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주노동자정책-이용일(부산대 강사)

독일 외국인노동자정책 – 독일연구 논문요약

이용일 (부산대 사학과)

1. 외국인노동자문제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다.
독일외국인노동자문제의 핵심은 외국인노동자가 독일 사회의 이방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방인의 개념정의: 오늘 왔다가 내일 가는 자가 아니라, 오늘 왔다가 내일 머무는 자. 독일 전체인구의 10%에 달하는 외국인의 문제는 독일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가장 민감한 사회적 문제이다.

2. 독일 외국인고용은 독일의 산업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독일은 130년 이상의 외국인 고용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1차대전 발발 전까지 독일의 외국인노동자규모는 120만 명에 육박했다.

3. 독일의 외국인고용은 두 차례의 대전을 치르며, 씻기 어려운 오명을 남기게 된 강제부역이라는 일종의 범죄로까지 발전했다. 1차대전 외국인노동자 규모: 200만 명, 2차대전: 765만 명.

4. 독일 연방공화국의 외국인 노동자고용은 1955년 이태리정부와 독일경제를 위한 이태리 노동자모집과 고용에 대한 협약 (노동력모집협약)을 체결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탄력성으로 인해 외국인고용의 규모는 1959년까지 미약한 수준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이미 장벽건설이전 제조업분야의 저기술.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수요증가와 함께 본격적인 외국인고용이 시작되었다. 외국인규모 증대와 함께 외국인노동자 모집국도 확대되었다. 1960년 그리스와 스페인, 1961년 터키, 1964년 포르투갈, 1968년 유고슬라비아와 차례로 노동력 모집협약을 맺었다.

5. 오일쇼크로 촉발된 세계경제위기로 외국인모집정책이 종결되었던 1973년까지, 외국인 노동자 규모는 거의 2백만에 육박했다. 외국인노동자 모집중지가 외국인고용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세계경제위기로 인한 대량해고사태의 희생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독일 제조업의 2차 노동시장의 주요한 노동력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경제발전의 역군으로 추켜세우던 외국인노동자가 사회의 짐으로 인식되게 될 정도로, 독일 제조업의 쇠퇴와 구조변화노력과 연관되어 외국인고용의 효용성은 이후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6. 외국인고용은 특히 대기업의 저임금,저기술, 어려운 노동조건, 고용 불안정로 특징되는 2차 노동시장에 집중되었다. 그것도 사양산업보다는 여전히 국제적 경쟁력이 있었던 기계, 철강, 자동차와 같은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대량생산 중심의 제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조업의 생산직은 점점 더 내국인노동자들이 피하는 일자리가 되었고, 또한 제조업의 성장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계속 만들어 지고 있었다. 외국인노동자가 없었다면, 1960년대 독일의 제조업은 인력난 때문에 국내외 시장으로부터 쇄도하는 수요를 다 충족시켜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외국인고용이 독일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다

7. 독일의 외국인정책의 골자는 이러한 경제성장과 노동시장의 필요성을 고려한 외국인고용에 있었다. 이러한 성장위주, 노동시장중심의 외국인정책이 현재의 독일 외국인문제를 만들었고, 구조화시켰다. 외국인의 사회적 문제는 흔히 주장하는 외국인노동자나 이민자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 때문도 아니요, 노동시장 필요에 따라 조정, 통제하는 정책의 부재 때문도 아니었다. 노동시장중심의 외국인정책의 전통에서 나온 외국인고용의 조정과 통제, 그리고 고용에 따른 사회문제의 해결에 대한 자신감은 사회문제해결에 도움은 커녕 오히려 해가 되었다. 쉬운 사회문제해결은 단지 권위주의시대 강제력으로만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 독일 연방공화국은 모집정책 이후 사회적 불안감으로 제한적 외국인정책을 썼지만, 성숙한 민주사회의 토대와 국제적 이미지관리에서 나온 사회적, 휴머니즘적인 고려가 이민정책을 정부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모순적 결과를 낳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황스러움이 고도성장기 이후 독일의 외국인정책을 특징지어 주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노동시장중심의 독일 외국인정책의 지속성(Persistenz) 1873-2003

I. 머리말

2002년 현재 독일의 외국인수는 대략 7백 3십만 명으로 집계되었고, 이것은 독일 전체인구에 8,9%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외국인비율은 유럽연합 평균 (5,1%)에 거의 두 배에 육박하는 것이고, 유럽연합 안에서는 룩셈부르크 (36,9%)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외국인인구는 독일사회의 적지 않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국내언론을 통해서도 간간히 알려졌던 외국인에 대한 테러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내국인과 외국인의 갈등을 독일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960년대에 시작된 노동이민이 1세대를 넘어 2세대 내지 3세대로 넘어 가면서 이들의 사회통합문제가 대두되었고, 동구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계속 증가 일로에 있는 동구 난민들의 처리문제도 독일정부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국인문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문제 내지 노동이민문제는 전후 서독 역사학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사회적 논의들에서도 역시 그것의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문제는 단지 1960년대 시작된 노동이민에 뿌리를 둔 현대문제로만 축소되는 경향이 두드려졌다. 그러나 독일의 대규모 외국인고용(Ausländerbeschäftigung) 내지 노동이민은 현대문제로만 국한될 수 없는, 그 시작을 1870년대 독일제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일 산업화의 부산물이었다.
본고의 목적은 산업화와 함께 시작된 독일의 대규모 외국인고용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독일노동이민 130년사의 꼼꼼한 연대기적 서술은 애시 당초 본고의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노동력만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외국인노동자들의 이민동기와 작업장에서의 경험, 환경, 법적 위치 등의 중요한 사안 등은 소홀하게 다루어짐을 의미한다. 본고에서 주로 다루게 될 것은 독일 외국인정책의 지속성이다. 독일 이민정책 내지 외국인정책은 여러 차례 변화되었지만, 중심축, 즉 단기적 안목에 입각한 노동시장 중심의 정책은 지금까지 큰 흔들림 없이 확고하다. 여기에 현재 독일 외국인문제의 출발점이 놓여 있다. 외국인문제는 외국인노동자 개개인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 아니라, 성장위주의 노동시장정책이 가져 온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안목의 부재는 외국인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착을 결정한 외국인노동자 개개인뿐만 아니라, 60년대 독일정부의 외국인 모집정책에도 독일 외국인문제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책비판의 내용은, 당시 고도 경제성장기에 인력난을 해결을 위해 기계화나 외국으로 노동집약산업의 이전 내지 내국인노동자의 고용을 더 추진했다면 이러한 사회문제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비판부터,
과거의 정책이 너무 노동시장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현재의 문제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견해까지 다양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비판은 늦게 시작된 독일 이민사연구들의 결과에서 나왔다. 즉 한시적인 독일노동정책이 너무 사회문제를 도외시함으로서 오늘날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가져왔다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문제를 바로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독일 노동이민정책의 지속성(Persistenz)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은 앞의 비판들과 동일하다.
본고는 독일 연방공화국의 노동정책의 과오를 논하기 이전에, 이러한 한시적인 외국인노동정책의 포기나 사회문제를 생각하는 외국인정책의 실현은 당시로는 불가능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전제는 지속성(Persistenz)과 방향의존성(Pfadabhängigkeit), 뿌리내림(Eingebettsein)이라는 신제도주의학파 개념의 이론적 토대 위에 서 있다.
한 나라의 제도들은 역사와 문화의 맥락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이러한 제도들의 총체인 한 나라의 사회생산시스템을 완성시키는데, 이러한 시스템에 뿌리박혀진 제도의 완전한 변혁은 어렵다는 것이다. 즉 한번 생긴 제도나 이러한 제도들이 뿌리박혀 만들어진 생산시스템은 점진적으로 변화되지만, 변화의 방향은 일정하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 경제체제의 긴밀함과 상호교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별국의 다양하고 독특한 기업문화나 시스템이 존속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방향의존성과 지속성 때문인 것이다.
“제삼세계” 국가들에 대한 서양의 경제제도 이식의 실패원인 역시 여기서 찾고 있다.
이 이론을 외국인고용에 적용시키면, 독일의 노동시장 중심의 외국인정책은 산업화와 함께 시작되어, 독일 산업사회 내지 독일 사회생산시스템의 한 부분으로서 자리매김하였고, 그로인해 당시 1960년대 다른 대안의 고민 없이 거의 자동적으로 인력난의 해결책으로 외국인고용이 등장했던 것이다. 즉 이민과 이민문제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고, 만들어졌고, 구조화되었고, 역사적 과정 속에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시장중심의 외국인정책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영향력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이 본고의 주된 목적이다. 이것을 통해 현재의 외국인의 사회문제는 그들의 번영이 가져 온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사회여론이나 이민사연구들에서 간과했던 독일 이민으로 인한 사회문제의 출발점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현대독일의 외국인문제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이주노동자문제”에도 큰 시사점을 줄 것이 틀림없다.

