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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제목 : 2012-2 [베트남 장학사업 현지 방문보고서] 3,598 - 조회
- 작성자이름 : 아시아연대  2012/06/07 - 등록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 닿게 될 것이다.”

                                                                    ― 2012년 5월 베트남 장학사업 방문 보고서

  
                                                                                                                                                     정귀순, (사)이주민과 함께 상임이사

                                      

1. 베트남으로


고 박순유님의 <박순유 한베 장학기금> 가족인 숙경을 만난 것은 아마 1992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젊고 발랄하고 목소리 큰 그는 소위 학출(대학생 출신)들이 노동현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마지막 무렵, 부산의 상징처럼 존재했던 거대 신발공장의 근로조건 개선과 노조민주화 운동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모임인 고무노동자협의회(고노협)의 회원으로 페인트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후배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후배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그와의 잦은 만남은 이후 떠난 후배 보다 더 깊은 인연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그의 개인사를 알게 된 것은 참으로 긴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다. 그가 5살 때 아버지가 베트남에 파병되었다가 실종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4년 어느 날 몹시 지쳐있던 그에게 베트남으로의 베낭여행을 권했다. 선선하게 여행을 떠난 그는 베트남에서 새삼 아버지의 흔적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캄보디아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어머니와 함께 참여하더니, 얼마 후 가족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베트남에 그런 의미 있는 사업을 해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수년 전 심장판막 수술을 받아야 하는 베트남 출신의 미등록노동자의 병원비를 마련해 보려고 도움을 청하는 작은 글을 신문에 썼다. "……한국은 지난 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양민을 학살한 아픈 과거를 반성하는 마음을 담아……"라는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 사무실로 베트남 참전 군인이라며, '양민학살'이라는 표현을 썼다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욕설을 폭포처럼 퍼붓는 항의 전화가 왔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니,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저희 사무실로 오십시오"라고 했다. 사무실이 박살 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 분은 오시지 않았다. 지난 날 한국은 베트남전에 군인을 파병하여 전쟁특수를 누렸지만, 정작 그 전쟁터에 갔던 이들은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많았고, 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져 개인들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들은 국가 차원에서 보살펴지지 않고 온전히 개인들이 짊어져야 할 몫으로 남았다. 그런 상처를 안고 있는 가족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그 곳에 마음을 내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니 얼마나 귀한 마음인가? 가족들의 십시일반으로 기금이 모아졌고, <박순유 한-베장학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장학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2007년 실태조사사업으로부터 시작한 베트남에서의 장학사업은 어언 5년째 접어들었고, 첫 장학금을 받았던 중학생들이 올 여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중학교에서 시작한 장학사업은 지난해부터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고등학교 장학사업을 맡기로 하여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동안 잘 진행되어 온 장학사업의 둘러보고 2012년 9월부터 2013년 8월 회기연도 사업 협의를 위한 방문단으로 5월 13일 아침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번 방문 일정은 5월 13일(일)부터 5월 20일(일)까지 7박 8일이었고, 방문단은 박순유한베장학기금 가족대표로 에코언니야 대표인 빅숙경, 통역으로 김나현 어울림 상담실장, 전체 코디네이터로 정정수 소장,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정귀순 공동대표, 그리고 현재 캄보디아 뽀이뻿지역 돈보스코 학교에서 자원봉사활동 중인 김미선, 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방문일정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호치민에서 베트남 역사와의 만남, 중부지역 뀌년과 푹호아사에서 장학사업을 진행하고,  하노이에서 귀국한 이주노동자들과의 만남으로 구성되었다.


