생각하면 community‧ communal(종파) 분쟁을, 권익에 얽힌 사람들 즉 무슬림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도구설(道具說) 또는 정치제도설로 볼 수 있다(⑥-102~103쪽).

셋째, 인도 국민회의(INC)의 행태가 서툴렀기 때문에 파키스탄이 생겨났다는 견해이다. 즉 ‘국민회의 책임론’이다.

2) 분쟁의 원인 제공자

힌두‧무슬림 분쟁의 역사적 원인을 에워싼 논란이 있으나, 영국 제국주의가 분쟁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이며, 간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인도 국내의 정치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기 이전에 힌두와 무슬림은 공존했다. 인도 땅에서 힌두와 무슬림은 오랜 세월 동안 공존해왔으며, 지금도 인도의 도시지역을 제외하면 두 종교가 평화공존하고 있다. 인도 민중 사이에서 별 불편 없이 공존해왔던 두 종교의 공존구도가 깨진 것은 정치가 종교에 개입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영국 제국주의의 정치가 인도를 분할통치하기 위해 인도의 종교를 정략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오늘날의 사태를 예비했다.

6. 힌두‧무슬림 분쟁의 역사적 연원

1) 19세기 후반의 상황

인도‧파키스탄 분쟁을 힌두‧무슬림의 2者 대립으로 보는 견해는 단견이다. 그러므로 Hindu Fundamentalism 역시 힌두‧무슬림의 2者 대립항(對立項)이 아니라 다자(多者) 대립항을 중심으로 바라보아야한다. 힌두‧무슬림의 2者 대립으로 보기 어려운 점을 아래에서 설명한다(⑥-104~113쪽 참조).

① 힌두‧무슬림 분쟁은 2者 대립이 아니다

ⓐ 무슬림 내의 대립; Aligarh파(근대 개량주의자) 對 Deoband파(복고파)

일반적으로 힌두‧무슬림 분쟁의 당사자인 무슬림과 힌두가 자기 진영내는 단결되어 있다. 그러나 무슬림 안에서도 분파가 많으며 힌두 사회 안에서도 분파가 많다.

먼저 무슬림쪽의 상황을 설명하면, ‘무슬림’도 한줄기가 아니라 다양하다. 계층적으로 말하면 상층 무슬림은 예전의 지배층인데다 ‘복고주의에 들뜬’ 하층이 많이 존재하며, 중간층이 대단히 얇은 게 인도 무슬림의 특징이다. 사상적으로 보아도 무슬림은 크게 복고주의자들의 Deoband파와 근대파인 Aligarh파(개혁파)로 양분되었다.

Aligarh파는 근대화에 뒤늦은 무슬림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받게 하자는 사이이드 아프마드 한(1815~1898)에 의해 시작된 운동이다. 이 운동은 그 이후에 결성된 ‘인도 무슬림 연맹’과 함께 (힌두의 대표들이 많이 모인) 국민회의에 대항함으로써,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인도 북부의 알리가르(Aligarh) 대학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인도 무슬림을 지도하는 많은 지식인과 정치가를 배출했다. 1905년 벵갈 분할령 반대운동을 계기로 알리가르 대학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정당결성을 시도했다. 또 킬라파트(Khilāfat) 운동(1차대전 이후 영국의 터키 정책 특히 이슬람 국가 최고주권자인 칼리프의 폐지를 에워싸고 ‘칼리프 옹호를 내건 인도 무슬림의 영국 반대 투쟁) 때에도 알리가르 대학은 지도적 위치에 섰다.

Aligarh파는 전술적으로 영국에 저항했으나 전략적으로는 영국에 협조했다. Aligarh파의 원조인 사이이드 아프마드 한은 상층 무슬림을 대표했다. 그는 영국 통치에 충실한 것이 무슬림의 교의에 합치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하여 Deoband파는 영국 총독부에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라고 주장함으로써, 영국 지배체제에 저항해온 힌두 쪽의 국민회의와 공감대를 형성했다.

무슬림 내의 이러한 대립은 힌두에 대한 노선의 차이로 나타났다. 즉 Deoband파는 힌두측과 협조하는 한편 Aligarh파는 국민회의를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당시 무슬림이 인도 인구의 20%를 차지하는데도 국민회의의 당 대회에서 무슬림의 지분은 7%에 불과한 점도 반발을 초래했다). 무슬림 내의 노선차이(Deoband파의 ‘反영국-親힌두 경향 對 Aligarh파의 親영국-反국민회의(힌두) 경향’ 은 힌두‧무슬림의 근본적인 대립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이런 복잡한 대립항의 핵심을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국민회의를 에워싸고 무슬림쪽의 Aligarh파가 힌두 쪽의 Hindu 복고파와 맞서는 꼴이다. 그럼 먼저 국민회의 對 Aligarh파의 대립관계를 기술한다.

ⓑ 힌두‧무슬림의 대립; 국민회의 對 Aligarh파

국민회의의 지도자인 간디는 힌두‧무슬림의 통일을 부르짖었으나 Aligarh파의 창시자인 사이이드 아프마드 한은 ‘힌두‧무슬림의 통일은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이러한 대립이 왜 나타났는지를 설명한다.

