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의 전쟁 5년
이스라엘은 왜 레바논에 집착하는가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종교다원주의를 항상 두려워하면서 레바논의 내부 분열을 기대해 왔다. 하지만 앞선 전쟁들과는 달리 이번 전쟁은 레바논 내전의 불씨를 당기는데 실패했다.
1897년 시오니즘 운동을 처음 주창한 테오도르 헤르츨의 저서 제목처럼 ‘유대인들의 국가’로 출발한 이스라엘은 탄생 초기부터 동방기독교와 수니파, 시아파, 드루즈파, 알라위트파 등 여러 이슬람 종파 사이에 천 년 이상 지속되어 온 중동의 종교다원주의와 충돌했다.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집트에는 유대 공동체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 공동체가 혼재하고 있다.1) 그런 복합적인 환경 안에 유대인만을 위한 국가를 세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20세기 초부터 아랍 진영에서 제일 먼저 위험을 감지한 자들은 팔레스타인, 레바논 및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지역에 들어온 사람들로 충원된 독점적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국가의 도래가 자신들 운명에 위협을 가하는 것을 느꼈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란 바로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자행되는 박해를 피한 아시케나지 유대인이었다. 동방기독교 공동체의 시각에서는 유럽 식민지 종주국들의 지원을 받는 시오니즘 운동이 십자군 운동과 유사한 점이 없지 않았으며,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중동지역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 간의 우호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런 성공사례에 자극을 받은 지역 기독교 공동체 일부 구성원이 해외에서 들어온 유대인처럼 자신들도 기독교 국가를 세우겠다는 권리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우려도 갖게 되었다.
2006년 9월4일, 남부 레바논 무하비브에서 최근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무력 충돌로 인해 사망한 헤즈볼라 대원의 무덤가에서 사망한 대원의 어머니가 앉아 슬펴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레바논, 시오니즘에 반대하다
이스라엘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유대인 이주민들은 중동의 기독교 소수파를 때때로 잠재적 연합세력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1919년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창설된 ‘대(大)레바논’의 기독교도들은 전반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프랑스어로 창작하는 레바논 시인 샤를 콤은 레바논의 페니키아 기원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시오니즘 사상을 전혀 모방하려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분열을 뛰어넘는 현대 레바논 민족주의의 기초를 세우려고 했다. 같은 시기에 이집트 민족주의 또한 민족의 기원으로 파라오를 거론했고, 갓 태동한 이라크 민족주의는 영광스런 바빌론의 유산을 찬양했다.
역시 프랑스어 사용자이며 친(親)프랑스계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명석한 레바논 저널리스트 미셸 시하도 이스라엘이 중동에 초래할 불안정에 대해 레바논 국민에게 경고했다. 레바논의 공동체적인 다원주의가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배타주의와 정반대 입장이므로 레바논 국민이 적대감을 구심점으로 집결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스라엘 국가 출현이라는 시련을 맞아 어려움에 빠진 국가의 운명에 대해 레바논 국민이 관심을 가지기를 가장 촉구한 사람은 마론교회 사제인 유아킴 무바락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속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대화와, 그 대화에 있어서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이 갖는 중심적 위치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2)
따라서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 군대가 다른 아랍 군대에 합류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49년에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현명하게도 레바논 군대는 1967년 6월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삼갔다. 이스라엘은 그 전쟁을 통해서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과 예루살렘 동부지역, 팔레스타인의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를 점령했다. 하지만 레바논은 전쟁의 여파로 점점 고조되어가던 중동 내 긴장의 물결을 피하지는 못했다. 민주주의적 자유와 다양한 정치적 감수성으로 인해 레바논은 1967년 이스라엘의 승전이 아랍세계 전체에 초래한 심각한 혼란상태를 증폭시키는 공명상자 구실을 하게 됐다.
