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부산외국어대 교수)
6월은 참 날이 많은 달입니다. 우리 하는 일과 관련된 혹은 그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꺼리를 주는 날이 많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선 6월 6일은 현충일입니다.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과 감사의 날로 오랜 동안 생각을 해왔던 날이지요. 그렇게 배워 왔던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더욱이 5월이 518로 우리에게 머물고 난 후 오는 6월이라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이를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갖는 폭력이 이어주고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이야기를 한 번 해보지요. 양심적 병역 거부 이야기입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한 이정렬 판사라는 분이 국가는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을 제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이 판사는 국가가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후퇴시키는 것은 부당하고 오히려 국가의 형벌권과 개인의 양심의 자유권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형벌권이 양보하여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오랜 만에 들어보는 인권을 향한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 안에서의 개인은 어떠한 존재일까요? 국가가 개인 위에 군림하고 나아가 개인의 인권을 짓밟는다 해도 여전히 국가는 개인에 우선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요? 마찬가지 논리로 민족 앞에 개인은 어떠할까요? 민족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거나 삶을 포기하는 역사를 우리 인류는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빨갱이는 과연 민족 안에서 어떠한 존재였고, '민족' 중흥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습니까?
6월 20일은 세계난민의 날입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날입니다. 그것이 탈출이든 아니면 밀입국이든 아니면 경제적 이주든 간에 자신이 속한 나라를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 인간 이하의 '처리'를 받으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날입니다. 그들은 원래 국가가 반드시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그 국가들은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을 팽개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현재 약 2천만 명이나 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다른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거처와 음식, 물,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지원받을 뿐 자신의 국가로부터는 아무런 지원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6월 26일은 유엔고문희생자지원의 날입니다. 고문이란 의도적으로 신체나 정신에 고통을 가하는 행위입니다.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설사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무슨 근거로 고문한다는 말입니까? 이 고문이야 말로 사형과 함께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야만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문을 자행하는 주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가입니다. 최근 미국이 이라크에서 저지른 고문의 만행을 보셨을 겁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그리고 미국이라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그러한 만행이 저질러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국가나 세계 평화의 가치는 유효한 건가요? 자기가 속한 국가를 위해 다른 국가에 속한 개인의 인권을 말살한다면 그 국가는 나와 남을 가르는 하나의 신비스러운 허상일 뿐 더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국가가 다르다는 것이 그 무슨 의미가 있기에 인간이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국가도 아니고 민족도 아니고 세계 평화도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인류 보편적인 가치는 무엇일까요? '인권'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는 있는 건가요? 인권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얼마 되지 않은 미래 언젠가는 바뀌어야 할 대답이 되는 것은 아닐는지요? '인권'이라는 것 또한 시간이 지나고 장소가 바뀌면 '국가'나 '민족'과 같이 한 때 추구했던 가치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는지 내심 두렵기까지 합니다. 우리 모두 깊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