1885년에 출범한 인도 국민회의(INC)는 맨 처음에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영국에 내놓았다; 중앙 및 주 입법참사회에 인도인민 선출의원을 참가시키거나 그 숫자를 늘릴 것, 입법 참사회가 행정부에 간섭할 권한을 부여할 것, 영국에서 이루어지는 인도 고등 문관시험에 인도인을 더욱 많이 합격시킬 것 등이었다.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힌두교도가 영국의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는 숫자가 늘었으나 무슬림은 그렇지 않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사이이드 아프마드 한은 ‘근대화에 뒤진 무슬림에게 근대교육을 시켜야한다’는 Aligarh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사이이드 아프마드 한은 그 뒤 대반란에서의 패배를 경험하면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버리고 영국과 타협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모두 경전(經典)의 民으로서 유사하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도인 영국을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것이 ‘두 국민설' 즉 힌두의 Nation과 무슬림의 Nation은 분리독립 되어야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사이이드 아프마드 한이 무슬림 분리주의의 대표자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힌두와 무슬림을 인도라는 신부(新婦)의 아름다운 두 눈동자‘로 비유함으로써 두 community의 공존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바로 이 것이 인도‧파키스탄의 분쟁을 2분법(2항 대립)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미묘한 지점이다.

ⓒ 힌두 내의 대립; 국민회의 對 Hindu 복고파

국민회의가 이른바 근대적 의회주의를 통하여 인도인의 권리확장‧인도인의 자치를 겨냥한데 비하여 힌두 복고파는 다를 길을 걸었다. 힌두 복고주의로 연결된 아리야 사마지(Ārya Samāj; 아리야 협회)가 1875년에 봄베이에서 설립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리야 사미지는 근대 인도에 있어서 힌두 개혁운동 단체의 하나이다. 서구 열강의 압력과 기독교 등의 종교사상 유입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져, 19세기에 각종 복고주의적인 종교개혁 운동(힌두 복고주의 운동)이 인도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아리야 사마지 역시 일익을 담당했다.

아리야 사마지의 슬로건은 ‘베다로 돌아가라’이다. 베다 이야말로 진리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복고주의라 하더라도 편협한 바라문 지상주의가 아니라 (옛날에는 상위 세 계급의 남자에게만 허용되었던) 베다의 학습을 모든 계급의 남녀에 인정하고, 계급제도‧유아혼(幼兒婚)‧남녀차별을 부정했다.

아리야 사마지의 이러한 복고주의는 근대적 의회주의를 지향하는 국민회의와 적지 않은 갈등을 낳았으며 국민회의로 하여금 진퇴양난(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국민회의의 딜레마는, 근대 유럽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동시에 영국에 대치해야하는 세력‧가치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인도인의 정체성(identity)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를 에워싼 딜레마이다. 아리야 사마지가 ‘베다로 돌아가라’며 인도인의 힌두적인 정체성(이후에 ‘Hindutuva’로 정리됨)을 밝혔기 때문에, 국민회의가 복고파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근대 유럽의 의회주의를 도입해야하는 매우 좁은 선택만이 남아 있는 딜레마이다.

문화‧종교를 통한 인도인의 정체성 확립을 무시하고 엘리트 중심의 국민회의 노선을 지속하면 곤란하다. 민초들의 민족감정‧애국심을 환기시키지 않으면 대중들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체성을 힌두주의(Hinduism)에서 구하여 힌두화하면 동반자인 무슬림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모순이 생긴다. 바로 이 것이 국민회의의 딜레마이자 복고주의와의 대립 지점이다.

2) 20세기 전반부(독립운동 시기)

① 국가‧국민‧민족의 문제

19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형태로 영국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community별의 선거를 통한 행정권의 몫을 획득하는 경쟁, 지방의 이해 충돌을 수반했다. 그것을 통해 국가의 형성, 국민의 형성이라는 과제가 인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민족운동은 불가피하게 인도인이 스스로의 정치적인 정체성을 추구했다. 지방의 이해에 기초하여 중앙이 움직이므로 국민회의와 아리야 사마지의 전국조직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직은 인도 대륙의 통일된 자기의식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어 국민의식(nation) 형성으로 이어졌다(⑥-112쪽).

영국의 분할통치 지배정책 아래에서 ‘국가’‧‘국민’의식이 성장하면서 민족운동이 전개된 인도의 독특한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민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미래의 국가(영국으로부터 독립된 인도)에 대한 귀속감이 주도세력간에 일치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점도 생각해야할 것이다. 미래의 국가에 대한 귀속감이 덜한 무슬림이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낀 나머지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 대열에서 벗어난 것이 1947년 분리독립의 불씨가 되었다.

