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조승수 의원 (진보신당) 외 5인의 국회의원실에서 주최하여 2010년 2월 5일 국회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재파병의 쟁점들] 토론회에서 발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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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 무장 갈등의 배경과 전망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국민국가 아프가니스탄의 한계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은 ‘아프간(Afghan)’의 땅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아프간’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큰 부족인 파슈툰(Pashtun)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은 파슈툰을 비롯한 여러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은 ‘파슈툰족의 땅’이라는 원래의 의미가 현재 설정되어 있는 지역의 범주 안에서 모호한 상태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은 ‘국가’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희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충성심을 바치는 대상은 종족이고, 그와 함께 모든 종족의 공통분모를 이루는 ‘이슬람’뿐이다. 여기에서 이슬람의 성격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을 하나의 문화 형태로서가 아닌 하나의 정치적 통찰력으로서 일상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그들이 종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들이 정치 안에서 경험한 것을 통해 이루어질 뿐 종교적 신앙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국가는 무슬림 사회 내에서 정의가 작동하도록 하는 장치이고, 정치사상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무슬림 혹은 무슬림 공동체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 시민권자가 탈리반에 가입하거나 자기가 속한 영국에 대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그에게 정체성의 첫 번째가 되는 것은 국가가 아닌 무슬림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십자로상에 있다. 이란-사우디아라비아의 중동, 인도-파키스탄의 남아시아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등장한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들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있다. 이 나라에 처음 군침을 흘린 것은 러시아와 영국이었다. 그들은 몇 차례의 내정 간섭과 전쟁을 치른 후 이 나라를 완충 지대(buffering zone) 국가로 독립시키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것은 완충국이야말로 두 당사자를 떨어뜨려 놓기에 충분하고 동시에 자신들과 적대적 관계에 놓일 수 있는 각 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매우 적합한 체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와 영국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그 후 양자는 결국 1893년에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경계를 결정짓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 때 조성된 두란드 라인(Durand line)은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의 경계를 지었고, 그로 인해 파슈툰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절반씩 찢어지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이 발생했을 때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이 기회를 잡아 파슈툰족 지역인 서북변경주(North-West Frontier Province)에 대한 소유권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1947년 파키스탄이 이 부족 지역을 포함한 채 독립을 선언했고 그 직후 파슈툰 부족민들은 이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파키스탄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에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영국령 인도와의 경계로 한다는 결정을 가져 온 모든 조약을 취소한다고 반응했고 나아가 두란드 라인의 파키스탄 쪽 지역을 묶어 ‘파슈투니스탄’으로 독립시키자고 하는 방안을 내는 기선을 제압하였다. 이에 대해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으로의 원유 공급 봉쇄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대해 카불 정부는 1950년 소련 정부와 즉각 물자 교환 협상을 맺어 소련 정부는 원유 생산품을 비롯한 중요한 상품들을 제공해주고 아프가니스탄은 원모와 원면을 그 대가로 제공한다는 내용을 체결했다. 소련은 또 아프가니스탄 상품이 자국 영토를 무료 통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치를 내렸고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원유 채굴 작업도 시작하였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점차 소련을 무역 상대국이자 원조국으로 인정하였고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제국주의에 의한 완충국의 설정은 끊임없이 외세의 간섭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국가를 소련 침공 이후 24년간의 내전에 휩싸였고, 그 과정에서 국가는 분열되어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탈리반이 등장한 것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였다. 따라서 탈리반 정부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사회 통합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우선적으로 이슬람주의였다. 그것은 언어나 부족 혹은 지역을 기준으로 할 때 전체의 인민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범주는 오로지 이슬람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이슬람을 정치화하면서 그것을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일 뿐이다
아프팍Afpak의 형성과 탈리반
역사적으로 볼 때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영국의 인도아대륙 식민 지배와의 관련 속에서의 일이다. 파키스탄은 소련이 철수한 후인 1992년 4월 이후 무자히딘 정부 등장 이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킬 정부를 카불에 세우기를 강력히 희망하면서 적극적인 간섭을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파키스탄은 탈리반을 육성하였고, 탈리반 정권 수립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78년 공산주의 쿠데타 이후 1979년 소련의 군사 침략은 10년 간 지속되다가 1992년 무자히딘(Mujahiddin)이 정권을 잡았는데 이 때 그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이 파키스탄이었고 그 뒤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군수 물자와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결국,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에 의한 꼭두각시 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침략하였고, 미국은 그 꼭두각시 공산 정부 대신 친미 정권을 세우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한 명백한 침략이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탈리반이 정권을 잡으면서부터 더욱 강화되었다. 탈리반은 파키스탄이 미국과 동맹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미국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지지는 냉전기 미국의 세계 전략의 일환이었다. 미국은 냉전기에 제3세계에서 본질적으로 반공산주의적인 이슬람이 정치화할 경우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또 하나의 세력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그들을 노골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한 미국의 전략은 198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맞아 떨어진 것으로 판명 났다. 공산주의 지배 체제가 붕괴한 후 이슬람 무자히딘 세력들은 부정, 부패, 무능력으로 일관되었다.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했고, 사회적으로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내전으로 인해 전통적 부족 지도부조차 사실상 소멸되어 실제적으로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 등장한 것이 탈리반이다.
