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한국사람들이 오만하더라”
[비자없는세상 41] 한 콩고공화국 난민의 고백
“난민과 불법이주자도 구분 못하는 한국”
2005/8/26
이유경 기자 penseur21@hotmail.com
그를 처음 만나러 가는 길에 조금 긴장한 건 사실이다.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사진촬영 ‘절대불가’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목소리도 ‘딱딱’했다. “내 약속하리다!” 했지만 카메라를 챙겨 들고 안산으로 향했다. 그것은 자기방어적 당당함이었을까? 미디어에 대한 불신이었을까? 아님 원래 말투가 그냥 그럴까? 두 번째 방문하기까지 몇 차례 통화에서는 목소리에 굴곡이 불어났다. 친근감이 전해졌다. 그의 집안에 다시 발을 들여놓던 날 나는, ‘나도 모르게’ 시끄러운 내 일상사를 늘어놓기 시작 했는데…약속을 지체하고 어겨야 했던 상황을 내심 변명하고픈 마음 반, 답답함을 분출하고 싶은 마음 반 뭐 그랬던 것 같다. 언니처럼 그리고 ‘권사님’처럼 ‘종교적 코드’로 나를 듬뿍 위로하려 했던 그. 내가 처음 만나는 아프리카 여인, 버지니아(Verginia).
그를 처음 만난 건 7월 14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주최한 ‘난민청문회’에서다. 나는 그때 그의 언어실력에 짐짓 놀랐다. 한국에 온지 5년. 한국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배웠다는 영어가 진술인으로서 할 말은 막힘 없이 줄줄 하는 수준이다. (학교와 학원, 수년을 배우고도 의사표현 제대로 못하는 게 한국인 영어의 특징이건만!). 프랑스언어권 사람들에게서 강하게 묻어나는 ‘프렌치쉬’(Frenchish : 그건 영어를 말하지만 불어처럼 들리는 언어다) 억양도 거의 없다. 케이블 TV를 열심히 시청했단다. 엄마의 언어에 놀란 나는 아들 다니엘의 언어에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살 반 꼬마는 우리의 대화를 연신 방해하며 “엄마!”를 소리했다. 그러면 버지니아는 “왜에에!”라고 답한다. 그리고 바로 영어와 불어가 마구 섞여 나온다. “아이가 언어 때문에 헷갈려 하는 것 같아!” 우리는 웃었다. 앞으로 영어, 불어, 한국어를 말하게 될 아이가 나는 부러워졌지만, 그들에게 ‘멀티 랭귀지’는 낯설고 말 설은 이국 땅에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언어는 문화의 출발이기도 하니 버지니아 가족은 그 언어’들’을 토대로 복합적 문화를, 그리하여 ‘또 하나의 문화’를 생성해낼 것이다. 동시에, 오 천년 단일민족의 무구한 역사를 지켜온 애국심 충만한 이 땅에서 그들은 ‘문화 도전자’가 될지도 모른다.
문화를 창조하고 도전하는 이름, 난민
방글라데시 출신 한 이주노동자의 일인시위. 난민과 이주노동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한국에서 이들은 인권과 미래는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다.
버지니아는 2000년 4월 남자친구와 함께 콩고 공화국을 탈출했다. 탈출하기 5일전 밤 6시. 암흑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납치되었는데 그들이 정부군이었는지 반군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양 측 모두 같은 군복을 입거든” 얼떨결에 총을 들 뻔했던 그들이 탈출 할 수 있었던 건 정말 우연 같은 행운이었다. 하나뿐인 가족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 고향 동부지역의 언어 스와힐리어로 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 소리를 듣고 한 병사가 다가왔다. 그 역시 동부출신이었고 이를 계기로 병사는 그들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화장실을 갈 때 병사들이 동행하는데 그가 화장실에 함께 가주었고 사다리를 놓아주었어. 담장을 넘어 앞만 보고 달리라더군, 누군가 도와줄 거 라면서” 앞만 보고 죽어라 달리다가도 숲 속에 피신하기를 여러 번, 그러다 아시아계 선교사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이틀 후, 선교사의 도움으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비행기를 타고 이국 땅에 이르렀다. “와보니 한국이었어. 그 선교사가 한국은 기독교 국가이니 우리에게 좀더 나을 거라고 했었는데…”
한국에 온지 2달 뒤 난민신청을 했지만 답을 들은 건 5년이나 지난 올 4월. “1년짜리 비자를 주면서, 비자 끝나면 나가라는거야” 난민신청은 거절 당했다. “이민성에서 뭐라면서 거절했지?” “고국 사정이 나아졌으니 돌아가도 박해 받지 않을 거래. 아니면 제3국으로 가라고 했어. 보다 강한 증거가 필요하다고도 하고” ‘사정이 나아졌다? 콩고 공화국이 여전히 콩가룬 건 제법 알려진 얘긴데…’ 쪽 팔렸다.