한편 아랍 국가들의 대대적인 패배와 팔레스타인 전체가 점령당한 사실이 팔레스타인 사회에 심각한 낭패감을 안겨준 가운데, 시설 크기나 인구 규모에 비해 과도한 숫자의 피난민을 수용하고 있던 요르단과 레바논 소재 팔레스타인 난민수용소에서 대원을 모집하는 무장단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르단 군대의 탄압으로 인해 1969년 요르단에서 쫓겨난('검은 구월') 팔레스타인 저항단체들은 레바논에 기지를 확장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국경지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펼쳤다.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 군대의 대대적인 보복 정책이 시작됐다. 1968년 12월에는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공수특공대가 레바논 민간항공기들을 파괴시킨 사건으로 레바논 국내 정치에 심각한 동요가 일어났고, 정부는 점점 더 심각한 마비상태에 놓인다.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전쟁 이후 시리아와 이집트 전선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레바논은 이스라엘과 대치하는 유일한 전쟁터가 되었다.3) 그리하여 1975년의 대혼란에 이르는 길이 시작된 것이다. 많은 팔레스타인 정당에 의해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을 동등하게 통합하는 민주적이며 비종교적인 미래의 팔레스타인 모델로 제시되었던 레바논은 폭력의 늪에 빠진다.4)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와 연대 하에 ‘국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레바논 비종교 정당들의 연합이 탄생한다. 국민운동은 수니파 공동체 내에 널리 포진하고 있는 나세르를 추종하는 다양한 파벌, 공산당, 시리아 민중당, 왈리드 줌블라트의 아버지인 카말 줌블라트의 사회당을 모두 포용했다. 그에 맞서 친미파 찰스 말리크 전 외무부장관의 영향 하에 놓인 팔랑헤당이 ‘레바논전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집결하노라고 주장하면서 무장하기 시작했다. 레바논전선은 소련과 소위 '급진적'인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받던 팔레스타인 혁명의 굴레로부터 레바논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대규모 보복정책에 의해 발생된 레바논의 이런 국내 상황이 195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전략적 구상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국가와 연합한 기독교 국가를 레바논 내에 건설함으로써 중동 내에서 유대국가의 정당성을 확립하자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5) 1978년 레바논 남부 리타니 강까지 침범한 이스라엘 군대는 예전에 다비드 벤 구리온이 계획했듯이 레바논 군대로부터 해고된 보충병들로 민병대를 구성한 후 반체제 기독교인 장교를 그 우두머리에 앉혔다. 1979년 4월 이 민병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25호를 위반해가면서 2000년까지 이스라엘 군대가 점령하게 될 800km2 면적의 땅에 '자유 레바논' 국가를 선포한다.
박해받는 레바논의 기독교도들
그와 동시에, ‘레바논전선’의 요새들에 대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와 국민운동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1976년 봄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 내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6) 레바논전선을 구성하는 정당들은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스라엘과 연계한다. 그에 따라 레바논 국내 정치의 완전한 변화를 추구하는 공동 전략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침공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한 팔랑헤당은 미국의 후원 하에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자 했고, 그렇게 하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이 뿌리 뽑히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1982년 침공 때 구체화된다. 전쟁 중 아리엘 샤론 장군은 6월부터 8월말까지 베이루트를 포위한 후 서방국가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의 보증 하에 레바논에 팔랑헤 정권을 수립한다.
