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단상(斷想) -차이와 불평등
박정석(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대표로부터 인권 혹은 평화에 관한 짧은 글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고민을 하다가 우선 글 제목을 ‘인권 단상’이라 붙였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부제를 ‘차이와 불평등’이라고 사족을 달았다. 내 짧은 소견으로 ‘인권’문제는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되고, 그 다름이 차별로 이어질 때 개인간 혹은 집단간의 불평등이 발생하고 또 ‘다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고 유린하는 사태로 발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하고 거기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일 것이다. 즉 어느 한 사람이 그가 속한 계층이나 신분 혹은 종교 때문에 또는 피부의 색깔이나 성(性) 때문에 달리 대접을 받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앞에서 열거한 차이들은 인간 군상들 개개인이 처한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과 생물학적 조건에 따른 ‘차이’일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공산사회가 아닌 이상 사회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서로 다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출생 순간부터 성과 나이 혹은 피부의 색깔 등으로 각자의 정체성이 다르게 형성된다. 하지만 이런 차이로 인하여 달리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불평등을 의미한다.
칼럼
다른 나라 이야기같이 들리겠지만 얼마 전까지도(지금은 이런 경우가 없겠지만) 관공서를 출입할 때는 큰 차(?)를 타고 가야 일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다든지, 아니면 양복을 짝 빼 입고 가야만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곤 했다. 개인의 경제적인 부(富) 혹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달리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대접을 하는 사람이나 대접을 받는 쪽이나 다같이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겉에 있는 외투와 물건이라는 꼬리표에 따라 달리 취급되고 있음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이제는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색깔을 나타내는 말 중에 ‘살색’이라는 용어가 있었다. 이 말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우리’에게는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단어였지만, 피부색이 다른 즉 ‘비살색’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색깔에도 우열이 있는가? 없다면 피부색의 차이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당연한 이치임에도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고, 우월한 인종 혹은 열등한 사람으로 은연중에 차별하였던 것은 아닌가. 특히 흑인에 대한 이런 차별은 익숙하지 못한 데서도 비롯되지만, 백인의 입장에서 본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결과라 여겨진다. 이것은 그림이나 조각상에 나타나 있는 모든 천사가 왜 흰색으로만 표현되어 있는가하는 의문과도 직결된다.
우리는 심심찮게 ‘저 사람은 나하고는 종교가 틀린 사람이다’라고 말하거나 ‘흑인종은 백인종과 피부색이 틀리다’라고 말한다. ‘틀리다’라고 말했을 때는 그 이면에 나는 혹은 우리는 ‘옳다’라는 가치판단이 도사리고 있다. 다른 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피부색이나 출신지역이 나(우리)와 ‘다름’을 ‘틀리다’라고 말함으로써,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옳지 못한’ 사람으로 내몰아간다. 이런 논리는 비약하여, 옳고 순수한 사람들을 그렇지 못한 불결한 사람들로부터 ‘구출’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나아가 종교근본주의나 순수혈통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저지르는 인종청소 혹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와는 ‘다른’ 문화, 종교, 습관,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와는 ‘다른’ 피부색, 성, 나이 및 장애/비장애를 가진 사람들 혹은 출신지역이나 출신학교가 ‘다른’ 사람을 ‘틀린’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때 비로소 차이로 인한 불평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 역시 그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 ‘틀린’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인권’ 문제는 어렵고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아니 내 자신 속에서 내재하고 있는 잘못된 관념을 고치는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