“그래서 뭐라고 반박 했지?” “우리는 현지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강력한 증거를 수집할 수 없다고 했지. 자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하더군”
‘젠느 아프맄’(Jeune Afrique : 젊은 아프리카 www.jeuneafrique.com), 비비씨 등 인터넷과 미디어에서 자료를 수집해서 제출하기도 했지만, 버지니아는 지난 5년 동안 이민성이 콩고 공화국 사정을 제대로 조사했는지 조차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또 ‘의혹의 눈길’과 자신들을 단순한 불법 이주노동자 다루듯 했다는 게 버지니아가 강하게 받은 인상이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온 난민과 불법 이주 노동자는 다른 경우야” 그가 덧붙였다.
콩고 분쟁 얘기가 나온 김에, 나는 ‘어린이 병사’로 유명한 그곳 사정을 물었다.
“그들의 나이 대는 어떤가? 열다섯? 열여섯? 아니면…”
“열다섯? 열다섯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열다섯은 나이든 경우야!. 여섯, 일곱 살짜리도 있어”
“강제 징집된 건가?”
“당연하지! 생각해봐. 어떻게 여섯 일곱 먹은 애들이 싸움을 원해서 전장에 나간다고 할 수 있나? 그 아이들은 싸우는 게 뭔지도 몰라!”
‘싸운는 게 뭔지도 모르는’ 예닐곱 꼬마병사들
www.cia.gov
콩고공화국 지도. ‘소위 국제사회’로 불리는 미, 프, 영 인근 국가들까지 콩고공화국의 풍부한 자원 착취에 혈안이 된 이들은 무기판매에 열 올리며 전쟁을 부추기며 지속시키고 있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6-7개의 외신과 관련 사이트를 통해 모국의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그는 콩고 공화국 사태가 알려진 것과 달리 ‘내전이 아니’라고 강하게 못박았다. “정부군의 병사가 콩고인들이고, 르완다 우간다 정부에 의해 조종되는 동부지역 반군들 역시 콩고인들을 사병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 뿐이야. 이걸 마치 콩고인들 간에 싸우는 내전처럼 말하는 건데…그건 아니지” 실제로 주요 외신들은 관련 보도를 할 때마다 ‘6개의 나라가 관련된 (콩고 내전)’이라는 표현을 쓴다. 거기에 서방국가들의 이해관계까지 고려하면 내전이 아니라는 버지니아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 (박스 기사 참조)
전쟁얘기를 좀 더 이어갔다. “550억 아프리카 부채 탕감이 수백만을 위한 승리”라며 깝쭉대던 G8 정상들이 회담 전야제를 맞이하던 6월 22일, 국제사면기구, 옥스팜 등 인권단체들은 “G8 국가들의 무기수출이 가난과 인권탄압에 불을 붙이고 있다” 는 공동명의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이들 국가들의 수단, 버마, 콩고 공화국, 콜롬비아, 필리핀 등지로의 무기수출을 지적했고, 엠네스티 사무총장 이리니칸(Irene Khan)은 “억압정권, 극심한 분쟁지역에 무기이동을 일부러 용인하며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G8국가들이 어떻게 가난과 불의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7월 2일 엠네스티는 다시 “영국, 이스라엘, 남아공, 미국, 동유럽의 무기회사들이 여전히 콩고 공화국 동부지역 무장세력, 르완다, 우간다에 무기를 팔아먹고 있으며 유엔과 국제사회가 이를 강력히 통제하지 않으면 인권침해의 대재앙이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콩고 공화국과 동부지역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르완다, 우간다가 ‘사실상’ 동부지역 무장세력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도, 또 이 두 나라가 미국, 영국과 정치군사적으로 가깝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 “아구가 맞아 떨어지네. 콩고는 엄청나게 큰 영토에 자원이 풍부하거든. 르완다와 우간다는 자원도 부족하고 아주 작은 나라들이야. 그런 나라들이 콩고를 침공하고 전쟁을 부추기는 배후에 뭐가 있는 것 아니겠어?”
“아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라크에서 한국군대가 ‘3등 침략군’ 이걸랑. 전쟁을 경험한 당사자로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마디 해봐”
“알고 있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언제나 민간인이야” 짧고 굵게 답했다.
“근데 말야. 왜 사진 촬영을 거부하지?” 그는 자신의 불쾌한 경험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몇 달 전 기독교계 한 신문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했을 때 사진을 게재하지 말 것을 요청했단다. ‘알았다’고 했던 기자는 배신을 때렸다. 사진이 나간 뒤 주위 사람들이 알아본 게 몹시 싫었고 변호사를 통해 항의하기도 했다.
“혹시 그 사진 사건 말고 한국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뭔가 좀 다른 걸 느끼진 않았나? 이를테면 좀 오만하다던가…뭐 그런…” 내 ‘편견’을 숨기지 못하고 은근슬쩍 유도질문을 했는데, 버지니아는 ‘즉각’ 이렇게 되받았다. “모든 한국인이 오만해! 단지 미디어 관계자뿐 만이 아니야”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 속이 답답해온다. 타 문화에 대한 배타성도 ‘화이트 해바라기’ 성향도 (고로 피부가 검을수록 눈알이 깔리는 것도) 먹구름마냥 짙은 이 땅에서 흑인 여성 버지니아의 5년 삶을 딱 요약해준 것 같았다.
