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지역 국가보안법과 인권탄압의 실상 –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 퍼옴

아시아지역 국가보안법과 인권탄압의 실상

1. 들어가며
지난 4월말 말레이시아에서 10명의 활동가가'국내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 ISA)'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들의 구속 사유는 앰네스티에서도 양심수로 지정한 바 있는 안와르 이브라힘 전부총리 유죄판결 2주년 집회를 계기로 시작되었다(1). 재판 없는 감금, 임의동행, 조사기간에 대한 자의성 등 말레이시아 국가보안법은 악법으로 이미 정평이 나있지만 이는 말레시아에만 국한된 특수 케이스가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일반화된 경향을 보이는 국가보안법의 실상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시아 지역 국가보안법은 식민지 종주국의 군사주의적/제국주의적 지배체제 속에서 태동하였다. 1900년대 중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진주하고 있었던 프랑스, 일본, 포르투갈, 미국, 영국 등 식민지 열강은 자국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독립 후 그 잔재를 기반으로 들어선 군사/엘리트 독재정권은 권력 유지와 정치적 반대세력 억압을 위해 국가보안법을 사용해왔다.
아시아 지역 대부분의 국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이름을 달리하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지만, 그 명분은 때와 국가적 특수성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2)이 북한이라는 “현실 공산주의 적국”에 맞서야 할 필요성이 명분이라면 중국의 경우는 “반공주의자” 혹은 “반혁명분자”를 처단할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식이다. 또한 국가안보는 “조국의 발전과 개발”의 명목으로도 의미확장되어 독재정권과 결탁한 독점재벌이나 기득권 세력의 권력 유지에도 매우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 기본 인권은 물론이거니와 노동권에 대한 탄압이 국가보안법의 이름을 빌려 자행되었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즉, 격렬한 체제 우월성 경쟁이 끝난 냉전 이후에는 그 대상이 공산주의자 혹은 반공주의자에서 민주화 운동과 권리투쟁을 벌이는 교수, 학생, 노동자, 분리주의 운동세력 등으로 변모하였으며 이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쓰이고 있다(3). 즉, “국가안보” 그 자체는 절대적으로 정의되거나 가치화될 수 없는 하나의 기득권 세력의 권력유지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근거로 작용해 왔다. 따라서 “국가안보”라는 명분으로 어떤 형태든지 간에 경제, 사회적 인권을 제한하고 나아가서 탄압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정의는 국가안보라는 목적하에 제정된 정치적 입법이라는 협의의 개념을 뛰어넘어 '법의 이름에 관계없이 국가안보 또는 사회안전을 진작시킨다는 명목으로 제정되어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는 법률 및 제도' 모두를 의미하며 그런 법률을 적용하고 집행하기 위한 특별한 수사기관과 재판기관을 포함한다는 광의의 개념(4)으로 확장하려는 시도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아시아 국가보안법의 전개과정과 현황

