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박숙경, 녹색생활지킴이 (사)에코언니야 대표)
4월 24일(일)부터 4월 30일(일)까지 6박 7일간의 여정으로 베트남을 다녀왔다. 베트남 중부의 푸억호아사와 인연을 맺은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섯 번째 방문이다. 이번 방문은 장학금 전달, 장학생 가정방문 등 당면한 일 외에 중학생에 한정해 온 장학사업의 범위를 고등학교까지 확대하기 위한 현지조사를 겸하는 것이어서 아시아평화인권연대의 이광수 대표, 안양숙 운영위원, 김나현 실장이 특별히 동행했다. 종전에 비해 방문일정이 비교적 짧고, 새로운 사업을 위해 가는 길이라 일정한 부담은 있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가족 중심의 기존 장학사업을 아시아평화인권연대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확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변수가 많을 수밖에 없는 가족사업의 부담을 덜고, 장학사업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크게 안도했다.
돌이켜보면 아득하고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베트남과의 첫 인연은 2004년 가을이었다. 개인적으로 꽤 힘든 시간을 보내던 그 때, 정귀순 대표와 친우 임미경의 강권(?)으로 얼떨결에 베트남 종단여행을 하게 되었다. 한국군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중부지방을 여행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 깊숙이 묻어둔 아버지의 이름을 자연스레 불러낼 수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덕분(?)에 아름다운 해변대신 맹호부대의 흔적들을 찾아다녔다. (한국군에 대한) 증오비, (미군학살지) 선미박물관, (한국군의 희생이 가장 컸던) 안케고지 등 베트남 중부지역의 곳곳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들과 마주하며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요동쳤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살아오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아픔들이 우리 가족 모두의 상처와 무관치 않음을 느끼며 베트남에서 무언가를 풀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2006년 우리 가족들은 작은 뜻을 모았고 아시아평화인권연대는 우리 가족의 뜻을 소중하게 받아주었다.
2008년 첫 장학금을 지급할 때만 해도 표정이 어두웠던 아이들, 2009년 마을을 덮친 홍수로 집을 잃어 서럽게 울던 아이, 고등학교 진학을 못할까봐 울음보를 터뜨리던 아이가 이번 방문에서 누구보다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몰라보게 키가 자라 보기만 해도 반짝반짝 눈부신 젊음들이다. 거기다 공부까지 잘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베트남 방문회수가 늘어날수록 우리 가족이 받은 위로와 선물이 곱절로 쌓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잊지 못할 선물은 아버지의 전사지를 찾은 일이다. 전사지를 찾겠다고 시작한 사업도 아니었는데 아버지의 전사지를 찾게 되었고, 작년 이맘때는 가족들과 함께 베트남을 방문해서 그 곳에서 40년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사도 지낼 수 있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삼십대 중반에 떠나보낸 남편의 마지막 자리에 백발노인으로 홀로 선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당신의 위로를 보내며 이별을 할 수 있어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6차 방문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우리 가족의 뜻을 응원하며 아름다운 동행을 해준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 가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특히 장학사업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동고동락해온 정정수와 보람쑤언, 전사지의 좌표를 찾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박인순․오형진, 언제나 뒤에서 가장 든든한 언덕이 되어준 정귀순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당신들에게 내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린다. 베트남으로 떠날 때 감기가 몹시 심했는데 돌아올 때 건강해진 이유는 그곳에서 얻은 정신적 충만감 때문이다. 방문단에게 말했듯이 나는 그 기운과 힘으로 또 1년을 살아볼 예정이다.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 이 글은 (사)이주민과 함께 소식지 <더불어 사는 삶>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