II. 독일 외국인고용의 역사와 유형: 이동노동자 (Wanderarbeiter), 이방인노동자(Fremdarbeiter), 초청노동자(Gastarbeiter).

울리히 헤어베르트 (Ulrich Herbert)가 쓴 『독일 외국인고용의 역사 1880년에서 1980년까지 (Geschichte der Ausländerbeschäftigung in Deutschland 1880 bis 1980)』는 1980년대 중반에 나온 독일 외국인고용에 대한 중요한 개설서이다.
이 책의 부제로 붙여진 시즌노동자, 강제부역노동자, 초청노동자 (Saisonarbeiter, Zwangsarbeiter, Gastarbeiter)는 독일 노동이민 130년사를 상징적으로 잘 함축해 주는 말임에 틀림없다: 농번기에 와서 농한기에 귀환했던 농업노동자를 필두로 시작된 독일의 외국인 노동이민은 두 차례의 대전을 치르며, 씻기 어려운 오명을 남기게 된 강제부역이라는 일종의 범죄로까지 발전했다가, 전후 고도성장기에 국가간 협약을 통한 대규모 노동자모집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초청노동자를 제외한 다른 두개의 외국인노동자를 지칭하는 말은 단지 현재 관찰자의 관점에서 당시의 각 시대별 외국인고용의 특징을 나타낸 것이지, 동시대인들에게 실제 불린 외국인노동자의 별칭은 아니다. 외국인노동자 (ausländische Arbeiter, ausländische Arbeitnehmer)의 별칭 역시 그 특징만큼이나 시대에 따라 뚜렷하게 변화되었다. 노동이민 초기 가장 많이 불렸던 이동노동자 (Wanderarbeiter)는 원래 특별히 외국인노동자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한시적으로 고용된 농업노동자를 총칭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국인노동자들과 굳이 구분하기 위해 외국인 이동노동자 (ausländische Wanderarbeiter)
로 불리기도 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외국인 강제부역자들은 이방인노동자 (Fremdarbeiter)로 흔히 불렸다. 물론 이 명칭이 문헌들에서 보이기 시작한 것은 훨씬 오래 전인 노동이민 초기 독일제국에서부터이다. 그렇지만 이방인노동자는 우리와 타인의 구분이 대량학살의 광기로까지 이어졌던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의도를 다분히 담고 있는 명칭으로 국가사회주의 체제와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오명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노동자는 전후 독일 연방공화국 외국인고용이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던 1950년대 중반 신문지상에 간간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명칭은 본격적인 외국인고용모집이 시작되고, 초청노동자라는 새로운 개념이 정착 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II장 부제 “이동노동자, 이방인노동자, 초청노동자” 역시 독일외국인고용의 역사를 잘 함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함축화”와는 달리 실제 130년의 역사를 작은 소논문에 정리하는 것은 어려움을 동반하는 작업이다. 이럴 경우 흔히 이용하게 되는 하늘에서 바라보는 듯한 조감도적인 관점(Vogelperspektive)을 도입해도, 이러한 어려운 상황이 크게 호전될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어려움은 우선 통계문제에 연유한 것이다. 남아있는 역사적 통계자료들로 독일노동이민사를 한눈에 고찰할 수 있게 돕는 조감도를 만든다는 것은 분명 역부족이다. 특히 1945년 이전의 통계자료들은 그 자체가 너무 적고, 들쑥날쑥 조사되어 빈틈이 많고, 조사방법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주로 이 시대의 외국인 고용규모는 정확한 수치라기보다 오히려 추정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표는 외국인고용 발전의 윤곽을 잡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외국인고용을 시기적으로 아래의 7개 발전단계로 나누었다.

독일 노동이민사 1873-2003
1. 독일노동이민 태동기 (1873-1914)
2. 1차 강제징용기 (1914-1918)
3. 외국인고용 1차 정체기: 법제화 (1918-1936)
4. 2차 강제징용기 (1936-1945)
5. 외국인고용 2차 정체기: 전후 복구와 독일난민과 탈동독자의 사회통합 (1945-1960)
6. 경제부흥과 대규모 외국인 모집기 (1960-1973)
7. 노동시장문제에서 이민문제로의 전환기 (1973-현재)

표1. 시기별 외국인노동자규모

자료: 독일노동자중앙회 출입국대장, 독일제국 통계, 독일 노동청 통계자료.

앞서 언급했듯, 독일 노동이민 130년사의 꼼꼼한 연대기적 서술이 본고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일 노동정책의 지속성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짧은 독일 노동이민의 연대기적인 고찰은 불가피할 것 같다. 이를 위해 편의상 위의 7단계를 다시 3시기, 즉 1차대전까지 외국인고용초기, 1차대전부터 2차대전말까지의 과도기, 그리고 독일 연방공화국의 외국인고용시대로 묶기로 하자.

