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반전평화운동과 시민사회의 과제 (정현백 교수)

국제 반전평화운동과 시민사회의 과제

정현백 /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여성단체연합 통일평화위원장

1. 국제연대의 문제

*미국 테러사태에 대하여
1) 지구화(globalization)의 물결 아래에서 민족국가는 강화되면서, 동시에 약화되는 이중적인 경향을 보인다. 뿐 만 아니라 이번 미국테러사태는 한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와 더불어 근대 이래의 국가 개념이 다시 토론되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인터넷을 통한 점 조직 국제 테러 네트워크가 세계 최강의 국가의 심장부를 강타할 수 있었던 사건은 거의 사이버세계를 통한 가상의 국가와 그것이 지니는 위력을 과시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최근에 국제 페미니즘 운동이 내세우는 모토대로 “Think globally, work locally”의 운동방식은 더욱 중요해졌다.

2) 그러나 이번 테러 사태의 경우, 이 사건이 거의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테러 영화에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의 대파국이었던 만큼, 이는 거의 전 세계인의 상상력의 허점을 찌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국제 반전평화단체의 대응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9월 9일 자정에 사건이 터진데 비해, 국제 평화단체로부터 공동대응의 부탁이 도착한 것은 20일을 전후하여서였다. 이미 13, 14일부터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경우 공동대응과 전쟁방지를 위해 전력을 투구하자는 메일을 보내었으나, 이에 대한 답장은 제대로 도착하지 않았다. 물론 사안 자체가 너무 엄청난 일이었고, 미국정부의 대응방향이 잘 추정되지 않아서이긴 하지만, 국제 평화단체는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였다. 우리가 주장해왔던 국제연대가 다급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국제 네트워크의 효율적인 작동을 위한 다각도의 방향모색 노력이 필요하다.

3) 미국 테러사태에 대한 국제평화단체의 대응과 관련하여 시급한 과제는 평화관련 NGO의 집중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의 전지구적 이윤추구나 미국과 같은 강한 정부가 가하는 전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세계정부에 대응할 만한 하나의, 집중화된 평화연대네트워크를 필요로 하고, 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전지구적인 대처가 가능해진다. 다양한 평화단체들이 산재해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움직이다 보니, 인력소모도 크고, 한목소리로 상황에 대처하는 것도 쉽지 않다. 따라서 전지구적 평화연대(global peace network)가 결성되어야 하고, 여기에 한국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현재의 지구화의 물살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의 지구화에 대처할 수 있는 지구적 경제기구나 지구적 대한 행정기구가 생기는 방안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을 위시한 몇 몇 강대국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 전지구적 대응 조직체가 생겨날 필요를 제안하고 싶다. 그러나 탈냉전 후 국가 내의 내전과 인종갈등으로 생겨난 분쟁에 대해서 유엔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이제 세계는 '인간안보'라는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유엔을 再가동하는 방안을 NGO들이 제안해볼 수도 있겠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비정부기구들이 힘을 합쳐, 한 목소리로 이를 제안한다면 이는 하나의 현실로 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에 대하여
4) 한반도의 평화와 관련된 국제 연대에서 중요한 점은 남북관계 개선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의 비정부기구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져야 하고, 이를 통해 미국의 여론이나 미국의 싱크-탱크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기존이 미국을 향한 우리 시민 사회운동의 대처방식은 원론적인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관련 단체들에 보내는 방식이었다.(예를 들면 300인 선언 등) 이런 원론적인 입장표명이 한반도의 평화를 이끌어 내는 데에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 시민사회단체들은 미국의 평화단체들과 지속적인 교류와 유대관계를 위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의 연대방식은 다분히 일회적이다. 이런 방식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국제연대 부분에 기동성이 뛰어난 인력을 배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5)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21세기의 벽두에 국가 간의 장벽을 낮추는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가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국가 간의 경쟁이 고조되고 있다. 또한 동북아의 시민들은 여전히 평화보다는 안보에 높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 간의 평화연대는 아직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제연대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은 동북아 국가들간에 연대를 통해 평화실현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동북아의 국가들을 움직이는 것에 못지 않게 비정부기구들을 가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우리 정부의 외교가 미국으로 지나치게 편향된 현실에서는 이런 노력이 민간단체 차원에서라도 적극적으로 개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평화연대를 추진하는 것에 따르는 난관은 아시아에서 몇 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시민사회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답보적이라는 점인데,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이나 대만 등과 적극적인 연대활동을 모색해야 한다.

