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아시라프·故 이크발 가족을 찾아서_2004.1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사망한 두 이주노동자의 자녀 학비를 지원하기 위해 난민캠프 방문을 마친 후 시알코트로 향했다.

시알코트에는 인권모임에서 파키스탄 공동체를 이끌었던 아미드가 살고 있다.
아미드가 그의 형과 함께 운영하는 자동차 수리점에 도착하니 음료수와 과일, 식사까지 극진히 대접하려고 한다. 맛있게 이것저것 먹는 동안 바바르의 형님이 아들과 함께 찾아왔다. 1년만에 한번씩 찾아오는 벗들을 위해 정성껏 대접해주는 아미드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미안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미드가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다 아시라프씨의 집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아미드씨는 방문단과 동행해 주었다.

가족들을 위해 먼 타국으로 일하러 왔다가 급성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한지 1주일만에 사망하였던 아쉬라프씨.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파키스탄 친구들은 그의 시신이나마 온전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어버린 가족들을 위해 이준배 원장님 가족은 흔쾌히 이들 가족의 후원자가 되기로 하셨고, 지원금과 선물을 준비해주셨다.

질퍽한 진흙길을 물웅덩이를 피해가며 겨우 도착한 아시라프씨의 집. 방문단은 부담스러울 정도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을 안은 채, 아시라프씨의 부모님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바느질을 하다 한쪽 눈을 잃은 아시라프씨의 아내는 우리 일행을 보자마자 흐느꼈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마자 콜라를 내어주었다. 아시라프씨의 부모님과 가족전부, 이웃까지 방으로 들어오면서 잠시 혼잡스러운 상황이 빚어졌다. 아시라프씨의 아내가 사는 방으로 일행은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아시라프씨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미드가 통역을 해주어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작년에 지원한 학자금을 아이들 학비에 썼는지,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학자금은 아이들 학비에만 썼고 부족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이미 한쪽눈을 실명한 상태라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다른 가족들의 도움이 다섯 아이들을 키우는데 필수적이다. 준비해간 지원금을 전달하면서 힘들더라도 아이들의 교육을 절대 중단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다행히 다섯 아이들 모두 열심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장남 파이잘은 엔지니어, 장녀 이크라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아쉬라프씨의 가족들은 차가 있는 공터까지 계속 따라나왔다. 우리를 꼭 껴안아주고는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어렵게 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지원하는 금액을 조금 더 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2002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갔던 이크발씨는 귀국한지 3개월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늙으신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두 아이들이 있었다. 아미드의 고장난 차를 수리하고 출발한 것은 오전 10시가 넘었을 무렵이다. 아미드의 사촌 할릴이 운전을 했다. 3시간 반쯤 달렸을까? 일행은 드디어 이크발씨집에 도착하였다.

그의 아내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비스켓과 음료를 대접하고는 또 뭔가를 준비하러 부산하게 움직인다. 늙은 시아버지는 거동하기에도 불편해보였고 언뜻 보기에도 형편이 어려워 보였다. 세간은 하나같이 낡았고 오래된 것들 뿐. 그의 아내는 우리가 건네는 지원금은 오직 아이들 학비에만 사용할 뿐 생활비는 정미소 일을 해서 벌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학교에 갔던 두 아이가 돌아왔다. 영특해 보이는 장남 압둘은 7학년이고 공부를 잘해서 어머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크발씨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다는 자베리아는 그새 1학년이 되어 있었고, 우리 일행을 보자 낯선 기색도 없이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의논상대가 되어줄 가장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하였다. 지난 송년회에서 모은 성금을 전달하면서 이들에게도 든든한 후원자가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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