탈리반은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교육을 받은 학생 집단이다. 파키스탄에서의 이슬람 교육은 19세기 이후 인도에서 일어난 반영 식민주의와 관련이 깊다. 당시 인도에서 영국 식민주의 지배 아래 힌두주의의 색채가 강한 민족주의가 크게 일어나자 북부 인도의 데오반드(Deoband)에 있는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중심으로 이슬람 교육과 이슬람 민족주의가 부상하였고, 이에 아프간의 이슬람 유학생들이 인도의 데오반드로 대거 이동하게 되었다. 데오반드의 마드라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반영제국주의의 색이 강한 정통주의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리반의 이데올로기적 뿌리가 반제국주의이면서 반계몽적이고 정통 이슬람적인 것은 바로 이와 관련해 있다. 데오반드의 마드라사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파키스탄 국경변에 많이 설립되었고, 내전 중 아프가니스탄 본국에서 발생한 많은 고아를 받아들여 양육하였다. 고아 양육은 아프가니스탄 본국의 청장년들과 그곳에서 양육된 청년들 사이에 정서적 유대감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였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반소 항전의 전사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나아가 현재의 반미 항전을 지속시키는 것 또한 가능하게 하였다.
내전 중 탈리반이 아프가니스탄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실을 맨 처음 알아차린 것은 파키스탄 사람들이었다. 탈리반은 파키스탄의 가장 급진적인 마드라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에 있는 급진주의 이슬람 요원들과 밀착할 수 있었고, 국경 내에 파슈툰 부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파키스탄이 그들을 지원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다. 그 후 파키스탄은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인도에 대한 전략적 위치를 강화하는 일거양득의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여기에 탈리반을 매개체로 하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연합의 뿌리가 있다.
탈리반은 파키스탄 국경 내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이슬람 운동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국경 내에 파슈툰 족이 많이 살고 있었고, 2002년 미국 침략 이후 많은 난민이 발생해 파키스탄에 임시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난민 캠프를 비롯해 전국에 걸쳐 마드라사를 통해 청년을 징집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난민 캠프는 많은 급진적인 이슬람 혹은 이슬람주의 운동이 이슬람 교육을 위한 센터 같은 것을 건설하였다. 그 가운데 많은 곳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 후원을 받았다. 징집은 청년들 중 상당수를 전장에 보내달라고 하는 것으로 우선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지역에서 온 부족의 지도자들과 난민 캠프의 지도자들이 호소하면서 그 규모를 키워 나갔다. 아들을 많이 가진 가족들이 부족으로부터 재정적인 후원과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주는 대가로 성전을 함께 나누자고 하는 요구를 받으면 긍정적인 반응을 내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므로 탈리반 운동은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지원 뿐 아니라 나라 외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지원에 의존할 수도 있었다.
