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체는 평화를 믿지 않는다

아체는 평화를 믿지 않는다

쓰나미 후 평화협정 체결했지만 민병대가 천지에 깔려있는 살얼음판 현장
하산하지 않은 게릴라 총사령관 무자키르의 어머니 모하마드 하산을 만나다

▣ 마네카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형, 찾아냈어. 미리 연락이라도?” “아냐, 알리지 마. 그냥 밀고 들어가자.”

“다짜고짜 찾아가면 안 된다고 할 게 뻔한데?” “어차피 서로 눈을 쳐다봐야 결판나는 거야.”

실랑이 벌일 여유가 없었다. 아체 취재 때마다 뒤를 봐준 <메트로TV> 기자 자이날이 망설임을 까뭉개고 운전기사를 닦달했다. “마네카완으로!”

아체 군사작전 중심지 록세우마웨에서 동쪽으로 56km 지점, 심팡 판트 브르흐 마을 마스짓 자믹 모스크에서 왼쪽으로 꾸부러져 전형적인 벼농사 마을 마네카완으로 접어들었다.

“여기가 무자키르 집 맞죠?” 느닷없이 찾아온 수상한 이들을 맞는 중년 사나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독한 모성애로 시치미를 떼다

“무자키르는 여기 없어요. 대체 무슨 일로?” “아, 무자키르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그 어머니를….”

이런저런 설명 끝에 무자키르의 아저씨뻘인 그 사나이는 동네 결혼식에 갔다는 무자키르의 어머니를 찾으러 나섰다. 이어 무자키르의 제수로 자신을 소개한 여성이 차를 끓여내며 “이 집 식구가 됐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형님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걸 달리 해석하면 ‘식구들과 무자키르는 전혀 교통이 없다’는 뜻이다. 이건 또 자식을 산(자유아체운동)으로 보낸 아체 가족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소식도 몰라’류의 변형이다. 인도네시아 정부군과 경찰에 시달리면서 얻은 ‘가족 방어용’ 인사쯤에 해당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제수씨 말이 사실인지 가늠하긴 힘들고 또 굳이 따질 까닭도 없지만, 내가 아는 자유아체운동은 밀선을 통해 세상 어디와도 실시간 교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분쯤 뒤에 되돌아온 아저씨는 “못 찾았어. 전화번호 남겨두면…” 하고 맥 빠지는 소식을 전했다.

“것 봐. 미리 공작을 하자고 했잖아. 만나기 싫다는 거야. 힘들게 됐어.” 자이날이 속을 긁었다.

“아냐. 어머니가 무자키르와 상의하고 결정할 거야.” “만난 적도 없다는데 상의는 어떻게 해.”

“촌스럽긴…. 다 선이 있는 거야.” 큰소리는 쳤지만 난감했다. 여전히 무자키르의 무선전화는 불통이었다. 그렇게 헷갈리던 저녁나절, 예상보다 훨씬 빨리 연락이 왔다. “내일 아침 9시에 집으로.”

9월6일 아침, 마네카완은 일찌감치 땡볕이 쪼이고 있었다. 무자키르의 예닐곱살 먹은 조카 셋이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쪼르르 달려나와 이방인을 맞았다. 경계심이 감도는 어두운 얼굴로 나선 어머니의 첫 인사도 이랬다. “1991년 아이가 집을 떠난 뒤론 연락 한번 없고, 본 적도 없어.”

남들은 다 아는 무자키르의 소식도 어머니는 ‘몰랐다’. 동네 아이들도 떠벌이는 자유아체운동(GAM) 사령관 무자키르를 어머니는 “얼마 전 방송을 보고 알았다”고 한다. 게릴라 사령관의 어머니 주바이다 빈티 모하마드 하산은 정보에 어두웠다. 시치미에 능숙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독한 모성애였다.

할아버지·아버지·남편도 ‘싸움꾼’

5년쯤 전, 니삼 산악기지에서 만난 무자키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 생각만 해도…. 가장 힘든 게 어머니야. 연락이야 할 수도 있지만, 모시지 못하니….”