1. 독일제국 외국인노동자고용: 이민자 수출국에서 노동수입국(Arbeitseinfuhrland)으로의 발전.

최초의 대규모 외국인고용 뒤에는 독일의 산업화가 있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과 농업의 구조개혁이 이러한 외국인고용 시작의 주된 원인이 된 것이다. 천혜자연, 기계화 그리고 “교통혁명” 등에 힘입은 값싼 미국산 곡물의 수입으로 독일의 농업은 국내와 유럽시장에서 급속히 경쟁력을 잃고 농산물의 폭락으로 인한 채산성급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 한때 유럽최대 농업수출국이었던 독일의 농업은 공업에게 경제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출의 첨병에서 국가의 도움, 즉 관세와 여러 특혜에 의지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혜자로 전락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위상변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고용인구의 변화였다. 한때 전체 고용인구의 3분의 2가 농업에 종사했던 농업국 독일이 19세기 말에 이미 공업인구가 농업인구를 훨씬 앞지르는 공업국으로 발전을 했던 것이다.
19세기 초반 농노해방 (Bauernbefreiung)이라 부르는 프로이센의 농업개혁이후 물고 트인 이농현상은 1870년대 농업위기를 맞으며 더욱 심화되었다. 농업위기에 가장 큰 타격을 받았던 엘베강 동부지방으로 흔히 불려진 프로이센 동부지역이 특히 이러한 이농현상의 진원지가 되었다.
사실 1873년 최초의 독일 민족국가가 수립된 후 이어진 경기침체로 아직 서부공업지대는 이들 동부의 이농자들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1890년 중반까지 이곳 엘베강 동부지역 출신 이농자들의 주된 목적지는 멀리 대서양 건너의 신대륙이었다. 실제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6 백만 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해외로, 특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870년대부터 1890년까지 거의 백만 명에 가까운 엘베강 동부인들이 이러한 이민대열에 동참했고,
결국 이제껏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던 남부독일 – 바이에른, 비르텐베르크, 바덴, 헤센 -을 제치고 가장 많은 이민자를 내는 지방이 되었다.
그 외에도 사탕무재배(Zuckerrübenanbau)가 먼저 시작되었던 작센지방으로 보다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한해 10 만 명 가량 되었다.
그렇지만 1890년대 중반 “제 2의 산업화”라 불리는 역동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해 서부공업지대는 동부지방 이농자들에게 점점 더 매혹적인 곳이 된 반면, 당시 독일 해외이민의 90% 이상을 차지했던 미국이민은 서부개척의 상당한 진척과 그와 연관된 미국서부의 토지 무상분배의 중단 등으로 인해 점점 그 매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해외이민과 작센 이동노동 (Sachsengängerei)은 쇠퇴의 길을 걸어간 반면, 도시 공업지구로의 이주가 주된 이농의 원인이 되게 되었다. 결국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큰 규모의 동부 농촌지역에서 서부 공업지대로의 원거리 인구이동이 일어났다. 1907년 까지 이러한 이동을 통해 1백 94만 명이 동부지방을 떠나 서부지방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이농현상과 함께 농업위기 타개책으로 이 지방 대지주들이 선택했던 사탕무재배가 이 지방의 인력난을 더욱 부채질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탕무는 잔손질이 많이 가고, 다른 작물에 비해 훨씬 노동집약적이었고, 계절에 따른 노동력의 차이가 현격한 작물이었다.

이러한 심각한 인력난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 융커들은 폴란드인들을 대거 모집하기에 이른다. 결국 전쟁발발 직전 독일제국에는 50만에 이르는 외국인 농업노동자가 있었다.
공업에서도 1890년 중반 호경기이후 국내노동자만으로는 인력난을 극복 할 수 없게 되자, 외국인모집에 나서게 된다. 이미 세계대전직전에 70만에 육박하며, 공업 외국인고용은 규모면에서 농업 외국인고용을 능가하고 있었다. 루르폴란드인(Ruhrpolen)이라고 불렸던 수십만에 달하는 독일점령 폴란드지역, 즉 엘베강 동부지역들의 일부에서 서부 공업지대로 이주했던 내국인신분의 폴란드인들을 감안한다면,
제조업과 광업에 종사한 “실제 외국인노동자”의 규모는 이미 백만 명을 훨씬 웃돌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업의 높은 외국인고용 비율은, 이러한 것이 농업을 제외한 전 산업분야에 적용되었던 외국국적을 가진 폴란드인의 고용금지에도 불구한 결과였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다. 노동이민 초기부터 외국인고용은 2차 산업에 그 무게의 중심이 놓여 있었다. 농업노동이민 역시 소득증대를 통한 기호품소비 증가와 소비산업의 발달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외국인고용에 차지하는 2차 산업의 비중은 더욱 더 커진다. 농업 외국인고용의 주원인이었던 사탕무재배의 증폭은 곧 19세기 말 세계설탕의 3분의 1을 생산하게 된 독일의 설탕산업의 발달로 귀결되었다. 실제 융커들이 사탕무재배와 설탕공장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저기술, 저임금노동으로 특징되는 외국인고용은 산업화의 부산물로, 독일 산업화와 병행하여 시작되었고, 2차 산업중심의 독일 산업사회와 그 흥망을 같이 하게 될 운명이었다.

2. 외국인고용 과도기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외국인고용의 일대 변혁이 찾아온다. 이제껏 제국영토에서 일하던 약 30 만 명의 폴란드 농업노동자들이 출국이 금지되었고, 각자의 작업장에 머물며 삼엄한 감시 속에 일을 해야 하는 사태가 생겼던 것이다. 이제껏 이러한 폴란드 농업노동자들의 강제 노동력으로의 전환은 젊은 장정의 군대소집, 군비증가, 국내농업의 자급화요구와 식량문제 등의 총력전으로 인한 인력난에 대한 전시체제의 권위적이고 비인도적인 해법이라고 흔히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속전속결의 단기전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개전 초기에는 이러한 강제출국조처의 요인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공업에서는 전쟁 바로 직전에 불어 닥친 불경기로 인한 높은 실업률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의 귀환을 환영하였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공업 외국인노동자들의 대부분이 동맹국이나 중립국 출신의 노동자라는 사실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1914년 동맹국이던 독일에서 일한 오스트리아출신의 공업노동자의 비율은 전체 외국인공업노동자의 55%였고, 개전당시 아직 중립국이었던 이태리 출신의 외국인 공업노동자비율은 19%였던 것이다. 반면 외국인 농업노동자의 대부분이었던 폴란드인들의 국적은 러시아 (66%)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31%)이었다. 결국 앞에서 언급한 출국금지조치가 내려진 폴란드 농업노동자들이란 적국이었던 러시아의 국적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즉 그들의 출국은 적군의 전력보강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이유에서 그들의 출국을 금지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였고, 점점 더 총력전의 양상을 띠면서 독일의 공업 역시 혹심한 인력난을 겪게 된다. 결국 점령지에서의 강제적인 노동자모집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 폴란드인 공업노동 금지조치가 해지되고, 폴란드 점령지역으로부터 새로운 노동자의 수혈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 모집된 러시아국적의 폴란드인들은 전통대로 농업에 우선적으로 배치되었다. 결국 군수산업을 위해서 직능기술자의 비율이 높았던 러시아 폴란드 점령지역에 살던 유대인, 일명 동구유대인(Ostjuden)이 모집되기에 이르렀다. 모집규모는 3만 명으로 작았지만, 이 모집은 곧 반유대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즉 이들의 모집이 곧 거대한 동구유대인의 독일이민으로 이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러한 반유대주의단체들의 동구유대인 노동자모집 반대의 주원인이었다.

