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요원한 이라크 시아파의 결속

테러와의 전쟁 5주년
아직은 요원한 이라크 시아파의 결속

새로운 주제를 찾는 일부 매체들은 이란이슬람공화국과, 레바논 및 이라크에 산재한 이란 지지자들을 하나로 묶는 ‘시아파 축’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만으로 동질적인 총체를 정의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근동 지역을 하나로 묶는 것으로도 불가능하며, 해당국가 각각에서도 이러한 동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라크 시아파가 보여주는 다양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라크에서는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광신적인 공격으로 매일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폭력의 강도는 점령군을 겨냥한 작전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가로지르는 티그리스 강이 두 진영을 가르고 있는데, 강 좌안은 대부분 시아파(알-루사파) 지역이며, 강 우안은 주로 수니파(알-카르크) 지역이다. 또 종교적 색채가 뚜렷한 카디미야(시아파) 구역과 아다미야(수니파) 구역 등 여기저기에 타 종파에 둘러싸인 고립지역도 존재한다. 전선의 형성을 가능하게 만든 이러한 집중현상은, 수니파 무장단체 대표 자이시 안사르 알-수나의 표현을 빌자면 “더 폭력적이고, 더 구조화된 전투를 예고”하고 있다.(1)

이라크 및 외국의 지배적인 해석에 의하면, 두 ‘공동체’가 권력 장악을 위해 서로 대결하고 있다. 한쪽에는 구제도에 종속된 채 중앙권력 독점을 상실한 아랍의 수니파 ‘공동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전통적으로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다가 미국의 침략 덕분에 국민 다수파로서의 자기 목소리를 내며 역사적 기회를 맞이한 것으로 보이는 아랍의 시아파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단순명쾌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라크 정치 현장의 주체들이 추구하는 복잡한 목표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무엇보다도, 공동체라고 하기에는 사실 너무도 이질적인 실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슬람 공동체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역동성이 전혀 없다.(2)

시아파를 동질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유혹은, 이라크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보여주고 이란에게는 충성을 이미 서약한 그들의 태도에 관한 최근 토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요르단의 압달라 2세 국왕은 2004년 12월 ‘증대하는 시아파’라는 표현을 구사했다. 그는 이란이 이끄는 이 시아파들을 수니파 이익을 위협하는 ‘제5열’로 소개하면서 걸프 만,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시아파들을 구체적 예로 들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이보다 한 술 더 뜨며 역사적으로 볼 때 아랍세계의 시아파들이 자기 조국보다 이란을 더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인기 있는 연구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개념화하여 일반화시키기까지 한다. 그중 한 명인 미국의 떠오르는 별 발리 나스르는 2005년 이라크 선거 때 시아파가 승리한 것이 지역 내의 모든 시아파를 동원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한다. 즉 이란의 야망에 기계적으로 봉사하는 시아파가 공동의 정체성과 동일한 요구를 바탕으로 그들을 결집했다는 주장이다.(3)

아랍과 페르시아 사이의 '단층'

