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파푸아여, 모닝스타여!

웨스트 파푸아여, 모닝스타여!

‘특별자치법’의 허상 고발하며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 열망하는 민중들
폭력에 대한 공포 속에 힘든 싸움,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를 바란다

▣ 유해정/ 인권운동사랑방 간사

12월1일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기념일을 기해 파푸아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사법처리 방침에도 불구하고 파푸아의 수도 자야푸라에는 수백 명의 학생, 시민, 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집회가 열렸으며, 영국을 비롯한 각국의 인도네시아대사관 앞엔 시위대의 물결과 함께 파푸아의 국기 모닝스타가 휘날렸다. 이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파푸아 독립”을 외쳤다. 국제사면위원회(AI)는 지난해 독립기념일 집회에서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각각 15년과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필립 카르마(45·전직 공무원)와 유삭 파카쥐(26·학생)를 양심수로 선언하며 석방운동에 돌입했다. 미국과 영국의 인권단체들은 자국의 군수물자가 파푸아 민중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며 정부에 무기판매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인도네시아의 철권통치와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절망의 땅으로 변해버린 파푸아에 독립의 기운이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다.

인구의 10분의 1이 살해당한 땅

이러한 단서를 마련한 것은 다름 아닌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지난 1961년 무력으로 파푸아를 침공하고 1969년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이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파푸아를 통제해왔다. 이 과정에서 살해당한 파푸아인만도 10만 명. 이는 전체 파푸아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수다. 인도네시아군은 광범위한 폭력과 비사법적 살인, 고문과 납치, 강간 등을 자행했고, 군이 지나간 마을은 초토화됐다. 250여 개의 부족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언어, 공동체가 파괴됐으며 땅은 개발이란 명목으로 파헤쳐졌다. 대대적인 이주정책의 결과 파푸아 거주자 중 절반이 이주자들이다. 이들은 파푸아의 모든 상권을 장악했다.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영양 부족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어른들은 감시와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차별정책에도 불구하고 파푸아인들의 저항은 계속돼왔다. 이에 자카르타 정부가 고안해낸 것이 특별자치법. 파푸아 지역 정부의 수입을 늘려주고 권력을 분산함으로써 파푸아인들의 저항과 비판을 잠재우려 한 것이다. 2001년 제정된 이 법에 의하면 파푸아인들은 모닝스타를 게양할 자유를 지니며, 국제관계, 방위, 재정정책, 대법원 기능을 제외한 나머지 권한이 파푸아 지방정부에 주어진다. 또한 도지사를 승인하고 인권에서부터 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문제를 취급할 권한을 갖는 파푸아 의회 설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특별자치법은 출발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자카르타 정부가 파푸아 의회의 구성을 계속 미루는 한편, 파푸아를 3개의 행정구역으로 분할했기 때문이다. ‘당근’과 기만책에 불과했다는 파푸아인들의 분노가 격화되자 대통령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파푸아를 방문, 의회 설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미 민심은 마음을 돌린 상태였다.

파푸아 지역의회의 사무총장 레오 림비리는 “특별자치법에 의하면 새로운 도를 만드는 경우 파푸아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도의 분할이 파푸아 의회가 구성되기 전에 이뤄졌다”며 이 법이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파푸아의 인권단체 엘스함의 알로이시우스 변호사도 “특별자치법하에서도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은 계속되고 있고 군과 경찰에 의한 인권 침해 역시 계속되고 있다”며 “파푸아인들의 정치·사회·경제적 지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파푸아인들은 8월12일 특별자치법의 철회 선포식을 열었다. 5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이 집회에는 1만여 명이 넘는 파푸아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특별자치법의 철회를 상징하는 검은 관을 들고 아벤푸라에서 자야푸라까지 25km를 행진했다.

“파푸아 의회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카르타 정부는 지난 10월 파푸아 의회를 구성했다. 특별자치법에는 총 42명, 각각 14명의 여성, 부족, 종교 대표를 선출하도록 돼 있는데, 여성과 부족 대표는 파푸아 주민들이, 종교 대표는 종교기관에서 뽑도록 규정하고 있다. 파푸아인들은 선거를 보이콧했고, 종교계 역시 정부가 선거운동의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아 정상적인 선거가 불가능하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거리에는 군 병력과 사복 경찰들로 북새통을 이루면서 파푸아의 긴장이 고조됐다. 일부 지역에선 선거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지방 관료가 부족과 여성 대표를 임명한 곳도 있었다. 자카르타 정부는 10월31일 이들의 취임식을 강행했다. 자야푸라 주교 대변인인 자누아리스 우유는 “천주교 대표라는 사람들은 교구에서 선출된 것이 아니라 관변 종교단체와 선관위가 일방적으로 임명한 것”이라며 그들의 대표성을 부인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주인민당 역시 “정부가 선거에 개입한 것이 분명하며, 파푸아 의회는 파푸아인들의 미래를 파괴하는 새로운 식민지 지배를 고착화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며 “우리는 파푸아인들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논평했다. 민심을 잡겠다는 정책이 오히려 파푸아인들의 독립 열망만 부추긴 셈이다.

