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 값비싼 평화

값비싼 평화

이윤벽(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시장사목)

성서를 보면 예수는 자신이 평화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 12,5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분이 또 이렇게도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예수께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신 것일까. 이 명백한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람들이 󰡐평화󰡑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다 참된 평화는 아니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너무도 자주 안락함과 기존의 질서 혹은 기득권의 보장을 평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각에 따르면 나와 내 집단이 현재 누리는 안녕의 수호가 평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시 정권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스스로를 세계질서의 수호자로 내세우며, 옛 로마 제국이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외쳤듯이 이른바 󰡐아메리카의 평화󰡑(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쳤지만, 예수의 안목에서 보자면 그것은 실상 참된 평화의 파괴일 따름이다. 그런 종류의 평화를 예수는 깨 없애러 오셨다고 선언하신다.
폭력에 바탕을 둔 거짓 평화의 논리를 불살라버리고 싶은 것이 예수의 간절한 원의였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힘󰡑이 아니라 오히려 󰡐무력함󰡑이었다. 성서는 그것을 󰡐십자가의 논리(혹은 말씀)󰡑라고 부른다(1고린 1,18). 참으로 어리석게 보이고 무력하게 보이는 이 길이 실상은 세상의 힘과 지혜를 무색하게 하는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라는 것이다.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한 이 과정은 비폭력과 섬김의 길일 수밖에 없고, 이 길은 개인으로나 공동체로나 필연적으로 어떤 고통을 감당하고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참된 평화는 이런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예수는 자기의 수난과 죽음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런 길은 세상의 대세를 역류하는 소수의 움직임이기에 이 어리석고 무모한 평화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우선 자기 안에서 일종의 󰡐분열󰡑을 겪는다. 그는 호된 정화의 과정을 거친 후라야 이 길을 참으로 선택할 줄 알게 된다. 그런 후 그를 기다리는 것은 대세를 형성하는 대다수가 보이는 적의이다. 이런 것을 일컬어 예수는 당신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셨으리라.
그러나 이렇게 󰡐분열󰡑의 과정을 확실히 거치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히, 그러나 더할 수 없이 확실하게 샘솟는 어떤 기쁨이 있다. 그것은 매우 힘있고 분명하게 사람의 발걸음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끌어준다. 비록 종교나 전통이 다르다 하더라도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지구상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이런 소수들이 평화의 이름으로 모이고 연대할 때, 참된 평화를 향한 움직임은 더 효과적으로 구체적인 힘을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참된 평화는 값싼 타협이나 안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아주 값비싼 어떤 것, 어떤 순간 우리의 피까지도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기에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이는 외로울 수밖에 없고, 우리는 이 길에서 약해지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도와주는 도반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고 깨달음과 뜻이 같은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려면, 개인적 차원의 어떤 수행(修行)도 꼭 필요하다. 평화 운동에는 그 어떤 개인적 야심도 공명심도 힘의 추구도 있을 자리가 없다.
이 대목에서 사실상 이 땅 생명 운동과 평화 운동의 진원지요 큰 뿌리셨던 무위당 장 일순 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나온 <좁쌀 한 알>(도서출판 도솔)은 뜻있는 도반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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