다른 학파는 강력한 ‘이라크 민족주의’ 테제를 내세우면서 위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이란의 한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필자들에게 털어놓았다. “시아파간의 연대는 아랍과 페르시아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단층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 시아파가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에 이란 시아파와 싸운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 같다. 이 전쟁은 20세기 후반기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었다. 이라크에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정보에 따르면, 이라크인들, 심지어 이란에서 망명생활을 보낸 이라크 사람들조차 이란의 영향력이 조국 이라크에 미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토론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시아파의 부흥에 대한 파악은 미국의 대 아랍정책, 아랍 국가들, 특히 이란의 모든 야망을 아주 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걸프 만의 왕정국가들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또 보수파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든 수니파 교도들 사이에서 시아파에 대한 증오심을 점차 확산시키고 있다. 이라크의 수니파 성직자 대부분은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이라크에서 사망한 알-카에다 지도자) 같은 지하드주의자들을 지칭할 때 경멸적인 의미로 ‘라와피드(rawafidh)’(‘배교자’란 의미)란 용어를 오랫동안 사용했는데, 이제는 시아파 교도들에게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란과의 갈등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이라크 ‘민족주의’란 용어는, 비록 그것이 여러 요인들 중의 하나를 설명해준다 할지라도 이라크 시아파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단어가 아니다. 이란과의 갈등 당시까지만 해도, 20세기 전반기에 시작된 민족 구성의 이행과정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1970년대에도 이라크 체제는 자원을 남부에 적극적으로 분배했다. 그 결과 알-디와니야나 나시리야 같은 남부 도시들은 경찰과 군대에 많은 인력을 제공한다. 농민들은 당시 바스(Baas)당 쿠데타 직후 실시된 대대적인 농업개혁을 적극 지지했다. 바스당이 추진한 진보정책들은 가난한 수많은 시아파 교도들로부터 체제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또 당시의 전체주의 체제는 나자프 시의 종교단체들을 모두 해체했고, 바스당과 경쟁이 될 만한 정치세력인 공산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들의 계획들을 모두 제거했다. 5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자랑하는 민중 군대에 바탕을 둔 강압정치 역시 이란에 맞서 시아파를 동원할 때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91년의 전쟁과, 전쟁에 뒤이은 봉기들은 집단적 정체성의 분화를 가속화시켰다. 즉 자율권 획득, 내전, 쿠르디스탄에서의 경제 호황이 뒤따라왔고, 가족 조직망과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에 기초한 약탈 및 ‘특권’ 경제에 유리하던 공급자 모델 경제가 포기된다. 이러한 변화는 체제가 제공한 사회적 상승 가능성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던 계층인 시아파 공무원, 군인, 소상인들에게 특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수니파 아랍인들이나 기독교도들이 이라크나 외국에 거주하는 자신들의 가족 조직망을 통해 자원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조건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변화가 그들에게 유리했던 것도 아니었다. 남부지역에서는 1991년 봉기를 일으켰던 시아파교도들에게 경제적인 보복을 가하는 정책이 실시되었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의 빈곤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받는 ‘시아파 공동체’란 용어는 수니파 체제의 전복으로 묘사되는 2003년 체제 몰락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 행정부가 마련한 정치적 프로세스 내에서 자리 배분이 갖는 당파적 성격은 ‘희생자들의 경쟁’ 형태로 표출되었다. 각 실권자들은 자신들이 감내했던 고통의 크기를 바탕으로 권력에의 참여 정도를 결정했던 것이다. 압델 아지즈 알-하킴이 이끄는 이라크이슬람혁명최고위원회(ASRII) 지지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지도자 가정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온 사실과 1991년 봉기에서 알-하킴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실을 드높이 샀다. 이와 반대로 강경파 지도자 모크타다 알-사드르를 따르는 사람들은 알-하킴이 외국으로 망명한 점, 이란을 대신하여 이라크 전쟁 포로들을 고문한 점, 그리고 1991년 이란의 철 이른 후퇴 때문에 반란자들을 풀어준 사실을 비난했다. 반면 그들은 체제에 유리하게 봉사했고, 체제에 유리하게 자신들 진영에서 수많은 첩보원들을 충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라크 역사를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이분법에 따라 재해석하는 것은 ‘이라크 민족주의’에 언제나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출신이 여러 종류인 이라크 국민들은 공통분모가 없는 실정이다. 왕정의 종식(1958), 바스당의 권력 장악(1968), 걸프 만 전쟁(1991), 미국과 영국의 무력 개입(2003) 등 이라크 역사의 공동 기준점들은 당파간의 분열을 반영하는 쓰디쓴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가자원은 더 이상 재분배되지 않고 있으며, 독점화 및 사기업화가 파렴치하게 진행되었다. 여러 학교들은 분할 해체되어 이슬람학당들로 변신했다. 연설 속에서는 분파를 초월하는 이라크에 대한 모호한 정의만 존재한다. 실제 선거에서 나타난 반응이나 터무니없는 폭력, 족벌주의, 유례없는 부패를 보면 충성의 내용이 전혀 민족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황이 이란을 ‘결점을 가진’ 국가, 혹은 이라크 시아파들 입장에서 ‘선택을 통한’ 국가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이라크 남부에서는 이웃 페르시아 국가에 대해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강경파 지도자 알-사드르는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타니가 이란 태생이라고 비방하고 있다. 또 알-아마라 시의 주민들은 알-쿠트 시 사람들을 아주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페르시아인들’이라고 부르며 즐거워한다. 이란 출신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그의 계승자인 알리 하메네이의 초상 사진들이 바그다드에서 급증하고 있어도, 시아파 정치현장의 실권자들 중 극소수만이 이슬람공화국의 기둥인 이란의 ‘이슬람법학자 통치론(velayat-e-faqih)’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란 태생이지만 현재 이라크 최대 성지인 나자프에 있는 아야톨라 알-시스타니는 이란 동료들에 대해 특정한 경계선을 넘는 것을 피하며 언제나 외교적인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단호하게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경전 해석의 출처에 있어서 그는 ‘안내자’인 아야톨라 하메네이보다도 자신이 더 중요하게 간주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란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자기가 가진 이라크 패를 자신만만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란 정부는 ASRII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알-사드르를 포함한 모든 정치 주체와 관계를 맺고 또 이들을 보다 잘 유도하기 위해, 동맹자들이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특히 지방 차원에서는 더 적극적이다. 이란 정부는 자기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소규모 집단들, 예를 들면 바소라에 있는 타르 알라와 같은 단체를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란은 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대량으로 지원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레바논 헤즈볼라에게 지원했던 대전차무기를 반란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나자프에서는 하메네이 이슬람학당이 장학금과 도서 지원 등을 늘이고 있다. 또 알-알람 위성채널은 전문성으로 인해 이라크 시아파들을 시청자로 대거 확보하고 있다.