탈리반은 파키스탄 안에서 급진적인 이슬람 혹은 이슬람주의 정당의 권력 기반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탈리반이 카불을 점령한 두 주 후인 1996년 10월 13일 비비시(BBC)의 이슬라마바드 특파원은 많은 파키스탄 사람들이 파키스탄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경제 침체로 인해 파키스탄 내 이슬람 학교의 학생들이 탈리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정치적인 영역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이후 실제로 탈리반과 자미아트-알-울레마와 같은 파키스탄의 급진적 정당과의 연계는 예상보다 더 강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2002년 미국의 침략 때문이다. 탈리반은 병력을 충원하는 근거지로 그 급진 이슬람 정당들을 공공연히 이용하였다.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는 한국과 같이 국가 정체성이 강한 나라가 아니다. 그곳은 뻔잡, 발루치스탄, 신드, 서북변경주와 연방통제 부족지역에 사는 모든 주민들은 자신들의 종족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보다 더 우선적으로 여긴다. 따라서 서북변경주와 연방통제 부족지역은 아프가니스탄에 매우 큰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나라 전체가 매우 보수적인 이슬람 전통을 가지고 있고, 무슬림을 핍박하는 인도에 대해 매우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남아시아 관계에 큰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파키스탄 전역이 파슈툰과 비파슈툰이 갈등하는 분규 지역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아프팍 무장 갈등에 대한 전망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한 몸이 되다 시피 하여 아프팍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리게 된 데는 인도의 종교공동체주의의 역할이 컸다. 국가자본주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세속주의를 국가의 기틀로 삼은 인도에서 네루와 그 정당인 인도국민회의의 힘은 막강하여 40년 동안 집권당의 위치를 구가하였다. 야당은 정권 획득을 위해 소수자인 무슬림을 적으로 몰면서 종교 감정에 불을 붙였고 그 결과 1996년 정권을 획득하였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은 성전이 파괴되거나 학살을 당하는 등 매우 큰 핍박을 받았고 이는 곧 무슬림의 다수 힌두에 대한 테러로 연결되었다. 그 연속선상에서 2008년 뭄바이 테러가 터졌고, 이는 파키스탄이 직접 개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파키스탄은 더욱 더 이슬람주의를 강화하였고, 그러한 경향은 탈리반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파키스탄은 반미와 반세속의 이슬람주의가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현재 즉 정권 재창출을 노리는 정치 세력으로서의 탈리반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과거의 극단적 폐쇄적 이슬람주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 미국도 아니고, 미국의 아류는커녕 미국의 전략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 그들을 무엇이라 규정하든 탈리반 세력은 이전에 정부를 구성해 본 바 있는 분명한 실체적 정치 집단이라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그들의 우선적인 목표는 반미 전쟁보다는 정권 재창출이기 때문에 그들은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다. 음악도 못 듣게 하고, 수염을 기르지 않은 남자를 채찍으로 때리고, 간통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인 그때 그 시절의 탈리반이 아니다. 그들은 현재 카르자이 정부가 얼마나 민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어떻게 하면 그 민심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지 잘 알고 있다.
탈리반의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에 파슈툰왈리(Pashtunwali)라고 불리는 파슈툰족의 부족 전통의 성격을 강하게 혼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이슬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지체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파슈툰이라는 다수 부족의 이데올로기를 중추로 삼는 것이 확고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기 때문이었다. 두 전통의 적절한 혼합은 아프가니스탄 사회의 세속화를 봉쇄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탈리반 정부 치하 아프가니스탄이 폐쇄적 국가를 유지한 것은 바로 이러한 파슈툰왈리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탈리반의 극단적 폐쇄주의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는 상황이 변하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민심을 잡고, 그 위에서 정권 재창출을 하기 위해서라면 과거 극단적 폐쇄주의는 얼마든지 폐기 처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 평화 운동이라는 진보주의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에서 말을 한다더라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평화는 탈리반이 집권을 할 때만 가능하다. 미국이 아닌 더 큰 세력이 침략을 전쟁을 벌이더라도 아프가니스탄을 이길 수는 없다. 미국이 철수하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은 자기네 방식으로 안정된 사회를 이룰 것으로 본다. 그 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밀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미국과 베트남이 그 좋은 예다. 그 시나리오 뒤에는 완전 자본주의로 변한 인도가 있기 때문에 훨씬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프팍이 아니라 인도까지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런데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이다. 게다가 알카에다는 공공연히 미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탈리반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에 대해 유화책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것은 탈리반을 정부 권력으로 인정하는 출구전략으로 연계되는 것 말고는 다른 전략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