여기에 지난 9월8일 법원이 무고한 파푸아인을 죽게 한 경찰관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 역시 파푸아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경찰은 2000년 신원불명의 사람이 아벤푸라 경찰서를 습격하자 용의자를 색출한다며 한 대학 기숙사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경찰의 총기 사용으로 사망했으며, 또 다른 이는 불구의 몸이 됐다. 기숙사에 있는 여성과 아이 등 104명이 체포됐고 그중 2명은 고문으로 사망했다. 사회적 파장이 커지자 인도네시아 인권위원회가 사건 조사에 착수했고 25명의 경찰을 기소하라는 의견을 냈다. 인도네시아 검찰은 3년이 지난 뒤 겨우 2명만을 기소하는 데 그쳤고, 법원은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저항을 위한 단서가 마련되긴 했지만 아직 파푸아인들의 전면적인 독립투쟁을 기대하긴 어렵다. 폭력에 대한 공포와 무기력함, 투쟁에 대한 패배감이 아직도 파푸아에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국제 시민사회가 연대의 폭을 넓히고 있지만 위력적인 힘을 모으고 있진 못하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한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 역시 목소리를 내기 꺼려한다. 파푸아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베니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제사회의 화답이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당신의 힘을 보태달라.”

그들은 왜 먹혔는가

인도네시아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천연자원 노다지, 1960년대부터 식민지로

웨스트 파푸아에 침략과 수탈의 역사가 시작된 건 1962년부터. 네덜란드의 독립 약속에 따라 파푸아는 1961년 의회를 구성, 국명을 ‘웨스트 파푸아’로, 국기를 ‘모닝스타’로 정한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파푸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파푸아의 미래는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놓이게 된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 회복’과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의 깊숙한 개입 속에 파푸아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6년의 인도네시아 지배와 1969년 국민투표 실시를 골자로 하는 뉴욕협정이 1962년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사이에 체결됐다. 1969년 진행된 국민투표 ‘Act of Free Choice’는 유엔의 묵인하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선발한 친인도네시아인 1022명만이 참여했다. 그들은 비행기에 태워진 채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원한다’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그 뒤 파푸아는 공식적인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인도네시아가 파푸아에 집착하는 결정적 이유는 막대한 천연자원 때문이다. 매년 자카르타 정부가 국내외 회사의 파푸아 벌목권을 인정해주고 버는 돈만 100만달러. 여기에 수하르토 시대 때부터 군부와 정치 엘리트들이 파푸아의 벌목사업들에 손을 대면서 파푸아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최근에는 광산과 가스 개발 사업이 주가를 올리고 있다. 1988년 그래스버그산에서 발견된 상당한 양의 광물은 개발업체 프리포트 맥모란 커퍼 & 골드를 세계 최대의 광산회사 반열에 올려놓았고, 자카르타 정부 역시 돈방석에 앉았다. 1991년부터 10년간 이 회사가 낸 세금은 모두 180만달러. 인도네시아군 역시 ‘보호’란 미명하에 수천만달러를 챙겼다. 빈투니 배이에서 내년부터 개발될 액화천연가스 프로젝트도 인도네시아의 배를 불릴 것이다. 중국, 일본 회사 등과 합작해 영국 페트롤엠이 추진 중인 개발 사업은 2006년부터 2030년까지 약 320억달러의 수익을 낼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가 얻을 이익은 약 90억달러. 이쯤 되다 보니 파푸아는 자카르타 정부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노다지’인 것이다.

*한겨레21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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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여, 모닝스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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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자치법’의 허상 고발하며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 열망하는 민중들

폭력에 대한 공포 속에 힘든 싸움,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를 바란다
▣ 유해정/ 인권운동사랑방 간사

12월1일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기념일을 기해 파푸아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사법처리 방침에도 불구하고 파푸아의 수도 자야푸라에는 수백 명의 학생, 시민, 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집회가 열렸으며, 영국을 비롯한 각국의 인도네시아대사관 앞엔 시위대의 물결과 함께 파푸아의 국기 모닝스타가 휘날렸다. 이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파푸아 독립”을 외쳤다. 국제사면위원회(AI)는 지난해 독립기념일 집회에서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각각 15년과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필립 카르마(45·전직 공무원)와 유삭 파카쥐(26·학생)를 양심수로 선언하며 석방운동에 돌입했다. 미국과 영국의 인권단체들은 자국의 군수물자가 파푸아 민중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며 정부에 무기판매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인도네시아의 철권통치와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절망의 땅으로 변해버린 파푸아에 독립의 기운이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다.