그랬다. ‘어머니’는 강렬한 태양이었다. 독립투쟁도 혁명전선도 게릴라 지도자도 모두 한줌 눈물로 녹아내리게 만드는. 그리하여 대소비에트 항쟁의 영웅 마수드도 동티모르 독립투쟁을 이끈 사나나도 ‘어머니’를 그리며 눈물을 훔쳤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경계심을 풀고자 자이날이 바빠졌다. “어머니, 아무 염려 마세요. 무자키르를 처음 만난 사람도, 또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도 여기 미스터 정이고…. 망명정부 말릭 총리와 박티아르 대변인 아시죠? 그들도 미스터 정과 <한겨레21>을 잘 알아요.”

한참 만에 어머니가 조심스레 나를 쳐다보았다. “난 기자들이 무서워. 신문이나 방송도 믿을 수 없고…. 우린 늘 감시당해왔으니.” 얼굴을 매만지고 자세를 가다듬은 어머니는 어느덧 게릴라 사령관의 어머니로 변해갔다. 어머니의 입에서는 아체 항쟁사가 줄줄이 쏟아져나왔다. 그의 눈매에서는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체 항쟁 130년의 한 맺힌 투쟁사가 또렷이 불거졌다.

“외국놈들이 지배하는 한 우리 아체에 평화는 없어. 그게 네덜란드건 일본이건 인도네시아건. 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또 남편도 그 아버지도 모두 싸워왔지.”

가슴으로 선대의 독립투쟁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니, 그 ‘가문의 영광’ 속에서 무자키르가 저절로 태어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대네덜란드 항쟁 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텡쿠 우낫이며, 그 할아버지의 형제들도 모두 항쟁의 주역이었다. 어머니의 아버지 텡쿠 주바이다 모하마드 하산은 대일본 항쟁에 참여하면서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어머니의 남편인 텡쿠 마납 빈 벤티쪽도 만만찮은 ‘싸움꾼’ 집안이었다. 시아버지인 텡쿠 빈티는 대네덜란드 항쟁에 참여했고, 남편은 대일본 투쟁에서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던 마이토 대위와 함께 전선을 달리면서 아체 투쟁사를 장식했다. 자, 그 가문에서 대인도네시아 항쟁을 주도해온 자유아체운동 사령관 무자키르 마납을 배출했다는 게 그리 놀랄 만한 일이겠는가?

“무자키르도 선대의 내력을 잘 알 거야. 그러니 자연스레 인도네시아에 맞섰을 거고.”

어머니는 옛날부터 아체 사람들이 외국놈들에 맞서 싸우는 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자동’이라는 뜻이고, ‘자연’이라는 뜻이다.

남편 세상 뜨고 품팔이로 생계 유지

이렇듯 항쟁의 땅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변치 않는 세상이 원통하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늘 전쟁이고, 늘 외국놈들이 지배하고.” 어머니는 ‘평화’가 뭔지도 모르겠다며 “아체 사람들끼리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자신쪽으로 옮겨가자, 사령관의 어머니는 ‘가문의 영광’을 후다닥 접고 아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촌할매’로 되돌아갔다. 달리 고상하거나 근엄하거나 ‘체’하는 모습도 없었다. “그런 건 몰라. 내가 몇년에 났는지 어떻게 알아.” 수줍어하던 어머니는 “일본이 침략하기 꼭 15일 전에 태어났다던데”라는 말로 대신 나이를 꼽았다. 이건 올해 65살이라는 뜻이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주름살을 지닌 어머니는 한방 체질로 따지면 ‘태양인’의 굵은 뼈대와 장부 기질이 도드라지는데, 그게 타고난 건지 풍상에 다듬어진 건지는 쉽사리 알아채기 힘들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인 열네살에 스물다섯살의 남편 마납 빈 벤티를 만나 5녀3남을 낳아 기르던 그에게 느닷없이 생존과업이 떨어진 건 1981년이다. 운전기사로 일하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혼자 여덟 아이를 키우다 보니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땅을 야금야금 팔아먹을 수밖에 없었어.”

대를 이어 마네카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어머니가 팔이라도 저을라치면 질밥(무슬림 여성이 머리에 쓰는 스카프)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에서 안타까운 땅 냄새가 살포시 풍겨나왔다. “이제 남은 건 손바닥만 한 땅뿐이야. 이웃에 품팔이 나가 번 샐닢으로 겨우겨우….”