이외에도 점령지인 벨기에에서도 강제노동력 모집이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약 13만 명의 벨기에인들이 독일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벨기에인 강제징용은 경제적인 득에 비해 정치적인 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스위스, 네덜란드, 바티칸, 미국과 같은 중립국들의 항의가 있었고, 이것은 국제여론에서 독일의 군국주의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더욱 더 공고히 하며, 국제사회내의 독일의 고립화를 한층 심화시켰다.
전쟁포로들 역시 노동력으로 이용되었는데, 백 6십만 이상의 전쟁포로들이 독일 전시경제를 위해 착취를 당했다. 주로 프랑스, 이태리, 벨기에 출신의 포로들은 주로 공업노동자로 투입되었고, 러시아와 세르비아 출신들은 농업노동자로 착취를 당했다. 이렇게 전쟁포로와 출국금지로 남게 되거나 새로 모집된 폴란드 민간인노동자와 벨기에 민간인노동자, 그리고 동구유대인까지 합한다면, 1차대전말기 2백만 이상의 외국인이 노동력으로 강제 착취를 당했다고 추정 할 수 있다. 이러한 1차 세계대전 강제 외국인고용이 규모면이나 조직면, 그리고 강도면에서 2차대전의 강제고용에 비할 수 없지만, 1 차대전 중의 이러한 경험은 “배움의 과정(Lernprozeß)”으로 국가사회주의 외국인강제노동정책에 본보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시체제해체를 위한 관청의 주된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전쟁 중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던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노동자의 조속한 귀향이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4년에 외국인노동자수는 여전히 17만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규모는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며, 경제공항 직전 23만에 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전적으로 사탕무재배와 그로 인한 외국인 노동자수요 때문이었다. 이미 앞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독일제국 외국인 농업노동자의 증가는 엘베강 동부지방의 사탕무재배 증가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었다. 물론 패전으로 인한 제국동부의 일부영토의 상실은 전후 독일제국 사탕무재배 면적이 전쟁 전에 비해 반 이상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지만 곧 사탕무재배는 급속한 증가를 하면서 1930년에 거의 전쟁 전 상태까지 회복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폴란드외국인의 귀향은 곧 심각한 이 지방 농업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에 도시와 공업지역에 많았던 독일인 실업자들을 농업노동자로 쓰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웠던 것은 조직적인 문제뿐 아니라 도시 실업자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여전히 제조업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나쁜 노동조건을 가진 농업노동을 받아들이며, 도시를 떠나기보다 실업의 고충 속에 사는 것을 택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결국 한편으로는 이민을 막기 위해 국경이 폐쇄 되고, 기존의 외국노동자들을 귀환시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폴란드 농업노동자모집을 허용하게 된다. 결국 10만 이상의 폴란드인이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규모 역시 이전과 비교하면 5분1 정도 수준에 머무는 것이었다. 공업에서도 거의 1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수가 집계되었다. 그렇지만 이들 대부분은 인근 유럽 국가들에서 온지 10년 이상 된 노동허가증이 필요하지 않은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중부유럽의 지정학적 위치 덕에, 7-8만 명의 외국인, 주로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와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50년대 여전히 외국인 고용이 없었을 때도 고정 외국인노동자의 규모는 그러했다. 그러므로 공업에는 실제 외국인노동자 고용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농업 외국인노동자 덕에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외국인고용은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에 정체기를 맞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체기는 1936년까지 계속 되었다. 군수산업 호황과 국내실업문제 해결과 함께 다시 외국인고용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렇지만 곧 전쟁으로 돌입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강제적인 외국인 노동력착취가 전체적인 국가의 지도아래 수행되게 된다. 이렇게 수행된 외국인 강제노동은 규모면에서 사상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1944년 전쟁 말기에 약 7백 6십만 명의 외국인들이 총력전을 위한 나치 전시경제의 주요한 노동력으로 투입되고 있었다. 이 규모는 전쟁 후 독일 연방공화국의 외국인고용 최대규모인 1973년의 2백 6십만의 거의 세배에 달하는 높은 수치였다. 이것은 또한 강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강제노동에 동원된 유대인들을 제외한 민간인 외국인노동자와 전쟁포로들만의 수치였다.
전쟁초기 30 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 전쟁포로를 오랜 외국인고용에 상응하게 농업노동력으로 강제 동원시켰다. 그리고 점령된 폴란드 지역에서 대대적인 노동력 모집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1940년 초까지 백만 명 이상의 폴란드 민간인이 강제노동의 희생자가 되었다. 실제 이러한 폴란드인 고용은 아리아인의 피를 강조하는 나치 인종주의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 고용은 하되, 구별되는 비인간적인 폴란드인 차별정책으로 그들의 인종주의적 원칙을 지키려는 고육지책을 썼다. “독일인의 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들 폴란드 민간인 노동자들은 임시 가건물에서 일반인들과 격리되어 살아야했고, 가슴에 P라는 마크를 달아 폴란드인임을 나타내어야 했고, 대중시설 이용이 금지되었고, 독일여인들과의 교제했을 경우 적발되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위협까지 받았다. 그리고 나쁜 작업장 환경과 비인간적인 대우는 더 말 할 나위가 없었다.
이러한 차별정책은 폴란드인들 이후 강제 노동력으로 이용된 서구유럽의 적국이나 동맹국들 출신의 온 민간인노동자와 전쟁포도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민간인 외국인 강제노동자와 전쟁포로노동자의 출신국을 본다면, 전쟁말기 소련이 2백8십만으로 전체 외국인강제노동자의 36,2%를 차지했고, 다음이 폴란드 백 7십만 명 (22,2%), 프랑스 백 3십만 명 (16,5%), 이태리 5십 9만 명(7,7%), 네덜란드 2십7만 명 (3,5%), 벨기에 2십5만 명 (3,3%) 순이었다. 즉 프랑스, 이태리, 네덜란드, 벨기에 출신의 민간인 노동자와 전쟁포로들은 폴란드인들에 비해 훨씬 나은 노동조건에서 일을 하였다. 그렇지만 실제 이들 중 가장 큰 차별을 받았던 것은 흔히 동부노동자 (Ostarbeiter)라고 불린 러시아 내지 소련 출신의 강제노동자들이었다. 전쟁초기 이들은 전시경제를 위한 노동력으로 전혀 고려되지 않았었다. 인종주의적 세계관과 안보상의 문제가 이들의 고용을 너무 위험한 것으로 보게 만들었고, 결국 폴란드인들에게 적용되었던 ‘선 허용, 후 차별강화’ 라는 타협조차도 러시아인 내지 소련인들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중반이후 극심한 인력난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인종주의적 소련인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들의 노동력에 의지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다. 전쟁말기까지 5백 7십만의 많은 소련군인들이 전쟁포로가 되었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이 넘는 3백 5십만이 굶주림으로 아사하거나, 추위로 동사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남은 2백 2십만의 소련군포로들 가운데에도 실제 노동력으로 이용된 것은 겨우 6십 3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련 강제노동자들은 독일군들과 노동청의 공조아래 강제모집 되어 온 민간인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작업능률면에서 이들 ‘동부노동자’들은 서유럽의 강제노동자들에 비해 월등히 떨어졌다. 이것은 차별적인 대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서유럽의 강제노동자들도 물론 집단수용소에 거주한 것은 동일하지만, 임금이나 식생활면에서 거의 독일노동자에 비견할 만큼 좋은 대우를 받았다. 반면 소련계 노동자들은 가혹한 대우 속에 영양실조로 고통 받았고, 일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속속 나왔다. 스탈린그라드전투 패전 이후 강제노동자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동부노동자의 작업능률개선 캠페인이 실시되면서, 이들의 생활환경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O자를 새기고 다녀야 했던 이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나치 이데올로기의 최대 피해자는 유대인들이었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을 군수산업에 노동력으로 이용하자는 제안을 처음 한 사람은 제국 군수상 (Reichsminister für Bewaffnung und Munition) 알베르트 슈페어 (Albert Speer)였다. 기업의 요구가 있을시 500명 단위로 강제수용소 수감원들이 노동력으로 대여되고, 공장이 있는 도시 근방에 세워진 임시수용소에 수용이 되어졌다. 그렇지만 이러한 제도는 체계적으로 발전을 하지 못했다. 나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는 유대인학살을 통한 말살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기에, 장기간에 걸친 유대인 노동력이용은 그들의 프로그램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학살이 거의 정점에 다다랐고, 노동력부족 역시 정점으로 치닫던 1944년 초부터 유대인 노동력이용에 대한 나치정부의 일련의 태도변화를 감지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44년 말 강제수용소 수감인원은 유대인들과 정치범들 모두를 포함해 6십만 정도였고, 이중 실제 노동능력이 있는 자는 4십 8만 명로 추정되었다.
결국 민간 외국인 강제노동자에 비해 이러한 수용소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의 나치 총력전을 위한 노동력으로서의 역할은 미비했다. 1944년 나치의 전시경제에 동원된 전체 외국인노동자의 74%가 강제로 징집되어 온 민간인들이었다.
전쟁 중 독일전체 노동력의 30% 이상을 차지했던 외국인강제노동자, 특히 민간인 외국인강제노동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 전시경제의 엄청난 근대화는 기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적어도 전쟁초기까지 일반 독일인들이 일상에서 누릴 수 있었던 “근대화의 수혜” 역시 외국인 노동력착취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강제노동이 가능했던 것은 국제여론의 압력을 무시하고 “노예노동(Sklavenarbeit)”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권위주의적 나치독재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였던 것이다.