한참 더울 때라 염려하였지만, 하루 한번씩 내리는 비는 더위를 식혀주었고, 어디에서나 귀한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가슴을 가득 채워주었다. 호치민에서 만났던 전사이자 작가인 반레 선생님과 구수정님과의 만남은 그 뒤에 이어진 장학사업과 하노이에서 이주노동자들과의 만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늘 함께 하기에 그 귀함이 더 빛나는 방문단 일행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해가는 벗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큰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게다가 맛있는 맥주와 망고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2. 호치민, 베트남 역사와의 만남


◑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 닿게 될 것이다.” ― 반 레 선생님과의 만남

                            
                                                                  <반 레 선생님과 함께>

지난 해 가을 민들레기금에서 활동가들의 베트남 연수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베트남 혁명가와의 만남을 추진하였고 하노이에 계신 작가 바오닌 선생님을 만났다.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공간의 차이, 그리고 40여년에 가까운 시간의 차이로 활동가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얘기들을 충분히 듣지 못하여 아쉬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번에 호치민으로 입국하면서 호치민에 계시는 반레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1966년, 17살의 나이에 해방전선군에 입대하여  1975년까지 베트남의 미국전쟁에 참전하여 통일 베트남을 이루었고, 이후 시인이자 소설가로 또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베트남의 현실을 가감없이 직시하고 또 발언하는 활동가이자 지식인이다. 만나고 싶다는 얘기에 흔쾌히 집으로 초대해 주셨고, 스콜이 쏟아지는 저녁시간 맥주잔을 기울이며 대화가 시작되었다.


"혁명군으로 싸우던 당시 선생님이 꿈꾸던 베트남, 그리고 현재의 베트남은 어떤가요?"라는 첫 질문에 선생은 베트남의 역사에 대한 얘기를 길게 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과의 전쟁 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그 이후 10년간이었다는 사실, 그로인해 많은 정치적 오류가 있었다는 사실, 너무도 가난했다는 것을 담담하게 얘기하셨다. 온 몸으로 역사를 밀고나온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생생한 역사 강의를 듣게 되었다. 한국의 작가 중 누구를 좋아하시냐고 묻자, "전쟁 중에는 '김지하 시인'을 존경했고, 그 이후에는 '김남주 시인'을, 지금은 '고은 시인'을 존경한다."고 했다. 그리고 "'김남일과 방현석'과 같은 좋은 젊은 작가들 친구들이 있다."고 하셨다. 전쟁 중 러시아어로 번역된 김지하의 시를 베트남어로 번역하여 군인들에게 낭송하기도 또 글로 전해주었다는 얘기, 2002년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망월동 김남주 시인의 묘 앞에서 몇 시간이나 통곡했다는 얘기도,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김남주 시인의 어머니께서 전화를 주셨다는 얘기도 들었다. 선생이 만든 다큐멘터리가 외국에서 유명한 상을 받는 동안 베트남에서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새롭게 만들고자 제출한 기획서는 1년이 지나도록 해당기관에서 답신도 없지만 불편한 진실을 얘기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한없이 부드럽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이면서도, 한편 강인하고 열정적인 성격도 함께 가진, 혁명가이자 시인인 그런 분이었다. 베트남은 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주변 나라들에게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베트남으로 하여 고통과 상처를 입은 이들과의 연대를 확인하지 못함이 한 가지 아쉬움이었다. 어쩌면 어딘가에사 진행 중이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라 그 이후 세대의 몫인지도…….  


쉴 새 없이 맥주잔을 채워주시는 선생과 밤을 새워 얘기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싶었지만, 우리의 인연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믿으며 다음을 약속하고 집을 나섰다. 그와 나눈 얘기들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이야기, “혹독하게 힘든 시간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시절이었지요.…….” ‘인간이 아름다운 시절’, 우리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기에 그들은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 전쟁기념관 VS 전쟁증적(證迹, 증언과 흔적)박물관 ― 구수정님과의 만남

                              
                                                                <학살과 공포, 전쟁증적박물관에서>

구수정님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학살을 한국사회에 새롭게 제기했던 이다. 그의 고발성 글을 연재했던 한겨레신문사는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집단 난입으로 사무실이 초토화되었던 적도 있었다. 이후 많은 단체와 한국인들이 베트남으로 '평화기행'과 '평화활동'의 이름으로 지원사업도 이루어졌다. 그는 지금 '아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베트남에서의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을 진행하고 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베트남 장학사업을 준비하면서 조언을 구한 적도 있었으나, 이번이 그와도 첫 만남이었다.