인도에서 국가의 형성, 국민의 형성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 과정에서의 ‘소외(무슬림의 소외의식) 현상’이 힌두‧무슬림 문제를 야기했으며, 오늘날 힌두‧무슬림 양쪽의 원리주의(Hindu Fundamentalism, Islam Fundamentalism)를 잉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② 민족운동과 힌두‧무슬림 문제

ⓐ 1920년대 힌두와 무슬림의 제휴

인도에는 수많은 community가 있지만 대표적인 통일조직이 없는 점이 영국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통일을 결코 장려하지 않았다.

제국주의적인 분할통치의 명수인 영국은 기본적으로 힌두와 무슬림이 갈등하는 구조 속에서 카스트간 계급대립을 입체적으로 가미하는 고도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인도의 통일을 가로 막았다. 이를 위해 영국 협력자 계층을 필요로 했는데, 대지주‧무슬림‧불가촉 천민을 차츰 협력자로 끌어들여 육성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에 따라 인도 사회의 분열이 가중되었다. 영국 제국주의는, 기존의 종교분열(힌두‧무슬림 대립)에 계급분열(카스트 간 분열)을 복합적으로 뒤섞어 도저히 Nation의 통합(인도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 20세기 들어서 인도의 독립운동(민족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국민회의의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1919년 ‘나는 생애를 바쳐 두 가지 일을 하겠다. 하나는 힌두와 무슬림의 영구적인 통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티야그라하’라고 밝혔다.

간디가 인도에 귀국한 이듬해인 1916년 말에 ‘힌두‧무슬림간의 라크나우 협정’이라는 일종의 선거협정이 체결되는 한편, 이슬람 복고파가 정치의 무대에 재등장했다. 이윽고 제1차대전 이후의 킬라파트 운동 때에는 무슬림과 힌두간에 협력관계가 두드러졌다. 모처럼 힌두‧무슬림의 공존시대가 열린 것이다. 1919년 델리에서 힌두‧무슬림의 공동집회가 열렸다.

1920년 10월 무슬림의 지도자인 마우라나 마프무드 하삼은 무슬림 지도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⑦-7); * 이슬람과 무슬림의 최대의 적은 영국 지배자이다. 영국 상품 불매운동이 무슬림의 의무이다. * 만약 인도의 형제들이 무슬림 community(Millat)를 지키고 킬라파트에 협력한다면 간디의 지도방침을 수용하겠다. * 종교적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한 인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 형제(힌두)와 협력하면서 민족적 통일을 도모할 수 있다.

이처럼 무슬림의 킬라파트 운동과 간디의 사티야그라하가 서로 제휴하게 되었다.

ⓑ 힌두‧무슬림 제휴에 대한 반발

무슬림의 킬라파트 운동과 간디의 사티야그라하가 서로 제휴하게 되자 힌두 복고주의 쪽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1909년 아리야 사마즈의 펀잡 지방 지도자들은 최초의 정치적 힌두 공동체 단체인 펀잡지방 힌두협의회(Punjab Provincial Hindu Sabha)를 세웠다. 이들은 특별히 힌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표방하였으나 초기에는 큰 영향력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무슬림들과 협력하며 반영(反英)운동인 킬라파트 운동에 참여한 1920년대 초에 새로운 ‘복고주의 활성화’ 요구가 있었다. 이 같은 협력이 일부의 힌두들에게는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곧 킬라파트 운동에 대한 협력이 호전적인 무슬림 공동체(무슬림 리그; Muslim League)를 인정한 것이라고 본 이들은 위협감을 느꼈고, 이에 대해 힌두의 일치와 강함을 보여줄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펀잡 지방 힌두 협의회는 1915년에 범(汎)지역 힌두 협의회(Sarvadeshik; pan-regional Hindu Sabha)로, 그리고 1921년에는 전인도 힌두 대협의회(All-India Hindu Maha-sabha)로 이름을 바꾸면서 복고주의 활성화의 요구를 수용하였다(Ⓐ-19쪽).

7. 인도에 있어서 민족주의‧민족의 의미
—-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에 관하여

1) 힌두 복고주의와 상가단 운동의 계보

통칭 HMS(Hindū Mahā Sabhā)로 불리는 위의 단체는 Hindu Fundamentalism의 맹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 이 단체가 표방하는 힌두 복고주의의 계보에 대하여 알아본다(⑥-122~127쪽 참조)

19세기말부터 인도 민족주의 과정에서 생겨난 움직임 중에서 ‘상가단(힌두의 純化‧통합 강화)’운동이 있었다. 상가단은 ‘인도가 무슬림 세력‧영국에 쉽게 침략‧정복된 원인이 힌두 사회 자체의 취약성‧조직력의 결여에 있으므로 사회의 각종 폐단의 극복을 통해 조직화함으로써 외세에 대항하자’는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초반기의 상가단은 옛 인도문화의 순화‧인도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매개했으나, 종교‧사회개혁적인 측면과 민족주의적(national) 감정의 발로라는 측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또한 여기에는 ‘힌두 복고주의’의 색채도 강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틸락(Tilak) 등이 있었다. 이들은 힌두 사상을 안받침한 강렬한 민족주의 사상을 강조하며 선전했다.