3. 독일 연방공화국 외국인고용: 노동수입국에서 이민국 (vom Arbeitseinfuhrland zum Einwanderungsland)으로의 발전.

전쟁직후 연합국에 의해 난민(Displaced Persons)으로 명명된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의 조속한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들 중 일부만 – 돌아갈 고국의 개념이 애매한 경우나 여러 이유에서 – 귀국을 하지 않고 남았는데,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다른 서방의 여러 나라들이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서 1950년 초반까지 외국인 강제노동자 송환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실제 오랫동안 독일사회의 큰 쟁점이 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방인노동자“의 귀환문제가 아니라, 1천 2백만에 달했던 잃어버린 독일제국 영토로부터 추방당한 실향민들과 소련점령지 내지 동독으로부터 탈출자들의 사회통합문제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이민은 패전의 상처로 신음하던 서독사회에 처음엔 심각한 부담과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골칫덩어리가 역동적인 경제재건과 함께 하루아침에 효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독일경제는 이러한 대규모의 이민 덕에 경제재건기에 인력난을 겪지 않고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직후 불가능하게 보였던 실향민과 탈동독자의 사회통합은 이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그 성공은 나중에 거의 신화화되기에 이르렀다.
탈동독자들과는 달리 동부독일 실향민의 서독행은 1950년 초반부터 하향화의 길을 걷다가, 1950년대 말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탈동독자의 행렬은 1961년 노동력손실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동독정권의 장벽건설을 통해서 겨우 진정되었다.
독일 연방공화국의 외국인 노동자고용의 시작은 다소 의아스럽게 이러한 실향민과 탈동독자의 유입이 한창이던 시점이었다. 1955년 독일정부는 처음으로 이태리정부와 독일경제를 위한 이태리 노동자모집과 고용에 대한 협약 (노동력모집협약)을 체결했고, 이것은 60년대 초에 다른 지중해 연안나라들과 맺었던 협약에 기초가 된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탄력성으로 인해 외국인고용의 규모는 1959년까지 미약한 수준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이미 장벽건설이전 제조업분야의 저기술.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수요증가와 함께 본격적인 외국인고용이 시작되었다. 외국인규모 증대와 함께 외국인노동자 모집국도 확대되었다. 1960년 그리스와 스페인, 1961년 터키, 1964년 포르투갈, 1968년 유고슬라비아와 차례로 노동력 모집협약을 맺었다.
외국인노동자수는 이미 1965년에 100 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빠르게 증가에 증가를 거듭했다. 이러한 증가세가 꺾이게 되는 것은 독일 경제재건이후 최초로 찾아 온 1966과 67년 사이의 경기침체였다. 이시기 전체 외국인 노동자규모가 130 만 명에서 99만 명으로 대폭 줄게 되었다. 그러나 1968년 다시 경기가 회복되자, 마치 다이어트후의 요요효과처럼 외국인 고용규모는 1970년 2백만 규모까지 육박했고, 외국인 고용모집이 종결되기 직전에 2백 6십만의 외국인이 독일경제를 위해 고용되었다. 이전과 달리 농업 외국인노동자의 수는 극히 미미했다. 이들 외국인의 80% 이상이 제조업과 광업에 종사하는 공업 외국인노동자였다.
출신국별 외국인노동자 규모를 보면 경기침체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진다. 외국인고용의 중심이 이태리를 위시한, 그리스, 스페인 등 나중에 유럽연합에 가입하게 되는 남서유럽국에서 서서히 유럽변방이나 유럽주변국으로 분류되는 터키와 유고슬라비아로 넘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1965년 외국인 노동자 출신지별 비율에서 이태리 31%, 그리스 16%, 스페인 16% 였 던 반면, 터키와 유고슬라비아는 각각 10 %와 6 %에 그쳤다. 그러나 1970년대 이태리는 외국인 노동자규모에서 유고슬라비아와 터키에게 추월당하게 된다. 1973년 터키 노동자의 비율은 29%, 유고슬라비아는 16% 였 던 반해, 이태리는 17%, 그리스 11%, 스페인 8% 정도에 그쳤다. 이러한 순위구조는 이후 계속 고정되었고, 유럽연합국들과 “변방국”들 간의 차이는 훨씬 더 벌어지게 되었다 – 2000년 터키 29%, 유고슬라비아 16%, 이태리 11%, 그리스 6%, 스페인5%. 그러나 이러한 외국인노동자 집중의 문제보다 더 큰 것은 외국인노동자의 독일정착 증가와 그것으로 인한 사회문제의 증가였다. 즉 이들 주변국, 특히 터키 출신의 노동자들의 독일정착 경향이 유럽연합 국가출신 외국인노동자들에 비해 현저히 높았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외국인노동자 모집중지(Anwerbestop)이후 외국인 노동인구는 줄었지만, 거주외국인 인구는 이러한 정착결정으로 인한 노동자가족들의 합류로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1973년 전체 4백만 명의 독일거주 외국인의 60%인 2백 6 십만 명이 노동인구에 속했는데 반해, 2000년에는 7백 3십만의 외국인의 27%인 2 백만 명 만이 실제 노동인구였다. 이 통계는 이미 독일이 70년대를 정점으로 노동수입국의 위치에서 이민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현재 독일의 높은 외국인 인구비율은 물론 노동이민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동구권의 붕괴로 급속히 늘어났던 동구난민과 터키내 소수민족 쿠르드난민의 독일행렬 역시 독일 외국인증가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92년 독일에 체제하는 외국인난민의 수는 대략 백 8십만으로 집계되었다.
이러한 높은 난민 수는 독일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경제적 풍요 외에도 유럽에서 가장 자유롭다는 독일난민법이 주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1993년 제정된 새로운 난민법으로 난민심사가 까다로워진 이후 이러한 난민규모는 대폭 줄었다고는 하지만, 1998년 여전히 난민 수는 백 십만 이상을 웃돌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 “보트는 이미 만선이다”라는 모토아래 독일정부는 끊이지 않는 이민행렬을 줄이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독일이 이러한 외국인으로 인한 심한 사회문제에도 불구하고 IT기술자의 부족으로 인해 노동이민의 필요성을 다시 역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민을 제한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은 여전하다. 어쨌든 독일사회가 외국인고용과 이러한 난민들의 이민행렬로 생긴 사회문제로 심한 몸살을 않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III. 노동시장 중심의 독일 외국인정책
1. 외국인고용정책의 생성과 확립