그랬다. 그 ‘농사용’ 손은 어머니의 일생이었다. 그 투박하고 거친 손이 무자키르를 키웠고, 아체 독립투쟁의 뒷밭을 갈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손에서 자란 무자키르는 어머니를 떠나 아체의 자식이 돼버렸다.

“내 속내를 어이 다 말로 표현하겠어.” 어머니는 무자키르 이야기로 넘어가자 다시 칼 위를 걷듯 조심조심 한올씩 말을 풀어냈다.

말레이시아로 떠난 뒤 리비아로 건너가…

“산에서 만난 무자키르는 말이 적고 매우 정중한 태도였는데, 어릴 때부터 그랬나요?” “어릴 땐 샤릴(Syahril)이라 불렀는데, 그때도 그랬어. 말도 없고 냉정했어.” “샵루딘 부디만 아시죠? 아체의회 의원이고 무자키르와 여기 한 동네에서 자란 선배뻘 되는. 그이 말로는 무자키르가 개구쟁이였다던데요?” “어릴 땐 다 그렇지 뭐. 근데 무자키르는 뭘 투정한 적이 없어. 옷도 먹는 것도 주는 대로….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내던 어머니의 입에서 난데없이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은 그 아이가 인도네시아 정부군 하사관 시험을 봤어. 예나 지금이나 하사관이 되려면 징병관에게 ‘뒷돈’을 줘야 하는데, 우리한테는 그런 돈이 없었어. 결국 포기하고 말레이시아로 떠났어.”

1991년, 말레이시아로 떠난 무자키르는 다시 리비아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은 뒤 아체로 되돌아와 자유아체운동 사령관이 됐다. 말하자면 징병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한 사나이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고, 자유아체운동은 빼어난 지도자를 얻었다. 반대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징병 비리로 자유아체운동 사령관을 키워낸 뒤 고달픈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희극적인가 보다! ‘뒷돈’을 대지 못한 가난이 독립투쟁가를 길러냈으니. 그리고 ‘뒷돈’을 대지 못한 어머니는 아들을 만날 수 없는 고문 같은 세월을 보내왔다.

어머니는 평화협정에 따라 지난 9월1일 석방된 1400여명의 자유아체운동 조직원들 이야기가 가슴에 사무치는 모양이었다. 특히 2003년 평화협정 대표단 가운데 체포됐다가 같은 날 석방된 테우쿠 카마루자만, 암니 빈 마르주키, 텡쿠 우스만 람포 아웨의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의 얼굴이 이내 어두워졌다.

“우리 아이도 곧 돌아올 수 있으려나. 신변은 안전하겠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정치나 역사적 의지 같은 것들과 본디부터 병립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을 향한 굳은 믿음도, 대물려온 가문의 영광인 투쟁사도 모두 한 자락 그리움 앞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냉정하면 연락 한번 없고…. 우리 마을에도 많은 이들이 하산했다는데….”

어머니의 말마따나 지난 8월15일 평화협정을 맺자마자 많은 ‘산사나이’들이 마을로 내려왔다.

마네카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게릴라들이 마을로 내려와 평화를 ‘염탐’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비에룬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땅을 마련해 ‘투항자’들의 사회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자유아체운동 ‘골수분자’ 무자키르 같은 지도부는 구체적 전망이 없는 실정이다.

어머니는 평화협정 뒤부터 달라지고 있는 분위기로 아들을 만날 기대감에 부풀어 있지만,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 현실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정치야 모르지만, 아무튼 믿을 수 없어. 일본놈 때나 수카르노 대통령 때나 수도 없이 그런 말들이 나돌았지만, 한번도 진짜는 없었어.” 한평생 분쟁을 겪어온 아체 어머니들에게 ‘평화’란 그림의 떡일 뿐 단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전시용이 아닌가 싶다. “우리 아이도 돌아와야 오는 거지, 그 전엔 난 아무것도 믿지 않아. 내 손으로 만져보기 전엔.” 파르르 떠는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던진 말이 도리어 염장을 질렀다. “어머니, 혹시 무자키르 사망설이나 총상설은 들어보셨나요?” 어머니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없어. 그런 이야긴 한번도 들어본 적 없어.” 긴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내 마음속에는 미안함과 의심이 마구 뒤섞여 돌아다녔다. ‘말이 지나쳤나?’ ‘인도네시아 전역에 파다했던 무자키르 ‘사살설’을 과연 어머니가 몰랐을까?’