이란은 통합자가 될 수 있을까

이란은 세련된 이미지를 가꾸기 위해 다른 방식, 예컨대 인도주의적 활동이나 경제 투자 등을 구사하고 있다. 걸프 만 왕정국가들과는 달리 이란이슬람공화국은 여행객들과 순례자들에게 국경을 대폭 개방했으며, 자신들의 상대적 안정과 번영을 방문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더구나 방문자들은 이란에서 생각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란의 전략은 조건반사적인 충성이 아니라, 다양한 집단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시아파 교도의 이해를 구하는 전략에 근거하고 있다. 시아파는 사회적 분열이 너무 깊어, 나자프의 종교지도자, 종교 도시의 상인들, 도시의 중산계층 등 보수 시아파와 알-사드르를 추종하는 혁명 대중 시아파가 서로 적대하고 있다.(4)

이라크 남부의 각 도시들은 나름대로 독자성과 쟁점을 가지고 있다. 별 문제가 없는 지방 소도시인 알-쿠트는 ‘대(大)남부 연방’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알-시스타니와 ASRII가 장악하고 있는 나자프 성지는 여러 실권자들이 지속적으로 탐내는 도시이다. 바소라 시는 자원, 특히 석유 밀수자원을 장악하기 위해 여러 ‘이슬람 정당들’과 그들의 민병대가 죽음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한마디로, 수니파와 시아파간의 대결이 각 진영의 외형적인 결속을 다지는 수도 바그다드로부터 멀어질수록 시아파 교도들 간의 폭력 가능성은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실정 때문에 개혁과 주도권을 둘러싼 이라크 내의 수많은 논의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 피터 할링은 국제위기그룹(ICG) 내에서 이라크, 시리아 및 레바논 문제를 담당하고 있으며, 하미드 야신은 파리정치학교(시앙스포) 박사과정에 있다.
(1)주요한 무장 적대세력의 유형에 대해서는 International Crisis Group, “In their own words : Reading the Iraqi insurgency”, Middle East Report, n˚ 50, Hopewell(미국), 2006년 2월 15일자 참조.
(2)아흐마드 살라마티안(Ahmad Salamatian),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시아파」,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7월호 참조.
(3)Vali Nasr, “When the shiites rise”, Foreign Affairs, vol. 85, n˚ 4, 뉴욕, 2006년 7-8월.
(4)International Crisis Group, “Iraq's Moqtada Al-Sadr : Spoiler or stabiliser?”, Middle East Report, n˚ 55, Hopewell(미국), 2006년 7월 11일자 참조.

피터 할링 하미드 야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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