1870년대 독일제국에는 외국인고용만 시작되었을 뿐, 외국인고용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이렇다할 제도조차 없었다. 외국인고용제도는 외국인고용으로 생긴 여러 갈등과 이해관계의 대립, 그리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문제점을 조정하고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서 서서히 만들어졌다. 민족국가와 민족주의가 외국인고용제도의 생성에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외국인고용은 민족국가와 이중적인 “애증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한편에서 외국인노동자는 호경기에 국민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민족국가에 절대 필요한 존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증가로 인한 사회불안과 사회통합의 어려움 때문에 대규모 외국인노동자들은 민족국가의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외국인노동자고용은 시작하자마자, 얼마가지 않아 독일 최초의 민족국가인 독일제국의 민족주의적 국가정책과 정면충돌을 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의 주 원인은 외국인노동자의 출신국과 외국인고용밀접지역의 특수성에 있었다.
다른 서구의 선진국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늦게 민족국가를 발족시켰던 독일에게 있어, 민족구성원의 사회통합은 중요한 국가적 과업이었다. 특히 독일 제국 내 소수민족문제는 제국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사회주의자들과 가톨릭신도와의 날카로운 대치국면과 함께 주요한 사회불안 요인이 되었다.
새로 탄생한 민족국가의 초대재상 비스마르크가 무엇보다 중점을 둔 것은 프로이센에게 분할 점령된 이전 폴란드 지역, 곧 프로이센 동부지역의 독일화(Germanisierung)정책이었다. 독일인 이주정책(Innere Kolonisation)과 언어정책등과 같은 독일화 정책이 큰 효과를 거둔 것은 아니나, 최소한 이 지역의 폴란드인구비율의 증가를 막는 구실은 했다. 그러나 이 지방 농업의 인력난으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게 분할 점령된 나머지 폴란드지역에서 폴란드 시즌노동자 – 독일 농업 외국인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 가 유입되었고, 이것은 곧 비스마르크정부가 추진하던 동부지방의 민족주의정책에 위협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에 폴란드세가 강했던 포젠지방에서 실시된 언어조사가 이것을 잘 뒷받침 해 준다. 이 지방은 1871년 제국성립 당시 폴란드어를 쓰는 인구가 57.2%로 42.8%의 독일어인구보다 월등히 많았다. 1875년 폴란드인구 비율은 1871년과 큰 차이 없이 57.1%를 유지했다. 그러나 외국 폴란드인 고용증대이후 이 지방의 폴란드어인구는 급격히 늘어나 1880년 58.6%,1885년 59.6%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885년에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영토의 외국 폴란드인의 추방을 강행했고, 이 조치로 그 사이 이주해 왔던 3만 2천 명 가량의 외국 폴란드인이 독일제국 영토를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곧 국경이 폐쇄되고, 독일내 외국인폴란드인(ausländische Polen)의 고용이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농업위기로 벼랑 끝에 몰린 엘베강 동부지방 대지주들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국내와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사탕무재배는 하나의 위기 타개책으로 추진되었지만, 값싼 사탕수수로 축출된 설탕에 대한 높은 관세와 인력난을 해결해 줄 외국인고용이 없이는 사탕무재배 자체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관세와 외국인 농업노동자는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절룩거리던 엘베강 동부지방 융커들이 지탱하고 의지하던 양쪽 목발(Zwei Krücken)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엘베강 동부지방의 대지주들은 폴란드 농업노동자 재허용에 대한 강한 압력을 넣었다. 결국 1890년 비스마르크의 후임으로 새로 재상이 된 카프리비(Caprivi)정부는 다시 외국 폴란드인의 고용을 허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 허용조치는 몇 가지 단서조항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농업에만 고용이 허용되었고, 농한기인 11월 15일부터 4월 1일 까지는 독일영토 밖에 머물러야 한다는 대기기간(Karenzzeit)이 법으로 규정되었다. 이 대기기간 조항은 외국인 폴란드노동자의 영구이민을 막고 귀향압력을 통해 그들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외국노동자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어 1908년부터 프로이센의 모든 외국인 노동자에게 국경관청이나 독일 노동자중앙회(Deutsche Arbeiterzentrale)에서 발급되는 신분증명서(Legitimationskarte)를 소지하는 것을 의무화시켰다.
민족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외국인고용의 효율성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역할도 함께 했다. 즉 대기기간규정과 신분증명서발급 의무화를 가지고 민족국가의 이해관계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외국인고용의 경제성도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외국인고용의 가장 큰 장점은 경기변동이나 필요에 따라 유연하고 자유롭게 조정 할 수 있다는데 있었다. 일손이 부족한 농번기에 폴란드노동자를 고용하였다가 농한기에 다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일반적으로 겨울철에 들어가는 불필요한 비용을 절약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계약기간동안 상해나 병으로 노동자가 더 이상 일 할 수 없을 때에 그들을 즉시 국경 밖으로 추방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외국인고용의 유연성(Flexibilität) 과 자유로운 조정 (Disponibilität)이 가능하였던 것은 외국인노동자들의 불리한 노동조건과 불안한 법률적 조건이 전제되었기 때문이었다.