반레 선생님과 만남에서 통역을 해주었던 구수정님은 본인이 안내하겠다며 전쟁박물관 견학하지고 제안했고 기쁘게 함께 했다. 전쟁박물관이라 불리는 곳의 정식 명칭은 전쟁증적박물관이다. 전쟁을 증언하고 흔적들을 기억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은 용산에 '전쟁기념관'이 있다. 하나의 명칭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이름을 얻고 개념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한국에서 박물관을 하나 만들면서, 그것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부실함과 성급함을 읽게 되기도 하고, 어쩌면 한국사회는 아직 전쟁의 종식, 평화를 추구하는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베트남전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진 구수정님과 함께 둘러보는 박물관은 혼자서 둘러보았을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가 던진 많은 질문들은 베트남전에 관한 것 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반레 선생님은 베트남의 시선으로 얘기를 들려주었다면, 구수정님은 한국의 시선으로 베트남을 다시 보게 하여 우리 일행은 짧은 시간에 풍성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셈이었다. 폐관시간에 쫒겨 베트남전을 기록했던, 그리고 최근까지 전쟁을 기록하다 사망한 사진작가들의 작품들이 헌정되어 있는 Requiem(레퀴엠, 진혼곡)관의 사진을 끝까지 다 보지 못하고 나온 아쉬움을 안고, 그가 안내한 현지인들의 시장 안에 자리한 식당 2층에 앉아 못다 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3. 중부지역 장학사업


◑ 소박하고 정겨운 푹호아사 인민위원회 사람들

이른 아침 호치민을 출발하여 뀌년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장학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푹호아사로 갔다. 먼저 들린 곳은 인민위원회 사무실이다. 처음 베트남에서 장학사업을 준비하면서 만난 현지 활동경험이 있는 활동가들로부터의 몇 가지 주의사항 중 하나는 인민위원회와의 관계였다.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측면들이 많아 해외 NGO에서 지원 사업을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마을인 푹호아사 인민위원회는 이 장학사업의 취지를 잘 이해해 주었고, 그래서 일들이 제대로 되도록 열심히 도왔다. 덕분에 고 박순유님의 전사지를 찾을 수 있어 그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인민위원회의 념 위원장을 비롯하여 여성위원장, 장학사업 담당자 등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마치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온 것처럼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담당자로부터 장학사업 진행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선정된 중학생 장학생들 중 일부가 학년중 재선정되었다는 사실, 고등학교 장학생 중 중도 탈락과 전학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사전에 알지 못한 것이라 학교 방문을 통해 확인하기로 하고 학교 방문 일정을 정한 뒤 인민위원회와의 첫 번째 간담회를 마치고 인민위원회에서 점심을 초대해 주었다.

                              

◑ 학교방문

하나, 푹호아 중학교

점심 식사 후 푹호아 중학교를 방문하여, 교장선생님, 장학사업 담당 선생님과 장학생들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인민위원회에서 보고한 바와 같이 15명의 장학생 중 11명이 두 번째 학기에 교체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체의 주요한 이유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성적이 향상되지 않고 공부 의욕이 낮아 성적이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과 부모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성적이 좋고 학교생활이 모범적인 학생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교 측과 가난으로 공부나 학교를 포기하기 쉬운 학생들이 중학교라도 졸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장학사업의 취지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가난한 마을이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 가난하고 학교 측에서는 가난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기회를 주고 싶은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성적 보다는 부모의 부재나 가난으로 공부의 의욕을 잃어가는 학생들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담은 장학금이라는 장학사업의 취지를 다시 얘기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장학생으로 선정된 중학교 장학생들은 고등학교에 가서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니 장학생 선정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을 수 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장학생에 탈락한 학생을 만나다>