1980년대, 소위 레이건/대처주의 등 신보수주의가 대두하던 시기 한국, 필리핀, 타이완, 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각국에서는 개발독재 속에서 억눌렸던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다양한 수위에서 전개된다. 이때 역시 국가보안법은 미국 등 선진자본/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이권 유지와 이에 결탁한 국내 독재 정권에 의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기능했음은 물론이다. 동시에 아시아 지역 내 인권탄압의 실상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계기로 작용하였다. 당시 아시아 각국 정부가 양심있는 국제시민사회의 따가운 눈초리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문화적 특수성”이라는 것이었다. 소위 “이만큼의 경제성장도 박정희 독재덕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한국 사회 우익의 이데올로기로 저변에 깔려 있는 듯이, 경제적 낙후성을 시급히 극복해야 할 필요성이 아시아 지역에 고유한 문화와 병합되었다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서구에서 아시아 신흥개발국의 경제성장의 “저력”을 “아시아적 가치”의 발현으로 분석해대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인권의 논의가 점차 당위로서의 “보편적 인권”의 개념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이러한 주장이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유교자본주의에 기반한 독재의 합리화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2-1. 아시아 각국 국가보안법
아시아 각국 국가보안법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리된다. 첫째는 공산주의자 혹은 반공주의자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데 목적을 둔 것으로 중국의 (Anti-반공산주의) 보안법,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국내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 한국과 인도의 국가보안법(National Security Act) 및 인도의 공공안전법(Public Safety Act) 등이며 태국의 반공법(Anti-Communist Activisties Act)(5)과 대만의 국가안전법 또한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반공주의 국가보안법이다. 둘째는 군사정권을 유지(버마, 태국, 인도네시아, 파키스탄)나, 분리주의운동에 대처하기 위한 것(인도)이다. 구체적으로 몇 개 국가의 국가보안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는 1971년에 독립했고 헌법은 1972년에 만들어졌다. 원래 헌법은 다양한 수준의 인권(생명, 의사표현, 자유, 안전의 권리 등)을 보장하고 있었고 이들 기본권에 대한 어떠한 제한이나 규제도 금지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수많은 군사 쿠테타가 발생했고 헌법은 수차례 개정되었다. 이들 기본권에 대한 보호는 폐기되었고 “긴급권한” 규정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방글라데시 헌법은 대통령이 국가 긴급사태를 선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대통령이 “방글라데시 경제 안보가 전쟁이나 외부의 침략, 혹은 내부 혼란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간주하면 언제든지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면 대통령은 기본권(이동, 집회, 결사, 언론, 출판의 자유)을 박탈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거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특별권한법(Special Powers Act, 1974) : 소위 범죄예방계획이자 정부가 명령한 지역에 대한 보안부대의 통제권을 부여하는 범. 6개월 동안 재판없이 구속할 수 있다.
특수보안군법(Special Security Force Ordinance, 1986) : 대통령, VIP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창설된 대통령 직속 특수보안군의 권한을 규정한 것으로 위협인물이라 판단되는 사람을 살해할 수도 있고, 그것에 대한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테러진압범(Suppression Terrorists Activities Act, 1992) : 이 법은 평화적 시위를 탄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고소도로 봉쇄, 교통 방해 등을 하면 최소 5년에서 사형까지 언도받을 수 있다.

<버마>
1962년 정권을 장악한 버마 군사독재정권은 식민지 치하의 법제도와 그 후 군법을 국가보안법에 그대로 사용하면서 국민들을 탄압하고 있다. 1988년 발표된 계엄령은 의회폐지, 파업금지, 다섯 명 이상의 집회 금지, 통행금지, 군부에 대한 공개적 비판 금지 등 막강한 최악의 권한을 규정했다.
국가보위법(State Protection Law, 1975) : 국가를 방해(molest)하거나, 괴롭히면(annoy) 재판없이 5년간 구금될 수 있다. 긴급조치(Emergency Provision Act, 1950) : 국가 군사조직과 정부 공무원의 건강, 품위, 존중감을 헤치거나 정부에 대한 비방을 하고 다닐 경우 7년간 구속될 수 있다.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매우 다양한 유형의 국가보안법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국내보안법이다. 국내보안법은 정구 관료가 (1)국가 안전을 위해, (2) 필수적인 국가기간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3) 국가 경제를 존속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재판없이 구속할 수 있다. 장관에 의해 구속이 결정되거나 국가 안보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해 경찰관은 영장없이 구속할 수 있다. 재판에 회부되기 이전에 60일간을 구속할 수 있고, 2년까지 무한정 연기될 수 있다. 또한 “예방적 차원의 구금”이라는 이름으로 가택연금, 대중 연설 금지, 출국 금지 등의 권한도 주어져 있다.
말레이시아는 또한 국내보안법 이외에 국민에 대한 정부의 통제 권한을 폭넓게 보장하고 있는 다른 법률들을 다수 가지고 있다.
마약단속법(Dangerous Drugs, 1985) : 재판없이 구금.
긴급명령(Emergency Ordience, 1969) ;
치안법(Police Act) : 허가없는 대중 집회 금지.
공무상기밀법(Official Secrets Act) : 정부가 기밀로 분류한 정보에 대해 출판물로 공표할 경우 구속된다.
사회단체법(Societies Act) : 정치적, 비정치적 조직을 규제하는 법.
대학법(University and Univerity College Act) : 학자의 정치활동 금지법, 학생의 사회단체, 정당, 노조 가입 금지법.
노동조합 및 산업관계법(Trade Union Ordinance and Industrial Relations Act) :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쟁의행위를 규제하고 제한하는 법률

