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레워크샵-이슬람의 이해

이슬람의 이해

이종억 (이슬람 부산성원 이맘)

세계의 화약고란 오명이 붙은 중동에서 일어난 일련의 지정학적·정치적 사건들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슬람에 가장 적대적인 미국과 유대 중심의 언론과 자료들을 통해서만 이슬람세계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이슬람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종교로 비춰지고 있으며, 이슬람의 본질과는 다른 편견과 오류를 재생산해 왔다. 여기에 현 정부가 대규모의 이라크 파병을 결정함으로서, 그 성격은 다르지만 지난 70년대 우리의 노동자들과 기술진들이 아랍 이슬람세계에 파견했던 때처럼 또다시 이 세계와 직접적으로 마주치지 않으면 안 될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무슬림 수가 어림잡아 10만을 헤아리고 있으며, 그 중 대다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관심차원을 넘어 이슬람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과연 무슬림들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기에 온갖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우선 종교로서의 이슬람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이슬람은 종교가 생활 그 자체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종교와 정치, 경제, 사회생활이 일체감을 이루어 끊임없는 자기 수련과 노력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실현한다. 즉, 무슬림의 사회는 정교합일의 사회요, 신정일치의 사회다. 둘째, 이슬람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다. 셋째, 종교 의무 수행에서의 융통성이 있다. 성서 꾸란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하나님은 종교에 관한 일로 너희들에게 일부러 힘든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라” (5:6). 넷째, 성선설(性善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므로, 기독교에서와 같은 원죄설을 부정한다. 다섯째, 예배의 언어는 반드시 아랍어여야 한다. 여섯째, 출현 당시 주변의 문화권에 비하여 보기 드문 상대적 관용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 (2:256), “… 사람을 강요하여 믿음을 갖게 할 수가 없다 (10:99). 일곱째, 이슬람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 대하여 절대적 복종과 신뢰를 가지고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하여 꾸란은, “믿는 자들아, 하나님을 따르고 예언자와 너희들 중에서 권위 있는 자를 따르라. 만약 너희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하나님과 예언자에게 가져가라…”(4:59)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은 이슬람에 대한 왜곡(歪曲)되어 있는 여러 가지 사항 중에 주요한 것들이다. 첫째, ‘이슬람 원리주의(근본주의)’는 ‘전통적 시각에서 보는 이슬람 개혁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다. 따라서 마치 이슬람이 전체가 다 원리주의(근본주의)인 것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다. 테러나 지하드(聖戰)는 이슬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다. 따라서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이슬람은 전쟁을 추구하지 않고,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다. 둘째, 이슬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다른 보수적 종교에서의 그것과 대등소이하다. 히잡을 착용하는 것은 여성 보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극단적인 부르카 착용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독특한 문화이고, 그것 또한 이슬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아랍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남아 지역 모두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위치나 의복 착용 등이 달리 나타난다.

* 이글은 지난 8월 월례워크숍에서 발표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발표문의 전문은 홈페이지의 월례세미나 강의안에 있습니다. 아울러 발표해주신 이종억 이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9월~2005년 1월까지 월례워크숍 대신에 <제 4회 아시아의 창>을 매월 개최할 예정입니다. “미국의 세계전략과 아시아”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강좌에 많은 분들의 참여 바랍니다. 자세한 강좌 안내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 활동소식>을 참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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