                                  
                                                         <새로 장학생으로 선장된 학생 가정방문>
  

24개 학급, 858명 전체 학생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새 학기부터 장학생 수를 5명 더 늘리기로 하고, 교장선생님께 이전 장학생 중 탈락한 학생 한명과 새롭게 선정된 학생 한명의 가정 방문을 부탁드렸고, 그 중 탈락한 학생 중에는 아버지가 알콜 중독으로 어머니에 대한 폭력이 심하고 가정형편이 아주 어려워 내내 방문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학생을 만나보았다. 그 시간 아버지가 술에 취해 그 집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가 학교로 와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라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그 아이에게 학교를 포기하지 말 것과 공부에 조금 더 마음을 써 다시 장학생으로 선발되라고 간곡하게 얘기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 파종 중인 논밭을 지나 새롭게 선발된 학생의 집으로 갔다. 가난한지만 참 따뜻한 가족이었다. 학급에서는 반장이고, 집에 돌아오면 교통사고로 거동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를 대신하여 장도 보고 집안일도 하는,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착하고 부지런한 아이였다. 공부를 너무 잘해서 어렵지만 대학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큰 딸은 호치민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며 어머니는 딸들을 자랑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어 하는 학교 측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수줍어하는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그날의 일정을 마쳤다.


- 뜨이푸억 고등학교

처음으로 장학금을 받았던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시작하고 올해 처음 6명이 졸업을 하게 되었다. 뜨이푸억 고등학교는 푹호아사 출신 학생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까지 모두 2016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고등학생들의 장학사업을 책임지게 되어 이번 학기부터 기존 푹호아사 출신 외 다른 지역 출신의 학생들 중에서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중 5명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중학교에 비해 고등학교는 조금 더 나은 교육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장학생들과 점심식사>

                          
                                                               <졸업예정인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둘러보고 장학생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의 푸짐한 식사에 아이들은 아주 즐거워했고, 식사 후 졸업반인 아이들과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모두 호치민과 뀌년의  사범대학과 공과대학 등에 입학신청서를 낸 상태였고, 이번 졸업시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열심히 꿈꾸는 미래가 실현되도록 도움을 주고 싶지만 아직 대학생들에 대한 장학사업에 대한 준비는 없는 상태라 또 하나의 고민을 안게 되었다. 아이들이 노력한 만큼, 또 원하는 결과들이 있기를 바라며 유쾌한 식사시간을 마쳤다.


- 호아탕 중학교

다음 날 25명의 장학생이 있는 호아탕 중학교를 방문했다. 다소 마을 중심에 학생 수가 800명이 넘는 푹호아 중학교에 비해 호아탕 중학교는 전교생이 211명인 산골 오지 마을의 학교로 학생의 다수가 생활보조금을 받는 가정 출신일 만큼 가난한 마을의 가난한 학교이다. 그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쓰여 그 학교에 멋진 도서관을 지었고, 장학생 수도 조금 더 많다. 학기말 시험을 친 직후라 학교는 텅 비어있었고,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장학생 담당 선생님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낡은 책걸상>

                                    
                                                                   <2011년 지원한 정수기>


그간의 장학생들의 상황에 대한 설명에 이어, 학교의 교육기자재 지원요청에 늘 적극이라는 사전  정보처럼 교장선생님은 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낡은 책걸상을 바꾸어 주기를 요청했다. 낡은 책걸상 교체는 교육부에서 계획된 것이었으나 교육기자재와 관련한 교육부의 비리가 문제되어 모두 중단된 상태라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미 지난해부터 빔프로젝트에 대한 요청이 있었던 터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장학생 수도 5명 더 늘리기로 하고, 책걸상을 비롯한 학교 시설들은 한번 더 둘러보았다. 갑자기 빔프로젝트를 취소하고 책걸상을 먼저 바꾸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교실의 상황은 열악했다. 그러나 학교의 가장 기본적인 시설과 관련된 문제는 교육부의 계획을 확인하고 협의하는 과정이 선행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방문을 끝내고 인민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의논하기로 했다. 빔프로젝트를 지원받기로 하여 훨씬 표정이 밝아진 교장선생님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산골마을을 돌아 나오며 그날의 일정은 끝났다.


◑ 인민위원회와의 2차 간담회 ― 2차 합의서를 만들다

학교방문을 마치고 방문팀은 집중회의에 들어갔다. 애초 매년의 사업협의 및 결정사항에 대해 문서로 정리해서 남기기로 했으나 오히려 사업 전반에 대해 상호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고, 장학생 선발의 기준과 운영에 대해 조금 더 세부적인 기준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오전 일정을 비워 인민위원회 및 각 학교 측과 협의할 문서들을 작성했다. 짧은 시간에 현지에서 공식저인 문서를 만드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단함을 안고 초안은 정수소장이, 번역은 나현실장이 맡아 멋진 2차 협약서를 만들었다.  


