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박광주(부산대학교 교수)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다. 누구나 지속적으로 안정된 조건에서 자신의 꿈과 인격을 온전하게 지켜나가고자 한다. 평화와 인권이 모든 이들의 보편적 염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온전하지가 않아서, 그같은 염원을 위협하는 일들이 상존한다. 한 국가 내에서 본다면 각종의 사적 폭력의 존재가 그러한 예이고, 때로는 과거 군사권위주의체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공권력자체가 위협적일 때도 있다. 무정부상태에 가깝다고 하는 국제사회에서 평화와 인권에 대한 침해가능성은 더욱 크다. 강대국의 무력행사를 제어할 구속력 있는 권위체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라크침공에 대해 국제연합이 아무런 제동을 걸수 없었던 데서 보는 바와 같다. 강대국이 스스로 국가이익이라고 하는 바를 쫓아 약소국을 무력적으로 제압하려 할 때 약소국 민중들의 평화와 인권은 유린될 수밖에 없다. 국가폭력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김형율과 김선일, 두 젊은이가 지금 살아있다면 모두 한창 일할 나이인 35세다. 김형율은 열흘 전에 이 세상을 떠났고, 김선일은 일년 전에 타계하였다. 일 년여의 시차를 두고 이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두 젊은이들의 죽음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수탈과 침략행위가 초래한 원자폭탄의 투하에 의해 생겨난 피폭환우의 이세인 김형율은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피폭후유증으로 인해 이제껏 병마와 싸우다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김선일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제패전략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적 이라크침공과 이에 저항하는 이라크인들과의 싸움과정에서 결국 희생되었다. 직접적으로는 미국의 원폭투하와 이라크저항세력의 처형에 의해 김형율과 김선일이 각각 희생되었다 할지라도, 그 근본적 원인은 제국주의적 자원수탈과 영토침략을 자행했던 일본과, 국제법을 무시한 패권주의적 침략행위를 자행한 미국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일본과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면에서 서로 앞뒤를 다투는 초강대국이다. 60여년의 시차를 두고 이들 두 나라가 자행하고 있는 행태를 보면, “힘센자가 옳다고 하는 것이 곧 정의이다”라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조금치의 변화도 없다. 그동안 이차세계대전의 반성위에 건설된 국제연합의 역사가 6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월한 무력적 힘을 이용해서 일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대국의 교만함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리고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죄하지 않는 모르쇠와 같은 뻔뻔함에도 조금치의 차이가 없다.
전지구적으로 크고 작은 분쟁은 언제나 있어왔다. 소위 내전이라 할 수 있는 국가폭력에 의해 개인의 소중한 삶이 짓밟혀진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은 대부분 국가건설과정에서 야기된 민족이나 국가내부의 분쟁이었다. 이들 내전은 대화나 타협보다는 힘에 의해 지배적 지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촉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 민족, 종교, 계급등의 명분이 무력사용의 구실로 제시되지만, 무력충돌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은 고귀한 개인의 삶이다.
추상적 명분으로 구체적 삶을 파괴하는 야만은 지금도 그칠 줄을 모른다. 강대국이 겉으로 버젓한 명분을 내걸고 약소국을 무력적으로 다스리려 할 때 그 같은 야만은 더욱 커진다. 동아시아의 공동번영을 명분으로 내건 일본의 아시아침탈이나, 자유민주주의의 확산과 이라크 민중의 인권보호라는 명분을 내건 미국의 이라크침공에서 보는 바와 같다. 실재로는 자원확보라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무력행사를 불사했던 이들 강대국들은 대외적 명분과 실재가 괴리된 만큼 겉으로 내건 명분자체를 파괴하는 정도가 극심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약소국의 평화와 민중들의 인권, 이 모두의 파괴이다.
항상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쳐왔던 김형율의 삶은 결국 국가폭력의 희생이 되었다.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할 일은 그같은 국가폭력의 실체를 밝혀내는 데 힘쓰는 일이다. 국가폭력에 의해 평화와 인권이 침해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모두가 동참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