인구의 10분의 1이 살해당한 땅

이러한 단서를 마련한 것은 다름 아닌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지난 1961년 무력으로 파푸아를 침공하고 1969년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이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파푸아를 통제해왔다. 이 과정에서 살해당한 파푸아인만도 10만 명. 이는 전체 파푸아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수다. 인도네시아군은 광범위한 폭력과 비사법적 살인, 고문과 납치, 강간 등을 자행했고, 군이 지나간 마을은 초토화됐다. 250여 개의 부족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언어, 공동체가 파괴됐으며 땅은 개발이란 명목으로 파헤쳐졌다. 대대적인 이주정책의 결과 파푸아 거주자 중 절반이 이주자들이다. 이들은 파푸아의 모든 상권을 장악했다.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영양 부족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어른들은 감시와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차별정책에도 불구하고 파푸아인들의 저항은 계속돼왔다. 이에 자카르타 정부가 고안해낸 것이 특별자치법. 파푸아 지역 정부의 수입을 늘려주고 권력을 분산함으로써 파푸아인들의 저항과 비판을 잠재우려 한 것이다. 2001년 제정된 이 법에 의하면 파푸아인들은 모닝스타를 게양할 자유를 지니며, 국제관계, 방위, 재정정책, 대법원 기능을 제외한 나머지 권한이 파푸아 지방정부에 주어진다. 또한 도지사를 승인하고 인권에서부터 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문제를 취급할 권한을 갖는 파푸아 의회 설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특별자치법은 출발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자카르타 정부가 파푸아 의회의 구성을 계속 미루는 한편, 파푸아를 3개의 행정구역으로 분할했기 때문이다. ‘당근’과 기만책에 불과했다는 파푸아인들의 분노가 격화되자 대통령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파푸아를 방문, 의회 설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미 민심은 마음을 돌린 상태였다.

파푸아 지역의회의 사무총장 레오 림비리는 “특별자치법에 의하면 새로운 도를 만드는 경우 파푸아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도의 분할이 파푸아 의회가 구성되기 전에 이뤄졌다”며 이 법이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파푸아의 인권단체 엘스함의 알로이시우스 변호사도 “특별자치법하에서도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은 계속되고 있고 군과 경찰에 의한 인권 침해 역시 계속되고 있다”며 “파푸아인들의 정치·사회·경제적 지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파푸아인들은 8월12일 특별자치법의 철회 선포식을 열었다. 5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이 집회에는 1만여 명이 넘는 파푸아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특별자치법의 철회를 상징하는 검은 관을 들고 아벤푸라에서 자야푸라까지 25km를 행진했다.

하지만 자카르타 정부는 지난 10월 파푸아 의회를 구성했다. 특별자치법에는 총 42명, 각각 14명의 여성, 부족, 종교 대표를 선출하도록 돼 있는데, 여성과 부족 대표는 파푸아 주민들이, 종교 대표는 종교기관에서 뽑도록 규정하고 있다. 파푸아인들은 선거를 보이콧했고, 종교계 역시 정부가 선거운동의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아 정상적인 선거가 불가능하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거리에는 군 병력과 사복 경찰들로 북새통을 이루면서 파푸아의 긴장이 고조됐다. 일부 지역에선 선거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지방 관료가 부족과 여성 대표를 임명한 곳도 있었다. 자카르타 정부는 10월31일 이들의 취임식을 강행했다. 자야푸라 주교 대변인인 자누아리스 우유는 “천주교 대표라는 사람들은 교구에서 선출된 것이 아니라 관변 종교단체와 선관위가 일방적으로 임명한 것”이라며 그들의 대표성을 부인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주인민당 역시 “정부가 선거에 개입한 것이 분명하며, 파푸아 의회는 파푸아인들의 미래를 파괴하는 새로운 식민지 지배를 고착화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며 “우리는 파푸아인들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논평했다. 민심을 잡겠다는 정책이 오히려 파푸아인들의 독립 열망만 부추긴 셈이다.

여기에 지난 9월8일 법원이 무고한 파푸아인을 죽게 한 경찰관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 역시 파푸아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경찰은 2000년 신원불명의 사람이 아벤푸라 경찰서를 습격하자 용의자를 색출한다며 한 대학 기숙사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경찰의 총기 사용으로 사망했으며, 또 다른 이는 불구의 몸이 됐다. 기숙사에 있는 여성과 아이 등 104명이 체포됐고 그중 2명은 고문으로 사망했다. 사회적 파장이 커지자 인도네시아 인권위원회가 사건 조사에 착수했고 25명의 경찰을 기소하라는 의견을 냈다. 인도네시아 검찰은 3년이 지난 뒤 겨우 2명만을 기소하는 데 그쳤고, 법원은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저항을 위한 단서가 마련되긴 했지만 아직 파푸아인들의 전면적인 독립투쟁을 기대하긴 어렵다. 폭력에 대한 공포와 무기력함, 투쟁에 대한 패배감이 아직도 파푸아에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국제 시민사회가 연대의 폭을 넓히고 있지만 위력적인 힘을 모으고 있진 못하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한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 역시 목소리를 내기 꺼려한다. 파푸아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베니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제사회의 화답이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당신의 힘을 보태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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