이와 더불어 아리야 사마지(아리야 협회)도 ‘힌두교에로의 재개종(再改宗)’ 운동을 전개하면서 급진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추진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처럼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힌두 사회내의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내향적(內向的)으로 그 공격의 화살을 무슬림 사회로 돌리는 완고한 복고주의가 강화되는 한편, 외향적(外向的)으로 강렬한 민족주의 사상을 낳았다.

이렇게 종교 원리주의(fundamentalism)와 민족주의가 결합 민족이 ‘근대’에 의해 유린‧침식당하면서도 그 민족의 생활감정(ethos) 속에 고유의 문명적인 ‘원리’를 의식함으로써 ‘근대’를 초월한다. 그리하여 원리주의가 Nationalism을 앙양시키는 역할을 하는 가운데 원리주의와 Nationalism의 연결이 이루어진다. (②-10쪽 참조).
함으로써 종교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발전한 민족주의 틸락(Tilak)이 사용한 반영적(反英的)인 성격의 띠는 힌두신 Ganesh 축제와 반 무슬림 성격을 띠는 Shivaji 축제, 그리고 힌두 부활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암소학살 반대운동의 전개와 애국심의 고취를 위한 Durga나 Kali 여신에 대한 숭배를 신성한 모국 인도에 대한 헌신과 동일시하는 Bharat Mata(신성한 어미니 인디아) 개념의 사용 등이 그 예들이다(Ⓒ-216쪽).
는, 그 당시 아랍권과 아시아(한국 포함) 등에서 드높았던 반제국주의적인 민족주의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 규명되어야할 것이다. 당시 인도에도 영국 제국주의의 횡포가 극심했으므로 ‘힌두 복고주의 단체’들이 영국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전개했느냐에 따라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힌두 민족국가(Hindu Rashtra)'는 주창했지만 ‘반제(反帝)‧반영(反英) 민족주의’를 제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항적(세속적)인 민족주의가 아닌 종교적 민족주의로 보아야할 것이다 원리주의와 Nationalism의 결합이 혁명을 지향하는 경우가 있으며 ‘보수적인 민족 egoism'을 지향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이슬람의 혁명세력에서 나타나며 후자는 인도 Hindu Fundamentalist들의 퇴행적인 모습에서 나타난다(②-1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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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측면에서 ‘Hindu Nationalism'이란 용어는 힌두 원리주의(Hindu Fundamentalism)이란 프리즘을 통한 민족주의 즉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으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보편적인 민족주의가 세속적(secular)인데 비하야 인도 특유의 ’Hindu Nationalism'에 원리주의적인 요소가 강하므로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으로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secular nationalism'의 요소가 박약하므로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이란 명칭을 부여하고자 한다.

또한 기독교에 의해 공격받는 힌두이즘을 부흥시킴으로써 힌두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창립된 ‘아리야 협회’가 급진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으므로 'fundamentalistic 힌두이즘은 베다에 이미 모든 가르침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서양의 가치들로부터 배울 만한 것이 없다. 베다만이 자기명증적인 진리이고 절대적 권위를 가졌으며, 여기에 神이 모든 것을 한 번에 계시한다.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듯하다.

따라서 Hindu Fundamentalism과 ‘Hindu Nationalism'이 유사하다거나 양자택일(Hindu Fundamentalism 대신 Hindu Nationalism을 선택하는)이라고 보는 태도는 안일하다. 또 당시 인도인‧인도 진보세력의 염원이었던 반제‧반영 운동에 소극적이었던 Hindu Fundamentalism 계열 단체들에게 ‘대문자로서의 Nationalism'이란 월계관을 씌워주기 어렵기 때문에, 소문자 ‘nationalism'을 병기하여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이라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Hindu교의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서양의 문물(기독교 포함)과 영국의 지배체제에 저항하려는 요소(주로 선거제도의 개선을 통한 저항)가 있었기 때문에 ‘nationalism’을 병기할 필요는 있다. 필자가 보기에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의 취약점은, 힌두 복고주의 단체들이 (반제‧반영 민족주의 투쟁을 열심히 전개한) 간디의 영토적 범 민족주의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만을 놓고 볼 때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은 민족주의이기는 커녕 '반(反)민족주의'라고 불러야할 것이다. 힌두 원리주의 세력은 식민정부에 협조하면서 노동자‧농민운동(토지개혁)에 반대했기 때문에 반민족주의라는 낙인을 찍을 만하다.

‘Hindu Fundamentalism'과 관련하여 거론되는 ‘Hindu Nationalism'의 이러한 가치전도 현상에 주목하면서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을 검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이란 조어에 대한 논란은 ‘Hindu Fundamentalism이 강한 인도에 있어서 민족주의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 인도에서의 민족주의

말릭(Malik)은 인도의 민족주의에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강조한다. 인도 민족주의(Indian Nationalism)와 힌두교 민족주의(Hindu Nationalism)가 그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개된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주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세속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후자는 서구적 가치에 자극받아 힌두의 경전을 재해석하고 사회개혁 운동을 펼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비베카난다(Vivekananda), 오로빈도 고쉬(Aurobindo Ghosh) 등을 선각자로 본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이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힌두교 민족주의자들과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 뿌리로서 소급해 볼 뿐이다(Ⓐ-13쪽).