<필리핀>
1972년부터 1986년까지 계속된 마르코스 독재정권 하에서 극도로 강화된 국가보안법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하고 권리를 빼앗고 헌법상의 민주적 권리를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다. 1986년 독재가 종식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가보안법상의 악법 조항들이 많이 제거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보통 의회를 거치지 않는 집행명령(Executive Orders)를 통해 재판 전 피의자에 대한 구속 기간을 두 배 연장할 수 있는 권한 등이 그것이다. 1987년에 제정된 현 필리핀 헌법은 많은 인권 보장 조항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법과정에서 상당히 약화되었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준군사조직을 증강하거나 주민등록증을 도입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좌절되었다.

<태국>
태국의 군부는 태국의 정치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1932년부터 군부가 관여한 20개의 쿠데타가 성공을 했기 때문이다. 1914년에 제정된 계엄령(Martial Law Act)은 일종의 긴급사태권으로 “국내외의 위협세력을 막아내고 평화와 진설를 유지하기 위해 국왕이 계엄령을 포고하면 군법이 권한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군부는 국가에 대한 적대적이라고 판단되면 7일 동안 구속 심문할 수 있으며 조사가 충분할 때에만 경찰서 유치장으로 보내진다.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의 국가보안법 남용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 시절 수백 권의 책이 출판금지 되고 50여 개의 일간지와 주간지가 폐간 당했고, 정부 정책을 비난한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다.
1953년에 제정된 반국가전복법(Anti-Subversion Act)구속과 사형을 포함한 처벌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군부에 의해 집행된다.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한 이후 이 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개정된 형법에서 ASA의 조항중 다수를 포함하고 있어 우려가 되고 있다.

2-2. 국가보안법과 세계 인권 규약들
아시아 각국에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6)과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ESCR)(7)모두에 가입한 국가는 94년 현재 한국뿐이다. 그러나 법 자체가 이러한 국제 규범을 위반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그러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예는 흔하다.
유엔의 모든 회원국이 서명한 세계인권선언의 관련 조항은 모든 사람이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헌법 또는 법률이 부여하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권한을 가진 국내법원으로부터 유효한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갖는다. (제8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형사상의 책임에 관하여 재판을 받게 될 때, 독립되고 편견없는 법정에서 공정하고도 공개적인 심문을 완전히 평등하게 받을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될 권리를 갖는다. (제10조, 11조)
·누구도 자신의 사생활, 가족, 집 또는 통신에 대하여 자의적인 간섭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명예와 신망에 대해 공격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간섭이나 공격에 대하여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제12조)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이 권리는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가질 자유와 모든 수단에 통해서 국경에 상관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받고 전할 자유를 포함한다.(제19조)
·모든 사람은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제20조 1항)
·모든 사람은 자국에서 동등하게 공무를 담당할 권리를 가진다.(제21조 2항)

세계인권선언은 이와 같은 권리에 “아무도 자의적인 체포, 구금 또는 추방을 당하지 않는다”(제9조)고 덧붙이고 있다.
ICCPR은 이러한 권리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체포된 사람은 누구든지 체포시에 체포이유를 통고받으며, 또한 그에 대한 피의 사실을 신속히 통고받는다.(제9조 2항)
·체포 또는 억류에 의하여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은 누구든지, 법원이 그의 억류의 합법성을 지체없이 결정하고, 그의 억류가 합법적이 아닌 경우에는 그의 석방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법원에 절차를 취할 권리를 가진다.(제9조 4항) 불법적인 체포 또는 억류의 희생이 된 사람은 누구든지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제9조 5항)

ICCPR는 개인의 권리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제한될 수 있다고 열거하고 있다.
1. 법률에 의하여 제한되어야 한다.
2.”국가안보, 공공질서, 공중보건 또는 도덕 보호의 필요”(제19조)

