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군이 파병될 지역으로 결정된 이라크의 아르빌과 술라이마니아는 쿠르드족 거주 지역이다. 이 지역은 전쟁 피해도 입지 않은 산악 지역이다. 따라서 한국군의 파병 명문이 평화 재건이라면 더욱이 이 지역에 파병할 이유는 없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길게는 2천여년간, 짧게는 200여년간 민족-국경-종교의 갈등을 겪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일부 언론에서 이야기 하듯 쿠르드 지역 파병을 환영하는 정치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쿠르드족의 여러 분파의 일부일 뿐이며 그들은 다른 쿠르드 분파들과 지금도 이미 십수년째 내전 중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한국군이 이곳에 파병되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내전의 틈바구니에 끼여 우리와 무관한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그들과 무관한 우리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쿠르드 지역의 분쟁에 대해 좀 더 소상하게 알아 보도록 하자. (아래의 글은 [고대 신문]에 연재될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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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로 몰살하면서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기 시작한 쿠르드인. 그들이 사고 있는 쿠르드 땅은 터키에서부터 이라크와 이란으로 이어진다. 쿠르드인은 터키에 43%, 이란에 31%, 이라크에 18%, 시리아에 6%, 구소련에 2%가 거주하고 있다. 이처럼 쿠르드 지역은 5개국과 맞닿아 있어서 그들의 저항과 독립투쟁의 역사는 여러 강대국들 간의 세력 다툼과 직결되어 있고 그만큼 험난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쿠르드인의 저항, 독립 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지원 하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치공화국을 건설한 후부터다. 아르메니아의 독립에 자극을 받은 쿠르드인들은 터키, 이라크, 이란에서 각각 저항운동을 전개시켰다. 각국의 도시에서는 쿠르드 지식인들이 쿠르드인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당을 결성하여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터키, 이란, 이라크 등 인접의 국가들은 한결같이 쿠르드인이 국경분쟁의 완충 역할을 하는 자국내 산악인 부족으로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터키 내 쿠르드인들의 봉기는 19세기 초 아랍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 시작됐지만 1923년 케말 파샤가 터키 공화국을 수립할 때 내세운 터키 제일주의 정책 속에서 묻혀 쿠르드인 자치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 후 터키 정부는 쿠르드인에 대한 동화정책을 고수해 왔으나, 1984년 이후 쿠르드인의 저항이 격렬해지면서 강경진압으로 입장이 선회하였다. 이에 쿠르드인 반군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게릴라 전법으로 맞섰다. 이는 필연적으로 쿠르드인의 저항운동이 터키와 이라크와의 복합관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라크에서 쿠르드인이 거주하는 북부의 모술, 키르쿠크 등의 지역은 석유안보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후세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제일 먼저 쿠르드 정책을 발표하면서 유화정책을 실시한 것도 바로 그 지역이 석유안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983년 발생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군은 쿠르드인의 민병대를 공격했고, 반면에 후세인은 사막지역에 쿠르드인을 거주시키며 이란과의 국경지역을 방어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이번에는 반이라크 정부의 태도를 보이자 1988년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를 이용해 그들을 학살하였다. 결국 쿠르드인은 이란과 이라크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이용당하고 폐기된 것이다.
지금까지 쿠르드인은 터키, 이란, 이라크와 관계 속에서 정치적으로 혼란한 곳에서 활발한 저항운동을 펼쳐 왔다. 그런 점에서 현재 쿠르드인이 이라크 과도통치위의 중심세력으로 떠오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그들의 독립에 있어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미국의 입장이 그렇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결국 쿠르드인의 독립 또한 험난한 여정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