3) Hindu Fundamentalism-Hindu Nationalism-Indian(secular) Nationalism의 관계

일반적으로 Hindu Fundamentalism과 Hindu Nationalism을 혼용하거나, 동일한 현상이 원리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나타내면 Hindu Fundamentalism이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나타내면 Hindu Nationalism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Hindu Nationalism의 대칭개념으로 secular Nationalism을 언급하므로 이 3자 관계를 정립하는 게 중요하다.

위의 3자 관계에서 몇 가지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첫째, 원리주의(Fundamentalism)가 Nationalism을 선도하는가? 원리주의가 Nationalism의 상위개념인가 상보적인 개념인가? 둘째, 원리주의가 Nationalism의 상위개념이 아니라면 원리주의(인도의 경우 Hindu Fundamentalism)와 종교 Nationalism(인도의 경우 Hindu Nationalism)은 호환적(互換的)인가? 셋째, Hindu Fundamentalism과 Hindu Nationalism이 호환적이라면 Hindu Nationalism과 세속적인 Nationalism(Indian Nationalism)은 상반적(相反的)인가?

첫째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종교 Nationalism의 상위개념으로 원리주의(Fundamentalism)를 내세우는 것에 대한 반대론이 강하다. 오히려 ‘원리주의’가 차별어(差別語)이거나 문명충돌론의 도구로 이용되는 측면이 강하므로 ‘Hindu Fundamentalism’ 대신 ‘Hindu Nationalism'을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원리주의(Fundamentalism)’의 타당성에 반대하는 Juergensmyer는 ‘Fundamentalism이 아니라 ’종교 Nationalism'을 사용할 것을 제언했다 Juergensmyer가 Fundamentalism을 부적절한 용어라고 지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Fundamentalism은 기술적(記述的)이라기보다 ‘비난을 동반한 경멸적인 용어’이다. 둘째, Fundamentalism은 통문화적(通文化的)으로 비교하는 범주로서는 엄밀함이 결여되어 있다. 셋째, ‘누구를 Fundamentalist로 부를까’가 사회 및 세계의 본질에 관한 폭 넓은 관심에 의해 동기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인 신조만으로 동기 지워진다. 즉 정치를 포함하지 않는다(⑧-15~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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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Nationalism과 종교 Nationalism을 ‘질서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는 Juergensmyer는 ‘세계를 수미일관한, 관리 가능한 태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가 잠재적인 라이벌이라고 말한다. ‘세속-종교의 2분법적인 대립구도에 있어서 새로운 정치적 종교현상’을 설명하려는 그의 관점에 따르면, Hindu Nationalism과 세속적인 Nationalism(Indian Nationalism)은 상반적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3자 관계를 종합적으로 관찰하면서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이라는 조어를 만들었다. 원리주의의 요소가 강한 Hindu Nationalism이므로 세속적인 Nationalism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fundamentalistic'이라는 규정을 덧붙였다. 또 이런 조어를 사용함으로써 ‘Hindu Fundamentalism과 Hindu Nationalism의 호환성’도 강조하려고 했다. 필자는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Hindu Fundamentalism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려고 한다. 그러면 인도의 현실 사회에서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이 구현된 경과를 통해 필자의 관점의 타당성을 검증해본다.

4)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과 HMS

앞에서 기술한 ‘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의 모태는 아리야 협회‧ HMS 등이며 극적으로 발전된 형태가 RSS(Rashtriya Swayamsevak Sangh; 민족의용단, 민족 봉사단)이다. 그러면 HMS가 어떤 경로를 거쳐 RSS로 발전했는지를 살펴본다(⑥-124~129쪽 참조).

1905년의 벵갈 분할(영국 제국주의가 종교적 척도를 기준으로 벵갈을 두개로 분할), 1906년의 ‘인도 무슬림 연맹’ 결성은 힌두 세력에게 위기의식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의 극복방안으로 1907년 ‘펀잡 힌두연합’이 창립되는데 이어 1915년 ‘힌두 대협의회(HMS)’가 결성된다. 힌두의 종교와 민족주의의 결합을 내건 HMS는 초기에 국민회의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1916년의 라그나우 협정(무슬림 분리선거제 용인) 등에 불만을 나타낸 HMS는 이윽고 1920년대 후반부터 국민회의로부터 이탈한다.

HMS는 1922년경부터 아리야 협회와 더불어 강제적인 재개종 운동에 뛰어든다. 그리고 이 시기에 힌두 상가단(조직화) 운동에 사상적 기반을 부여한 대표적 인물로 사바르카(Vinayak Damodar Savarkar; 1883~1966)의 이름이 거론된다.

