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여, 아체에 꽃을 피우자
총인구의 5%가 사망한 ‘원상복구 불능’최악의 현장르포… 참으로 기나긴 이 변방의 비극이여
▣ 반다아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위장했다, 시민단체 구호요원인 양. 수마트라 주도인 메단에서 나라 안팎 시민단체를 묶어 쓰나미(Tsunami)에 강습당한 아체를 지원하고 있는 아동인권교육정보센터(KKSP)로부터 그럴듯한 문서까지 얻어들고 아체를 향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군 검문소에서 돈을 뜯겼다.” 말레이시아 구호요원들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지던 참이었다.
국경 검문소에선 뒷돈을 요구하다
1월6일 04시 메단을 떠나 07시 아체 국경에 닿았다. 인도네시아 정부군 검문소가 모든 차량들을 붙들어맸다. 한참 기다린 끝에 차례가 왔다. 군인들이 운전기사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여권들을 거둬갔다. 이내 운전기사가 되돌아와 ‘돈 소식’을 전했다. 동행한 타이 기자와 일본 기자 이름이 나란히 적힌 시민단체 문서를 내밀었다. “구호단체 요원인데 갈 길이 바쁘니 빨리 보내주시오.” 군인들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1인당 10만루피아씩 해서 30만루피아(3만4천원꼴) 내시오.” “왜 우리가 그런 돈을? 피해자들 도우러 왔는데….” “무슨 소리를 해도 내겐 안 들려. 난 이미 눈을 감았어.” 군인은 앞서 간 프랑스 요원들이 지불했다는 10만루피아짜리 지폐를 꺼내 보였다.
주먹이 날아갈 뻔했지만, 참고 흥정했다. “그럼, 10만으로 끝냅시다.” “안 돼. 적어도 20만.” 5만루피아짜리 지폐를 하나 덧붙여 던지고서야 검문소를 지날 수 있었다.
놈들은 쓰나미로부터 기막힌 ‘선물’을 얻고 있었다. 남들이야 죽든 말든, 남들이야 구호를 하든 말든, 내 주머니가 불룩해지는 것으로 인생을 만끽하고 있었다. 숨이 넘어가는 바쁜 구호차량들을 붙들고 그런 짓들을 하고 있었다. 그 말레이시아 구호요원 이야기는 사실이었고, 쓰나미에 할퀸 아체는 그렇게 들머리에서부터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반다아체로 향하는 길 곳곳에서 검문이 벌어졌다. 더 이상 실랑이로 시간을 죽일 수 없었던 나는 가짜 구호요원 신분을 버리고, 인도네시아군(TNI)이 몇몇 외국 기자에게만 1년짜리로 발급하는 이른바 ‘전국 무불통’ 신분증을 내보이며 길을 재촉했다.
1년6개월 만에 다시 찾은 아체는 격한 감정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10년 넘게 아체 분쟁을 취재해온데다, 특히 2003년 5월 인도네시아 정부가 아체 전역을 계엄작전지역으로 선포한 뒤 마지막까지 남아 현장을 취재한 외국 기자였던 내게 그 땅과 하늘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린 가슴을 안고 달려온 내게 아체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쓰레기더미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쓸려가버린 텅 빈 마을들은 소리 없이 흐느꼈고, 그 땅에 살아남은 이들은 멍한 충격 속에 흐느적거렸다.
지난 1년6개월 동안 늘 아체 소식에 애태웠던 나는 쓰나미로 아체 길이 열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아체를 떠난 뒤부터 단 한명의 외국 기자도 아체 땅을 밟은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하게 외국인의 출입을 차단했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해 12월26일 쓰나미가 덮치자 국제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외국 구호단체와 기자들에게 문을 열었다. 아체에는 지금 각국에서 몰려든 구호단체와 기자들이 들끓고 있다.
28년째에 접어든 분쟁의 땅 아체에 이렇게 외국인들이 들끓었던 적은 없었다. 1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인도네시아 정부군한테 살해당하는 동안에도 아체는 속시원히 세상 사람들 입에 한번 오르내린 적이 없었다. 하여 아체 시민들은 지금 쓰나미 강습에 이어 다시 외국인 홍수 사태를 맞고 있는 셈이다. 아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그 외국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수백명의 시민들이 공항 담장에 달라붙어 각국 구호단체와 군이 파견한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장면을 빠짐없이 눈에 담는가 하면, 길 가던 시민들은 외국 구호단체 차량이 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뿌연 먼지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본다. 반다아체 도심에 자리잡은 뉴질랜드 지원군 숙소 주변 철조망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명승지’가 되었다.