“난 마음을 드러낼 수 없어”

2003년부터 시작된 아체 계엄 군사작전이 한창이던 지난해, 정부군이 흘린 ‘무자키르 사살설’이 한동안 큰 화제가 됐다. 물론 그 뒤 정부군이 오보라고 발표했지만.

한참 망설이다가 당시 무자키르와 함께 현장에 있었던 게릴라를 통해 들은 실상을 어머니께 전했다. “무자키르를 사살했다는 건 거짓 선전이지만, 무자키르가 총상을 입은 건 사실이에요. 그 총상으로 아직도 한쪽 다리를 좀 절고….”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는 어머니에게 창 너머 뛰어든 햇빛이 대답을 재촉했다. “몰라. 난 아무것도 몰라.” 독백처럼 몇 마디를 늘어놓던 어머니의 눈에서 진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감긴 두 눈에서 흘러내린 그 눈물의 정체를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인지, 아니면 쓸데없이 아들의 아픈 사연을 되새김질시킨 나에 대한 증오인지. 그럼에도 내 못된 직업의식은 카메라로 손이 갔다. 어머니는 눈물을 거두며 말했다. “난 마음을 드러낼 수 없어. 그럴 의미도, 이유도 없겠지만.”

답답하고 어색해진 나는 어머니 손을 잡았다. “알아요, 그 마음. 무자키르는 무사할 거예요.” 어머니는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바람은 하나뿐이야. 그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서 푹 쉬었다가 메카로 순례를 떠나는 거야.”

한나절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일행을 배웅코자 마당으로 내려선 어머니의 바주 빤장(무슬림 여성용 드레스)이 유난히 눈부셨다. ‘나비의 꿈’이런가? 어머니의 치마폭으로 자유아체운동 전사들의 얼굴이 서물서물 기어나왔다.

이 여인, 주바이다 빈티 모하마드 하산은 아들·딸을 산으로 보낸 수많은 아체 어머니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뿐, 그곳에 무자키르의 어머니는 없었다.

아직도 아체는 불꽃튀는 땅이었다

“평화협정 뒤에도 여전히 군인과 경찰이 찾아와서 무자키르가 어딨냐고 캐묻고 감시하는데, 난 말야 그 민병대라는 게 염려스러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아직 아체는 평화의 땅이 아니다. 이제 기껏 평화를 말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2002년 타켕온의 합동보안위원회(JSC)에 불을 지르고 요원들을 폭행해 휴전협정을 작살냈던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가 온 천지에 깔렸고, 정부군은 자신들이 키운 민병대를 여전히 지원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어머니의 손을 오랫동안 잡고 깊숙이 고개 숙여 작별인사를 나눴다. 마치 무자키르 ‘대역’이라도 하듯이. 그러고는 세상이 모두 어머니와 아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거듭 깨달았다.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 동네 날머리에서 오토바이 두대에 나눠 타고 순찰을 도는 인도네시아 해병대원 넷과 마주쳤다. 급히 차를 어머니 집쪽으로 돌렸다. 다행히 해병은 어머니 집을 스쳐 지나갔다.

아직도 아체는 군인과 시민이 서로를 째려보는 불꽃 튀는 땅임이 틀림없다.

산사나이들의 미래는…

평화협정 체결 뒤 하산한 게릴라들, 아직 긴장감은 높아

평화협정을 체결한 직후, 이미 ‘산사나이’들이 하산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남부 망가맛산쪽에서는 적어도 60여명이 하산해 인도네시아 정부군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는 말도 들려왔다.

인도네시아 정부군 대변인 에리 수티코 중령은 “이게 바로 우리가 원했던 거다”며 흥분했다. 말만 듣고 보면 ‘평화’란 게 진짜 코앞까지 다가온 기분이 들만도 했다.