사바르카는 틸락(Tilak)의 제자이다. 틸락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의 힌두 원리주의 운동은 ‘급진적 이념과 혁명적 방법론을 지닌 호전적인 민족주의’ 형태를 지니게 되는데, 이는 틸락이 주도했던 힌두 민족주의 운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틸락은 힌두 민족주의의 주요 이념 제공자로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Bhagavad Gita』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기타가 종교적인 행위는 물론 정치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고 강조하고 정의로운 이유로 행하는 폭력은 도덕적으로 정당함을 시사했다. 틸락 등 급진파의 이러한 폭력적 테러리즘은 급진파가 의회 장악에 실패하여 1907년 의회가 균열되고 이후 약 10년간 그들 지도자의 대부분이 투옥, 추방 또는 은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입증해 주었다. 결국 힌두 원리주의 운동은 틸락 등의 급진주의자들의 영향으로 급진적 이념과 혁명적인 방법론을 지니는 호전적인 민족주의의 형태를 취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20년 틸락의 사망과 의회가 간디의 지배 하에 들어감에 따라 급진주의자들의 전성기는 끝을 맺게 된다(Ⓒ-217~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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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Hindutva' 개념의 등장

사바르카는 청년기에 ‘신생 인도협회’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혁명적인 지사들과 접촉하면서 급진적인 테러리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의 제자의 영국인 암살과 관련하여 안다만에 투옥(유폐)되면서 그의 사상은 바뀌었다. 옥중에서 킬라파트 운동‧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반대하는 한편 영국에 대하여 ‘순응적인 협력’하는 자세로 전환한 것이다. 그 뒤 감형되어 고아 북쪽으로 이동되어 지내는 동안 집필한 책이 그의 대표작인 『Hindutva(힌두의 본질)』이며, 이 책에 그의 ‘상가단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사바르카에 따르면 Hindutva란 ‘힌두교도가 의지해야할 근본적인 원리로서 이른바 힌두 다르마(Dharma; 法), Hinduism보다 광범위한 의의를 지닌다. 그가 말하는 ‘Hindu'는, ‘인도(힌두스탄)에서 삶을 향유하고, 인도를 조상 전래의 땅‧ 성스러운 땅으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공통의 피에 의해 결합된 하나의 민족(rashtra)’을 구성한다(⑥-123~125쪽).

HMS의 이념은 Hindutva와 Hindu Rashtra(Hindu Nation)를 그 기본개념으로 지닌다. Hindu Rashtra는 ‘힌두(Hindu)' 개념의 정치와 경제에 부합되는 정부 형태를 갖는 힌두 국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바르카의 글 『Hindutva』에서 처음으로 체계화되어 이 이후 힌두 원리주의 이념의 기본 개념이 되고 있다. 따라서 Hindu Rashtra의 건설이 HMS의 이념적 목표일뿐만 아니라 이후 힌두 원리주의 운동의 목표가 되어 왔다. Hindu Rashtra에서의 ’힌두(Hindu)'는 영토적, 문화적, 민족적 단위와 동일시되는 개념으로서 인도를 성스러운 땅 곧 자신의 종교 발생지는 물론 조국으로 간주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외래 종교인 기독교나 이슬람 신자들을 제외한 힌두교도, 불교도, 자이나교도 그리고 시크교도 등 인도에 기원을 갖는 모든 종교의 신봉자들을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의 민족 개념이다. 이러한 민족개념은 다양한 종교 집단간의 정치적인 통합을 위하여 세속국가의 건립을 지향해온 온건주의자들의 영토적 의미의 민족 개념과는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자가 종교적, 종족적 또는 문화적 차이와는 상관없이 인도 영토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에 비해 전자는 힌두 인도 국민과 비힌두 인도 시민으로 구분한다(Ⓒ-219쪽).

'rashtra'가 우리말로는 ‘민족’으로 번역되지만 서구 근대시민사회의 근간인 민족(nation; 국민국가의 알갱이)과 다른 개념임을 인식해야하며('Hindu Nationalism'의 ‘Nationalism'을 서구의 Nationalism과 혼동하면 안 된다), 이러한 인식이 부족하면 Hindutva에 입각한 Hindu Fundamentalism을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Hindu Fundamentalism과 Hindu Nationalism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바르카에 의하면 ‘공통의 민족(rashtra), 공통의 종족(race; jati), 그리고 공통의 문명(civilization; sanskriti), 이것들이 'Hindutva(hinduness)'의 본질이다. 이 모든 본질들은 “힌두에게 신두스탄(Sindusthan; 인도 대륙)은 조국(Pitribhu)일 뿐 아니라 성스러운 땅(Punyabhu)이다”라는 말에 의해 가장 잘 요약된다. Hindutva의 앞의 두 본질(민족과 종족)은 조국이라는 단어와 명백히 연결되어 있고, 세 번째 본질인 문화는 성스러운 땅이라는 단어에 의해 타고난 우수함이 내포되어 있다.