다음 날 오후 인민위원히 사무실에서 2차 간담회가 열렸다. 가볍게 인사하는 자리로 생각했던 인민위원회 측과 달리 우리의 태도와 준비는 다소 무거웠다.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오해를 염려하여 형식을 갖춘 2차 협약서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협약서 검토를 시작했다. 장학사업의 책임자는 인민위원회임을, 따라서 장학사업 진행 역시 인민위원회의 관리 아래 학교 측에서 진행하는 것을 인민위원회 측에서 확인하였고, 가난하고 학업을 이어가지 어려운 조건의 학생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을 명시한 장학생의 선발기준과 사전협의를 명시한 협약서상호연락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전날 호아탕 중학교 방문 때 제기되었던 책걸상 교체에 대해서 인민위원회 측에서 먼저 교체를 위해 애쓰겠다고 하여 그것도 아주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협약서 보다는 ’합의서‘로 명칭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2시간 넘게 걸린 그날의 회의는 마쳤다. 젊지만 당당하고 하나하나의 조항을 쉽게 놓치지 않는 여성위원장의 태도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한편 홀가분하게, 또 한편 아쉬운 마음으로 참으로 소박하고 열성적인 인민위원회 간부들과 작별했다. 장학사업 일정 모두를 마치고 뀌년으로 돌아오면서 ’우린 참 좋은 파트너를 만났구나‘ 생각들었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숙소에 3박 4일 동안 머물면서 바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래도 마지막 저녁을 먹는 동안 비 소리와 파도 소리가 어우러져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인민위원회와 2차 간담회>


4. 하노이에서  

◑ 한국문화원, 결혼이주여성 사전교육프로그램을 보다

                                        
                                                                               <한국문화원에서>

뀌년을 떠나 하노이에 도착해서 먼저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국입국 전 교육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한국문화원을 방문했다. 마침 15명 정도의 베트남 여성들이 교육 중이었다. 2007년 호치민에서 시작한 교육프로그램은 호치민과 껀터, 하노이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2009년 8월부터 교육을 시작한 하노이에서는 한국대사관에 입국비자를 신청할 때 교육 수료증을 함께 제출해야 접수가 된다니 의무교육인 셈이다. 하노이와 호치민에서는 하루 프로그램으로, 한국으로의 결혼이 많은 껀터에서는 3일의 교육프로그램이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나고 여유가 있다면 한국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도서관도 있다), 한국어 강좌도 들을 수 있으니 좋겠지만, 문제는 실제 결혼 후 한국비자를 신청하는 여성들은 하노이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시골 출신들이 많아 하노이에서 진행되는 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가면 시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시어머니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던 여성을 비롯하여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던 여성들을 어울림의 상담에서 만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곳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세 명의 베트남 스탭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 귀국한 베트남 친구들을 만나다

이번 베트남 방문의 마지막 일정으로 열심히 공동체 활동을 함께 했던 베트남 친구들을 만났다. 이미 귀국한 지 7년이 된 치엔, 4년 쯤 된 쩐수언, 2년이 된 청담, 그리고 두달 전 귀국한 녹씨, 이렇게 역대 베트남 공동체 리더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 매제가 젊은 나이에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아 병원에 가야하는 쩐수언과는 짧게 통화만 하고 나머지 친구들 세명과함께 만났다. 많은 사연을 안고 귀국한 치엔은 귀국 후 결혼해서 예쁜 딸의 아버지로 나름대로 자리잡은 사회인으로 살고 있었고,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청담은 작은 기업의 영업을 담당하며 둘째 아이를 자랑하는 아버지로 자신의 사업을 준비 중이고, 이제 막 귀국한 녹씨도 벌써 한국기업에 취업해서 바쁘게 살고 있었다. 어디서나 열심히 살 친구들 이어서 베트남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되었고, 한국에서보다 훨씬 안정감 있어 보여 좋았다.