6) 한국의 국제연대활동 중 가장 성공한 사례는 정신대대책협의회의 활동이다. 이는 범아시아 차원의 연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고, 국제적으로 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알리고, 한국 여성운동의 저력도 과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비록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과거청산 그리고 여성이 전쟁이나 성범죄에 연루되는 문제에 대해 경종을 울린 점에서 운동으로서의 기여도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정신대대책협의회와 다른 여성단체들간에도 약간의 견해차가 있었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이 활동이 제국주의적 지배나 식민지적 착취에 비해 지나치게 성폭력의 문제에 강조점을 두지 않았나 하는 자성적 비판이 있으나, 다른 페미니스트나 일본 여성학자들 중에는 오히려 정신대대책협의회의 활동이 민족차별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비판을 거침없이 제기하고 있다. 이 쟁점에 대해 이 자리에서 논할 생각은 없지만, 군 위안부와 관련한 국제적 연대의 성공은 우리 운동의 고민을 국제사회에서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언어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데에 기인한 것 같다. 즉 전쟁시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진 성폭력에 대한 국제 페미니즘의 고조된 관심과 군 위안부 문제의 제기가 거의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스니아 전쟁과 거기에서 일어난 끔찍한 성범죄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시기적으로 일치한 것도 성공의 큰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한반도의 평화달성을 위해 국제연대의 효율성을 높이자면, 이런 전략적 고려, 다시 말하면 국제사회의 분위기에 맞추어 우리의 쟁점을 再가공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2. 한국 시민사회의 역할

1) 시민단체간의 평화연대체 구성문제
평화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국제연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시민사회를 어떻게 조직해내느냐이다. 이번의 경우, 시민사회가 그렇게 늦게 대처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대처방식이 추이에 따라 변하고 있었고,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테러에 대한 분노의 분위기 때문에, '전쟁반대' 구호를 쉽게 내세울 수 없었던 점이 작용하였다. 대체로 17일 경에 첫 성명서가, 20일에 시위와 같은 집단행동이 나타났다. 성명서와 집단행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은 여러 단체들이 빨리 연대체를 결성하여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민주노총이나 여성단체들이 동일한 날에 시위를 함으로써, 후자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지 못한 사례도 있었고, 같은 내용의 모임을 준비하면서 인력을 중복 낭비하는 문제도 해소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각 단체들이 힘을 합해, 통일된 평화연대를 꾸리는 것이 필요하다.

2) 대중화문제
평화운동과 관련된 시민사회의 역할과 관련하여서는 지속적으로 평화운동의 대중화문제가 거론될 수밖에 없다. 일반국민에게 알리는 문제나 시위 참석자를 늘리는 문제 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이다. 언론의 호응을 받아내는 것도 대중화의 맥락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번 9월 사태의 경우 다행히 우리 미디어에서 일찍부터 미국이 보복전쟁이 현명치 않다는 주장이 조심스레 제기되었고, 또한 방송이 아프간의 처참한 현실을 특집으로 방영한 것들에 전쟁에 대한 반대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와 같이 전 국민이 충격을 받을 만한 사건이 아닌 경우, 평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과제이기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평화운동을 대중화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된다.

3) 피해고발에서 평화문화의 정착으로
우리 평화운동은 여전히 피해고발 차원에서 맴돌고 있어서, 정신대 피해자,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 베트남 민간학살 피해자 등이 겪은 고통을 정확히 조사해내고, 이들의 목소리를 사회화하는 것에 집중되고 있다. 군축문제, 아시아 핵문제, 아시아의 새로운 방위체제 등의 문제는 거론도 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평화를 방해하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나아가서 어떻게 우리 일상생활에 평화문화를 정착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에 맴돌고 있다. 우리 운동의 초미의 관심이 일차적으로는 남북관계의 개선에 놓여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지난 1년 사이의 남북관계를 둘러싼 정쟁과 보수여론의 훼방을 지켜보면서, 새삼 깨닫는 것은 남한 사회의 일상적 평화 없이는 진정한 남북 간의 평화체제 건설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민단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평화문화의 정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보다 에너지를 절약하면서 시도할 수 있는 방식은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나 평화연대 등의 단체가 준비하는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참여하는 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다.

4) 정부의 역할에 대한 견제
미국의 테러 사태와 관련하여 우리 정부의 태도는 낯뜨겁기 짝이 없었다. 우선 전쟁의 규모와 방식이 결정되기도 전에 우리 정부는 서둘러 협력을 약속하면서, 4급의 협조체제를 2급으로 상향조정하였는데, 왜 이런 조처가 필요하였는지에 대한 국민의 이해도 구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신문 보도에 따르자면, 파키스탄 국민들의 분노에 찬 테러를 염려하여 우리 정부는 대사관을 철수시켜야 했다. 뿐 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는 분노하며, 이 참사를 통해 희생된 미국 국민에게 애도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왜 우리 정부가 그렇게 서둘러 사이렌을 울리며 묵념을 했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납득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공직자들에게 골프를 금하는 조치도 우리 국민 모두를 웃음거리로 만든 조치이다. 차라리 신중하게 상황의 전개를 기다려, 미국을 지원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덜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 평화와 관련된 이런 정부의 대처방식은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며, 이에 대해 시민사회는 앞으로도 견제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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