사망자 집계 포기… 꼬리 무는 악성루머
그렇게 쓰나미 강습 뒤부터 10여일 동안 ‘정체불명’의 외국인들을 지켜본 아체 시민들은 ‘의심’을 풀고 구호단체 요원들이나 기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기 시작했다.
시민들 가운데는 굶주리고 몸 누일 곳 없는 외국 기자들을 데려가 보살펴주는 이들도 생겨났다. 현재 반다아체에 몰려든 기자들은 먹을 것과 잠자리가 없어 주지사 공관을 ‘점령’해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이미 수용 한계를 넘어 내남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답답했던지 운전기사가 우릴 자기 집에 데려갔어. 쓰나미로 쓸려가서 방이 딱 하나 남은 집인데 기자 둘을 재우겠다고 말야. 가족과 한 방에서 자지만 화장실 셋에 수십명이 매달린 북새통 지사 공관보다야 훌륭하지.” 보야(Voja Miladinovic·전 <시그마> 사진기자) 같은 이들은 그렇게 잠자리를 해결했다.
“쓰나미에 당하긴 했지만 세상이 우릴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래도 마음이…. 쓰나미도 외국인도 모두 처음인데, 국제사회가 조금만 일찍 아체에 관심을 가져줬더라도….” 한창 재롱 떨던 4살짜리 딸과 아내를 잃고 혼자 블랑빈땅의 붕박죽모스크 난민촌에 앉아 있던 줄리안(34)은 배급받은 물과 비스킷을 내게 권하며 말동무를 만난 듯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이 사람들이 얼마나 외로웠으면!”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핑 도는 감상에 빠진 나는 스스로 ‘삼류기자’임을 확인했다. 자식 잃은 아체 어미가 소리 한번 맘껏 내지 못한 채 숨죽여 흘리던 그 피눈물을 10년이 넘도록 봐온 나는 결코, 냉정함을 잃지 않는 멋들어진 ‘일류기자’가 될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1989~98년에 아체 전역을 군사작전지역(DOM)으로 다뤄온 뒤, 다시 2003년부터 아체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체 사람들은 바깥 세상과 철저히 차단당했다. 그 사이에 아체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총을 휘두르는 인도네시아 정부군뿐이었고, 아체 사람들이 느낄 수 있었던 건 처절한 고립감뿐이었다.
쓰나미 강습일로부터 10일째에 접어든 반다아체는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고 있다. 일부 지역에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기 시작했고, 평소 200여개에 이르던 시장 가운데 20여개가 다시 전을 펼쳤지만, 도시 기능은 전혀 살아나지 못한 상태다. 모퉁이마다 난민촌이 설치됐고, 주검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반다아체에서 미래를 말하기엔 너무 이른 감이 든다. 도심을 벗어나면 아직도 곳곳에 주검들이 널브러져 있다. 얼마나 더 많은 주검들이, 얼마나 더 오랫동안 발견될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은 쓰나미 공습 5일째를 맞던 12월30일, 사망자 수가 10만명에 이르자 일찌감치 집계를 포기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다.