국가보안법 탄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 중에서 일부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보안법은 흔히 국가의 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범죄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같은 범죄를 다르게 다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차별의 근원이 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흔히 어떠한 민주사회도 범죄로 치부하지 않는 사안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모호한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어 위반 여부를 가리는 데 있어 혼란을 낳는다. 따라서 모순적인 법집행을 낳고 국가에 의한 남용과 사법부의 불합리한 판단을 발생시킨다. 이는 이중적 잣대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사법부가 독립되어 있지 않을 때, 문제는 훨씬 심각해진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받은 사람은 흔히 이중, 삼중의 권리를 침해당한다. 국가보안법은 일반적인 범죄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이 확정되기 이전에도 불법적인 체포와 (장기간의) 독방수감, 자백강요, 변론조차 무시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장기적으로 사용되면 관계당국은 폭력과 비폭력 행위, 국가 안보에 대한 '국내적'과 '국외적' 위협 사이의 분별력을 상실하고 합법적 행위와 견해를 억압하게 된다.
·국민에 대한 지나친 통제로 인해 법체제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낳는다. 만약 국가가 부적절한 목적으로 억압적인 법률을 사용한다면 법에 대한 전반적인 존중의식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개념 설명과 법률 조항이 국가보안법에 의한 탄압을 적절하게 나타내지는 못한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정의된 권리 제한과 위반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3. 국가보안법 탄압의 사례(8)

<리 하이(Li Hai, 중국)>
1996년 12월 리 하이는 '국가 기밀을 캐고 수집한' 협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9년의 형량을 받았다. 1989년 민주화 운동 당시 감옥에 수감된 평범한 베이징 주민들에 대한 정부를 수집했다는 것이 판결의 이유였다. 리가 양심수들의 많은 가족들과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그들로부터 '캐낸' 정보라는 것은 양심수의 이름, 나이, 가족 상황, 죄명, 형량, 수감장소, 수감시 처우 등이었다.
리는 1995년 5월에 수감되어 11개월 동안 이유없이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그는 1996년 4월에 체포된 것으로 남아 있다. 전 재판 과정은 50일도 채 걸리지 않았으며 반복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들은 이 사건이 '기밀'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재판 참관조차 거부당했다. 법원은 리가 수집한 정보가 '국가 극비 사항'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판결했으며, 리의 '국가기밀 누출'에 대한 검찰의 혐의부과는 사실무근이라고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리는 현재 건강이 안좋은 상태이며, 그가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들의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의 어머니가 계속해서 석방 탄원을 하고 있지만 무시되고 있다.

<숀쵸이 차크마(Shonchoy Chakma, 방글라데시)>
숀쵸이는 다카대학 학생으로 '치타공 지역' 문제(9)의 해결을 요구하는 조직에 참여했다. 숀초이는 대학 기숙사에서 새벽 두 시에 영장도 없이 체포되었다. 방글라데시에는 체포 후 24시간 내에 판사로부터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법적 규정이 있지만 그는 이틀 동안 심문을 받았으며 보석을 거부당하고 조사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되돌려 보내졌다. 6일 후 그는 120일 간의 구금 명령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국가와 공공의 안전, 그리고 법과 질서에 대해 편향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라는 것이었다. 그는 2주가 지나서야 자신의 구속 사유가 적혀 있는 정식 영장을 볼 수 있었고 거기에는 그가 “방글라데시 국민들 사이에 적의를 퍼트림으로서 법과 질서를 혼란케 했으며… 반국가 행위자의 대변인”이라고 써있었다.
재판 과정이 시작되어 법원은 그를 구속한 것은 불법행위이며 그를 석방하라고 경찰에 명령했다. 법원은 이 사건을 심사하고 임시 판정을 통해 구속 명령이 합법적인 근거를 제시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이 명령을 집행하기 바로 전에 법원은 그 명령을 취소하고 재판을 진행하여 숀쵸이에 대한 혐의를 벗겼다. 숀쵸이는 구속된 지 5주만에 풀려났다.