찾아나섰다. 자유아체운동 산악 본부쪽이 마련해준 선을 따라 록세우마웨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해변가에 자리잡은 반다마센 마을로 들어섰다. 약속된 동네 찻집에 앉자마자, 경주용 오토바이가 날아왔다. 첫인상에 ‘산사나이’임을 짐작케 하는 건장한 암리(33)와 모하맛(24)이 긴장끼 도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내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구경하러 빼곡히 몰려들었다.

“왜 이리 일찍 하산했나?” 가장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모하맛은 “가족들이 내려오라고 해서”라는 매우 ‘비정치적’이고 ‘비전투적’인 말로 대꾸했다.

“각자 알아서 하산한 건 아닐 테고?” “지도부에서 결정했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내려왔다.” “하산했으니, 뭐 할 건가?” 암리가 “우린 자유아체운동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고 되받았다. “그런 거 말고, 개인적으로?” “아직 생각해본 것도 없고, 모른다. 내려와 보니, 우리 집은 불타버렸고 가족들은 다 떠나버렸고. 내가 산으로 떠난 뒤, 가족들이 군인들에게 너무 시달려….” “여긴 몇명이나 내려왔나?” “오토바이 6대.”(오트바이 1대란 말은 게릴라 2명이란 뜻이다.)

암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굉음을 내면서 오토바이 4대가 달려왔다. “여긴 어떤가. 다른 쪽에서는 하산한 게릴라들과 정부군이 차도 마시고 노는 모양인데?” “지역 상황에 따라 다 다르다. 여긴 그런 것도 없고, 아직 긴장감이 높다.”

관중들이 끼어들었다. “어젯밤에도 사복들이 찾아와서 게릴라들 행적을 꼬치꼬치 캐물었어.” 뒤늦게 말판에 끼어든 니악(42)은 “낮엔 별 탈 없는데, 밤이 문제다”라며 걱정했다. “무기는? 물론 들고 내려오진 않았겠지?” “그야 당연하지.”

이렇듯, 3주 전까지만 해도 치고받던 자유아체운동과 인도네시아 정부군은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든 ‘평화’를 서로 조심조심 염탐하고 있다. 종일 낚시로 때운다는 암리는 “지금 이 순간만은 총보다 낚싯대가 더 좋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과연, 아체의 평화는 오고 있는가? 하여, 산사나이들이 총 대신 쟁기와 어망을 들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아직 아체의 평화를 말하기엔 이르다는 느낌, 그 하나다. 배신과 좌절로 얼룩진 아체 분쟁 130년 역사가 여전히 아체를 맴돌고 있는 탓이다.

회담 대표단, 얻어터지다

석방된 테우쿠 카마루자만 2003년 평화회담 자유아체운동 대표

지난 8월15일 평화협정에 서명한 인도네시아 정부는 양해각서(MOU)에 따라 ‘평화 건축’의 첫 삽질에 해당하는 자유아체운동 게릴라를 비롯한 그 관련자 1424명을 전원 석방했다.

8월 말로 석방 시기를 예상하고 있던 기자들은 8월30일이 지나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법무부는 “대통령 서명 절차가 늦어졌을 뿐 과정에 차질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던 8월31일 새벽 3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전원을 석방했다. 기자들은 헛물을 켜고 말았다.

9월1일, 급히 아체로 달려갔다. 형무소 대신 평화협정 뒤 게릴라들이 판치는 반다아체의 술탄 호텔에서 카마루자만을 만났다. 그는 “출옥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당신 쪽지를 받고는 형무소 문을 나서면서 두리번거렸는데, 아무도 없더구만?”이라며 반갑게 손을 잡았다.

그랬다. 본디 반둥의 수카미스킨 형무소에서 출옥하는 그를 현장에서 잡을 계획이었다. “얼굴이 그 전보다 좋아 보인다”는 인사에, 카마루자만은 “감옥에서 보고 들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며 쓰나미 걱정으로 되받았다. 커피가 한잔씩 돌고, 2003년 평화회담 대표로 참가했다가 인도네시아 정부에 체포·투옥당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화제에 올랐다.