반다아체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은 사망자가 최소 15만~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같은 쓰나미 피해를 입은 타이 정부가 주검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비록 타이쪽에서는 외국인 관광객 사망자가 많은 탓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인도네시아 당국은 너무 일찍 손을 털어버렸다. 교통과 사회기반 시설이 충분한 타이쪽과 지형적으로 접근하기가 매우 힘든 고립된 아체 형편을 놓고 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쓰나미 발생 초동 단계에서부터 국제구호단체나 기자들의 진입을 차일피일 미루며 기회를 놓쳤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정부는 즉각 구조·구호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해병과 코파수스(특전사)를 비롯한 특수전 병력 4만여명을 아체에 배치해왔지만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산악게릴라들은 치명적 손상 피한 듯
“아체 군사작전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진행한다.” 엔당 수와리아 아체작전사령관은 쓰나미로 아체 총인구의 약 5%가 죽고 10%에 이르는 40여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극단적인 재해 상황에서도 전의만을 불태웠다. 이건 쓰나미 발생 뒤 자카르타의 인도네시아군(TNI) 최고사령관 엔드리알토노 수탈토 장군이 자유아체운동(GAM)과 휴전을 선언한다고 밝힌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뤘다. 아체 자치와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자유아체운동도 쓰나미 발생 이틀 뒤 최고사령관 무자킬 마나프의 이름으로 휴전을 선언한 상태다. 그럼에도 쌍방이 쓰나미와 상관없이 흑색선전에 열을 올리면서 현지에서는 온갖 악소문이 난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구호물자 보급을 차단하며 자유아체운동을 공격하고 있다.” “자유아체운동이 구호단체 요원들을 공격했다.” 주로 확인되지 않은 이런 유의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쓰나미 발생 뒤 쌍방이 교전을 벌였다는 정확한 정보는 잡히지 않은 상태다. 그리고 쓰나미로 인한 쌍방의 병력 손실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12월26일 07시58분50초에 밀어닥친 쓰나미로, 휴가를 떠나기 위해 반다아체항에서 군함을 기다리던 정부군 700여명 가운데 500여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실종됐다는 정보가 군부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다.
엔드리알토노 최고사령관도 “수천 병력 희생”을 말했을 뿐 자세한 내막을 밝힌 적이 없다. 나는 앞서 얻은 정보 700명 사망·실종에다 현지 군인들을 직접 취재해 얻은 숫자 162명을 더해 지금까지 정부군 사망·실종자 862명을 확인했다. 그러나 자유아체운동 병력 손실은 통신두절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산악 게릴라전을 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일부 도시를 오가는 보급·연락책들을 제외하고 주력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현재 반다아체에서 복구가 된 지점은 반다아체 모스크뿐이다. 특히 반다아체에서 인구가 가장 밀집됐던 울레레(Ule Le) 지역은 초토로 변한 채 아직도 수많은 주검들을 건져올리고 있다. 울레레는 반다아체 항구에서 반다아체 모스크에 이르는 폭 4km 지점에 자리잡은 지역인데, 집중타를 맞아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단 한채의 집도 살아남지 못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울레레 앞 항구에 세워놓은 15m짜리 기념탑 꼭대기가 부서져버린 것으로 미뤄볼 때, 최소 15m를 웃도는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던 사실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반다아체에서 육로로 접근이 가능한 남서 13km 지점 록응아(Lhok Nga)에도 살아남은 생명은 없었다. 록응아 피해 상황을 통해 해안선이 이어지는 남부지역의 피해 실태를 추정해볼 수 있었다. 현재 쓰나미로부터 직격탄을 받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메울라보(Meulaboh)를 비롯한 남부 해안지대에 대한 구호작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육로 접근이 불가능해 각국 군대가 파견한 헬리콥터만 오가고 있다.
아, 처음으로 ‘아체의 밤길’을 달렸겄만…
그렇게 쓰나미에 강습당한 아체는 내 눈에 원상복구 불능 판단으로 차올랐다. 아체를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대가 전쟁 대신 시민 복구에 나서고 국제사회가 이문을 생각하지 않는 전폭적인 장기 지원을 하는 길뿐인데, 과연 그런 아름다운 일들이 아체에서 벌어질지는 의문이다. 그동안 아체전쟁은 군인들이 뒷돈을 챙기는 사업장이었고, 국제사회가 단 한번도 눈길을 준 적 없었던 사각지대였음을 놓고 본다면 말이다.
쓰나미가 할퀸 뒤에도 아체에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이 각각 하나씩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인도네시아 정부군의 부라린 눈길과 총부리며, 변한 것은 지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달릴 수 없었던 ‘밤길’이다. 나는 취재와 기사 송고를 위해 밤길과 새벽길, 그 어둠 속을 달렸다. 이 밤길이 영원한 안전으로 이어지고, 시민들이 이 밤길을 마음껏 달릴 수 있을 때, 나는 아체의 평화를 노래하게 될 것이다.
아체의 비극은 끝나지 않은 채 참으로 긴 세월 동안 고단하게 이어지고 있다. 분쟁에 찌든 시민들에게 하늘은 왜 그다지도 가혹했는지. 만약 내게 신이 있었다면, 슬픈 아체를 위해 기도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