<치아 티에 포 (Chia Thye Poh, 싱가포르)>
치아 티에 포는 1960년대 중반 싱가포르 국회의원이었다. 1966년 그의 소속 정당은 집권당의 야당 탄압에 맞서 의회를 떠났다. 3주 후 그는 체포, 구속되었다. 구속된 직후 정부 당국은 그가 자백을 할 때까지 계속 구금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어떤 것도 자백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아는 22년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다. 그는 특정한 범죄 행위에 대한 기소도 되지 않고 재판도 받지 않았다. 그가 구속된지 19년만에 싱가포르 정부는 그를 공산당원이라는 혐의를 씌웠지만, 그가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 폭력과 테러행위를 했다는 의심을 살만한 어떠한 증거와 증인도 없었다.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수감되었던 치아는 1989년 가택연금 형태로 석방되었다. 1991년이 되어서야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고 약간의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정부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대중연설, 저술, 출판, 단체가입, 해외여행도 금지 되었다. 특히, 싱가포르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구속된 양심수들과의 접촉은 일체 금지 되었다.
1998년 11월에 이르러 그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23년간의 구속, 3년 6개월의 가택연금, 그리고 6년간 이어진 극도의 속박 등 싱가포르 정부는 그의 57년 인생 중 32년을 앗아갔다. 치아는 재판이나 법원의 명령도 없이 싱가포르 어떤 죄수보다 훨씬 긴 감옥생활을 한 것이다.

<긴급규제법(스리랑카)>
스리랑카는 허가증 없는 총기 소지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구속되고, 재판을 받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피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피의자로서의 모든 권리(체포후 24시간 이내 조사를 끝내야하고, 보석을 신청할 수 있으며, 변호인을 선입하고, 독립적인 사법부에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수 있다)를 누린다. 재판결과 유죄가 확정될 경우 1000루피의 벌금 혹은 1년간 구속될 수 있다. 문제는 “긴급규제?quot; 또한 무허가 총기 소지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정부당국은 일반 형사법이 아니라 긴급규제법을 통해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 긴급규제법 하에서 총기 소지 피의자의 체포, 구속, 재판의 전과정은 형사법하에서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정보기관은 피의자를 보석없이 무기한 구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사와 구속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형식적인 보호 조치도 없이 재판과정도 일반범죄 재판과 다르게 매우 축소되어 있다. 만약 유죄를 선고받게 되면 형량이 최소한 10년이다. 또한 모든 개인 재산 몰수, 무기형,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다.

4. 아시아지역 국가보안법 반대 투쟁의 흐름

아시아 지역적 차원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문제를 가장 선도적으로 제기한 국가는 한국이었다. 1993년 국제인권대회와 아시아지역 방콕 준비회의에서 처음 제기된 국가보안법 문제가 중심적으로 제기되고 본격화된 시기는 한국 국가보안법이 50주년을 맞이한 해이자 세계인권선언 50주년 1998년이었다. 1996년 아시아·태평양 인권대회(약 70개의 인권 단체 가입)에서 회의에서 인권촉진팀(Facilitating Team)을 구성하여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보안법 폐지활동을 지원해주는 활동을 본격화 한 것이다. 이에 앞선 1995년에는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세계인권활동가 회의는 국가보안법에 관한 몇 가지 원칙을 결정하였다(요하네스버그 원칙). 이 원칙은 정부가 국가 안보를 책임질 합법적 역할을 부여받는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그 역할을 좀더 철저히 규정한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ICCPR의 제19조를 근거로 만들어졌으며 수용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필수사항들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도 했다. 이 원칙을 몇 가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국가보안법에 의한 어떠한 권리제한도 법에 근거해야 한다(반헌법적인 법과 합법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않은 정부 활동은 제외된다). 2. 국가보안법에 의한 어떠한 권리제한도 민주 사회를 위한 필요사항이어야 한다.3. 국가보안법에 의한 어떠한 권리제한도 “정당한 국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정당한 국가안보”란 (a)국가의 존립이나 영토보존을 헤치는 무력의 사용, 혹은 무력 사용의 위협이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으며, (b) 그러한 무력에 대응하기 위한 능력에 대한 위협).
지금도 양심수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고 각국 수준에서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반대투쟁도 줄기차게 전개되고 있다. 유엔과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국제적인 운동에 있어서 간과되지 말아야 할 것은 국가보안법 철폐운동과 소위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그것이 정치, 경제적 지형과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 지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그에 상응하는 국제연대적 대응계획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국가보안법은 늘 기존의 권력과 독점재벌 세력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위기 관리 방식의 하나로 자리잡아오고 있다. 즉, 국가보안법 반대 운동은 보편적 인권의 가치에 입각한 단순한 자유권 쟁취 운동으로만 시각화되고 한정되어서는 안되며, '안보이데올로'기라는 불평등한 경제, 사회적 구조의 공고화에 맞선 투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심지어 세계화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면서 “주권국가”의 가치를 부르짖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국내 경제위기와 부정축재 등에 대한 국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직면해서 가장 먼저 휘두를 수 있는 칼날이 바로, 국가보안법이기 때문이다.