안산 = 이유경 penseur21@hotmail.com
자원 있는 곳엔 분쟁 있다
5년 분쟁, 최소 330만명 사망(국제구호위원회 2003년 통계). 2003년 휴전이 선언되었지만 동부지역의 끊이지 않는 살육전은 ‘휴전은 종이에만 있다’는 버지니아의 말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2003년 4월 국제구호위원회(IRC) 대표는 “이라크의 장기전에서 나타난 최악의 사망률이나 최근 발칸분쟁에서의 사망통계도 콩고 수치에는 근접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콩고 공화국 분쟁은 국제 미디어로부터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MSF) 올 8월 2일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콩고공화국 이투리(Ituri) 지구의 부니아(Bunia) 타운 캠프를 폐쇄했다. 이들은 최근 몇 년 수십 만 명이 학살된 동부 이투리(Ituri) 지역을 두고 “(휴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폭력은 계속된다”고 덧붙였다.
1998년 8월 시작된 콩고 공화국 분쟁은 외형상으로 보면 동부지역에서 발생한 폭동이 그 출발점이다. 서방세계의 후원으로 32년 집권한 모부투(Mobutu) 독재정권이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 반군에 의해 전복된 지 1년만이다. 당시 미국은 ‘독재자 갈아 치우기’를 계획 중이었고, 아프리카 착취의 원조이자 모부투의 이용가치를 더 유지하고 싶었던 프랑스에서는 ‘로랑 카빌라는 미국의 꼭둑각시’라는 보도도 튀어나왔다. 1996년 당시 론 브라운(Ron Brown) 미 통상장관이 서 아프리카 순방 중 “이제부터 미국은 옛 식민지 세력(프랑스 등)에게 아프리카 시장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것은 이 지역에서 두 제국주의의 기 싸움을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로랑 카빌라는 97년 호주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모부투 전복은 32년 독재에 지친 민중들의 요구가 미국의 이해관계와 우연히 만난 것”이라며 ‘미국 꼭둑각시론’을 일축했다. 독재정권 전복 1년 만에 ‘정부군’으로서 동부지역의 ‘반군’들과 전쟁을 시작한 로랑 카빌라는 2001년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고 이후 아들 조셉 카빌라(Joseph Kabila : 현 대통령)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동부지역 무장조직은 94년 르완다 대학살로 악명 높은 후투족 무장세력 '인터라함웨'(Interahamwe), 우간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콩고해방운동'(MLC : Movement de Liberation Congolese) 그리고 르완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콩고민주행동'(RCD : Rally for Congolese Democracy) 등이다. 특히 인터라함웨는 르완다 투치족 대학살 당시 독재자 모부투의 지원을 받았고, 이들이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자이르(Zaire : 콩고 공화국의 전 이름) 동부 반야르완다족(Banyarwanda : 투치족) 거주지역에 도착했을 때도 모부투는 이들을 지원했다. 이는 또 다른 인종학살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엔과 프랑스 미국 등은 학살범 인터라함웨의 난민캠프 유입을 사실상 눈감으며 이 난민캠프에 대거 구호물자를 퍼부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조직을 소생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로랑 카빌라 진영의 인권침해 사례만을 물고 늘어지는 ‘소위 국제사회’의 태도는 유엔 인권침해유엔조사단과 카빌라 정부 사이의 최대 논쟁 거리 중 하나다. 서방 언론 역시 카빌라가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고 보도하며 지자체류의 자치조직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등 편향 보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서방의 태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제국주의의 개발착취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콩고 공화국은 세계 코발트 보존량의 80%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이아몬드, 금광석, 석유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축복 받은’ 땅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금광회사인 남아공의 앵글로 골드(Amglogold)와 두 번째 규모인 캐나다의 배릭 골드는 콩고 공화국 북동 지역에 5만7천 평방 킬로미터를 착취 개발했고, 96년 모부투는 8만2천 평방킬로의 광산채굴권을 배릭회사에 넘기기도 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이 거래를 성사시킨 공로자다. 어디 이뿐이랴. 콩고 독립 이듬해인 1961년,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독립영웅 루뭄바 (Patrice Lumumba)는 미국과 벨기에의 합작음모로 암살되었고, 65년 모부투의 쿠테타는 미 CIA를 등에 업은 것이다. 32년동안 모부투는 서구 제국주의의 ‘아프리칸 도구’로서 악명을 떨쳤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보자. 평화롭게 공존하던 이 지역에 분할지배정책으로 인종간 갈등을 심어놓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 백인 식민통치가 그리고 인종을 고려치 않은 채 ‘맘대로 국경선 긋고 떠나기’ 따위가 원조다. 자원 있는 곳에 늘 도사리는 제국주의의 착취와 쟁탈전은 오늘날 제 3세계의 분쟁을 ‘불치병’으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