공격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레바논 의회는 바시르 제마옐을 팔랑헤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그가 암살당하자 다시 그의 형 아민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미국의 압력 때문에 새 정권은 1983년 이스라엘과 불평등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같은 시기에 베이루트 남동부의 산악지역인 추프 지역의 2십만 기독교인은 강제로 이주 당했다. 이스라엘 군은 기독교 민병대와 드루즈 민병대를 부추겨서 서로 살상하도록 하고는 그 지역에서 퇴각했다. 한편 팔랑헤 정권은 1978년부터 점령에 저항해온 중심세력인 레바논 비종교 정당들의 군대조직을 무장해제 시킨 후 내쫓아버렸다. 팔레스타인 전사들의 축출과 민간인 보호를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1982년 8월 레바논에 파병된 다국적군의 도움을 받아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국적군이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에서 거둔 혁혁한 전과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해서 신의 당 헤즈볼라가 창설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헤즈볼라는 이란의 종교혁명에 자극을 받은 시아파 공동체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모병을 하면서 이스라엘에 의한 레바논 남부 점령 상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끈질긴 인력동원에 나섰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위성국가가 되지 못했기에 레바논은 공동체 분열의 악순환에 빠진다. 1990-1991년에는 반(反)이라크 연합에 가담한 데 대한 보상으로 서방국가들은 레바논에게 시리아에 대한 감시권을 부여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신임을 받던 라피크 하리리가 총리 직에 오르자 레바논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의 콘도미니엄 처지로 전락한다. 라피크 하리리는 1992-1998년에 이어 2000-2004년에도 총리 직을 수행하면서 국내에 유례없는 부동산 및 금융 투기 바람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레바논은 4백억 달러의 빚을 짊어지게 되지만 측근들과 추종세력들, 아랍 왕자들, 시리아 관리들, 국내 은행 및 투자기금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하게 된다.
2004년 9월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1559호 결의안은 레바논의 취약한 지위를 다시 문제 삼았다. 이라크 침공 이후 ‘새로운 중동’ 계획에 따라 미국은 ‘삼나무의 나라’ 레바논을 시리아와 이란이 이루는 축의 궤도 내에 내버려두기를 거부했다. 미국은 헤즈볼라를 그 축의 단순한 발현으로 보면서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기를 원했다. 결의안은 미국이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규정한 헤즈볼라 조직의 주요 지지자로 간주된 에밀 라후드 레바논 대통령의 재임 금지, 시리아군의 철수, 레바논 남부에 레바논 군대 배치, 모든 민병대(레바논과 모든 아랍 세계에서 '저항군'으로 인식되고 있는 헤즈볼라와 국내에 잔존하는 팔레스타인 조직을 뜻함)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유례없이 무분별하게도 프랑스가 이 결의안 채택을 주도했다. 아마 이라크 문제로 불화가 초래된 이후 미국과 화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레바논은 최악의 불안정에 빠져들면서 1975년과 1990년 사이의 상태, 즉 중동의 모든 적대세력이 대치하는 공간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레바논 남부를 재점령하는 계획이 발동됐다. 그와 동시에 라피크 하리리 총리 암살 사건 이후 미국과 프랑스는 하리리 가문과 줌블라트 가문을 중심으로 확립된, 소위 미국의 ‘3월 14일 주장’에 우호적인 국내 정권이 출현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총리 암살 사건도 물론 유엔 안보리가 다루게 된다. 국제조사위원회 설치, 국제재판소 설치, 레바논 정부가 결의안 1559호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감시할 필요에 대한 재확인과 관련된 일련의 인상적인 결의안들을 채택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유엔 최고기관의 이러한 부산한 움직임은 2006년 7월 이스라엘이 레바논 국민 전체를 인질로 잡고, 여러 지역들을 통째로 파괴시키며, 수백 명의 주민을 살상하면서 수만의 주민이 피난을 갈 수밖에 없게 내몰던 때 안보리가 지독히 수동적이던 것과 이상할 정도로 대조를 이룬다.
규범을 벗어난 레바논 침략과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자행되는 침략을 지원하거나, 비겁하게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국제사회'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레바논이 상당히 거북한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과 이스라엘 단짝은 1982년의 '수술' 결과 레바논을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처럼 여러 해 동안 단말마의 고통 속에 빠뜨리더니 2006년의 수술 결과도 그보다 신통치 않다.
‘테러’ 및 ‘이슬람 파시즘’과의 전쟁이라는 주장의 이론적 틀로서 미국 행정부가 2002년 이래 찬양해 마지않는 ‘문명간의 전쟁’이 레바논 국민을 공동체간의 유혈 내전으로 다시 몰아넣을 우려는 없는 것일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기를 그토록 거스르는 종교다원주의를 상징하는 땅이라는 레바논의 소명이 이번 타격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1975년과는 달리 레바논 기독교도 대부분이 앞서 언급한 자신들의 지적, 정치적 유산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마음 든든한 일이다.