<후주>

1) 마하티르 총리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안와르 전 부총리는 부정부패와 연고주의에 휩싸인 말레이시아 정치권 개혁을 요구, 정면으로 마하티르를 겨냥했고 금융위기 당시 경제처방에서도 입장이 엇갈리는 등 사사건건 마하티르와 대립했고, 지난해 8월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9년형을 선고받았다. 마하티르에 의한 일종의 정치적 숙청 작업이었고, 그는 6년 후 다시 권력 남용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된다. 즉, 사면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그는 2014년까지 복역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해 말레이시아 야당은 물론 “Reformaci”, 즉 개혁운동 세력은 정치적 음모로 규정하고 정권 반대 운동의 일환으로 그의 석방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번에 구속된 일부 활동가가 안와르의 부인인 아지즈가 당수로 있는 민족정의당(NJP)에 소속되어 있어, 이번 구속사태는 개혁세력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현지 활동가들의 생각이다. 실제로 지난 해 12월 민족정의당(NJP)의 지도자 3명이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후 불법집회 참가와 소요 등 혐의로 체포되었던 전례도 있어, 이번 사태도 마하티르의 야당/개혁세력 탄압의 연장선에서 바라봐진다.

2) 대만,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은 반공을 국시로 하고 있다.

3) 한국의 경우, 소위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양심수의 증가가 대폭 증가했던 예를 보자. 특히 96년과 97년의 양심수의 수는 노태우 정권 시절을 능가했다. 한국통신의 파업이 주사파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 주장한 “빠콩”의 주사파 파동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일찍이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신공안정국을 이끌며 1987년 이후 노동자 투쟁에 대응하여 “경제안정”과 국가안보이데올로기를 접목시키기도 했다. 강준만이 개념화한 조선일보의 “국가안보상업주의” 또한 보수우익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에 대한 저항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시시각각 차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예이다. 이외에도 예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지만 국가안보이데올로기가 어떠한 원리를 갖고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박홍규의 [개발독재와 인권-한국와 아시아의 경험]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첫째, 그것은 정부가 알고 행하는 것이 최선의 최고의 지상의 가치라고 하는 국가지상주이다. 여기서 국가는 현정부 및 체제로 대변되며 둘은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모든 법적 권위는 정부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에 대한 어떤 도전도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국민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되는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되고… 셋째, 공산주의는 물론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은 군사적인 차원의 적대적인 세력과 같이 취급되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취급이 불가능한 것으로 매도된다… 다섯째, 공산주의는 자유기업의 창달을 적대시하는 것이므로 기업의 경영소유권에 대한 어떤 도전도 잔체제적인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 현대의 국가안보는 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에 의해 실질화되는 것이므로 기업이 발전되기 위한 자본주의 원리는 철저히 존중되어야 한다…”

4) 1993년 한국인권단체협의회

5) 1952년에 제정되었으며 재판없이 6개월간 구속할 수 있다.

6) 1948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민과 모든 국가가 달성해야 할 공통의” 인권 기준을 확립했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차차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규범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법적 구속력이 없고, 국가의 의무를 명기하지 않은 점등을 들어 두 개의 규약이 마련되었고 그것이 바로 소위 A조약과 B조약으로 불리는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과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이다. A규약의 경우 당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제기한 것으로 노동권 등 경제적, 사회, 문화적 불평등을 받지 않을 권리를 기술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양자 모두 1990년에 비준했다.

7) [개발독재와 인권-한국과 아시아의 경험], 박홍규

8) 1998, 아시아·태평양 인권단체 인권촉진팀(Facilitating Team) 보고서 인용

9) Chittagong Hill Tracts. 파키스탄 장악했던 1957-1962년 사이 이 지역 중아에 캅타이라는 거대 인공호수가 들어서면서 그곳에 살던 원주민 10만 명이 생존터를 잃고, 인도와 미얀마 등지로 쫓겨났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원주민들이 이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나 파기스탄에서 분리한 방글라데시가 1979년 이곳에 침략하여 군대와 방갈인들을 이주시키면서 이 지역을 철저히 방갈화(Bangalies)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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