“오, 그 황당한…. 그게 ‘불법’이었지. 평화회담 조건 중에 회담 대표자를 해코지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었거든. 근데 5월18일 결렬되자마자 아체에서 경찰정보국에 끌려갔던 거지.”

그 무렵 인도네시아 정부는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 회담이 결렬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5월19일 자정을 기해 아체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곧장 특전사(코파수스)와 해병대를 비롯한 중무장 최정예 특수전 병력 4만6675명을 투입해 1975년 동티모르 공격 이후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에 돌입했다. 그 군사작전에는 해군이 23대의 공격함을 파견했고, 공군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 분쟁에 F-16 최정예 공격기를 띄우는 기록을 세웠다.

그날 대표단에 참여했던 5명과 함께 끌려간 카마루자만은 5일 동안 ‘신나게’ 얻어터졌다. 고무봉으로 머리를 맞고, 총으로 협박당하고, 잠을 못 자고…. 대개 ‘고문 목록’에 등장하는 것들을 모조리 당한 뒤, 보안법 위반으로 13년형을 받았다. “2년3개월 동안 수도 잘했다”고 낄낄대는 이 속없는 사나이는 때리는 놈도 없고 동기들도 잘 대해주던 ‘빵’에서 “호강했다”고 한다.

그는 석방된 지 하루 뒤라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지만, 이미 ‘유명세’로 보나 감방에서 쌓은 ‘내공’으로 보나, 평화협정이 일정대로 잘 굴러간다면 정치판 전면에 나설 주요 인물로 꼽히고 있다.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다면 내 역할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무기는 없고 정신력으로 대항”

사트리아 인산 카밀 반분리주의 민병대 사령관

1999년 9월 동티모르, 그 불바다를 기억했다. 2002년 12월 아체 중부 타켕온, 그 광란의 현장을 기억했다. 모두 정부군이 조직하고 지원해온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가 저질렀던 일이다. 요즘, 아체의 평화도 그 민병대들의 준동 유무에 달렸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북부 아체의 대표적인 민병대 베란타스는 군사작전 중심지 록세우마웨하고도 그 총사령부 마당 안 바로 옆 건물에 사무실을 꾸렸고, 그 주위엔 늘 수십명의 정체불명의 젊은이가 진을 치고 있다.

사트리아, 여기 사령부 내에 터를 잡았다는 건 정부군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절대 아니다. 우린 순수 민간인들이고, 자원자들로 조직했고, 회비로 운영하는 단체다.

군사훈련은 어떻게 받았고, 무기는 어디에 감춰뒀나.

=군사훈련 같은 거 받은 적도 없고, 무기도 없다. 우린 전투조직이 아니다.

무기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은 이들을 어떻게 민병대라고 할 수 있나.

=오직 정신력만으로 대항한다는 게 우리 목표다.

어떤 정신력으로? 자유아체운동은 무기를 지녔는데.

=아체의 독립을 반대하고 평화를 바란다는 믿음으로. 그래서 자유아체운동이 우리 조직원 11명을 살해하는 동안에도 우린 냉정하게 평화를 유지해왔다.

분쟁의 당사자도 아닌 민병대가 어떻게 평화를 말하는가.

=아체에 독립파 자유아체운동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린 인도네시아 통합파도 있다는 걸 증명한다. 해서 평화협정을 지지하며 자유아체운동에 협력하자는 전갈도 보냈다. 아직 답변은 못 받았지만.

동티모르 민병대를 알고 있겠지? 민병대가 설치면 아체도 그 짝 나는 것 아닌가.

=동티모르건을 여기 아체에서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럼, 2002년 휴전협정을 끝장냈던 아체 중부 타켕온 민병대는.

=우린 타켕온 민병대들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베란타스는 언제 만들었고 조직원은 몇 명이나 되는가.

=계엄군사작전 기간 중인 2003년 11월12일에 창설했고, 록세우마웨를 비롯해 북부지역 850개 마을에 모두 8217명이 있다.

그 많은 수로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조직원들이 정부군과 경찰 작전에 협조하는 것뿐이다. 직접 싸우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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