1989-1990년에 시리아를 레바논 밖으로 몰아내려다 실패한 전 레바논 군대 총사령관 미셸 아운 장군은 그때부터 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베이루트 남부 변두리 지역 출신인 아운 장군은 레바논을 강타한 새로운 불행, 주거지역을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었기에 시아파 공동체에는 더 심한 타격을 가했던 불행에 대해 연대감을 표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운 장군은 이스라엘이 상궤를 벗어난 폭력행위를 통해서 새로 도발하려 했던 공동체간 불화를 방지하는 방어벽을 쌓았다. 유대 국가와 워싱턴에 있는 그 연합세력이 1982년과 마찬가지로 ‘반역’ 국가 레바논을 분쇄하고, 이 나라를 괴뢰로 만들기 위해서 가하는 최상의 승부수가 고작 이런 폭력이다.
레바논에 중립은 허용되지 않아
‘문명간의 충돌’ 선전의 사이렌 효과와 1975년 이래 팔레스타인과 함께 이스라엘 전쟁기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느라 지친 국민 전체의 사기 저하 앞에서, 맞닥뜨린 모든 불행에 맞서 싸우는 레바논 시민사회의 존경스러운 저항이 결국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안보리 결의안 1701호에 누락된 부분과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기화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결의안 1559호 채택 이래 끊임없이 그래왔듯이, 자기들 뜻대로 레바논 정부를 움직이고 내정을 간섭하려들지 않을까?
레바논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결에 대해 중립을 취하고 시리아 지역과 차단되어, 부시가 약속한 ‘새로운 중동’ 내에서 석유 부자 에미르(족장)들를 위한 몬테카를로가 되기를 바라는 레바논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소심한 오랜 꿈은 레바논 앞에 던져진 역사적 도전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미국이 촉발시킬 지도 모르는 이라크 내전의 유령과, 미국의 말을 잘 듣는 아랍의 고객 정권들이 중동 지역 내에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대립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모든 사람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 및 미국의 계획과 사회 분열은 동일한 특성을 갖는다. 사회가 분열되면 더 많은 무질서와 고통이 초래될 것이다. 과연 레바논은 침략에 맞서서 자신을 지켜냄으로써 모든 공동체의 연대라는 놀라운 자발적 충동을 보존할 수 있을까? 오직 미래만이 해답을 알고 있다.
* 레바논 전 재무부장관. 『분열된 중동(1956-2006)(Le Proche-Orient éclaté(1956-2006))』(Gallimard, coll. “Folio”, 파리, 2006)과 『동양-서양, 상상 속의 장벽(Orient-Occident, la fracture imaginaire)』(La Découverte, 파리, 2005) 등의 저서가 있다.
1) 『지중해 연안의 종교다원주의 역사(Histoire du pluralisme religieux dans le bassin méditerranéen)(Geuthner, 파리, 1998)』 참조.
2) 『특출한 인물 유아킴 무바락(Youakim Moubarac, un homme d’exception)』(La Librairie orientale, 베이루트, 2004) 참조.
3) 1978년 안와르 알-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레바논 내 폭력사태가 재발된다(『현대 레바논(Le Liban contemporain)』, La Découverte, 파리, 2005 참조). 그와는 달리 점령지 골란고원의 시리아 전선은 현재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불안정에 빠져 있는 레바논 상황과 대조를 이룬다.
4) 1974년 11월 12일 행한 유엔 총회에서의 유명한 연설을 통해 야세르 아라파트는 “기독교도, 유대인, 무슬림이 함께 살고, 정의, 평등, 우애를 바탕으로 한 유일한 민주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보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말했다.
5) 『중동의 발칸화. 신화와 현실 사이에서(La Balkanisation du Proche-Orient. Entre le mythe et la réalité)』,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1983년 1월호.
6) 여름에 시리아 군대가 처음에 행한 일 중 하나는 텔 알-자타르의 팔레스타인 수용소에서 학살을 자행한 일이다.
조르주 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