사바르카의 정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지리적이고 계보학적 의미로서, 공통의 민족과 종족에 기반한 조국(혹은 모국)에 대한 강조이다. 이는 사실상 인도에 단일한 민족과 종족이 있어왔고, 이들이 이룬 단일한 문명이 있다는 발상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종교적 의미로서, 성스러운 땅에 대한 강조이다. 이는 다야난다(Dayānanda)가 신성시했던 베다 경전의 위치에 성스러운 땅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성스러운 땅이라는 관념은 힌두 문화의 우월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사바르카는 이상과 같이 ‘힌두’에 대한 정의인 Hindutva를 주장하면서 Hinduism과 Hindutva를 분리시킨다. 그에 따르면 Hinduism은 신학적이고 영성적 측면만을 갖는 부분인데 반해 Hindutva는 힌두의 삶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언어적 측면이 포함되는 복합체라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종교 체계로서의 Hinduism과 공통의 문화로서의 Hindutva를 구별하는 것으로서 이처럼 종교와 문화를 구별하고 문화로서 공통의 정체성을 삼으려는 시도는 이후 힌두교 민족주의자들에게 이어진다(Ⓐ-20쪽).

이는 범 슬라브주의나 범 이슬람주의처럼 Hindu도 하나의 커다란 결합체를 형성해야한다는 것이다. 사바르카의 사상은 장래의 ‘힌두 민족체(Hindu Rāshtrīyatva)’의 확립을 겨냥한다. 이럴 경우 다른 곳에 기원을 갖는 이슬람교나 기독교의 신도 등 ‘소수파’도 인도의 통일국가 형성에 협력해야하며, 이슬람은 조화를 위해 행동하여 최량의 것을 바라야한다. 그러나 늘 이슬람을 경계해야한다(⑥-125~126쪽).

사바르카는 Hinduism이라는 용어에 불교, 자이나, 시크, 부족 종교까지 포함하여 인도 대륙에서 발생한 종교를 나타내는 말로 간주한 반면 이슬람과 기독교는 외래 종교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외래 종교를 믿는 무슬림과 기독교 공동체는 인도를 성스러운 땅으로 보지 않기에 ‘나라(country)'에는 살지만 ’민족(rashtra)'에서는 배제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슬림이 개종을 해도 힌두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 Hindutva에 속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인도의 역사에서 무슬림의 역사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21쪽).

사바르카는 ‘인도는 지금 단일적이며 동일적인 하나의 민족이 아니며, 힌두와 무슬림이라는 주요한 두개의 민족이 존재한다’고 규정하면서 '인도 무슬림 연맹’에 의한 ‘두개의 민족론(二民族論)’의 힌두판(版)을 제기한다. 즉 사바르카에 있어서 무슬림과 기독교도는 힌두 국가(country)인 인도에서 결코 힌두와 동격이 될 수 없다(⑥-126쪽).

사바르카가 이처럼 ‘나라(country)’와 ‘민족’을 구분하는 것은 세속주의자들(국민회의)이 영토적 개념만으로 민족을 정의하는 것에 반발한 까닭이다. 곧 그는 세속주의자들의 민족 관념이 다수인 힌두가 갖고 있는 고대의 영광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 있는 성스러운 땅을 강조함으로써 ‘힌두 민족’을 정의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21쪽).

사바르카의 ‘두개의 민족론’에 반발한 국민회의(INC)는 1934년 HMS와 ‘인도 무슬림 연맹’을 ‘communal 당파’로 규정하고 제휴관계를 단절한다. 이에 맞선 HMS는 사바르카를 총재로 앉히고 반(反)INC의 색채를 강화한다(⑥-126쪽).

이 당시 사바르카-HMS는, 인도 대륙 전체에서 힌두의 독점적인 지위를 요구하면서도 영국 제국주의의 철퇴를 요구하지 않는 모순을 유발했다. 사바르카-HMS가 구상하는 ‘힌두 지배’는, 영국 지배 아래에서 가능한 한 많은 관직을 힌두가 독점하고 무슬림에게는 종속을 요구하는 한편 영국 지배층과의 투쟁을 과제로 삼지 않는(인도 총독부와 협력하는) 것이다. 이들의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순응적 협력’ 노선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결과 HMS의 정치력은 쇠퇴했다. 그러나 사바르카의 'Hindutva'에 심취한 헤드게바(Hedgewar)가 RSS(민족 의용단)를 설립하면서 Hindu Fundamentalism(fundamentalistic Hindu nationalism)의 디딤돌을 놓는다.

Ⅲ. ‘RSS 一家’와 Hindu Fundamentalism

먼저 Hindu Fundamentalism을 실행하는 RSS가 어떤 조직인지를 설명한다(①-33쪽).

RSS는 1925년 헤드게바(K.B. Hedgewar; 1889~1940)가 창설한 힌두 지상주의 조직이다. RSS는 Rashtriya Swayamsevak Sangh의 약자로 민족의용단 또는 민족 봉사단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종파주의적인 조직 중에서 ‘최대의 영향력을 갖고 가장 규율이 철저한 집단’이다.

