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명분 사라지는 평화협상을!
8월14일 휴전 뒤 레바논에 예상 뛰어넘는 9억4천만달러 재건자금 지원… 이스라엘의 셰바팜스 철수와 수감자 교환에 관한 일련의 합의가 열쇠
▣ 베이루트=니컬러스 블랜퍼드(Nicholas Blanford) 레바논 <데일리스타> 기자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파괴된 레바논을 재건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9억4천만달러의 자금을 마련했다. 이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액수로, 푸아드 시니오라 총리가 이끄는 레바논 정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레바논 정부는 전후 재건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시아파 무장·정치 조직인 헤즈볼라의 막강한 정치력에 맞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전체 인구의 7%가 떠돌이 생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레바논 전후 재건 자금 공여국 회의에서 시니오라 총리는 “오늘 레바논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레바논 경제를 성장세로 되돌리기 위해선 먼 길을 가야만 한다”며 “우리는 산적한 난관을 극복해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34일에 걸친 이스라엘의 공세로 레바논에선 1천 명이 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약 36억달러 상당의 재산피해가 났다. 또 1975~90년 이어진 내전을 딛고 지난 15년여 기울여온 재건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은 30만여 명의 주민들이 여전히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는 레바논 전체 인구의 7%에 이른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의 침공 기간 동안 삶의 터전을 잃고 피난길에 오른 이들은 무려 100만 명에 이른다.
경제활동 중단과 일자리 상실, 관광산업과 농업, 각종 제조업 수입 손실 등 경제 전반에 걸친 장기적 직·간접 비용까지 따진다면 수십억달러 이상의 추가적 경제손실이 예상된다는 게 시니오라 총리의 지적이다. 그는 회의에 참석한 50여 국가 및 10여 개 국제기구 대표단에게 이스라엘의 ‘모욕적인’ 레바논 해상·항공 봉쇄 조치가 철회되지 않는 한 어떤 재건 지원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8월31일 모금된 레바논 재건지원금은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위해 임시 주거 마련과 의료지원 사업, 상수도와 전력망을 포함한 파괴된 사회간접시설 복구와 불발탄 제거에 우선 사용될 예정이다. 시니오라 총리는 국제사회의 지원금을 투명하게 사용할 것임을 밝혔으며, 지원금이 결국 헤즈볼라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란 주장을 강력 반박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모아준 재건자금이 어떻게든 헤즈볼라로 유입될 것이란 주장은 완전한 가설로 절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헤즈볼라는 상당한 자금력을 확보해놓고 있는 상태다. 이 단체는 이미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가옥이 파괴되거나 무너진 주민들에게 현금 수천달러씩을 나눠주고 있다. 이는 피해를 입은 시아파 주민들의 지지세를 유지하기 위한 치밀한 민심 회복 전략의 일환이다. 헤즈볼라는 이런 노력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명성과 시아파 주민들의 지지기반을 회복해가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 강해질 것으로 보이는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촉구하는 레바논 내부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 시아파 주민들은 적어도 개인적으론 헤즈볼라 때문에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난민으로 전락했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공공연하게 표현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헤즈볼라도 시아파 주민들 내부에서 지지세를 만회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이 단체가 거주지를 잃은 가구마다 1만달러에서 1만2천달러, 많게는 1만5천달러까지 지급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헤즈볼라가 향후 3년 동안 계속할 주거지 재건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 정책일 뿐이다.
주민들은 헤즈볼라를 원망하지 않는다
헤즈볼라는 향후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사회적 활동에 집중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레바논 내부적으론 이스라엘의 침공을 촉발했다는 점을 들어 헤즈볼라를 겨냥한 각종 정치적 압박이 비등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 때문에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국경지대에서 군사적 능력을 회복시키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 레바논에 더욱 강화된 형태의 국제 평화유지군이 배치될 예정이어서 헤즈볼라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것으로 보인다. 1978년 이후 남부 레바논에 주둔 중인 2천 명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은 1만5천 명 수준으로 확대될 예정이며, 이들과 함께 1만5천 명 규모의 레바논군이 추가 배치될 예정이다. 새로운 평화유지군의 대부분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스페인·폴란드 등 유럽국가 출신으로 구성된다. 이는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에 적대행위가 재발되지 않도록 평화유지군의 정치적 비중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헤즈볼라는 강화된 국제 평화유지군의 남부 레바논 배치가 자신들의 무장해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반대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 바 있다. 헤즈볼라가 조만간 무장을 해제할 가능성은 없다. 이스라엘조차 헤즈볼라를 격퇴시키거나 이들의 무장조직을 해체시키지도 못했으니, 강제력을 동원한 헤즈볼라 무장해제는 이미 선택지가 아니다. 대부분의 레바논 정치 분석가들은 중동 평화협상의 종결 이외엔 어떤 조치도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로 이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정책 당국자들은 헤즈볼라 무장해제를 절체절명의 과제로 여기는 대신 헤즈볼라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헤즈볼라-이스라엘 갈등이란 측면에서 볼 때,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겨냥한 공격에 나설 수 없도록 할 수만 있다면 무장조직을 보유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게다.
스톡홀름 공여국 회의에서 마크 말로크 브라운 유엔 사무차장은 현 갈등 국면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정치적 해법 마련을 촉구했다. “그렇지 않고선 레바논 재건 지원이 자칫 재건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산소 같은 역할을 할 민간 투자를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며 “무력분쟁의 가능성이 높은 상태로 유지되는 한 레바논에 대한 투자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게 브라운 사무차장의 지적이다.
지난 8월14일 이스라엘의 공세를 중단시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701호는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지역에서 무력분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양국 간 산적한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유엔 사무총장에게 촉구했다. 논의돼야 할 현안에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레바논 땅 셰바팜스 지역의 영유권 문제와 레바논 남동부 산악지대로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골란고원 문제도 포함된다. 또 이스라엘과 레바논 양쪽이 붙잡아두고 있는 상대국 수감자 문제와 레바논 영공에 대한 이스라엘의 침범 문제 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분쟁 가능성 높으면 투자는 중지
이스라엘이 셰바팜스 지역에서 철수하는 한편 양쪽이 포괄적인 수감자 교환조치에 합의하고, 이스라엘이 레바논 영공 침범을 중단하는 등 일련의 합의가 이뤄진다면, 이스라엘에 맞서 헤즈볼라가 강력한 무장능력을 계속 보유해야 할 명분이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될 것이다.
* <한겨레21>에 처음 글을 쓰는 니컬러스 블랜퍼드는 레바논 베이루트의 유력 일간지 <데일리스타>의 기자로 <미스터 레바논 암살사건-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이 중동 정세에 끼친 영향> 등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