가축의 우리나 헛간을 개조하여 만든 집단 노동자숙소에 거주하며 농번기 때 와서 일을 도왔던 폴란드 외국인노동자의 노동조건은 기혹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해가 떠서 해가 질 때로 규정 된 긴 노동시간을 감내하여야만 했고, 이러한 노동시간 외에도 지주가 요구하면 시간외의 노동을 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잔업이나 주일노동과 같은 시간외의 노동은 외국인들이 내국인에 비해 더 자주 요구되어졌다.
물론 임금도 대부분 내국인노동자에 비해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용은 단지 농번기에만 이루어진 시즌노동이었던 것이다.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나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개인적 또는 집단적 항의나 요구 없이 온순히 일하였다. 출신지의 경제, 사회적 낙후성과 그로 인한 낮은 생활수준, 그리고 단기간 많은 돈을 벌어 귀향한다는 의지 등이 그들을 이러한 악조건을 견디는 값싸고 (billig) 고분고분한 (willig) 노동자로 만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고분고분한 태도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불안한 법률적 처지에 있었다. 농한기의 귀향압력과 신분검사 등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은 계속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일을 했으며, 추방의 위협과 그로 인한 불안감은 그들의 일상생활이었다. 실제 외국인 농업노동자가 나쁜 노동조건에 불만을 품고 심하게 불평하거나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단체행동을 할 경우, 성가신 외국인으로 낙인 찍혀 즉시 추방되었다.
대기기간과 귀향압력, 신분증발급을 통한 통제 등을 통해 독일은 이미 이민국이 되는 위험을 막고, 경제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한시적인 노동정책의 근저를 마련했다.
이러한 민족국가와 고용주의 이해를 균형 있게 대변하는 노동정책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사회에서는 “낮은 문화수준”의 폴란드 외국인노동자의 대규모유입이 “우수한 독일문화”의 저속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우려와 맞물려 값싸고 순종적인 폴란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선호현상에서 농업 노동자문제, 즉 이농현상의 주요한 원인을 찾으려는 소위 밀어내기테제(Verdrängungsthese)까지 나오게 된다.
즉 쉽게 말하면 값싸고 순종적인 외국인 노동자는 덤핑노동자(Lohndrücker)로 내국인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때로는 일자리를 빼앗아 결국 고향에서 설 땅을 잃어버린 내국 농업노동자를 도시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산업화와 그로 인한 사회. 경제적 변화가 가져왔던 독일 농업노동자들의 이농현상을 단순히 값싸고 순종적인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 탓으로 돌리려는 이 주장은 물론 억지에 가깝다. 분명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거대한 이농현상이 먼저 일어났고, 이 현상이 남기고 간 커다란 틈을 외국인 고용이 메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덤핑노동자로, 파업이탈자(Streikbrecher)로서 외국인노동자들이 독일노동자와 노동조합에 입힌 손해 또한 적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외국인노동자의 폐단을 없애려는 노력이 이제 막 시작한 독일 노동운동 안에서 있었다. 그렇지만 노사정 모두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외국인정책의 완성은 바이마르공화국에 가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11월 혁명이후 정치사회적인 변혁의 분위기속에 노동운동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져 있었고,
외국인고용정책의 입안과정에서 역시 이러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전쟁직후 노동계에서는 외국인노동자가 이전처럼 덤핑노동자와 파업이탈자로 이용될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요구의 목소리들을 내었다:
1. 외국인고용은 내국인이 더 이상 고용할 수 없는 상황에 한해서만 허용한다.
2. 허용된 경우는 외국인노동자와 내국인노동자는 같은 협정임금 등급기준을 통해 임금이 지급되어야 한다. – 동일한 노동일 때 동일한 임금의 원칙.
3. 고용주와 사용자로 대등하게 구성된 위원회를 통한 외국인고용허가.

이러한 요구들은 차례차례 받아들여져 법제화되었다. 이것으로 외국노동자에 대한 내국인노동자 우선권(Inländerprimat)이 법으로 확정되었다. 독일제국에 이미 생겼던 대기기간, 귀향압력, 신분증명서 발급의무 등도 계속 유효했고, 또 새로 생긴 외국인고용을 관할하는 노동알선과 실업보험을 위한 제국관청 (Reichsanstalt für Arbeitsvermittlung und Arbeitslosenversicherung)에 경기상태에 따라 매년 고용된 외국인수를 정하게 하는 의무를 부여했다. 이것으로 경기에 따라 외국인고용을 조정 할 수 있는 한시적 외국인노동정책을 위한 도구 역시 세밀하게 완성이 되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시기에 노사정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담합주의적(kooperativ)이고 한시적인 외국인고용정책이 확립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원칙들이 실제로 실행되어진 것은 30년이 훨씬 지난 독일 연방공화국에 와서이다. 우선 바이마르공화국의 불안했던 경제는 오랫동안 대량 외국인고용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총력전으로 인한 극심한 인력난속에 대량 외국인고용이 정작 필요했을 때는, 이러한 민족주의에 충실한 원칙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족주의의 극단화된 폐해 속에 외국인고용이 노예노동으로 전락함으로써 실행의 기회조차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독일 연방공화국 외국인고용의 제도적, 심리적 연속성
2,1 외국인 모집정책 (1955-1973)