                              
                                                                   <청담, 치엔과 함께>

                              
                                                                          <녹과 함께>

한국에서 공동체 대표로 자신의 시간을 쪼개 늘 베트남 친구들의 상담을 돕고 교육을 맡아주었고, 한국의 정치나 한국의 노동자들 뿐 아니라 다른 국적의 이주노동자들과 연대과의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수준 높은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돈 버는 일과 자신의 가족들과의 삶 외 베트남 사회에 대해서나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음이 아쉬웠다. 한국에서의 활동이나 경험이 귀국 후 그곳에서의 삶에서도 이어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하노이를 떠나 부산으로 돌아왔다.


5. 에피소드

◑ 하나

이윤벽 신부님으로부터 해외지원사업 때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학생복 상하의를 대량으로 후원을 받았다. 애초 장학생들에게 선물로 가져갈까 생각하다 부피가 너무 커, 결국 인민위원회에 교사들에 전하는 선물로 50벌을 기증하기로 하고 상하의 2박스를 가져갔다. 잘 나가다 호치민 공항에서 면세품을  확인하는 X-ray 기계 앞에서 직원이 박스 중 하나를 열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옷들이 베트남에서 고급품들이기 때문에 그냥 가져갈 수 없다고 했다. 그 옷들이 중부지역 장학사업에 전달할 물품임을 설명했으나 세금 운운 하며 두고 가라고 했다. 오래 전 중국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바라, 두고 가는 것은 물건을 포기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결국 그 물건들은 그들이 개인적인 것으로 될 거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절차에 대해 잘 몰랐음을 정중하게 사과하고 베트남을 위해 좋은 일이니 당신들도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직원 하나가 슬쩍 ‘그럼 돈을 조금 주면 좋겠다’고 했다. 돈?, 얼마를? 그러나 지원 사업을 하면서 돈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의 원칙 중 하나이다. 여자 네 명이 떠드는 얘기로 보아, 박스를 포기할 생각도 없고 돈 줄 생각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던지, 그 옆의 직원이 테이프를 던져주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다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얼른 박스에 테이프를 붙이고 옮겼다. 그리고 ‘땡큐~’라고 얘기하고 돌아서 나왔다. 그제서야 숙경, ‘땡큐’ 라며 직원의 사진을 찍자 얼른 자리를 피한다. ‘대표님, 이 옷들 공항에서 문제 생기지 않을까?’ 라고 애기하던 이광수 교수님을 떠올렸다. ‘교수님,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갔어요~’

                                
                                                                <문제의 옷 박스를 무사히 전하다!>


◑ 두울

하노이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두고 근처에서 점심 먹을 식당을 찾고 있었다. 나란히 걷고 있었던 숙경 옆으로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 두 명이 스쳐 지나갔고 갑자기 숙경이 놀라 소리쳤고 들고 있던 핸드폰을 길바닥에 떨어뜨렸다. 우리 옆을 지나던 베트남인들과 길 건너편 베트남인들 모두 놀라 쳐다봤고 괜찮으냐고 물었다. 뒤늦게 깨달은 상황은 웃으며 다가온 오토바이를 탄 청년들이 숙경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낚아채려고 했던 것이다. 무심결에 쇼핑백을 쥔 손을 더 꼭 쥐어 숙경의 손은 까졌지만 결국 그들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했다. 저렴한 식당을 찾아보려던 마음을 접고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 식당에서 숙경이 악착같이 지켰던 그 쇼핑백에 든 물건들을 보고 우린 한바탕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날 길에서 사서 나눠 먹고 남은 오징어 반 마리, 쥐포 두 마리! 그것이 전부다. 숙경이 좀 놀라긴 했지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그걸 줘 버려야 했어, 그랬으면 애써 낚아챈 쇼핑백에 고작 먹다 남은 오징어와 쥐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참담했겠니~’라며 즐거운 기억으로 남겼다.

                                    
                                                                      <까진 손가락을 치료하다!>


# 별첨 : 2차 합의서  

                                                                                                                                                 2012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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