RSS는 인도 민족운동의 과정에서 힌두 사회의 결속을 겨냥한 ‘상가단(조직화)’운동의 일환으로 출현하여, 힌두 전체가 공유해야할 민족의식의 양성, 상호 유대의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1940년 2대 총재인 고왈카르(Golwalkar; 1906~1973)가 RSS를 지도한 이후 조직이 더욱 강화되어 다른 종교‧ 소수집단을 배제하는 ‘힌두 민족’론을 전개했다. 인도 독립이후인 1948년 간디 암살과 관련되었다고 지목을 받은 RSS가 비합법화되었다. 그런데 국민회의 정권의 부수상인 빠텔(Sardar Vallabhbhai Jhaverbhai Patel; 1875~1950)은, RSS의 규율성과 조직력을 국민회의가 흡수할 생각을 갖고 느슨하게 대응하기도 했다.

1950년에는 RSS가 모체가 되어 종파주의적인 ‘BJS(Bharathiya Jana Sangh; 대중연맹당)’ 이 결성되었다. 이 당은 델리‧ 북부 인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1977~80년에는 ‘쟈나다 당(JP; Janata Party)’ 정권에 가담했다. 그 뒤 BJS는 인도 인민당(BJP)로 개칭‧개조하여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중앙의회의 하원에서 야당 제1당이 되고 북부 인도의 4개주에서 주(州)의 정권을 장악한다.

RSS는 또한 ‘세계 힌두 협회(VHP; Vishva Hindu Parishad)'의 주요한 구성조직으로서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분야에서도 종파주의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RSS는 '아요디야(Ayodhya) 사태’를 일으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1998년에 BJP가 정권을 장악한 뒤 정책을 에워싸고 RSS와 BJP 사이에 의견대립이 점차 표면화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상 파리와르(RSS 一家)’라는 말이 회자되는데, 여기에는 RSS라는 힌두 원리주의(힌두 민족주의)조직을 중심으로 VHP(종교조직)‧ BJP(정당)이 동아리를 이루어 인도 사회를 움직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RSS 一家’의 이념인 Hindu Fundamentalism의 탄생배경‧경과‧영향력 등을 분석함으로써 인도 사회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RSS의 탄생‧성장 과정을 설명한다.

1. RSS의 탄생‧ 성장 과정(⑥-127~130쪽)

1) 초창기

RSS의 창립자인 헤드게바는 본래 국민회의(INC)의 급진적인 활동가이었다. 그는 1923년 Nagpur에서 발생한 종파주의 폭동(communal riot) 직후 힌두 연합의 결성으로 나아갔으며 이어 1925년 9월의 ‘다샤라(Daśarā; 힌두교의 축제)’ 기간에 Nagpur를 본거지로 하는 RSS를 창설한다.

헤드게바는 사바르카의 영향을 강하게 많았다. 그는 1925년 라이나기리에 유폐중인 사바르카를 방문했는데 그 자리에서 본 사바르카의 『Hindutva』초고가 RSS 창설의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 간디 주도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실패를 체험한 헤드게바는 RSS를 정치조직이 아니라 힌두 사이의 민족의식‧상호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으로 위치 지웠다.

주로 바라문의 자제 출신의 활동가로 이루어진 지부를 각지에 세워 인격형성‧ 심신 단련을 하는 규율 있는 힌두 청년집단의 조직화를 겨냥했다. 이들 지부는 그 이후 RSS의 기초적인 활동단위로 되었다.

이러한 RSS 조직의 세 가지 주요한 일상 활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찰봉 휘두르기 연습 등의 전투훈련을 비롯한 집단활동. 둘째, 종교적인 훈화‧ 힌두의 神格‧ 시바지(Shivājī; 인도 중‧서부 데칸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마라타 왕국의 창시자. 후세에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의 영웅으로서 19세기말 反英민족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람다스(Rāmdās; 1608~1681: 인도를 침입한 이슬람 교도에 첨예하게 대립한 종교가) 등의 영웅이나 聖人에 관한 敎說. 셋째, 참가자 전원에 의한 토론.

RSS는 조직내의 규율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 회원 상호간의 제휴를 중시하고, (검정 샤츠에 카키색의 반바지) 제복을 입고, 시바지를 상징하는 새프론 색의 깃발(‘Bhagwā Dhwaj’라고 부름)을 들고 다닌다. 회원들은 RSS의 총재(‘Sarsanghchālak’라고 부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받는다. 1년에 한차례 거의 강제적인 기부 행사(‘Gurudakshinā'라고 부름)에 즈음하여 자금 모집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RSS를 특징 지우는 독특한 조직체계의 원형은 헤드게바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RSS의 조직은 급속도로 확대되어 1930년대 초의 125개 지부(회원 12,000명)가 30년대 말에 500개 지부(회원 6만 명)로 늘어났다. 이 당시 RSS의 활동가의 대부분은 주로 도시의 상층 카스트‧중류계층 출신이었다.

RSS는 ‘민족(Rashtra)'를 내걸면서도 자신의 인격형성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인’ 조직의 성격을 지닌다. RSS는 개인적인 활동의 경우를 제외하면 조직으로서 ‘反英민족운동 참가’를 활동가들에게 지시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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