대규모 외국인 강제노동자의 고용이 전쟁종식과 함께 끝이 난후, 불과 9년 만에 – 이런 외국인 강제노동자가 완전히 독일영토를 떠난 이후로는 불과 4년도 체 되지 않아 – 외국인노동자의 재고용이 추진되고 있다고 경제부장관 루드비히 에하트가 1954년 말에 언론에 발표를 했다. 이 선언은 사회각계로부터 의아함과 당황함, 그리고 종국에는 반대캠페인까지 일어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여론의 원인은 여전히 기억이 생생했던 나치과거의 강제노동의 폐해가 아니었고, 외국인정책의 근조가 되었던 내국인노동자 우선원칙 때문이었다. 즉 내국인을 구할 수 없는 경우만이, 외국인고용이 허용된다는 조항이 외국인 재고용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전후 급속한 경기회복으로 실업문제가 진정국면에 있긴 했지만, 1954년 말 실업률이 5% 이상을 기록하고 있었고, 여전히 독일난민과 탈동독자들의 물결로 내국인노동자는 국내 노동시장수요를 충족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부안에서도 외국인문제로 갈등이 빚어졌었다. 실제 외국인노동자고용을 관할하는 노동부장관 슈톨히는 여전히 구조적 실업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시점에서 외국인고용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부인을 했다.
그리고 가까운 장래 외국인고용이 필요할 때,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동일임금과 동일노동조건을 공약하며, 강하게 반발하는 노동계를 달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독일정부는 곧 이태리와 첫 노동자고용모집협약을 맺는 쪽으로 국무회의에서 의견을 조율하며, 준비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주된 이유는 통상압력을 통한 이태리의 자국 노동자고용 요구 때문이었다.
이러한 외국인고용 준비과정에서 노사정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서로 이해관계를 조율했다. 노동계가 허용의 전제로 내밀었던 내국인우선의 원칙, 특히 동일한 노동일 경우 동일한 임금의 원칙들이 고용주들에 의해 받아 들여 졌고, 결국 노동조합의 동의아래 외국인모집은 시작이 되었다. 결국 고도의 경제성장이 노동력부족 때문에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공통분모를 노사정 모두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담합이 가능할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초기 외국인고용에 대한 담론의 핵심이 외국인고용의 효용성문제가 아니라, 외국인고용의 시기문제였다는 것이다. 이후 60년대로 넘어가 이러한 노사정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외국인고용에 대한 거대담론은 없었다. 단지 사회적 문제와 맞물려 외국인고용의 효용성이 잠시 불거져 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경제성장이라는 목표 앞에 이내 사그라지는 운명이었다.
초기를 제외하고 외국인고용이 별 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여 진 것은, 결국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외국인노동은 호경기 인력난의 해결을 위한 노동시장정책의 일부로 여러 사회구성원들의 머리에 각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인노동을 필요에 따라 조정하고 통제하는 제도가 이미 있었던 것이다. 실제 사회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에도, 이것은 한시적인 것이고 노동시장의 필요성이 없어 질 때,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고용된 모든 외국인노동자는 1년간의 노동허가를 받고, 필요시에 해마다 연장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허가가 항상 독일체류허가의 전제가 되었다. “초청노동자”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한시적인 외국인고용에 대한 희망이 들어 간 것이다.
실제 외국인노동력은 경제발전기에 경기완충장치(Konjunkturpuffer)로서의 역할을 십분 발휘했다. 이러한 외국인의 역할이 가장 잘 드러났던 때는 1966년에서 1967년까지의 경제침체기였다. 이 시기 독일인노동자 규모가 단지 2,5%로 정도 감소했던 것과 달리, 외국인노동자의 감소율은 무려 24,5%에 달했다. 이러한 경기침체기의 경험은 독일정부에게 외국인고용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외국인들의 독일정착 경향이 늘어가고 있던 1970년 초에도 여전히 독일 외국인고용의 한시적 특성과 이민문제해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당시 노동부장관이던 아렌트가 국회에서 행했던 연설은 그러한 정부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껏 경험은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4년 혹은 그 이상의 독일체류 후에 완전히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연방정부는 여러 번에 걸쳐 독일은 인구밀도 때문에 이민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바있다. 노동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한시적 체류는 외국인들의 강한 귀향 움직임을 통해 증명이 되었다. 지난 5년간 3명 중 2명이 귀환자였다. 예상되는 지속적인 외국인고용으로 독일에 정착하려는 외국인의 수가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수는 전체 외국인노동자에 비례해 미미한 것이다.”

물론 아렌트 장관의 이러한 견해는 실제 현실정치와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사회적 문제, 특히 외국인고용으로 인한 주택과 교육 같은 사회기반시설의 부족은 70년 초 이미 독일정부로 하여금 외국인고용의 계속적인 확대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게끔 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73년 6월에 독일정부는 외국인노동자 중개수수료 인상과 사회기반시설의 수용능력에 따른 인구밀집지역의 외국인고용의 허용여부 결정이라는 원칙을 골자로 하는 외국인고용을 위한 특별프로그램(Aktionsprogramm zur Ausländerbeschäftigung)을 만들어 공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일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 외국인정책은 여전히 시장의 원리에 충실했지, 사회정치적 고려에 의해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았다. 특별프로그램은 만들어지긴 했지만, 당초 의도했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수요억제를 실현 할 기회조차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프로그램이 나오고 6개월도 체 되지 않은 1973년 11월 23일 갑작스럽게 공포된 외국인노동자 모집중지를 통해 1955년부터 실시된 외국인모집정책 자체가 종말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집중지의 결정적인 요인은 사회적 문제로 인한 외국인고용의 폐해가 아니라, 오일쇼크와 함께 시작된 세계경제위기였다. 대량실업사태를 가져 온 이 위기의 여파로 외국인노동자의 수요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독일정부는 경기침체의 심각성과 장기화조짐을 감안해 모집중지가 단시일에 다시 해제될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정부는 전반적으로 이 모집중지를 임시적인 조치로 보았다. 때문에 업무가 재개될 경우 빠른 정상화를 위하여, 모집국들의 주요도시에 산재했던 독일 노동청의 모집관청에 담당공무원과, 신체검사를 맡았던 의사들의 일부를 일단 현지에 남겨 두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불황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독일 경제가 다시 기지개를 펴게 되었을 때도 외국인모집중지 조치는 다시 해제되지 않고,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도전 앞에 부심하는 독일 제조업의 구조조정과 기술혁신에 대한 노력과 연관되어 있다. 1970년대 경제위기후 경제성장률이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끊임없는 수요(Nachfrageü

자료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